레드 퀸은 일곱 번 죽인다 (La Dama rossa uccide sette volte, 1972)

이탈리아산 연쇄살인마 영화의 유행기에 나온 영화, “레드퀸은 일곱번 죽인다”는 비교적 전통적인 공포물과 당시 유행하던 이탈리아산 연쇄살인마 영화, 그러니까 소위 지알로라는 것의 중간 정도에 자리 잡은 영화입니다. 내용은 성채에서 살고 있는 한 귀족 갑부의 후손 손녀가 있는데, 죽은 자기 동생이 되살아 나서 “레드퀸”의 전설 대로 살인을 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 입니다.


(포스터)

일단 장점은 으시시한 성에 서려 있는 무시무시한 전설이 있고 무덤에서 다시 일어난 귀신이 걸어 다니는 그 전통적인 향취가 당시 지알로 영화의 환상적인 분위기에 딱 들어 맞을 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 가지 특징의 중간에 걸친 영화 다운 재미를 맛볼 수 있는 장면들이 있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 영화에서 나오는 문제의 “레드퀸”의 모습입니다. 레드퀸은 빨강 망토를 두르고 얼굴은 창백하게 질린 듯한 긴 머리의 여자입니다. 이 귀신인지 뭔지 모를 것은 갑자기 밤거리에서 어디선가 스으윽 나타나서 뒷모습만 보여주더니 갑자기 미치광이처럼 이상한 웃음소리와 함께 거리를 비틀거리듯 춤추듯 뛰어 갑니다. 그런 모습은 빨간 마스크 이야기나, 비슷한 도시 전설 느낌이 나게 썩 잘 어울렸습니다.

좀 더 당시 지알로 유행으로 기울어 진으로는 넓고 길게 뻗은 복도 끝에서부터 점차 화면쪽으로 레드퀸이 달려 오는 장면을 그대로 중심에 맞추고 계속 보여 주는 대목도 기억이 납니다. 일곱번이라는 숫자에 맞춰서 하나 둘 시체가 늘어나는 것도 아가사 크리스티 추리 소설 등의 영향을 받은 당시 이탈리아 범죄물의 분위기에 맞는 느낌이었습니다.


(환상처럼 저 멀리서 점점 화면 쪽을 향해 끊임 없이 뛰어 오는 레드퀸)

전통적인 공포물 연출이 깔끔한 것도 있었습니다. 이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이 영화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민요풍의 배경음악을 들이밀며 시작하는데, 상황에 맞게 여러가지로 변주되는 이 곡조는 참 잘 어울립니다. 이 가문에서 몇 백년마다 이상하게도 저주처럼 살인극이 벌어진다는 전설이 소개 되고, 이 이야기를 가문의 자손인 어린이 두 명이서 암시하고 듣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불길한 민요 같은 곡조가 완벽히 들어 맞았습니다.

광기에 사로잡힌 어린 아이가 다른 아이가 애지중지하는 인형을 부수면서 낄낄거리는 모습을 빠른 화면 이동으로 담아내면서 섬뜩하게 보여 주는 기술도 훌륭했거니와, 이야기가 본론으로 들어간 후 죽은 동생이 귀신이 되어 돌아 와 살인을 저지르는 것은 아닌가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확인 차 동생 시체를 숨겨 둔 성채 지하실의 깊숙한 비밀장소로 천천히 걸어 들어 가는 모습도 기억에 남습니다. 조마조마하고 불길한 분위기를 잡는 것은 정통파 고딕풍 공포물의 정석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빠르게 이야기가 흘러 가는 70년대 최신 패션의 지알로 이야기로 가다가 이런 내용으로도 잘 어울리게 부드럽게 나가고 있는 영화여서 운치도 그만이었습니다.


(언니-블랙퀸, 할아버지, 동생-레드퀸)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영화는 재미 없고 식상한 장면도 못지 않게 들어 있어서 전체로 따지자면 평균 수준 정도라는 느낌이었습니다.

일단 여러 차례 연쇄살인이 거듭 될수록 신비의 레드퀸이 점점 재미가 없어집니다. 앞서 말씀 드린 신비로운 모습은 갈 수록 없어 집니다.

레드퀸의 처음 등장은 정말 어디선가 귀신이 툭 튀어나와서 갑자기 정신 흐릿해지는 순간에 길거리를 스윽 스치고 지나가는 신비로운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살인 수법을 하나 둘 달리하려고 하다 보니, 점점 신비롭게 연출할 수가 떨어져 버린 듯 했습니다. 레드퀸이 자동차에 사람을 매달고 질주하거나 하는 등, 뭔 음주단속 피하는 유흥가 음주운전자 같은 수법까지 쓰게 되니, 절대 귀신은 아니라는 느낌만 선명해집니다.

그나마 여러 수법 중에 정신병자가 레드퀸에게 당하는 장면 정도는 그래도 괜찮은 편이었습니다. 정신병원에 감금 되어 헛소리만 하다가 담너머로 등장해 레드퀸을 보고는 따라 나선 것인데, 창살로 된 울타리를 넘으려다가 발을 헛디뎌 창살에 찔려 버리는 겁니다. 정신병자의 마지막 모습이 섬뜩하기는 합니다만, 복선과 수수께끼 같은 말을 잘 하고 있어서 불길하면서도 환상적인 영화 분위기를 돋구었다고 느꼈습니다.

그후 거듭된 살인 중에 점점 이야기는 그냥 되풀이 같았습니다. 그러니 얼른 레드퀸의 정체나 알려주고 영화 끝나면 좋겠다는 생각이 점차 움트게 되었습니다. 그나마 한 번 호기심을 끌기 위해 중간에 이 귀신 장난을 꾸민 연극을 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까발리는 대목이 있고, 그런데 이 사람들에게 조차도 레드퀸이 목격 됩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진짜 귀신인가?” 궁금하게 하는 것으로 중반을 때워 나가는 데, 부족한 연출로 별로 귀신 같은 느낌 없는 연출로 흘러 가다 보니 재미는 줄었습니다.

그 외에도 괜히 장사 좀 해보려고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장면들을 끼워 넣는 것도 전체 흐름에 안 맞아 들고 쓸데 없이 이야기를 잘라 먹고 끊기는 느낌만 준다 싶을 때가 많았습니다.


(장성한 언니, 왼쪽)

결말 역시 비슷하게 반반이었습니다. 다 펼쳐 놓고 설명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일단 멋진 것은 문제의 레드퀸의 정체라는 소재였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가문의 저주에 관한 전설이 있고, 이 전설에 따르면 가문의 한 손녀가 미치광이, 즉 “레드퀸”이 되어 살인극을 펼치게 됩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어릴때 손녀들끼리 다투다가 레드퀸이 될 손녀는 머리를 부딛혀 죽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런데도, 그 죽은 레드퀸이 귀신이 되어 돌아와서는 살인을 저지르는 것 같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니 따져 보면 따져 볼 수록, 이 레드퀸은 저주의 진짜 레드퀸인 것만 같습니다.

이런 이야기에서 마지막에 드러나는 레드퀸의 정체는 구색이 맞아야 합니다. 그냥 이야기 등장 인물 중 적당히 악당 같았던 인간 한 명이 변장하고 레드퀸인 척 했다고 하면 손쉬운 결말이기는 할 겁니다. 하지만, 그러면, 레드퀸이 “꼭 진짜 같았다”는 느낌, 악몽과 지옥의 세계에서 정말 슬쩍 누군가가 새어나와 이 세상을 비죽거리며 쳐다 보고 있다는, 이 영화 재미의 핵심과 안 들어 맞게 됩니다. 그냥 돈이나 노린 흔하디 흔한 사기꾼일 뿐이지 않습니까?

이럴때 그 대신 쓰는 지겨운 수법은 주인공 손녀가 다중인격이라든가 뭐 그래서, 사실은 자기 자신이 레드퀸이었다는 결말일 겁니다. 그러나 이런 수법을 쓰는 영화나 소설도 이제 정말 지겹도록 많이 쌓였고, 지알로 영화 중에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 결말을 택하더라도 의무적으로 최소한의 조건을 맞히는 정도일 뿐이지, 역시 별 재미는 없게 된다고 생각 합니다.

멋지게도 이 영화의 결말은 괜찮은 제3의 길을 떠올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무엇인고 하니, 레드퀸은 정말 이 가문의 미친 후손이 맞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전설과 현실이 멋지게 얽히는 반전이 나옵니다. 즉 영화 처음에 등장해 이 전설을 이야기해 주었던 할아버지는 전설이 현실이 되는 것을 너무나 두려워해서, 손녀 딸 한 명을 바꾸어 길렀던 것입니다. 즉, 실제 자기 손녀 한 명은 전혀 이 가문 사람이 아닌 것처럼 다른 곳에서 상관 없이 따로 자라게 하고, 대신 동네에서 얻어다 양녀로 삼아 기른 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이 아이를 주인공에게 동생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릴적부터 주인공은 그 양녀가 자기 친동생이라고 생각했고 이 양녀가 머리를 부딛혀 죽은 아이였던 것입니다.

그러다 나중에 어른이 된 후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실제 후손이 - 그러니까 친동생이 - 유산을 노리고 다른 상속자와 경쟁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살인을 하고 다녔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레드퀸은 진짜 가문의 후손이고 탐욕에 미쳐 살인을 저질렀다는 말이 들어 맞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악당 정체에 어울리는 정통성을 꿰어 차면서도, 전체에 흐르는 전설과 얽힌 신비감도 다시 꺼내 왔습니다. 심지어 시적 정의로도 들어 맞는 내용이라고 생각 합니다.


(전설을 그린 그림 앞의 레드퀸. 뒷모습만 보여 줍니다. 돌아보면 어떤 모습일까요? 정말 귀신일까요?)

반면에 재미가 없었던 것은, 이런 사실을 터뜨린 뒤에 결말로 나아가는 마지막 싸움이었습니다.

일단 정체를 드러낸 레드퀸은 이 놀라운 사연이 너무나 아깝도록 비중 없이 그냥 잠시 후에 별 곡절도 없이 픽 죽게 됩니다. 별 대단한 화려한 죽는 장면의 연출도 없습니다. 배우 얼굴이 잘 기억에 남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다른 악당 하나가 주인공을 죽이려 들기는 하는데, 칼, 권총 등을 써서 살인이 잘만 벌어지던 이야기에서 꼭 주인공만은 바로 처리 안 하고 지하실에 가두어 놓고 서서히 물을 차오르게 하여 익사시키는 것을 노립니다. 뭔 제임스 본드 악당 같은 터무니 없는 복잡한 괴상한 짓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억지도 그저 그 뿐으로, 물이 차오를 때 물을 피해 도망친 쥐떼들이 먼저 나오는 장면이 하나 좀 힘들게 촬영했겠다 싶을 뿐, 주인공은 허우적거리기만 하고 시간이 좀 지나니 그냥 경찰이 도착해 구출해 주면서 썰렁하니 끝이 나 버립니다.

막판 반전과 멋진 음악을 이용한 도입부, 신비롭게 연출된 레드퀸의 몇몇 그럴듯한 짧은 장면들의 인상이 길게 남을만한 영화였습니다. 브루노 니콜라이가 맡은 음악은 중독성도 좀 있는 것 같습니다. 일곱번이나 범죄가 들어 가야 하는 영화 중간을 때우는 범죄 장면들을 조금 더 환상적으로 하나하나 잘 꾸몄다면 훨씬 괜찮았을 영화 였다고 생각해 봅니다.


그 밖에...

지알로 영화 유행에 맞게 주인공의 직업은 패션 사진 작가 입니다.

레드퀸이 되는 주인공 동생의 이름이 에블린 입니다. 같은 사람이 감독을 맡은 비슷한 시기에 나온 영화 “에블린이 무덤에서 나온 밤”의 귀신과 이름이 같습니다. 이 영화도 고딕 공포물과 슬쩍 통하는 데가 있으니, 둘을 엮어서 “에블린 시리즈” 정도로 불러도 될 듯 합니다. 실제로 두 영화는 DVD 박스 세트로 묶여 나온 적이 있습니다.

두 영화를 비교해 보자면, "레드퀸은 일곱번 죽인다"가 조금 더 개성이 사는 편인 영화이고, "에블린이 무덤에서 나온 밤"이 조금 더 깔끔한 기술로 만들어진 영화라고 느꼈습니다. 물론 "에블린이 무덤에서 나온 밤"에도 분명히 개성이 있고, "레드퀸은 일곱번 죽인다"의 몇몇 장면은 훌륭한 기술로 촬영되어 있기도 합니다. 굳이 둘 중에 조금이라도 나은 것을 골라 보라면, 저는 "레드퀸은 일곱번 죽인다"가 좀 더 기억에 선명히 남았다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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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작 이탈리아산 연쇄살인마 영화 “에블린이 무덤에서 나온 밤”은 당시 유행하던 비슷한 부류의 영화들, 그러니까 지알로 분위기가 슬쩍 가미되어 있습니다. 완전한 지알로 영화라기 보다는 지알로가 섞인 전통 공포물에 가깝긴 합니다. 내용은 큰 성채에 사는 좀 맛이 간 귀족 갑부 남자가 있는데, 돈으로 여자를 사서 끌어 들인 뒤 살인하는 놈이라는 것으... » 내용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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