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 무도회 - 2005년 서울 공연 5. 6. 7. (공연 후반)
1. 신라
2. 암살극
3. 서울 공연
4. 리카르도의 집무실
5. 점쟁이와 손
6. 비극
7. 가면무도회


5. 점쟁이와 손

점쟁이가 악마에게 음울한 찬양을 보내면서 분위기를 잡고 있습니다. 이부분의 세트는 커다란 손모양의 바위로 꾸몄습니다. 어쩔수 없는 운명을 상징하는 재미있는 세트였습니다. 점쟁이는 이 거창한 세트에서 수십명의 지지자들의 어지러운 율동속에 둘러싸인 사이비 종교 교주처럼 보입니다. 그러고 보면 세트 자체도 그런 오컬트스러운 비밀 소굴이미지도 강하게 듭니다.

이런 설정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이 점쟁이를 사이비 종교 교주로 설정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냥 항구의 부두바닥에서 인기 많은 용한 집시 점쟁이로 설정할 수도 있을 겁니다. 이 점쟁이 앞으로 어부들이나 술취한 선원이 지나가고 막판에는 동네 주민들이 단체로 등장하기도 하는 걸 보면, 항구 부두바닥이 사이비 종교 소굴보다는 좀 더 어울릴 듯 합니다. 술취한 선원이 괜히 사이비 종교 소굴로 지나간다든가 어린이를 포함한 동네 주민들이 떼로 갑자기 이곳에 등장하는 것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뭐, 거대한 손모양의 바위가 있는 것을 보니, 포항 앞바다의 해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또 대법관이 나서서 굳이 처벌하려고 나선다는 점과 악마에게 노래하는 무시무시한 가사를 따져보면 사이비 종교 교주에 더 어울릴 지도 있겠습니다. 각각 장점을 잘 살릴 수 있는 연출이 있을 텐데, 이날 처럼 연출했다면, 나중에 주민들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그냥 일반 시민들이 괜히 나타나기 보다는, 사이비 종교 수사를 위해 들이닥친 대규모의 군인들과 호기심 때문에 따라온 군중들 정도로 설정하고, 그런 성격을 부각시키는 것도 좋았겠다 싶습니다.


[소굴]

리카르도는 어부로 변장하고 나타나 점쟁이를 몰래 살펴봅니다. 한 술취한 선원이 나타나 평생 왕에게 충성했지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신세를 한탄하고는 점을 봅니다. 점을 보니 선원에게 길운이 있을 거라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리카르도는 재미삼아 슬쩍 이 술취한 선원에게 돈과 장교 임명장을 찔러 넣어 줍니다.

돈과 임명장을 발견한 선원은 신기하게도 점괘가 맞았다며 기뻐하고, 과연 왕에게 충성하길 잘했다면서 왕에게도 찬양을 보냅니다. 아무래도 슬쩍 장교 임명장을 찔러 넣는 것은 가수가 소매치기가 아닌 다음에야 실수없이 자연스럽게 연기하기가 쉽지 않은지라, 대놓고 가방속에 서류를 집어넣고는 던져주는 것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원작의 잔재미가 죽긴 합니다만, 어쩔 수 없었을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장면은 다시 바뀌어 난데 없이 리카르도의 부하 레나토의 아내가 나타납니다. 레나토의 아내는 불륜의 짝사랑에 빠졌다면서 무슨 방법이 없을지 점쟁이를 찾아온 것입니다. 숨어서 지켜보던 리카르도는 자기가 짝사랑하는 그녀가 사실은 그녀도 자기를 짝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고 엄청 좋아합니다. 레나토의 아내는 저력있는 노래를 들려주었습니다. 충분히 리카르도에 발맞춰줄 수 있는 솜씨였습니다.

장면은 바뀌어 리카르도의 다른 부하 몇몇이 도착하고, 리카르도는 자기도 재미삼아 점을 한 번 봅니다. 점쟁이는 리카르도가 권력을 쥔 운명이라고 말하고는 엄청난 살이 끼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당신은 지금 처음으로 손을 잡는 사람에게 살해당할 것이다.”


[어부와 점쟁이]

라고 날벼락 같은 소리를 합니다. 리카르도는 코웃음을 치면서, 그런 미신이 어디있냐고 합니다. 리카르도는 주변의 부하들에게 손을 잡을 것을 권하지만, 점쟁이를 믿는 부하들은 두려워서 피하고, 애초에 리카르도를 해칠 생각을 품은 반대파 귀족들은 찔려서 피합니다.

그러던 차에, 리카르도 최고의 충신 레나토가 뒤늦게 등장합니다.

“반가운 나의 가장 충실한 친구 레나토!”

하면서 상황을 모르는 레나토의 손을 덥석 잡습니다. 이 때의 악수는 정말로 충실한 친구임을 표현하는 좋은 연기와 음악이었습니다. 모두, 왕을 보호하는데 가장 충실한 레나토라면 안심이라고 점쟁이의 예언이 틀리는 군, 하고 생각합니다. 물론 사정을 다 아는 관객들만 안타까워 합니다. 이렇게 손을 잡는 것에 얽힌 운명이 손 모양의 세트와 교묘하게 어울리기도 합니다.

곧 리카르도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점쟁이를 용서한다고 합니다. 점쟁이는 배반할 사람들이 보인다며 경고하지만, 곧 여러 시민들과 아이들이 모여들어 리카르도를 찬양하고 환호하는 노래를 부릅니다. 깃발을 든 왕의 군대가 화려하게 등장하고, 리카르도는 합창하는 아이들을 안아주며 환호에 응답합니다.

아까 시작장면이 왠지 나치스의 국회를 연상시킨다고 했는데, 이 장면에 등장하는 깃발이며 군인들은 왠지 나치스 시절 뉘른베르크 행진 같은 것을 떠오르게도 합니다. 좀 엄중한 느낌의 군인들을 연출하다보면 요즘에는 자연스럽게 이렇게 되는 것입니까? 모를 일입니다.


[친위대 사열 - 두산 엔사이버 백과사전에서]



6. 비극

레나토의 부인이 절벽아래에 있는 무슨 뿌리를 캐러 옵니다. 그걸 부적으로 갖고 있으면 짝사랑에 대한 번뇌를 떨쳐버릴 수 있다는 점쟁이의 말을 따르려고 온 겁니다.

절벽은 붉은색의 뾰족한 조명을 위에서 주는 착시효과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두운 무대에서 가수들을 2층 높이의 철판위에 올려다 놓고 조명은 뾰족한 모양으로 주니까 조명이 있는 부분에만 디딜 철판이 있는 더 좁디 좁은 절벽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덕분에 관객들이 보기에는 자칫하면 가수가 무대로 뚝 떨어지겠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정말 굉장히 위험해 보입니다. 좋은 특수효과 입니다. 그런데, 기왕에 붉은 절벽을 표현했으면 아래쪽의 바위 세트들도 황량한 붉은 바위로 표현했으면 잘 어울릴 텐데, 바위들은 푸른색으로 표현되어 있어서 절벽이 인공적인 느낌이 확 듭니다. 의도적인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듭니다.

어쨌거나 이 위태로운 절벽은 대놓고 이 부인과 리카르도의 위험한 불륜을 상징합니다. 좀 있다 리카르도가 등장해서 정말 위태롭게 이중창을 벌이고 있노라면 물리적으로 위험해 보이는 느낌까지 같이 들어서 효과가 좋은 편입니다.

두 사람의 이중창은 썩 듣기 좋습니다. 이번 공연의 연출에서는 리카르도와 부인이 뭔가 일을 막 치르려하는데, 갑자기 멀리서 레나토가 나타나서 허둥지둥 부인을 숨기는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갑자기 앞부분에서 유쾌한 인상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던 리카르도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약간 피가로의 결혼 마지막 부분 분위기처럼 좀 우스꽝스러워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건 그냥 제가 요즘에 그 노래들을 자주 들어서 그게 괜히 생각나서 그럴 겁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충직한 레나토는

“나쁜 귀족들이 떼거리로 다니고 있습니다. 몸을 피하는게 안전할 듯 합니다.”

하고 리카르도에게 말합니다. 이 레나토의 긴박한 말과 당황해서 긴박한 리카르도와 레나토의 부인이 격정적인 3중창을 부릅니다. 소프라노와 테너의 고음들이 어지럽게 엇갈리는 이 노래도 재미있고 듣기 좋은데, 이 부분에서도 상당히 가수들이 잘하고 있습니다. 레나토의 첫 노래, 다같이 점쟁이를 만나러가자는 합창, 오스카의 마지막 노래와 함께 제가 이 오페라에서 좋아하는 노래입니다.

리카르도는 일단 몸을 피하면서 그 자리에서 빠져나오고, 곧 반대파 귀족일당들이 들이닥칩니다. 레나토는 반대파 귀족들에게 검을 빼들고 대항합니다만, 그러던차에 부인을 가리고 있던 베일이 벗겨지고 레나토는 아까 리카르도와 속닥속닥하던 여인네가 자기 아내라는 것을 알고 황당해 합니다.

이 모습을 보고, 리카르도의 반대파 귀족들은 비웃는 노래를 부릅니다. “하하하”하는 웃음소리를 반복된 가사로 하는 이 비웃기 중창 합창노래는 아주 좋은 솜씨로 불렀습니다. 들으면서 진짜 비웃는 것 같다. 정말 레나토가 부끄럽겠다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아쉬운 것은 앞서 말한 주역들에게만 집중하는 연출덕분에 이 매끄러운 비웃기 노래를 부른 가수들을 거의 가려버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장면은 레나토의 집으로 바뀝니다. 레나토는 자신을 배반한 아내와 그야말로 은혜를 원수로 갚은 리카르도를 저주하고 또 저주하기를 마지 않습니다. 이 때 분노한 레나토의 노래와 슬퍼하는 아내의 노래들은 전부다 솜씨가 아주 좋습니다.

첫부분에서 레나토의 노래가 그저 그런 편이었다고 말했습니다만, 이 부분에서는 그 때보다 훨씬 더 좋은 노래를 들려줍니다. 계속 수준을 유지해오고 있던 아내 아멜리아의 노래도 빼어나게 울려퍼집니다. 추상적이면서도 심각해보이는 무대도 이 부분에서는 십분 어울립니다.

특히, 대본에서 레나토가 집에 걸어놓은 리카르도의 초상화를 보면서,

“네 놈이 어떻게 이럴수가!”

하면서 분개한 나머지 리카르도의 초상화를 찢어 버리는 장면을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공연에서는 이것을 리카르도의 흉상을 올려두고, 분개한 나머지 흉상의 목을 쳐서 깨버리는 것으로 바꿨습니다. 주변 무대장치와도 잘 어울릴뿐만아니라, 깨지면서 파편이 무대에 흩날리는 것이 극적인 느낌도 강합니다. 흥미 있는 연출이었습니다.

또 한가지, 이 부분에서 오케스트라의 솜씨도 무척 좋았습니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얼마나 같이 연습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초반 합창에서 힘겨워하던 부분에 비하면, 이 부분에서는 무대위 가수들의 감정이 음악이 되어 자연스럽게 뿜어져 나오는 듯하게 역동적이고도 딱딱 떨어지는 솜씨를 보여주었습니다. 일부러 좀 과하게 빠르게하는 부분이 있기도 했습니다만, 충분히 어울리는 범주였습니다.

특히 지휘자가 상당히 쇼맨쉽이 풍부하고 또 감정적이어서 지휘 동작이 크고 열정적이었습니다. 극에 완전히 몰입해서는 입모양으로 가수들의 노래를 직접 따라하면서 지휘를 몰아쳤습니다. 지휘자가 악센트 부분에서 손가락으로 찍는 몸짓을 취하며 팔을 내리 꽂을 때, 저를 포함한 많은 관객들이 흥겨워했습니다. 이때의 다소 과시적인 지휘와 훌륭한 연주 덕분에 아마 오케스트라에 대한 평가가 전체적으로 후해 졌을 겁니다.

이 레나토의 집부분은 전체적으로 가면무도회의 시작장면과 함께 공연전체에서 가장 훌륭한 부분이었습니다. 레나토와 아멜리아의 노래가 끝날 때 마다, 여기저기서 “와-” 하는 소리와 “브라보”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 부분에서 제 옆자리에 앉아 있던 한 영어권 출신의 할머니는 “Wow!”를 과하다 싶을 만큼 연발했습니다.

막이 내려갈 때 남아있는 리카르도 흉상 잔해를 다시 칼로 쳐서 아주 산산조각으로 깨뜨리는 마지막도 오케스트라와 정확히 어울리면서 강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7. 가면무도회

레나토는 180도 전향하여 반대파 귀족들과 손을 잡고 리카르도를 암살하려고 합니다. 그리하여 가면무도회에 잠입해서는 리카르도를 없애버리려고 계획을 세웁니다.

한편 리카르도는 고민끝에 레나토와 그의 아내 아멜리아를 다른 나라로 파견하려고 합니다. 충직한 부하에게 나쁜 짓을 하고 있다는 양심의 가책 때문에 그들을 먼 곳으로 보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는 아멜리아가 무척 그리울것이고, 그녀도 자기를 사랑하는데 왜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을까라고 갈등합니다만, 의리를 지키기 위해 파견장에 서명을 합니다.

곧 가면무도회가 시작됩니다. 정통적인 연출대로, 리카르도 혼자 썰렁하게 고민하고 있는 무대 뒤편을 가로막고 있던 막이 올라가면서, 화려한 가면무도회장이 드러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썰렁하고 답답하고 혼자뿐인 무대 바로 뒤쪽에 이 오페라 전체에서 가장 화려한 장면을 숨겨두고, 음악과 함께 드러내면서 대조를 이용하는 트릭을 사용했던 겁니다.

가면무도회는 온통 강렬한 붉은색으로 현란하게 의상을 꾸민 발레단과 공중에서 늘어뜨린 수십개의 붉은 전등들. 그리고 무대위에서 뿌려서 천천히 쏟아져 내리는 붉은 꽃잎으로 장식했습니다. 추상적이고 미니멀한 전체적인 연출분위기를 거스르지 않는 범위내에서 가능한한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화려하고 좋은 연출이라고 생각됩니다.


[예술의 전당 공연 가면무도회 장면]

가면무도회는 극 전체가, 숨겨진 음모, 변장, 가면, 숨김, 비밀의 이야기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 꼭꼭 숨긴 어떤 욕망이나 쾌락 같은 이중적인 면을 들춥니다. 그런 것을 압축적으로 내세워서 상징하는 장면이 이 가면무도회 장면이고, 그런 일견 비도덕적인 듯 하면서도 위험한 느낌을 주기에 공연의 색채 사용과 무대 구성은 탁월했습니다.

모두가 가면을 쓴 무도회장에, 리카르도, 레나토, 아멜리아, 그리고 반대파 귀족일당과 오스카에 이르기까지 엇갈리며 도착합니다. 레나토는 오스카에게 리카르도가 어떤 가면을 쓰고 변장했는지 물어봅니다만, 오스카는 장난스럽게 가르쳐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 때 오스카가 멋모르고 가면무도회에 재밌어하는 느낌을 살리며 부르는 노래가 고음의 화려한 곡입니다. 그렇습니다만, 이 부분에서도 역시 오스카를 이리저리 힘들게 뛰어다니게 하면서 그런 재밌어하는 느낌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노래를 어느 정도 희생해야 했고, 노래 자체의 화려함은 그냥 포기해버렸습니다. 애초에 이 노래를 얼마나 잘하는 사람이 어떻게 잘할지 기대하면서 자리에 앉았던 저는 꽤 아쉬웠습니다.

레나토는 죽일 리카르도를 찾아 헤메고, 아멜리아는 암살계획을 알리기 위해 역시 리카르도를 찾아 헤멥니다. 모두가 가면을 쓴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가면무도회에서 본래 정체를 알기 위해, 그리고 죽고 죽이기 위해 이리저리 혼란스럽게 오가는 장면은 좀 과장하면 표리부동이 너무 많은 세상살이에 대한 비유일 수도 있을 겁니다.


[과거 공연의 가면 무도회 장면]

어쨌거나, 이 날의 주역에게 집중하는 연출, 즉 합창단과 발레단이 주역과 같이 나올 때면 항상 약하게하는 연출 때문에, 주연이 뚜렷이 드러나고 합창단과 발레단은 한출 뒤에서 그냥 단순한 배경으로 깔려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가면무도회에서 정체를 모르는 가수들이 어지럽게 교차하는 그 묘한 재미는 별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아멜리아와 리카르도가 뒤섞인 아주 잠시 동안의 군무에서 그런 느낌만 살짝 줍니다.

곧 레나토는 리카르도를 찾아내고 그를 찌릅니다. 리카르도는 죽으면서 미안하다고 하고, 그 살인죄를 용서 하면서, 먼 곳으로 파견하는 파견장에 서명했다고 말합니다. 리카르도가 아멜리아를 사랑하긴 하지만, 자신과의 의리 때문에 고민하다가 께끗이 포기한 것을 안, 레나토는 뒤늦게 살인을 후회합니다.

가면무도회장의 모두가 격정적인 합창으로 장엄하게 비극의 충격을 노래하면서 무대는 막을 내립니다.

커튼 콜에서 가장 많은 박수를 받은 이는 열렬한 지휘를 보여주었던 지휘자였습니다. 모든 가수들의 노래가 다 한가지씩은 들을 거리가 있는 좋은 연주였습니다. 그에 비해서 주역 가수 이외의 부분을 너무 축소시킨 연출이나 가수들에게 부담스러운 동선을 좀 자주 주문한 듯한 점은 어떻게 좀 더 해결할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돌이켜보면, 정말로 주역 외의 가수들도 그렇게 묻히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잘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외에 연출의 참신한 시도들은 신선하고 재미있었습니다.

중간에 무대를 바꾸는 과정에서 무대 한구석을 좀 덜 닫아서 제가 앉은 자리에서 무대 뒤쪽에 가수들이 준비하는 곳이 훤히 드러나는 실수도 있었습니다. 커튼 콜 때는 무대 중앙에선 남자 아이가 뭔가 무대 뒤에서 싸웠는지, 옆에 있는 여자아이와 손을 잡지 않으려고 하면서 짜증내는 재미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이 날 공연은 중기 베르디 특유의 재미있고 대중적인 오페라의 묘미를 즐기기에 충분했습니다. 음악의 묘를 잘 살리는 가면무도회 직전과 화려한 붉은색을 잘 살린 가면무도회 시작 장면의 대비는 기억에 남습니다. 그 장면들은 괜히 덕지덕지 치장과 장치를 겹쳐 씌우지 않았으면서도 유려하게 매끈하고 빼어났습니다.

많은 프리마 돈나 소프라노 중심의 오페라와 달리 가면무도회는 리카르도라는 테너 배역을 중심으로 하는 오페라입니다. 이 오페라에서 썩 좋은 가창을 들을 수 있었던 것도 즐거웠습니다. 이날의 리카르도는 초반에 유쾌하고 여유있는 왕의 모습을 잘 소화해내던 인상이 좋아서, 아마도 리골레토의 만토바나 세빌리아의 이발사의 알마비바 배역에도 잘 어울릴지 싶습니다.

동행한 사람과 같이 차타고 오는 길에, 세상살이가 과연 꾸밈과 거짓 인간관계로 가득한 것이가 하는 생각을 했는데, 결론은 잠시 미뤄두고 집에 와서는 아쉬웠던 오스카의 마지막 노래를 조수미 것으로 한 번 다시 들어봤습니다.


[스톡홀름의 왕립 오페라 하우스 - 구스타프 3세의 지시로 건설되었으며, 구스타프 3세가 이곳의 가면무도회 도중에 암살당하였습니다. 요즘에는 가끔 이곳에서 가면무도회가 스웨덴의 오페라단들에 의해서 공연되기도 합니다. 여행중 마주치게 된다면 그때 그곳에서 벌어지는 가면무도회 장면이 구경할만할 겁니다.]

by 게렉터 | 2006/02/08 20:00 | 오페라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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