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소리 영화

1967년은 김수용 감독에게 "기적의 해" 였습니다. 아인슈타인이 1905년에 광전효과, 브라운운동, 특수상대성이론의 세 논문을 한꺼번에 냈다면, 김수용 감독은 그로부터 62년뒤인 1967년을 기점으로 "안개", "사격장의 아이들", "갯마을"로 영화계를 뒤흔들었습니다. 그는 "갯마을"로 1966년 백상예술대상, "안개"로 1967년 청룡영화제, "사격장의 아이들"로 1967년 대종상 각각 감독상을 휩쓸었습니다. 바로 이 1967년에 김수용 감독은 영화를 찍어내듯 만들어야 했던 상황에 맞춰 무려 10편의 영화를 감독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전설적인 기록 때문에, "안개", "갯마을" 못지 않게 볼만한 영화였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영화의 수상경력에 상대적으로 묻혀 버린 영화가, 역시 같은 해인 1967년에 나온 "까치소리"일 겁니다.

" 까치소리"는 1967년작, 신성일, 이대엽, 남정임, 윤정희, 고은아 주연의 강변 농촌을 배경으로한 영화입니다. 김동리의 유명한 소설이 원작이며, 생각 보다 어두운 영화입니다. 만약 이 영화를 보실 기회가 있으시다거나, 볼 마음이 있으시다면, 더 이상 아무런 정보도 취하지 마시고, 원작도 읽지 마시고, 그냥 보시기 바랍니다. 충분히 볼만한 고전입니다. 이 글도 더 이상 읽지 않는 편이 영화를 재미있게 보는데는 더 도움이 될지 모릅니다.


(포스터)

왜 특별히 아무런 정보도 취하지 마시라는 말씀을 드렸는고 하니, 이 영화는 반전이라면 반전이라고 할만한, 꽤 강렬한 전환점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원작 소설과도 분명히 느낌이 다르고, 영화가 처음 시작할 때 기대하던바 와도 느낌이 다른 멋드러진 국면전환이 있습니다.

"까치소리" 라는 제목에 강변을 배경으로하는 평화로운 농촌이라면, 어두운 분위기라고 해봤자 "상록수" 마지막 부분의 시련이나, 심해봐야 "붉은 산" 정도, 내지는 "감자" 정도겠지 생각하고 따분하게 여기게 되기 쉽습니다. 실제로 영화의 초반은 좀 그런 분위기가 납니다. 영화의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부분이 꽤 기이해 보이긴 하지만, 금새 잊혀지고, 갑자기 길가는 탁발승에게 착한 윤정희가 다소곳이 곡식을 좀 주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스님말을 듣는 걸 보면, 무슨 전래 교훈동화 같을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까치소리는 그 평온해 보이는 강변 농촌을 바탕으로, 느릿느릿 흘러가는 가운데, 실은 고전적인 비극같이 운명의 장난에 휘말린 격정적이고 약간은 기괴한 비극을 펼쳐냅니다. 스님은 별 다른 이야기를 하지는 않습니다만, 실은 카산드라요, 맥베스에게 저주의 예언을 하던 마녀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이 영화의 묘미가 있습니다.

이 야기는 이렇습니다. 평화로운 강변 농촌. 어느 초가집에 병든 노모를 모시고 20대 초반쯤의 어린 처자가 열심히 가계를 꾸려나가고 있습니다. 그 평온의 중간에, 갑자기 전쟁터에서 죽은 줄 알았던 오빠가 살아 돌아오면서, 이 건실하고 착한 오빠를 중심으로 서서히 운명이 모든 것을 바꿔 버린다는 이야기 입니다.

물론, 단점도 있습니다. 최종결말은 시간이 부족해서 갑자기 뒷장면을 하나 끊어 먹은 것 처럼 약간 부실하고, 성우 후시녹음 연기의 답답함이 주절거리는 낭독으로 승화되는 장면도 많습니다. 더군다나 비슷한 시기에 나온 "장군의 수염"은 물론이요, 한참 먼저나온 "하녀"에 비해서도, 장면구성이나 촬영기술이 아직도 1930년대 전후의 낙후된 습관에서 헤메고 있는 곳도 꽤 많아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까치소리"는 40년이 지난 지금에도 꽤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는 영화입니다. 무엇보다, 영화 속 반전의 강렬함이 그 가치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반전 장면에서 갑자기 사설시조풍의 긴긴 책읽기 성우쇼가 곁들여져서 지금보면 좀 대사가 장황하고 문어체가 과한 느낌이 있긴 합니다만, 그래도 반전을 중심으로 꽉 짜여진 영화의 구성은 뛰어납니다.

우 선 이 영화는 반전을 막판 10분전, 2분전에 펼친다거나 하지 않습니다. 대신, 고전적인 비극 수법 그대로, 반전이 나올 때까지, 주인공의 연기, 배경의 변화, 주변 인물의 변화 등을 조금씩 조금씩 제시하면서 분위기를 서서히 돋구어 갑니다. 그리고, 주인공이 기다리고, 따라서 관객들도 기다리게 되는 어떤 기대되는 목적지를 제시해 놓고, 은근슬쩍 거기에 도착하면 어떨까...하면서 호기심을 주는 방법도 사용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적당히 고조된 상황에서 반전을 보여주고, 그 반전을 기점으로 파국을 맞으며 각양각색으로 망가지며 침전하고 그러면서 돌발행동을 하는 주인공을 비추는 것으로 나머지 재미를 삼습니다.

이 모든 것을 이 영화는 충분히 천천히 자연스럽게 끌고 갑니다. 나른한 농촌 여름 분위기를 거기에 걸쳐 얹어서 그 느리고 조용한 모습이 적절한 분위기를 갖게 한 것도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때문에 이 파국과 반전이 더 독특한 성격을 갖게 됩니다. 노파의 헝클어진 머리칼, 까치소리, 여름, 시원한 물줄기, 조각배, 논, 밭, 들판, 강을 장면 구성요소로 다루는 방식도 적절하고, 여름 초가집안의 답답한 느낌을 배경으로 하는 장면과 강변의 탁트인 시원한 느낌을 배경으로 하는 장면을 대조하면서 이야기를 펼치는 방식도 볼 만 합니다.

무엇보다, 배우들의 연기도 굉장합니다. 또다시 눈물의 여인인 윤정희는 특별할 것은 없지만 성실하게 착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열심히 밭일을 하는 윤정희의 모습은 정말 모든이에게 "착해" 보일만큼 성실하게 연기되고 촬영되어 있습니다. 10대 소녀로 등장한 남정임은 그 어느 영화 속의 남정임 못지 않게, 귀엽고 순수한 10대의 심상을 잘 살려 냅니다. 거기에 소위 트로이카 특유의 매력을 은근슬쩍 뿜어내면서 영화의 결말에 이르기까지 딱 필요한 인상을 모두 보여줍니다. 한편 초인기 배우 신성일과 맞먹어야 하는 역할인 이대엽은 실제로 그런 상황에 처한 보통 사람 같은 느낌을 설득력있게 보여주는 재주를 보여주고, 연기할 거리는 적지만 고은아도 극중 주인공의 옛애인이라는 인상에 아주 어울리게 캐스팅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이 영화에서 압권의 연기를 보여주는 것은 이 영화의 독보적 주연인 신성일입니다. 까치 소리는 소설과 달리 결코 주인공 혼자서 영화를 끌어 나가지는 않습니다. 조연들의 연기와 어우러짐이 중요하게 부각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신성일의 연기는 다른 조연들의 연기를 압도할만큼 보기 좋습니다.

단적으로 신성일이 답답해하는 표정으로 방안에 들어와 "호롱불을 집어 담배불을 붙이고" 방한켠에 앉아 담배를 입에 무는 자연스러운 장면은, 꽤 직접적으로 그 심정을 바로 전달합니다. 좀 과장하면, 그 모습에서 우울함과 답답함을 느끼는 사회 부적응자의 느낌, 그러나 본심은 착한 사람이라는 느낌, 그래서 스스로 적응하려고 부단히 노력하지만 잘 안되는 느낌, 그러는 속에 어딘가 숨기고 있는 것이 있는 듯한 느낌. 이런 오묘한 느낌들이 서리도록, 표현하는 전체 연기의 축에 아주 걸맞게 배치되어 있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특히나, 신성일과 주인공 인물은 변화하는 주인공의 심경과 그에 따른 분위기, 불안감을 서서히 잘 이끌고 가서, 관객이 이야기의 반전과 파국을 절절히 공감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연출과 연기가 정말 잘 부합했다고 존경할만합니다.

어쩌면, 까치 소리는 멋드러진 솜씨로 꾸며 보여줄 수 있는 단편 영화를 좋은 연기를 보여주는 멋있는 배우들과 몇 가지 연출적 장치를 이용해서 그럴듯한 장편 영화로 잘 확장한 것이라 할만합니다. 강변 농촌의 조용한 평화로움과 그런 속에서도 어쩔 수 없이 사람이 사는 가운데 펼쳐질 수 밖에 없는 운명적인 비극을 대조해 내는 방식은, 그 격렬함을 강조하기도 하면서도, 보편성과 함께 깊은 여운을 줍니다.


그 밖에...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청룡영화제 상을 받은 사람은, 노모를 연기한 한은진 선생이었습니다. 충분히 조연상을 받을 만한 호연이었습니다. 한은진 선생은 소위 한국 영화계의 전설적인 "산증인"입니다.

신성일과 윤정희는 같은 해에 개봉된 "안개"에서도 김수용 감독과 함께 일했습니다. 윤정희의 회고에 따르면, 김수용 감독은 같은 배우와 함께 두 영화를 동시에 찍었다고 합니다.

따지고 보면, 흑백영화이기 때문에 가능한 트릭이 크게 작용해서 영화의 맛을 살린 면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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