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멘 - 2004년 서울 공연 1. 2. (19세기말 유행음악)
- 지난번에 올린 "아이다"글에서 그때 국립오페라단의 발레 안무나, 2막 앞쪽의 암네리스 공주 방의 묘사 같은 장면이 플라시도 도밍고가 출연했을 때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공연을 모방한 것이라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거의 직접적인 참고라는 생각에 저도 동의 합니다만, 공주 방을 묘사하는 부분은 나름대로 경제성 있는 연출을 하려는 창의성이 있었습니다. 어쨌거나 제 글에서 언급한대로, 발레 장면은 괜히 이상한 특이한 것을 따라하려다가 실패해버렸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것만 아니었다면, 나름대로 창조적 모방으로 칭찬 받을만 했다고 봅니다.

- 두 번째로 정리해서 올리는 오늘의 내용은, 오페라에 별 관심이 없는 분들 사이에서도 팬층이 두터운 "카르멘"입니다.

역시 잡다한 무의미한 이야기를 사랑하는 제 취향덕에, 공연과 상관없는 이야기도 아주 많고, 내용도 좀 깁니다. 아마, 3. 줄거리 항목이나, 5. 서울 공연 항목부터 읽으셔도 별 상관 없을 듯 합니다.

아는 바가 부족해서 어줍잖은 구석이 많습니다. 정정, 첨언 부탁드립니다.

1. 반달족의 땅과 캐리비안의 해적
2. 셀레스트 베나르
3. 줄거리
4. 한국 초연
5. 서울 공연


1. 반달족의 땅과 캐리비안의 해적

코스타 델 솔. "태양의 해변"은 뜨거운 태양과 눈이 시리도록 파란 바다가 아름다운 곳입니다. 이 곳은 에스파니아 서남쪽 끝트머리의 유명한 관광지역입니다.

익숙한 그라나다, 세비야 같은 지명들이 있는 이 지역을 안달루시아 라고 하는데, 이 말은 “반달족의 땅”이라는 이슬람 표기가 다시 유럽으로 넘어오면서 “반달리시아”라고 했던 것에서 유래한다고 합니다. 옛날 우리나라 고려의 이슬람 표기가 유럽으로 넘어가면서 “코리아”가 된 것과 비슷합니다.

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유럽 구석구석에 게르만족이 몰려와 살 무렵. 지금 우리에게는 문화재 파괴 즉 “반달리즘”으로 악명만 높은 반달 족이 이 근처에 왕국을 만들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슬람이 맹위를 떨치던 이 시기가 되자, 바다 건너 아프리카 지역과 가까운 이 곳은 기술이 발달한 이슬람인들에게 금새 점령당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긴 세월 동안 이슬람인들이 이 “반달족의 땅”에 들어와 살게 됩니다. 그러면서 에스파니아의 이 지역 이름이 반달리시아 - 안달루시아가 되었다고 합니다.


[반달족의 로마 함락]

한편 저 멀리 인도에서는 고대로부터 카스트 제도의 폐해 때문에 도저히 살수 없어서 떠났거나, 추방된 인도인들이, 사는 곳을 떠나 도망다니다가 서쪽으로 서쪽으로 계속 흘러 가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애초에 고향에서 추방되어 떠돌이 인생을 작정하고 사는 종족이었기 때문에, 이 도시 저 도시를 떠돌며, 말매매/점성술/춤-노래판 벌리기 등등의 일을 하면서 사는 유랑 민족이 되었습니다.

사실, 이 사람들은 문자도 없고 다른 민족의 문자에도 문맹인데다가, 무슨 자신들만의 도시나 왕국 같은 것도 없었기 때문에 이런 기원에 대한 이야기도 어렴풋한 추측일 뿐입니다.

인도와 가까운 중동지역에 널리 퍼지게 된 이 떠돌이 민족이 바로 “집시”입니다. 이들은 이슬람 세력의 번창에 따라, 지금의 터키 지역과 동유럽 지역에도 퍼져 나갔습니다.

여기 저기에 퍼져나간 이들은 에스파니아의 안달루시아에 서서히 모여들게 됩니다. 이 지역은 비교적 자신들에게 익숙한 중동의 이슬람 문화가 많이 남아 있고, 카톨릭/이슬람교가 왔다갔다 하는 통에 문화적 색채가 굉장히 다양해 져서 포용력이 넓어져 있기에 집시들과 어울리는 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리하여 에스파니아의 집시 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집시들은 독특한 춤동작과 화려하고 정열적인 춤, 독특한 음색의 음악으로 개성이 뛰어났으며, 이런 안달루시아 집시들의 춤이 결국 “플라멩고”가 됩니다. 안달루시아 집시들의 춤에는 점차, 에스파니아의 평야 지역인 라만차 지역의 민속춤도 뒤섞이게 되는데, 그 중에 가장 매력적인 것은 아무래도, 한참 춤을 추다가 갑자기 빠른 노래가 끝나자마자 딱 동작 멈추는 것이 재미있는 “세기디야” 춤일 것입니다.


[집시]

집시들이 온 유럽과 아프리카, 중동을 이리저리 유랑하다가 에스파니아의 바닷가 안달루시아에까지 흘러들어올 동안, 에스파니아에 원래부터 있던 사람들은 대서양을 가로지르며 대항해시대를 열고 있었습니다.

특히 대서양 건너편, 카리브 해의 쿠바 같은 곳은 대항해시대, 에스파니아의 가장 왕성한 무역기지이자, 동시에 온갖 해적들의 근거지이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황금 한탕을 노리며 어지럽게 어울려 난리를 치고 다녔고, 해적들이 아니라도, 카리브해는 영국, 미국, 에스파니아, 프랑스 각 지역의 문화가 아무런 장벽 없이 그저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어지럽게 뒤섞이는 지역이 되어 버렸습니다.

해적들은 18세기쯤이 되자, 대영제국의 위세를 정비하는 영국의 대토벌을 중심으로 각국의 토벌에 의해 잠잠해졌지만, 이렇게 뒤섞인 문화는 쿠바와 카리브해 각 지역에 그대로 남았습니다.

특히, 쿠바의 중심지, 하바나에서는 아주 독특한 일이 생겼습니다. 노예 사냥꾼들이 노예로 부려먹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마구잡이로 잡아온 흑인들이 쿠바 하바나의 농장에서 일하면서, 이 뒤섞인 문화에 젖어 들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들은 대항해시대에 뒤섞인 영국, 에스파니아의 농촌풍 민속음악에 독특한 흑인 정서를 섞은 춤과 노래를 만들게 됩니다.


[쿠바의 하바나]

이런 쿠바 하바나의 노래와 춤들은 반대로 선원들에 의해 에스파니아 본국으로 되돌아가 유행하기도 하고, 나중에 이 춤과 노래가 남미 전역으로 퍼져서, 탱고의 한 축이 되기도 합니다.

이것이 곧, “하바나 스타일” 즉 “하바네라” 춤입니다.

오페라 “카르멘”에서 카르멘이 부르는 가장 중요한 두 곡의 노래인 “하바네라”와 “세기디야”는 이렇게 해서 에스파니아에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2. 셀레스트 베나르

쿠바에서 혹독한 노예제에 반대하여 대규모 흑인 노예 반란이 일어나고, 그 결과 노예제도 폐지와 농민 혹사 반대를 부르짖는 싸움이 점차 세력을 얻어 갈 때쯤, 프랑스에서는 아버지가 영재교육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 “조르주 비제”라는 소년이 나타났습니다.

4세때 악보 보는 법을 배우고, 9세때 파리 국립음악원에 입학한 그는, 나중에는 피아노를 잘치는 것으로 유명해져서, 거장 리스트에게 대단한 솜씨를 가졌다고 칭송을 받기도 하여, 말하기 좋아하는 몇몇 사람들은 “모차르트에 버금가는 천재”라며 그를 추켜 세우기도 했습니다.


[비제]

그런데, 역시 너무 천재라고 사방에서 떠드는 사람은, 자칫 잘못하면 주저 앉기 쉽기 때문인지, 그도 기대했던 것 만큼 빛을 발하지는 못했습니다. 여전히 꽤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고 있었고, 차근차근 자리를 잡아 나가고 있긴 했습니다. 그렇지만, “천재”의 성장이라고 하기에는 미흡했습니다. 비제 자기 스스로는 무척이나 갑갑하고 답답하기도 했을 겁니다.

쿠바에서 본격적인 노예해방 전쟁이자 독립 전쟁인 “10년전쟁”이 막이 오를 무렵, “한때 천재라던 음악가”, 비제는 여행중의 기차 안에서, 셀레스트 베나르 라는 독특한 여인과 만납니다.

이 여자는 부자들이 정부로 삼아 주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가 하면, 무용수이기도 하고, 음악을 연주하기도 했고, 오페라 연출에 관여하기도 했습니다. 하여간 오페라계 주변에서 온갖 사람과 별별 일에 다 관여하면서 자유롭게 마음가는 대로 즐기면서 사는 여자였나 봅니다. 별명이 그 바닥 이름을 따서 “라 모가도르”였답니다. 요즘으로 따지면, 미스 코엑스몰쯤 될까요.

그러면서 이 베나르는 한 군데 메이는 것을 싫어하고, 끈덕지게 달라붙는 남자들에게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것으로도 유명했답니다.

기차 안에서 만난 두 사람은, 신기한 우연으로 마침 사는 곳이 이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렇게 저렇게 하면서 비제는 이 여자와 교분을 갖게 됩니다. 둘 사이의 관계가 얼마나 깊었는지는 여러 설이 분분합니다만, 하여간 꽤 친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 시절, 셀레스트 베나르는 세바스티앙 이라디에르 라는 사람이 작곡한 “하바네라” 춤을 무대에서 매력적으로 추었고, 비제는 여기에 상당히 인상을 받았습니다.

뭐 어쨌거나, 비제는 나이가 차서 혼처를 찾을 때 즈음 해서는 자기 음악 선생님의 딸과 결혼을 하였고, 그러면서 이 셀레스트 베나르라는 여인과의 관계는 끝을 맺습니다.

30대 초반 쯤에 이르러서, “아를르의 여인”으로 어느 정도의 인기와 명망을 얻게 된 비제는 마침 그 무렵, 병을 얻어 고생하게 되기 시작합니다. 안좋은 몸을 추스리면서 “아를르의 여인”을 바탕으로 이런저런 음악작업과 오페라 작업에 참여 하던 중, 그는 오페라계 유력 인사, 카미유 뒤 로클의 눈에 들게 되었습니다. “아이다”를 만들 때, 고고학자의 편지를 베르디에게 전해 주었던, 그 카미유 뒤 로클 말입니다.


[파리 오페라 코미크]

결국 비제는 이리하여, 파리 오페라 코미크의 감독인, 바로 이 카미유 뒤 로클의 지지를 얻어 뭔가 대형 오페라를 하나 만들어 보라는 요청을 받게 됩니다.

비제는 한 때 “천재”라 불리웠던 자신의 역량을 이 기회에 완전히 발휘해보기로 하고, 아주 새로우면서도, 정말로 화려고, 또 아주 좋아서, 누구든지 보면, “어떻게 이런 것을 만들어 냈단 말인가”하고 감탄할 만한 것을 만들려고 작정했습니다. 그는 메리메의 소설 “카르멘”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젊은 시절, 이 소설가 메리메는 에스파니아의 몬티호 백작부인에게, 말하자면 좀 추근거리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시절에 그는 백작부인에게 어떤 여자한테 맛이 가서 패가망신한 남자 이야기를 하나 듣게 됩니다. 그로부터, 10년도 지난 뒤에, 메리메는 그 이야기를 소재로 소설을 쓰게 됩니다. 소설은 이렇습니다.

“나”는 에스파니아 여행중에 한 사람에게 시계 소매치기를 당합니다. “나”는 그 사람을 붙잡는데, 알고보니 이 사람은 살인죄로 사형당할 사람이었습니다. 어쩌다보니, 이 사람이 어쩌다가 살인범이 되었나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내용인 즉슨 원래는 누구보다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었는데, 한 여인에게 정신이 빠져서 환심을 사려고 한 발 두 발 어둠의 세계에 발을 디뎌 결국은 모든 것을 잃었고, 졸지에 폐인이 되어 살다가 살인까지 하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이 사형대에 끌려가기 전에 마지막 남은 유언을 듣고 떠나가는 그를 본다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납니다.


[세비야 시가지]

비제는 이 소설을 보고, 한 남자가 패가망신한 원인이 된 소설 속의 집시 여인과 뭇 목 메는 남자들을 매몰차게 거절하던 자신이 아는 여자, 셀레스트 베나르를 겹쳐 떠올리게 됩니다. 비제는 셀레스트 베나르가 추던 이국적인 멜로디의 춤인 “하바네라”를 기억해냈고, 이를 오페라에 집어 넣을 것을 작심합니다.

오페라 제작이 시작되자, 아내의 사촌 뻘이자, 음악 선생님의 조카뻘 되는 빅 알레비와 그의 20년 동료 앙리 메이약이 오페라의 가사를 맡았습니다. 비제는 천재성을 과시할 수 있는 파격적인 내용과 파격적인 음악으로 된 새로운 오페라를 원했고, 이 작가 두 사람은 흥행에 성공하고 전통에 맞추려면 그렇게 막나가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둘을 조율하기 위해 오페라를 만드는 데 아주 많은 토론이 필요했습니다.

비제는 원래부터 리허설 중에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거나 마음에 안드는 부분이 있으면 고민고민하다가 내용을 바꿔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특별히 혼신의 힘을 기울여 만들고 있던 카르멘에서는 그런 일이 더 심했습니다.

등장인물들의 성격을 그 어떤 오페라보다 인상깊게 제시해주면서도 생생함이 넘치는 1막의 장면들이나, 가장 강렬한 피날레를 자랑하는 4막의 마지막 장면들은 비제가 수없이 고치고 고친 결과들이라고 합니다. 물론 비제는 셀레스트 베나르가 추던 하바네라도 아주 적당한 곳에 잘 삽입해 넣었습니다.

그리하여, 비제가 “아주 독특하면서도 좋은 점이 많은 오페라”로 심혈을 기울여 만든 카르멘은 1875년 3월 3일, 드디어 개봉하게 됩니다. 카미유 뒤 로클의 지지로 만든 대형 신작인 만큼 기대는 대단해서, 구노, 오펜바흐, 알퐁스 도데, 알렉산드르 뒤마 2세 -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원작자이기도 합니다. - 등의 파리 최고의 예술계 유명인사들이 모두 모였다고 합니다.


[엔리코 카루소의 동 호세]

그러나 공연이 끝난 후 평론가들의 반응은 상당수가 참담한 혹평이었습니다. 흥행성적 자체는 나쁘지 않은 편이긴 했습니다. 하지만, 평론가들은 이해할 수 없는 실패작이라고 카르멘을 폄하했습니다. 그냥 돈을 그만큼 갖다 발랐으니, 대강 조금 흥행한 것이되, 예술적 가치는 떨어진다는 이야기가 주류였습니다.

“카르멘”에 비제가 집어 넣은 “독특한 점”은 “자극적이고 오페라에는 어울리지 않는 해괴한 짓”으로 매도되었고, “카르멘”에 비제가 집어 넣은 “좋은 점”은 “다른 여러 오페라들의 좋은 점을 짜집기한 짓”으로 매도되었습니다.

특히, 프랑스 오페라계에서 특이한 것으로 비치던, 바그너 오페라의 장점을 따온 부분이 부각되어 “카르멘”은 바그너 아류작으로 불리웠고, 비제는 예술계에서 거의 아무런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흥행 성적은 점차 시간이 흐르자 더욱더 좋아져서 대박의 예감이 있기도 했습니다만, 정작 비제 자신은 혼신의 정열을 기울인 작품이 평단에서 무시되는 것에 쓸쓸해 하면서, 정확히 개봉 3개월 후인 1875년 6월 3일. 지병 악화로 불과 36세로 사망하였습니다.


[엔리코 카루소 스스로 그린 자신의 동 호세]

이듬해가 채 지나기도 전에 카르멘이 최고의 인기를 얻고, 나아가, 사실주의 오페라 쯤으로 번역할 수 있는 이탈리아 베리스모 오페라를 나타나게 했으며,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오페라들 중에서도 가장 자주 공연되는 오페라가 될 줄, 이 수재 음악가는 모르고 죽었던 것입니다.
by 게렉터 | 2006/02/08 20:07 | 오페라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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