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의 수염 영화

언뜻 제목만 보면 풍자적이거나 비판적인 요소가 들어가 있는 희극적인 영화일 듯 합니다. 그러나, 실상 "장군의 수염"은 시종일관 진지한 범죄 수사, 느와르 영화로 1960년대 한국 영화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런 영화를 만들고 있다가 마무리에서 실패해 버리는 영화입니다. 약간은 이탈리아 지알로 영화나 누벨바그 영화의 범죄물 분위기도 풍깁니다. "장군의 수염"은 살해당한 피해자가 쓰고 있던 소설의 제목일 뿐입니다. 물론 이 소설 자체는 꽤 풍자적인 우화입니다.

영화의 내용은 간밤에 한 남자가 연탄가스 중독으로 셋방에서 죽습니다. 형사들이 나타나 이 죽음을 수사합니다. 수사를 진행하면서 남자의 살아생전 행적을 하나둘 보여주는 것이 영화의 내용입니다. 몇몇 용의자들이 있습니다만, 남자의 변심한 애인이 가장 수상쩍어 보입니다. 당연히, 죽은 남자는 신성일이 연기하고 있고, 그 애인은 윤정희가 연기하고 있습니다.


(느와르 윤정희. 윤정희의 회고담을 보면, 이 영화를 찍을 때 감독과 "등을 노출하는 문제"를 두고 1시간 동안 싸웠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영화는 초반에는 꽤 흥미진진한 느와르 영화처럼 펼쳐집니다. 수사가 진행되면서 하나하나 주변인물들을 조사하게 되고, 주변인물들은 죽은 남자에 대해 흥미있는 이야기를 한토막씩 들려줍니다.

"시민 케인" 수준은 아니지만, 그러면서 사용되는 심심하지 않은 연출이나 한 가지씩 특색이 있는 인물들은 재미있습니다. 필름값 아끼는 헐리우드 영화에 비해 싼 장비를 사용한 것이 가장 큰 이유겠지만, 원색과 무채색의 대조적인 활용이나, 몇몇 연출 방식, 절제된 음악사용은 이탈리아 지알로 영화, 누벨바그 영화와 약간은 닮은 방식으로 호기심을 끕니다.

느와르 영화 여주인공이자, 가장 의심스러운 인물을 연기하는 윤정희 배역의 인물도 흥미진진합니다. 지겹도록 보아오던 대로, 또 스타킹과 가터벨트로 묘한 분위기를 만들며 형사와 대립구도에서 인상을 끕니다만, 그걸 꽤 잘하고 있고 윤정희의 표정연기도 그럴듯해서 답답하지는 않습니다. 스타킹이 영화 전체에서 계속 등장시킨 것은 좀 안이한 생각이지만, 나름대로 그만한 성의를 다하고는 있는 겁니다.

특히 주인공이 쓰고 있던 소설의 줄거리를 소개해주는 부분은 애니메이션으로 제시되어 있는데, 이것도 볼만합니다. 우화적인 이야기가 영화 분위기와 꽤 어울리기도 하고, 60,70년대 일본 삽화풍으로 그린 그림도 지금 보면 독특한 면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60년대 한국 컬러 애니메이션이 거의 기록이 없는 현실을 생각한다면 더 흥미있게 볼 수도 있을 겁니다.

범죄물의 내막을 흥미진진하게 하나 둘 제시하고, 느와르 영화 분위기도 그럴듯하게 잡아나가던 영화는 중반부터 점점 재미없어 집니다. 우선 윤정희의 정체는 팜므 파탈이 아니라 눈물의 여인으로 바뀌어 가는데, 이게 꽤 어색합니다.

특히, 윤정희와 신성일의 감춰진 비밀이랍시고 꺼내는 이야기들이 무성의한 투의 한국전쟁 무용담과 2차대전말기의 혼란기에 "부자집 땅 날린 이야기"인데, 흔한 이야기이고 많이 만들어 본 이야기라서 방심한 탓인지 정말 흔하고 심심하게 만들어져 박혀 있습니다. 영화 초반의 분위기와 아주 안 어울립니다.

여기에 이르면, 마치 영화는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인냥, 절제되던 음악 사용 기법도 잊어버리고, 나름대로 의식이 있던 장면 구성 기법도 잊어버리고, 그냥 많이 만들던 옛날 방식으로 되돌아가 버립니다. 갑자기 끼어든 여자 주인공 아버지를 서울을 점량한 북한군이 고문하는 장면에 이르면, 그냥 가장 잘만들 수 있는 자극적인 장면을 채워서 러닝타임을 때워보자는 안일함처럼 보일 정도 입니다.

신성일과 윤정희의 비밀 이야기가 끝이나고, 사건의 내막을 완전히 밝히는 결말 부분으로 넘어가면, 이야기 형태와 분위기 모두, 영화 초반의 범죄물에 적합한 형태로 다시 회귀합니다. 이것은 어울려 보이긴 합니다. 그렇습니다만, 이만큼 끌어온 이야기, 특히나 중반부에 꽤 멀리 나아갔던 이야기를 맺기에는, 동작도 감정도 약하고 수사의 결론도 수수할 뿐입니다.

사건을 조사하는 형사는 젊은 형사, 늙은 형사 둘이 나옵니다. 늙은 형사를 맡은 김승호가 관록있는 중간자 역할을 잘 보이는 반면에, 젊은 형사는 수수하고 진짜 형사같은 외모에 비해 너무 험프리 보가트 따라하기로 연출되어 있어서 좀 어색합니다. 더군다나 초반에는 젊은 형사를 더 주인공처럼 다루다가, 결말로 가려니까 어쩔 수 없이 슬쩍 늙은 형사가 더 주인공인것처럼 내세우는 것도 영화를 급히 만든 것 처럼 보입니다. 차라리 형사를 하나로 하거나, 험프리 보가트 따라하기 형사 대신에 콜롬보나 몽크 같은 괴짜 형사를 쓰는게 더 어울렸을 겁니다.

신성일은 언제나 그렇듯 신성일입니다. 성우 후시녹음 연기의 수렁에 깊이 빠져 있는 윤정희에 비하면 판토마임을 볼만하게 펼치면서도 무성영화스러운 어색함은 충분히 헤쳐 나온 상태입니다.

윤정희는 범죄 용의자로서 수사되는 초반에는 꽤 그럴듯한 연기를 보여줍니다. 숨겨진 비밀이 있고, 차가운 분위기로 매력과 위험한 느낌을 발산하는 조용한 가라앉은 표현은 괜찮습니다. 그렇지만 중반이후 "눈물의 여인"이 되어 감정을 발산하는 부분에 가면, 진부하기 그지 없는 성우 후시녹음 연기의 판토마임에 푹 빠져서 허우적거리게 됩니다.

흥미진진한 초반부의 분위기 잡기와 이야기 전개방식, 애니메이션, 초반부의 윤정희 팜므 파탈 연기의 전형은 재미있지만, 전체적으로 완결성과 완성도가 부족한 이야기입니다.

장황하게 이어지는 문학서적스러운 대사들을 보면, 카프카나 까뮈의 책같은 이야기, 내지는 "서울, 1964년, 겨울" 이야기를 하고 싶은 의욕과 흥미진진한 이야기 풀이 중심의 범죄물을 찍는 기술이 뻣뻣하게 붙어버린 것처럼 보입니다.


그 밖에...

약 40년전의 여운계가, 신성일이 하숙한 집의 노처녀 딸이라는 비중 적은 역할로 출연합니다. 자기 목소리로 직접 녹음을 한 여운계의 가벼운 인물은, 21세기에 보기에는 모든 인물의 연기 중에서 가장 자연스럽고 익숙하고도 편안합니다.

중간에 끼어든 "장군의 수염" 이야기는 독립을 맞이 한 나라의 장군이 기른 수염이 유행하는 바람에 세상 사람 모두가 수염을 기르게 된 세상을 그리는 이야기입니다. 갖다 붙이자면 산업 사회에서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는 신성일에도 연결하고, "장군의 수염" 이야기를 영화전체의 주제와도 어떻게 끼워 맞출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여러모로 영화는 연결에 미숙한 편입니다.

애니메이션을 칭찬했는데, 조사를 좀 해 보니, 신동헌 감독의 작품이었습니다. 과연.

이어령이 쓴 원작이 있는 영화입니다. 1966년에 나온 원작에는 "장군의 수염"의 "장군"이 독립군 장군이 아니라, 쿠데타를 성공시킨 장군입니다. 정치적인 입장을 고려해서, 쿠데타군 두령 장군을 독립군 대장 장군으로 바꾼 것은 이야기의 핵심을 약간 무디게한 면이 있습니다. 원작에는 화자인 "나"가 제1 용의자로 의심을 받는 한 편, 팜므 파탈 캐릭터가 영화처럼 나서지 않습니다. 덕분에 "장군의 수염"이라는 극중 소설의 비중이 훨씬 큽니다.

"무진기행"으로 유명한 작가 김승옥이 영화의 각색 각본을 맡았습니다. "영화"라는 매체와 약간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듯도 한, 장황한 문어체 대사들은 이 분의 작품입니다. 초반의 느와르 분위기가 재미났다는 점을 생각하면, 각본을 맡은 김승옥이 좀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한 세대를 풍미했던 전설의 코메디언, 고 곽규석 선생이 출연하는 영화입니다.

생각해 보니까, 요즘 관객들에게 이 영화를 보여줄 때는, 왜 연탄 난로의 뚜껑을 몰래 열어 놓고 가는 것이 "살인" 행위가 될 수 있는 지, 사전 정보 전달이나, 자막 처리가 필요하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 영화에서만 해도 아무런 설명없이 굉장히 실용적인 살인 방법인척 하고 있어서, 21세기 10대, 20대 초반 관객이 잠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십입니다만, 이런 이야기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50610550022 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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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스미스 2007/11/16 13:57 # 답글

    우왁 김승옥이 각색했나요...
    저도 그 느와르 분위기땜에 한국 고전 중에 이런 영화가 있었단 말이야! 하면서 보다가, 나중엔 지루해서 채널 돌리고 싶은 욕망을 꾹 눌러야했던...
    여기서 늙은 형사분(김승호 씨군요) 정말 멋있지 않나요. 이 영화의 중후한 분위기는 절반이 그 분 풍채에서 나왔던 것 같습니다.

  • 게렉터 2007/11/19 13:25 # 답글

    스미스/ 이게 좀 살펴보다보니, TV/비디오/필름 등등이 판본에 따라서 편집이 조금씩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삭제장면이 들어가거나 빠진 것도 있고, 심지어 순서가 바뀌게 배치된 것도 있어 보였습니다. 좋은 판본으로 잘 편집된 것은 아무래도 좀 더 재밌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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