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시 영화


(포스터)

"내시"는 "장군의 수염"과 함께 요즘에는 윤정희의 대표작으로 곧잘 손꼽히곤 하는, 조선 문정왕후의 전횡 시대를 배경으로 한 1967년작 사극입니다. 줄거리는 정략적인 이유로 강제로 이별을 당하고 명종의 후궁으로 끌려온 여주인공이, 내시가 되어 궁전에 잠입한 옛 애인과 스캔들을 낸다는 겁니다. 여기에 문정왕후에 관한 흉흉한 풍문과 명종의 열등감, 내시와 궁중여인들의 비밀들이 얽혀 있습니다.

줄거리가 어찌되었거나, 제목에 부합하게, 영화는 중세 궁중 변태 종합 선물 세트입니다. 딸을 후궁으로 파는 신하, 묘한 기류가 흐르는 내시 동료들, 옆방 궁녀를 습격하는 동성애자 후궁, 가학증 애호가, 어머니에 대한 열등감에 빠진 잠자리를 남에게 공개하길 즐기는 왕, 주술에 빠져 있는 욕망이 강한 잔인한 왕비, 지하 감옥 던전과 거기에 갖혀서 수십년 동안 햇빛 한 번 못보고 미쳐가는 무고한 죄수들 등등입니다.


(윤정희를 노리는 후궁)

영화 전체를 놓고 볼 때 갈등의 가장 중요한 축은, 문정왕후에 대한 열등감으로 좀 막나가게 살고 있는 명종과 강제로 궁전에 끌려온 여주인공, 그리고 여주인공을 추궁하고 추적하다가 점차 그녀를 동정하고 그녀에게 이끌리는 겪는 내시감, 세 사람의 관계 입니다.

그런데, 내시로 인생을 살게된 신성일의 배역이 영화 초반에는 꼭 주인공인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갈등의 단초가 되는 인물이자, 사건 전개에도 결코 비중이 적지 않은 인물이지만, 어디까지나 이 인물은 여주인공에게 동기부여를 해주는 인물일 뿐이지 갈등의 적극적인 주체가 아닙니다. 하는 일은 문정왕후나, 여주인공을 야밤에 덮치는 후궁과 다를 바 없습니다.


(왕과 왕의 여인)

그런데, 배우가 "신성일"인 데다가, 영화 초반에는 꼭 내시로서 삶을 살아가는 한 인간의 인생역정을 보여주는 듯한 분위기로 출발하기 때문에 지나치게 신성일의 배역에 초반에 기울어 집니다. 그리고 영화의 가장 중요한 주인공인 여주인공 윤정희의 배역이 영화가 시작되고 한참동안 암시도 되지 않고, 등장도 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영화가 전체적으로 중심이 흔들흔들 합니다.

비슷한 이유로 영화 중반에도 곁가지 이야기가 꼭 가장 중요한 이야기인냥 빠져서 잠시 헤메는 경향이 있습니다. 덕분에, 고문이나 살육이 난무하는 중세 비극풍의 고딕적인 잔혹극 분위기가 잘 살아있는 영화치고는, 분위기 안 어울리게 갑자기 밝고 교훈적인 사극 연출로 빠져 버리는 실수도 꽤 눈에 뜨입니다. 가장 거창한 죽음을 맞이하며, 찰톤 헤스톤 못지 않게 사극 인물로서의 입체감을 보여주는 내시감은, 하필 그 최후 장면이 편집과 음악삽입 연결이 뻑뻑한 문제점도 있습니다.


(내시와 끌려와 갖힌 여인 윤정희)

그러나 전체적으로 줄거리와 인물간의 성격 설정이 잘 살아 있고, 갈등의 주요 축을 이루는 세 인물이 모두 좋은 연기를 보여줍니다. 이미 칭찬한 바 있는 내시감 역의 박노식도 최고이고, 남궁원은 맨날 써먹는 터프가이 환상으로 넘실거리는 역동적 인물을 그대로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눈물의 여인에서 팜므 파탈로 변해가는 윤정희도 설득력있는 연기로 매력을 보여줍니다. 허장강이나, 도금봉의 인물도 비중 설정이 좀 뜬금없어서 빛이 바랬기는 하지만 격정적인 감정과 위엄을 동시에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일본 사무라이 영화의 기술을 모범적으로 배워 펼치는, 조용하고 정적인 가운데 펼쳐지는 마지막 검술 액션이나, 어두운 중세 잔혹 영화의 분위기를 잘 살리는 지하 감옥 별궁의 여러 장면들, 고문, 살해 장면들은 원색적인 연출도 잘 살아 있습니다. 변태적인 구석이 많은 왕과 여주인공의 내밀한 장면, 적절하게 삽입된 분위기 조성용 폭력들은 충분히 좋은 분위기를 유지하며 흥미를 끄는 편입니다.


(내시 박노식)

"내시"는 액션과 기괴함을 잘 다루는 신상옥 감독의 재능이 꽤 잘 살아났다고 할만한 영화입니다. 약간만 편집을 다시 하면, 단지 유명한 옛 영화일 뿐만 아니라, 꽤 그럴듯한 깔끔한 고전이 될 수 있을 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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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오일렌부르크 2011/04/16 00:44 # 삭제 답글

    아주 오래전에 포스팅 하신 글이지만..^^
    얼마전에 신성일 인터뷰집 보고 생각이 나서 덧글 달아봅니다.
    그 인터뷰집에선 신성일씨가 박노식씨한테 두들겨 맞고나서 나중에 꼭 그 빚을 갚아주리라고 벼르던 대목이
    인상적이었거든요.

    지금은 방화(옛날엔 방화라고 불렀죠^^)포스팅이 좀 뜸하신듯한데,
    언제 기회되시면 박동룡 필모그라피처럼 박노식 필모그라피 포스팅 한 번 기대해봐도 될까요?
    언제나 건필하시길~
  • 게렉터 2011/04/16 23:54 #

    박노식 출연작은 두어편 올릴 듯 합니다. 적당히 출연작이 쌓이게 되면 정리 글도 한 번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응원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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