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펠바운드 (망각의 여로) Spellbound 영화


(정신분석학자들 두 명)

알프레드 히치콕 영화들은 대체로 어떤 비밀이 숨겨진 사건을 대상으로 하는 스릴러 영화들입니다. 그렇긴 합니다만, 정통 논리 추리물처럼, 단서들이 차근 차근 제시되는 가운데, 진상에 접근해 나가는 그런 정통 미스테리물은 거의 없는 편입니다.

대부분의 알프레드 히치콕 영화는 어떤 비밀 때문에 주인공은 어떤 사람이나 집단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주인공은 그 위협을 이리저리 피하는 가운데 그 비밀이 자연스럽게 점차 드러나는 이야기 입니다. 별다른 복잡한 추리 없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란하거나 강렬한 마지막 액션과 함께 비밀이 해결되고 주인공도 위협으로부터 벗어나는 형태의 이야기가 대부분입니다.


(스펠바운드에 등장한 알프레드 히치콕)

그런면에서 "스펠바운드"는 꽤 다른 영화이고, 그런만큼 별로 알프레드 히치콕의 주특기가 발휘되지 못하여 전체적인 재미가 떨어지는 영화입니다.

우선 "스펠바운드"는 본격 추리물입니다. 액션과 서스펜스 중에 서서히 진실이 밝혀지는 영화가 아니라, 조각조각난 증거들을 하나 둘 수집하면서 나중에 "수수께끼는 모두 풀렸다!" 하면서 똑똑한 탐정이 관객들에게 설명을 해주는 영화입니다. 이것만해도 알프레드 히치콕 답지 않은데, 영화에서는 한술 더떠서 그 추리라는 것이 과학수사, 논리추적이나 심리트릭이 아니라, 어림없게도 꿈해몽과 정신분석학입니다.


(수수께끼는 모두 풀렸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잉그릿드 버그만은 정신분석학자 입니다. 꽤 유능하며, 많은 정신불안한 사람들을 잘 이끌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그녀가 학자로서 동경하던 에드워드 라는 다른 정신분석학자가 나타납니다. 잉그릿드 버그만은 그 배우가 그레고리 펙이니 만큼, 단번에 사랑에 빠질만큼 호감을 느낍니다만, 친하게 지낼수록 이 사람은 여러모로 불안한 구석이 많아 보입니다. 그리고, 그 숨겨진 비밀이 차차 드러나면서 두 사람은 모험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1940년대라서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의 위상이 지금과 전혀 다른 시기라는 점은 접어 두고라도, 알프레드 히치콕이 이런 선택을 한 것은 자신의 장기나 스타일과는 배치되는 일이었습니다. 알프레드 히치콕은 동적인 사건을 일으키고, 액션을 펼치며, 상황을 과시적으로 보여주는데 재주가 있습니다. 그런만큼, 비밀이 드러나는 과정은 동적이고, 실체감이 있을 수록 좋습니다. 달리는 열차에서 격투를 벌인다든지, 바닷물속으로 뛰어내린다든지, 하다 못해 여주인공이 샤워라도 하는 가운데 살인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모호하기 이를데 없는 심리의 세계, 더군다나 도무지 관객에게 보여주는 설득력이라고는 부족한 정신분석학이라니, 별로 안어울리는 조합입니다. 안그래도, 잉그릿드 버그만이 셜록 홈즈 행세를 하면서 추리 결과를 다소곳이 앉아서 설명하는 것이 알프레드 히치콕 영화에 별로 안 어울릴텐데, 그 설명의 배경조차 이렇게 실체가 없는 것이다보니 영 재미없어지기 쉽다는 겁니다.


(옛 영화의 묘미. 스키 장면까지도 합성 실내촬영으로)

실제로 그 결과도 그다지 좋지는 않습니다. 이 영화에서 진상이 드러나고 문제가 해결되는 장면을 강하게 하려면, 그 정신분석학적 설명이, "이야- 정말 그렇다-"하고 감탄을 자아낼만큼 그럴싸해야 합니다. 정통 정신분석학적인 것은 아니지만, "가면의 정사" 처럼 아귀가 딱 맞아드는, 많은 사람이 절절히 공감할 수 있는 설명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영화에서 바퀴는 뭘 뜻하고, 지붕은 뭘 뜻한다는 설명은, 꿈속의 돼지는 돈이 굴러들어오고, 용은 큰 행운을 상징한다는 것과 별 다를바 없습니다. 그냥 막연하고, 꽤 많이 의심스럽습니다.

정신병이 치료되는 가장 극적인 순간도 따지고보면, 거기서 갑자기 보여주는 영상이 꽤 충격적이라서 좀 그럴듯한거지, 이야기 연결 선상에서는 별로 들어맞지 않습니다. 영화의 이야기대로라면, 정신병의 충격요소는 "비스듬한 줄무늬"에서 "비스듬함"이어야 하지, "줄무늬"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엿보기 묘미, 정체성문제, 유령을 어지럽게 보여주는 "현기증"이나, 스파이들간의 옥죄어오는 대결을 보여주는 "" 였다면, 말이 좀 안되어도 후다닥 "그래서 어떻게?"하면서 넘어갈 수 있지만, 워낙에 추리자체를 정면에 부각시킨 스펠바운드에서는 아무래도 단점으로 걸리적거립니다.

두 사람이 기막히게 사랑에 빠지는 것의 묘사도 부실하고, 대부분 히치콕 영화의 주인공들이 어쩔 수 없이 긴박하게 쫓기듯 모험에 나서는 것에 비해, 기본적으로 스펠바운드는 주인공들이 "그냥 궁금해서" 모험에 나서고 있다는 점도 영화의 설득력을 떨어뜨려버립니다.


(영화 내용의 핵심과 관련이 매우 부족하지만, 여전히 멋진 살바도르 달리의 미술 한 가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볼만한 것은, 각본과 연출을 제외한 나머지 요소들 때문입니다. 영화 자체보다 더 화려한 주제곡은 길이 남을 명곡이고, 살바도르 달리가 직접 전면에 나서는 영화 미술을 볼 수 있다는 점도 분명 멋집니다. 이 음악과 미술이 "싸이코"나 "새" 같은 명작 영화처럼 절묘하게 어울리는데는 실패하고 있습니다만, 그 자체로 일단 가치가 있습니다.

배우들의 연기도 뛰어납니다. 잉그릿드 버그만은, 우리가 이 배우에 대해 품고 있는 심상의 한 극단을, 알프레드 히치콕 영화의 금발 미녀 배역의 한 극단에 얹어서 제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분명 우호적이고 강렬하지만, 그만큼 연약하고 불안해 보이는 사람을 제대로 연기한 그레고리 펙도 각본의 한계가 원망스러울만큼 좋은 연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스펠바운드는 볼만한 영화입니다. 하지만,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치고, 이 영화를 정말로 제대로 즐길 사람들은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팬이 아니라, 그레고리 펙이나 잉그릿드 버그만, 혹은 살바도르 달리의 팬들일 겁니다.


(가장 자연스러운 각본, 연기가 조화된, 잉그릿드 버그만에게 찝쩍대는 남자1 배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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