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 간다 영화



트래쉬 무비 매니아에게는 당연히 약간은 지루해 보인다. 느린 호흡의 장면들은 유지한다손 치더라도, 약간만 더 속도감을 주었으면, 그래서 1시간짜리 텔레비전 단막극으로 만들었다면 약간의 박진감마저 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볼 때는 오히려 이런 더딘 전개가 여러 모로 더 좋은 장치가 된다. 이 영화는 조용한 이야기 면서도 오히려 감정이입은 강할 수 있는 이야기를 전달하는데, 충분히 여유로운 시간을 두는 것은 관객들에게 자기 생각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핵심은 이렇다. 누구에게든 사랑의 추억과 감정은 다소간 낭만적이고 또한 극적인 것이다. 그것이 머큐쇼의 칼질을 동반하거나, 누가 칼을 쓰고 감옥에 갖혀서 거지로 변장한 사람을 만나거나 하는, 거창한 일이나 특이한 사연이 아닐지라도 그러하다.

그렇다면, 평범한 사람들이 단조롭게 펼치는 이야기들 역시 충분히 사람에게 감상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봄날은 간다"는 바로 그런 야심에 도전하는 영화다. 이 영화에서는 이야기 구성상의 소위 "영화 같은 설정"이 거의 0에 가깝게 의식적으로 절제 되어 있다.

솜씨 좋은 기술자들은 그런 야심을 가능한한 최상의 기술을 발휘하여 실제 작품으로 꾸려냈다. 이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는 고르고 고른 미술적인 화면들과 조용하고 참신한 음악들로 꾸며져 있다. 이런 것들은 영화관에서 펼쳐놓으면 그 자체로 자신을 팔 수 있는 것들이다.


특히 이런 미술과 음악들은 산사와 편곡된 트로트 음악으로 대표되는 굉장히 오리엔탈리즘 가득한 것들이기도 해서, 가끔은 의도된 국제 영화제 노림수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행히도 오리엔탈리즘 자체에 경도되기 보다는 신선한 방식으로 영화주변을 장식하는데 그치고 있긴 하다.

그리하여 이 미술과 음악은 서로 상호작용을 일으켜 영화자체의 평범하고 조용한 이야기가 흡인력을 갖게하고, 관객들은 덕분에 자신과 더 동일시하기 쉬운 그런 이야기들에서 새로운 감동을 느낄 수 있다.

주인공들을 현실적이고 가까운 거리의 인물인듯하게 구성했으면서도 배우들 고유의 매력은 거의 조금도 잃지 않는 미덕을 갖고 있다. "신석기블루스" 같은 영화의 완전한 대척점이라 하겠다. 유지태의 단정한 발성과 순박해 보일 수 있는 인상을 잘 이용하고 있고, 이영애의 나이 든 모습과 천진난만한 인상을 대조시키는 입체적인 인물 구성 수법도 아주 보기 좋다. 첫 등장에서 졸다가 전화받는 모습은 좋은 트렌드 드라마의 수법처럼 내놓고 그런 것을 형상화하는 장면이겠다. (잠자는 사람의 모습이란 것은 독특한 매력이 있긴 하다만, 영화에서 이영애는 한 7할정도는 조는 모습으로 승부한다. )

좀 지저분한 이영애의 집을 처음 구경한 유지태가

"어떤 술 좋아해요?"
"왜요?"
"다양하게 있길래."

하는 장면이나, 시내 사진을 보며 집자리를 짚는 이영애 장면 같은 것들은 특히 사랑스럽게 와닿았다.

영화는 1999년도 TV드라마 "초대"를 생각나게 하기도 한다. 드라마에서 이영애는 참 잘 사귀고 있던 연인과 이별하고 덕분에 상대는 폐인생활에 잠시 추하게 빠진다. 실제로 "헤어지자"고 말하는 장면의 구성을 포함하여 많은 장면이 그 드라마와 겹치고 이영애의 연기와 인물도 대조적이면서도 또한 겹치는 구석이 있다. 아주 희귀한 우연의 일치이거나, 영화제작진이 TV드라마에서 발견한 배우의 개성을 다시 한 벌 잘 활용한 예가 되겠다.

(영화에는 "8월의 크리스마의"의 돌 던지기 장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하는 장면이 있다.) 사실상의 마지막장면인 벚꽃 거리 장면은, 미술적인 강렬함과 그 강렬함을 극적인 구성속에서 엮어서 이야기 구성상의 긴장감-안타까움까지 발전시키고 있다. 많은 영화의 많은 장면들 중에서도 단연 강한 힘을 갖고 있는 장면이다.

이영애의 존재감은 강하지만, 이는 관찰 대상으로서의 무게이며, 그에 비해 유지태의 감정은 보다 노출되어 있고, 유지태는 관찰자로서의 주인공스러운 초점도 갖고 있다. 유지태가 보다 중심의 주인공으로 서는 영화이며, 감적의 극적인 굴곡도 유지태의 것을 주로 노출시켜서 관객의 감동을 유도하고 있다. 이렇게 유지태에게 무게가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은 좀 은근히 숨겨져 있는 편이다.

한편으로 영화는 "왜 얘네들이 서로 좋아하게 되었는가" 정말로 "어디서부터 그러면 어긋나기 시작했는가" 하는 장면들은 슬쩍 지나가면서 그냥 얼버무려 숨기고 있다. 하기 힘든 이야기는 좀 교활하게 감추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요소는 도리어 관객의 추억을 자극시켜 감정이입을 돕는다. 어차피 사람은 사랑을 할 때에도 결국 상대방의 마음은 완전히 모르는 것이며, 저마다 다 다른 사연으로 사랑이 기승전결을 따라간다. 영화가 유지태 한 쪽에 약간 기울어진 것과 중요한 이야기 전개를 숨긴 것은 숨겨진 부분과 기울어진 부분에 관객 자신의 추억이 자리 잡도록 유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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