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The Hitchhiker's Guide To The Galaxy 영화


(머나먼 은하 저편, 외딴 행성에 기약도 없이 쓸쓸히 남겨진 아서 덴트와 마빈)

당연히,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는 원작 팬을 위한 팬시 상품의 성격이 강하다. 대형할인매장 구석에서 파는 포켓몬스터 스케치북이랑 비슷하다고 한다면, 첫번째로 궁금한 것은 스케치북 앞면에 실린 피카츄가 얼마나 귀여운가 하는 것이고, 두번째로 궁금한 것은 스케치북의 종이는 쓸만한가 하는 것이다.

보통 가격을 적당히 맞추려면 둘 다 잘 해내기란 쉽지 않으므로, 많은 중국제 싸구려 팬시 상품들은 모양이 가짜 같거나, 아니면 제품 본연의 기능이 형편 없거나 둘 중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는 양쪽 모두에 뛰어 나다. 충실하고 원작 팬들이 좋아할만한 요소를 잘 구현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원작을 전혀 모르는 관객마저 즐겁게 볼 수 있을만큼 영화자체의 구성 또한 흥겹다.

지구와 우주의 장대한 모습들을 부담없이 펼쳐 보여주는 CG로 표현했다. 이것은 책을 읽으면서 상상했던 즐거운 시각적 인상을 구체화한 것이고, 그 품질도 좋기 때문에 누구나 공감할만 하다. 마빈의 디자인은 칭찬할만한 좋은 예이다. 큰 머리와 짧은 팔은 굉장한 연산 능력을 가진 로봇이라는 이미지를 구체화 한다. 동시에, 왠지 우스워 보이는 귀여운 느낌을 잘 전달하고, 고개를 떨구고 어깨를 숙인 채 서글프게 걷는 그 멋진 이미지를 표현하기에도 아주 적합한 디자인이다.


(옛 TV 미니시리즈 시절의 아서와 마빈)


(영화의 아서, 포드, 자포드와 마빈)

또 한가지 누구나 공감할만한 장점은 코메디에 잘 어울리는 배우들과 그 연기이다.

사실 아놀드 슈월츠제네거 - 터미네이터 처럼 완벽하게 딱들어 맞는 인상이라고 하기에는 배우들의 기존 인상이 완벽하게 부합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당히 어울리고,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 덕분에 그 적당함은 정말로 좋은 수준으로 발전한다.

이것은 각본이 좋아서 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트릴리언이라는 인물은 원작에 비해서 좀 더 비중이 높고 또 조금 더 많은 이야기를 갖도록 구체화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구체화의 방향이 지나치다거나 설득력 없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원작의 분위기를 헤치지 않고 돕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성의를 다한다. 정말 원작에서는 생략된 "뒷 이야기"를 잘 풀어 놓은 것만 같다.

이러한 각본의 노력은 몇몇 부분에서는 아주 빛난다.

"개그 SF"의 최고봉인 원작은 언어유희와 문학성을 이용하는 농담으로 가득차 있다. 이런 성격의 원작을 영화로 구체화하기는 좀 골치아프다. 예를 들자면,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물리쳤다" 같은 표현은 문장에서는 굉장히 재기발랄하지만, 몇 분을 끄는 에피소드로 만든 뒤에 나래이션으로 한 마디 툭 삽입하는 수준으로 만들면 좀 아까울만큼 심심해진다.

그런데,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는 도입부에서 "안녕, 그리고 물고기는 고마웠어요"를 뮤지컬 스코어로 보여 준다. 이것은 모든 관객들에게 영화의 "비현실 농담주의" 성격을 잘 설명하면서, 동시에 원작팬들을 굉장한 기대로 고조 시킨다.

거기에 감정이 프로그래밍되어 있어 귀찮고 한심해 보이는 "문"을 단지 문이 이상한 괴성을 한 번 지르는 것으로 표현하는 등, 시청각을 이용하는 영화 매체에 원작의 요소들이 잘 연결되도록 굉장히 노력하고 있다. 좀 더 예를 들어 보자면, 초반에 지구를 돌아다니며 비명소리를 들려주는 것, 쥐의 최후 모습을 이용하는 연출법 역시 재치 있었다.

요즘 영화 각색의 유행은 액션 장면이 조금 있다 싶기만하면 아무렇게나 이야기를 줄인 뒤에 칼질, 폭파장면, 군중장면만 죽어라 삽입하는 것인가 싶다. 그에 비하면,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제작진은 스스로 원작의 팬들이었든지, 아니면 원작의 재미를 이해하기 위해 정말 열심히 노력한 사람들이다. 여기에는 더글러스 애덤스가 직접 작업한 각본과 라디오 드라마 대본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 주효했을 것이다.


(TV 미니시리즈 시절의 트릴리언)


(영화의 트릴리언)

물론 여전히, 원작의 많은 농담 문학을 살리기 위해서, 플래쉬 풍의 애니메이션을 곁들인 나래이션을 아주 많이 사용하곤 한다. 그러나 우주선, 외계인, 복장의 디자인은 흥미있고 배우들의 코메디 연기는 빛나도록 웃긴다. 반대로 꽤 전형적인 삼각관계 연애담을 약하게 끼워 넣고, 몇몇 이야기를 조금 변형하고 결말도 몇몇 이야기를 약간 섞어 비비기도 했다. 그러나 또한, 라디오 시절의 저 멋진 시그널 음악이나, 텔레비전 미니시리즈 시절의 마빈 로봇, 더글러스 애덤스의 얼굴, 그에 대한 추모의 메세지 등등을 삽입해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그나마 원작에서 꽤 벗어나는 것은, 영화가 말미에 이르면서 이야기하는 영화의 주제다. 대책 없이 자유롭게 나가는 농담천국인 원작의 분위기는 물론 마지막까지 건재한다. 그렇긴 하되, 영화는 지구와 우주의 자연에 대한 예찬과 경이감을 분명한 주제로 삼고 있다. 이러한 주제는 원작의 이야기 속에서는 사실 중요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상업영화의 안전하고 단순한 장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더글라스 애덤스)

그런데, 원작에는 어느 에피소드 못지 않게 읽기 즐거운, 작가의 "안내서에 대한 안내서"라는 서문이 있었다. 이 멋진 서문은 영화에 드러나 있지는 않다. 하지만, 서문에서 작가가 드러내는 사연을 생각해 본다면, 자연과 인생을 가볍게 우러러보는 영화의 주제는 충분히 적당한 것으로 보인다. 굉장히 지루한 이야기와 어마어마하게 답답한 롱숏을 남발하는 영화 못지 않게 "삶의 실존적 의미에 대한 진지한 고찰과 반성"이라는 의미에서도 이 영화는 꽤 할 일을 다 한다고 본다.


(조지 W 부시 + 프레디 머큐리)

원작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관객을 대상으로 한다고 생각할 때, 지난 "우주전쟁"과 비교해 보면, "은하수를 위한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는 훨씬 보편적인 이야기다. 여기에는 원작 자체가 현대적이라는 이점이 있었겠지만, 애초에 동적인 활극이었던 "우주전쟁"에 비하면 "은하수를 위한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말들을 옮기는 것도 못지 않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나하고 생각한다.

동시에, "우주전쟁" 등과 비교해 볼 때, "은하수를 위한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는 원작의 내용과 성격에도 매우 충실하다. 역시나, 원작자가 직접 참여한 각본을 사용할 수 있었다는 이점이 컸기도 할 것이다.



그 밖에...

IMDB 페이지의 Trivia를 보시면, 더글러스 애덤스의 어머니에 대한 꽤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으실 수 있습니다. ( http://www.imdb.com/title/tt0371724/trivia )

역시나 IMDB 페이지의 Trivia에 따르면, 샘 록웰은 은하계의 대통령 자포드를 연기하면서 "조지 W 부시"와 "프레디 머큐리"를 혼합한 인물을 상상하며 연기했다고 합니다. 저는 그러한 기준에서라면, 샘 록웰의 연기는 완벽했다고 생각합니다.

파티 장면에서 아서가 읽는 책이 무엇인지 유심히 보십시오. 최근에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되어 나온 리처드 도킨스의 "악마의 사도"를 읽으신 분은, 아마 꽤 깊은 감흥을 느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재번역판 이전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좋아하고, 타월을 들고 가서 영화를 봤습니다. 저에게는 감동의 도가니였습니다. 동시에, 그냥 아무거나 재밌는 영화 보자는 관객들이 꽤 많았던 주말 메가박스 상영에서, 관객들의 반응 역시 아주 좋았습니다. 그냥 일반 오락 영화처럼 개봉했어도 충분히 흥행했을 것 같은데,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 였습니다.

우리나라 상영판은 약간 편집이 다르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불가능 확률 추진 장치에서 털실 인형으로 변하는 장면이 없다는 것은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행성 제조 공장에서 처음 지구를 보여 줄 때, 한반도와 그 주변을 보여주는데, 다른 나라 상영 버전에서는 다르다는 소문도 들었습니다.

감격에 젖어 자막이 올라갈 때 까지 한 참 기다리다가, 재미있는 추가 장면을 하나 더 발견했습니다. 자막이 완전히 다 올라 갈 때 까지 기다리십시오. "안녕, 그리고 물고기는 고마웠어요" 노래도 꽤 듣기 좋지 않습니가.

덧글

  • 지킬 2005/10/17 10:34 # 답글

    옛 TV 시절 마빈보다는 지금의 마빈이 더 정겨운 느낌이 드네요. 더 귀엽기도 하고^^
  • 게렉터 2005/10/23 10:30 # 답글

    옛날 마빈은 진부한 로봇의 고정관념에 너무 갖혀 있는 느낌입니다. 아무래도 "카이 홀맨"이 등장한지도 한참 지난 요즘 디자인이 저도 더 재미난 것으로 보입니다.
  • skysurfr 2005/11/16 21:35 # 삭제 답글

    이제야 이글을 보게되네요. 안녕하세요. 노스모크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저도 그 수건들고 하는 이벤트에 참가 했었습니다. "아아 생각만 하면 즐거운~" 좋은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관람이 끝나고 나서는 무척 쑥쓰런 인터뷰도 했었더랍니다. 어디에 쓰일지 모르는...
  • 써머즈 2005/11/17 02:04 # 삭제 답글

    [불가능 확률 추진 장치에서 털실 인형으로 변하는 장면]이 잘렸다니! 그 장면도 재치있는 장면이었는데 말이죠.
    시간 때문에 자른 걸까요? 흠...
    그리고, 아무래도 외국흥행에 죽을 쑨 게 국내 개봉에도 영향을 미쳤으리라 싶어요.
    개인적으로 굉장히 재밌게 봤는데, 지구(!) 흥행에 실패해서 아쉬워요.
  • 게렉터 2005/11/18 02:32 # 삭제 답글

    skysurfr/ 닉네임 굉장히 멋있습니다. 루크 스카이워커의 성을 가볍게 능가하는 스카이서퍼 라니. 뭐라고 욕할 사람 꽤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대중적으로도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가 스타워즈ep3: 시스의 복수 보다 더 재미있으면 재미있었지 못할 거도 없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썰렁하게 몇 개관에서만 개봉했다는 사실이 두고두고 아깝습니다. 이 영화 덕분에 책도 좀 널리 읽히게 되고, 그랬으면 좋았을텐데 말입니다.

    써머즈/ 어쩌면, 혹, 메가박스에서만 자른건지 어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외국 흥행에 죽을 쑤었다는게, 외국도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주로 상영관 갯수를 조금밖에 못잡아서 흥행을 별로 못한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메가톤급 스타가 없었으니. 저는 기왕 이럴바에야 좀 황당하지만 감독을 제임스 카메론이나 스티븐 스필버그 쯤 기용해서 영화를 찍었으면 영화의 흥행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겠나... 하고 허황된 상상을 해 봅니다. 더글라스 애덤스가 직접 만든 각본이 있었으니까, 이런 감독들의 자의식이 지나치게 발현되는 것도 어느 정도 막아 줄 것이니, 더 할만한 일이었을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 skysurfr 2005/11/18 10:08 # 삭제 답글

    이 닉네임을 한번에 알아보시는군요. 감사하고 영광입니다. skysurfr는 원래 pc통신시절 스타워즈를 매우 좋아하시는 분의 것을 패러디(라고 해야하나?)한겁니다.
    어제 DVD가 와서 감상해보니 털실인형 부분이 있었습니다. 안짤리고 다나온건 좋았지만, 번역이 극장판과 달리 평범하게 해버려서 아쉬웠습니다. 오늘 집에가서는 Extra부분을 볼 예정인데 무척 기대가 됩니다.
  • 게렉터 2005/11/23 19:45 # 답글

    스타워즈에도 관심이 많지만, 또 제가 파도타기도 좋아하다보니, 단박에 들어왔습니다. 이 영화 DVD는 저도 살 계획입니다. 기대됩니다.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