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쉘 (Bombshell: The Hedy Lamarr Story, 2018)

영화 “밤쉘”은 다큐멘터리 영화로 40년대에 할리우드에서 주로 활약했던 배우 헤디 라마르(Hedy Lamarr, 헤디 라머)의 일생을 다루고 있습니다. 헤디 라마르가 고전 할리우드 시대의 훌륭한 배우였으면서 동시에 발명가이기도 했다는 사실은 최근에 점점 더 널리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 영화도 초점을 좀 더 두는 내용은 헤디 라마르가 아름다운 배우이기도 했지만 당시 그에 대해 씌워졌던 굴레 때문에 오히려 불행해질 수 밖에 없는 시련이 있었다는 것과, 헤디 라마르가 사실은 발명가였으며 그 발명의 가치가 잘 안 알려졌다는 것입니다.


(포스터)

전체적으로 정통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모양새입니다. 요즘 다큐멘터리 영화들 중에는 도전적이고 재미난 편집과 연출 기술을 팍팍 밀어 붙이는 경우도 있고, 제작진이 일종의 등장인물 역할을 하면서 인물들의 성격, 재간, 제작 과정의 이야기로 재미를 끌어 내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이 영화는 그런 형태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보다는 좀 더 차분한 태도로 헤디 라마르의 출생, 성장, 영화 출연, 할리우드 진출, 40년대 전성기, 발명가로서의 삶을 차례로 차곡차곡 다루고 있습니다.

발명가로서 삶을 다루는 내용에는 여러 가지 자료들을 도전적으로 제시하는 편입니다. 하워드 휴즈와의 교류처럼 작은 이야기 거리를 잘 조사 해 와서 내용을 채워 넣은 대목도 있었고, 핵심적인 기술을 친절한 그림과 차근차근 이어지는 설명으로 쉽게 알아 볼 수 있게 잘 설명해 준 것도 좋았습니다.

다만 기술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다양한 내용을 많이 다루고 있기보다는 몇몇 핵심에 집중하는 형태입니다. 예를 들자면, 헤디 라마르가 특허를 낸 무선 조종 어뢰 기술에 대해서는 정말 알기 쉽게 상세히 잘 설명해 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 외에 그 특허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면서 소개한 현대의 블루투스 등의 무선 통신 기술에 그 기술이 어떤 식으로 활용되고 있는 지, 어떤 식으로 헤디 라마르의 특허가 다른 제품들에 간접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지 등등에 대한 설명은 어느 정도 생략하는 형태입니다. 아무래도 영화 상영 시간도 한계가 있었던데다가 헤디 라마르의 발명이 잊혀져 있었다는 문제 제기에 시간을 충분히 할애하는 영화라서 기술 이야기만 많이 할 수는 없었을 테니, 타협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애초부터 본격 과학기술 다큐멘터리와는 약간 성격이 다른 내용의 영화이기도 합니다.

저는 영화를 보고 나니, 헤디 라마르가 어떤 식으로 발명을 해 나갔고, 어떻게 아이디어를 얻고 어떻게 연구를 해 나갔는지 더 궁그해졌습니다. 헤디 라마르가 일생의 어느 시기에 발명에 가장 관심이 많았는지, 어떤 분야에 지식이 많은 편이었으며 반면 어떤 분야는 약했는 지, 등등 발명가로서 헤디 라마르에 대해 그 장점과 약점, 개성과 가능성에 대해 좀 더 상세한 사연이 궁금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런 내용에 대해서 좀 더 다룬 이야기, 책을 더 보고 싶기도 했습니다.

헤디 라마르의 잊혀진 이야기를 소개하려는 영화이므로, 헤디 라마르가 영화 배우로서 이루어낸 활동은 핵심만 짧게 간추린 편입니다. 헤디 라마르를 사람들이 아름다운 여성으로서 동경했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거대 영화사의 전성기이던 당시에 고생하고 부당한 대우도 많이 받았다는 이야기에 조금 더 중점을 둡니다. 영화의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어쩔수 없이 헤디 라마르의 멋진 연기나 헤디 라마르가 남긴 영화의 면면과 그 뒷 이야기를 소개하는 내용에는 무게를 덜 싣는 편이고, 헤디 라마르가 꼬여서 실패한 이야기라든가, 불행을 겪고 고생한 이야기에 무게를 더 싣고 있습니다. 그래도 고향을 탈출해 할리우드로 넘어 가는 장면처럼 인생 자체가 드라마인 내용은 충실히 다루고 있었고, 자유로워야 하는 사람이지만 억압 받다가 기회와 자유를 찾아 일생일대의 도전을 하는 사람의 모습이 심금을 울렸습니다.

영화 후반에는 약물 중독, 도벽, 성형 수술 중독으로 재산도 날리고 힘들게 살아가던 시기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전성기 이후 헤디 라마르의 몰락과 불행에 대해 제법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습니다. 영화판의 강요에 시달린 여성에게 불행이 어떤 모습으로 찾아올 수 있는지 드러내 보여주고 그 문제에 대해 슬퍼하고 고민하게 해 주는 내용입니다.

저는 할리우드 전성기 시절 헤디 라마르의 영화만 보았기에 헤디 라마르가 정작 독일어로 이야기하는 목소리는 이 영화에서 처음 들었습니다. 독일어로 헤디 라마르가 너무나 편안하게 말하는 것을 듣는 순간, 이 사람의 본 모습은 또 다른 것이고 나는 할리우드 영화가 비춰 준 한 모습 밖에 못 본 것이구나, 하는 뻔한 사실을 절절히 느꼈습니다. 그런 대목에서는 가족을 인터뷰하고, 헤디 라마르의 육성 자료를 이용해서 자료를 잘 모아 놓은 영화의 가치가 충분히 돋보였다고 생각합니다.


그 밖에...

2018년 6월 18일 명동역 CGV에서 저녁 상영을 했을 때, GV가 있었는데 제가 출연자로 나가서 나름대로 헤디 라마르와 영화에 대해서 아는 이야기를 열심히 나누어 보았습니다.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여러 영화글을 써 왔는데, 참 기억에 남을 만한 시간 아니었나 돌아 봅니다. 같은 자리에서 좋은 말씀해주신 과학과사람들 최진영 팀장님, 과학사학자 정인경 박사님께 감사드리고, 주최측과 영화 배급사에도 다시 감사 말씀 올립니다.

여권 없는 여인 (A Lady Without Passport, 1950)

1950년 MGM 제작, 조셉 루이스 감독작 "여권 없는 여인"은 당시 느와르 영화 유행에서 한 부류를 차지했던 어딘가 이국적인 이상한 지역에서 남자 주인공이 사건에 휘말리고 위험한 여자가 나타나고 어쩌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에서 이국적인 장소는 쿠바의 하바나이고, 주인공은 하바나에서 미국으로 불법 입국을 하게 해 주는 업자와 다투게 됩니다.(포... » 내용보기

불명예의 여인 (Dishonored Lady, 1947)

1947년 UA 배급, 로버트 스티븐슨 감독작 "불명예의 여인"은 흥미진진한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뉴욕의 빌딩 숲, 어느 멋진 고층의 사무실에 헤디 라마르가 연기하는 여자 주인공이 나타납니다. 남자 직원들은 몰래 여자 주인공 험담을 하고 있었는데, 막상 여자 주인공이 나타나자 어느 정도 굽실굽실 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미술 편집에 있어서 최고의 실력을... » 내용보기

공주마마와 벨보이 (Her Highness and the Bellboy, 1945)

1945년 MGM사 제작, 리처드 토어프 감독작 "공주마마와 벨보이"는 뉴욕에 온 유럽 어느 나라의 한 공주와 그 공주가 묵고 있는 호텔의 벨보이가 주인공인 영화입니다. 이렇게만 말 하면, 고귀한 여자와 가난하지만 유쾌한 남자가 엮이는 "로마의 휴일" 같은 이야기일 것 같고, 잠깐 그렇게 흘러가기도 합니다만, 그런 구성은 아닙니다. 조금 더 가볍고 조금... » 내용보기

백물 (White Cargo, 1942)

1942년 MGM사 제작, 리처드 토어프 감독작 "백물"은 아프리카의 어느 고무 농장에서 일하러 온 백인 남자들이 겪는 일을 다룬 내용입니다. 머나먼 이국 땅에 너무나 덥고 괴로운 곳에 주인공들이 와 있는데, 그 중에 닳고 닳은 냉소적이고 노련한 사람, 만사 포기하고 술에 쩌들어 있는 의사, 오직 집에 돌아 갈 날만 꿈꾸고 있는 나약한 사람, 멋 모르고... »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