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콩 King Kong (2005) 영화

어림없게도 제가 가장 큰 인상을 받았던 소위 정통 킹콩 영화는 "킹콩 2" (혹은 "킹콩은 살아있다." King Kong Lives) 입니다. 개성적인 괴물과 당대 최고의 특수효과를 과시했던 오리지널 킹콩도 아니고, 새롭게 킹콩 붐을 일으키는데 성공한 70년대판 킹콩 리메이크도 아닌, 80년대의 킹콩2는 욕만 먹고 인기도 별로 못 끌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콩"들이 세 마리나 나와서 나돌아 다니게 됩니다만, 세 편 중에서는 가장 조잡한 영화로 남았습니다.


(킹콩2: 수술실 겸 연구시설의 킹콩)

제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이 영화에서 다친 킹콩을 수술해서 살리기 위해 수술하는 장면 때문입니다. 이 장면에서는 킹콩에 마치 수도 파이프 같은 거대한 파이프를 연결하여 피가 콸콸 흐르는 모습이 보이고, 건축 공사 장비와 같은 거대한 장비가 메스와 주사기가 되는가 하면, 마치 탱크 엔진 같은 거대한 장치를 인공심장이라면서 움직입니다. 이런 장면은 극단적인 미지의 자연인 킹콩과 기계적인 최첨단 기술이 정면으로 맞부딪히는 장면인지라 꽤나 그럴듯해 보였습니다.

거기다, 린다 해밀턴이 출연하면 왠지모르게 B급 영화들이 이상하게 현실감 넘치는 것처럼 보였던 제 고정관념 덕분에 킹콩2 는 제게 더 그럴싸해 보였는지도 모릅니다.


(킹콩2)

2005년판 "킹콩"은 오리지널 킹콩의 팬으로서 애정을 과시하기 위해 만든 박람회 작품 영화입니다. 그런즉, 2005년판 킹콩은 피터 잭슨 감독의 "멋대로 만들기"가 풍성한 영화입니다. 단적으로 이 영화의 상영 시간은 3시간이 넘어갑니다. 이 영화에서 영화의 전체적인 완성도나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평범한 감상을 심어주는 것을 포기한 수준은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과 비슷합니다. 보통 특수효과 중심의 블록 버스터에서 그런 객기를 부리는 경우가 드물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스티븐 스필버그의 "우주전쟁"과 비슷합니다.

2005년판 킹콩에서는 오리지널 킹콩의 전체 줄거리를 거의 그대로 따라가고 있으며, 일부 명대사와 명장면들을 그대로 반복합니다. 거기다가 오리지널판 영화에 대한 힌트를 주는 장면을 속속 삽입하고 있고, (대표적으로 1930년대인 당시에 "페이 레이"를 섭외하려고 하니까, RKO에서 영화를 찍는 중이라서 안된다고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페이 레이가 1930년대 RKO에서 찍은 영화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당연히 오리지널판 "킹콩"이었습니다. 현실과 가상이 돌고 도는 겁니다.) 무엇보다도 영화 자체의 배경도 21세기가 아닌, 오리지널 킹콩이 촬영되고 상영되었던 1930년대로 하고 있습니다.
1930년대의 시대상을 강조하기 위해서 영화 시작장면에는 30년대의 브로드웨이 쇼 유행, 시가지 모습, 경제 대공황 이후의 거리 모습, 시위대등을 교차편집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이 영화가 1930년대 오리지널 킹콩을 예찬하기 위한 영화임을 상징합니다. 그런즉, 오리지널 킹콩을 한 번 보시거나, 그에 관한 배경 감상을 알고 있는 것은, "우주전쟁"에서 원작에 대한 애착을 갖고 있는 것 만큼이나, 영화를 즐겁게 보는데 더 도움이 됩니다.


(오리지널 킹콩의 격투 장면)

누가 뭐래도 이 영화의 가장 위대한 장점은 최고 수준의 특수효과와 이를 이용한 액션 연출입니다. 오리지널 킹콩에서 아이디어를 제시한 장면들을 가져와서, 현재의 기술로 가능한 만큼 더 부풀리고 더 멋지게 꾸미고 더 입체적으로 만들어서, 더욱 아이디어가 풍부하면서 박력과 중량감이 넘치는 장면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공룡과 킹콩을 필두로 해골섬의 온갖 동물들은 "반지의 제왕" 기술이 한층 더 발전한 형태로 살아 움직이고, 이것이 선원들, 주인공들과 얽혀 벌이는 액션은 정신없이 빠르고 거대함을 강조하는 중량감으로 넘쳐납니다. 많은 부분에서 "스타워즈 에피소드 2" 무렵부터 나타나던, 입체적인 공간을 잘 활용하면서 고속으로 전개되는 액션장면은 킹콩에서 가장 창의적으로 펼쳐지고 있습니다.

특히나, 영화역사에 길이 남을 괴수 격투 장면인, 킹콩과 티라노사우러스의 싸움은 오리지널 킹콩의 명장면이 그대로 박혀 있기도 합니다. 멋드러진 양자 대결구도, 킹콩이 티라노사우러스를 두들겨 패는 권법(?)까지, 오리지널 킹콩을 그대로 따오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가히 감개무량하기까지 합니다.


(2005년판 킹콩의 격투 장면)

영화에서 몇 군데 지적하고 싶은 부분 중에 가장 눈에 띠는 점은 발단 장면의 적지 않은 부분이 영화 전개상 거의 전혀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영화는 시작한지 한 20분쯤이 지나고나면, 해양 모험 영화로 변합니다. 미지의 섬으로 나가는 장면은 흥미진진하게 구성되어 있고, 하나 둘 소개되는 개성적인 선원들도 아주 인상적인 인물들입니다. 뭔가 사연이 많이 있을 것 처럼 보여서, 이 부분만 모아서 꾸려나가도 "로스트" 비슷한 TV시리즈 하나쯤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킹콩이 시작되고 괴물들과의 액션 특급이 펼쳐지면, 이런 부분은 별 쓸모없이 더 이상 언급되지 않습니다. 유일한 의미는 이런 사연이 있을 듯한 구성 때문에, 괴물에게 얻어맞는 사람들이 조금 더 불쌍해 보인다는 것인데, 그래봤자 많이 불쌍해 보이지도 않고 워낙에 주인공이 인간들이 아니라 괴물들인 영화라서 상당히 무의미 합니다. 피터 잭슨이 해양 모험 영화 하나 만들어 보고 싶어서 재미로 해 본 게, 전체 영화에서는 별 필요가 없어서 그냥 끼워진 모양새 입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다른 몇몇 피터 잭슨 감독이 분위기의 어울림을 좀 무시하고, 주특기라서 끼워 넣은 장면이 있어 보입니다. 원시 부족 문명이라기보다는 꼭 현실세계와 완전히 유리된 환상세계처럼 보이게 꾸민 해골섬 부족들의 모습이라든가, 남발되는 빙빙돌며 멀어져서 장대한 경치 보여주기 연출, 감정을 긴장시키면서 시간을 잡아줄 때 쓰이는 몽환적인 화면 전환 같은 것들 입니다.

또 한가지 중대하게 눈에 띠는 점은, 오리지널 킹콩의 예찬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오리지널 킹콩과 킹콩을 다루는 배경과 관점이 다소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선, 오리지널 킹콩이 그토록 유명한 영화가 된 것은 누가뭐래도, 뉴욕을 휘젖고 다니는 킹콩의 인상이 어마어마하게 강렬했기 때문입니다. 오리지널 킹콩이 해골섬에서 각종 괴물들과 벌이는 액션도 멋졌지만, 도시를 돌아다니며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기어오르는 모습은 킹콩의 가장 유명한 상징이었습니다. 즉 자연의 신비인 야생 괴수가 인공적이고 기계적인 도시와 얽히며 벌이는 충격이 소재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수많은 킹콩 아류작이나, 70년대판 킹콩에서도 이런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뉴욕의 킹콩)

사실, 2005년판 킹콩에서 뉴욕 부분이 오리지널 킹콩에 비해서 그렇게 짧고 간략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2005년판 킹콩은 도입부와 해골섬 부분이 강렬하고 깁니다. 그래서, 킹콩이 뉴욕에서 펼쳐지는 난리는 다소 축소되어 보이는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도시의 인공과 야생의 킹콩이 빚는 그 대조의 묘미가 좀 줄어들어 보입니다.

더군다나 아쉬운 것은, 뉴욕이라는 도시가 20세기 초반부터 수십층 자리 빌딩이 즐비하고, 네온 사인과 자동차가 도심에 넘쳐나던 곳이라는 점입니다. 덕분에 1920, 30년대 쯤의 뉴욕을 배경으로 하면, 꽤 예스러운 예술 감각을 보여주면서도 세계의 대부분에서 보기 힘든 기묘한 거대기계문명의 정경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이런 모습들은 스팀펑크 SF 스러운 묘미가 있기도 합니다. 사실, "배트맨"의 고담 시나, "허드서커 대리인"의 뉴욕은, 뉴욕의 이런 독특한 모습을 제대로 이용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2005년판 킹콩은 1930년대 뉴욕의 이런 독특한 정경을 멋드러지게 보여주고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요소들을 현대기계문명과 킹콩을 대조하는데 별로 활용하지도 않고 대강 넘어갑니다.

게다가 비현실적으로 큰 킹콩을 자주 보여주었던 오리지널 킹콩에 비해서, 2005년판 킹콩은 25피트라는 키를 대체로 유지합니다. 이 정도 덩치는 해골섬에서의 액션에서는 충분히 거대해 보이지만, 뉴욕에서 날뛰고 다니면 좀 약해 보입니다. 기껏해야 버스 정도 되는 덩치로 밖에 안 보이기 때문에, 고층빌딩 숲에서 난리를 치면 그 "거대한 느낌"이 상당히 줄어들고 맙니다. 이런 여러 요소 때문에 뉴욕 장면이 좀 약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특성 덕분에, 2005년판 킹콩의 킹콩은 상당히 서정적이고 의인화된 모습입니다. 지능도 굉장히 뛰어납니다. 심지어 뉴욕에서 여주인공과 센트럴파크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 데이트하러 가기도 합니다. 킹콩과 여주인공이 스케이트를 타며 눈으로 장난치는 모습은 "세렌디피티"에서 케이트 베킨세일과 존 쿠삭과 별로 다를 것도 없습니다. 여러가지 면에서 킹콩은 꽤 지능이 높아보이고, 심지어 유머감각에 대한 이해력도 높습니다.


(최악의 고생문이 열리는 시점의 나오미 와츠)

따라서 해골섬에서 킹콩이 여주인공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 이유도 좀 달라 보입니다. 파충류와 곤충, 정신나간 부족만 가득한 섬에서 어마어마하게 외롭게 살다가, 오랫만에 지능이 높은 정상적인 영장류를 발견했기 때문에 너무나 반갑기 때문이었던 겁니다! 정말 그런 느낌이 듭니다. 이런 면 때문에 킹콩은 전통적인 자연 야생 괴수라기보다는, 다른 지성체와 교감을 하는 외계인이라거나, 인공지능 거대 로봇에 가까운 분위기입니다.

그 결과도 역시, 해골섬이 강화되고 뉴욕인 약화되는 방향입니다. 킹콩의 대활약은 좀 더 공감할만하고 영웅시되어 펼쳐지는 반면, 뉴욕에서의 모습은 도시의 기묘한 공간에서 좌충우돌하는 원시의 대자연에 결코 미치지 못합니다.

킹콩 이외의 배우 중에 가장 비중이 큰 여주인공 나오미 와츠는 굉장합니다. 많은 부분에서 전통적인 고전시대 헐리우드 금발 여배우의 미모를 정면으로 과시하고, 다양한 30년식 의상 역시 잘 어울리게 펼칩니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여주인공이 "다이 하드" 형식으로 정말 죽어라 고생하는 영화 입니다. 거의 존 맥클레인 형사가 1,2,3편에서 겪은 고난과 역경을 이 영화 하나에서 앤 대로우라는 나오미 와츠의 배역이 다 겪습니다. 나오미 와츠는 설득력 있는 표정과 몸짓으로 액션을 연기하며, 여러 장면에 정말 미친 듯이 몸을 날려서 멋진 장면을 만들어 냅니다.

잭 블랙은 광기어린 영화제작자라는 면과 생긴 모습 면에서 어느 정도는 피터 잭슨 감독 자기 자신을 약간은 투영하고 있는 인물을 연기하고 있기도 합니다. 잭 블랙 특유의 우화적인 과장 연기는 이런 정신 나간 캐릭터를 연기하는데 빛을 발합니다. 특히 초반에는, 록 음악에 빠진 "스쿨 오브 락"의 가짜 선생님이 이번에는 영화에 인생을 걸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만큼 그럴듯해집니다.

그러나, 영화가 점점 진지해져가고, 액션 활극으로 바뀌어가면서, 진짜 위험한 광기로 바뀐 부분에 이르면, 단순한 우화 연기로는 표현하기가 약간 약해지는 구석이 있습니다.

에이드리언 브로디도 비슷합니다. 가난하지만 실력있는 작가를 연기하기에, 비쩍마른데다 약간 울적해 보이는 이 사람의 모습은 더 이상 잘 어울릴 수가 없습니다. 마치 비슷한 시기 일제시대의 우리나라의 울적하고 가난한 소설가들을 연기하기에도 딱 어울릴법 합니다.

그런데도, 역시, 영화가 액션으로 넘어가게 되면, 이 사람은 사랑에 목숨을 걸고 온갖 고난과 역경을 돌파해서 여주인공을 구하러 사지로 뛰어드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기에는 다소 이지적이고 도회적인 정적 감성에 빠져 있는 이 사람의 연기로는 좀 약해지는 구석이 있습니다.

"우주전쟁"도 감독이 예찬하고 싶은 고전을 새로운 기술로 뽑은 비슷한 성격의 결과물이었습니다.

만약 "우주전쟁"이 2005년판 "킹콩"정도가 되는 특수효과와 그 연출의 감개무량한 향연이 있었다면, 훨씬 더 멋진 영화가 될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또한 스티븐 스필버그가 톰 크루즈와 다코타 패닝의 스타파워에 기대고 휘둘리면서 영화가 좀 어긋난 것에 비해서도, 괴수와 특수효과-연출을 중심으로 강화해 나간 "킹콩"과 비교될만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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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렉터블로그 : 디 워 D-War 2007-08-05 08:23:08 #

    ... 역시, 커다란 것을 내다 꽂는 호쾌함과 괴물의 개성이 잘 살아나도록 화면이 빠르게 움직이도록 연출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은 "비행기와 싸우는 킹콩 http://gerecter.egloos.com/2033752 "의 모방, 변용들 중에서도 무척 인상적인 축에 속한다고 느꼈습니다. 이무기는 도시 외곽 지역에서 서서히 도심으로 기어들어오는 것으로 되어 ... more

덧글

  • 잠본이 2005/12/18 11:08 # 답글

    보더빌 코미디언이던 대로우가 자기 특기인 슬랩스틱 개그로 킹콩을 달래는 장면이 참 인상싶었지요;;;
    (사실은 처음에 나왔던 찰리채플린 연상케 하는 분장이 더 인상이 강했지만...;)

    '페이'가 'RKO'에서 찍는 그 영화는 오리지널이 확실합니다. 왜냐면 감독이 '쿠퍼'라고 더넴이 그러거든요! >_<
    (아니 어쩌면 딴 영화 찍고 있었는데 킹콩소동이 일어나자 '이거 장사되겠다' 싶어서 재빨리 내용을 바꾼걸지도)
  • EST_ 2005/12/18 22:57 # 답글

    잘 읽었습니다. 제겐 정말 굉장한 영화였어요.
  • 게렉터 2006/02/02 16:52 # 답글

    잠본이, EST_/ 고전 코메디를 좋아하다보니, 코메디에 대한 열정과 자부심으로 가득차 있는데다가, 경이로운 재주까지 보여주는 앤 대로우의 역할은 사실 진지하게도 감개 무량한데가 있습니다. 더군다나 원채 제가 노을을 좋아하기에 영화 몇몇 장면이 감상을 자극하기도 했습니다.
  • cygo 2007/03/02 16:42 # 답글

    킹콩과 공룡이 싸우는 장면에서
    유인원이라는 걸 보여주려는 듯
    짱돌을 손에 들고 찍거나 >.<
    떨어지는 낭떠러지에서 넝쿨 액션이 인상적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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