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계단 The 39 Steps 영화


(스코틀랜드에서 도망)

"39계단"은 "유럽판 북북서"라 불리우는 "해외특파원"과 함께 "영국판 북북서"라 할만한 1935년작 영화 입니다. 다시 말해서 "39계단"은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와 같은 소재를 사용하고 있는 먼저 나온 이야기입니다. 평범한 주인공이 우연한 기회에 알 수 없는 사건에 휘말리게 되고, 이 사건은 살인과 얽힌 국제적인 스파이 조직에 연루되어 있으므로 온갖 조직의 추격을 받으며 누명을 벗기 위해 이국적인 지역을 돌아 다니는 겁니다. 1990년대 중반 한국 영화 "런어웨이"까지 똑같이 반복되는 돌아다니며 추격전 펼치기의 성공적인 원형을 제시하는 영화 중 하나입니다.

"39계단"은 런던 웨스트 엔드 쯤으로 보이는 극장에서 1930년대의 현재감이 물씬 나는 버라이어티 쇼로 시작합니다. 이 쇼를 보러온 관람객인 주인공 남자는 얼떨결에 극장의 소동에 얽히게 되고, 그날 처음 보는 여인과 함께 집에 돌아옵니다. 이 여인은 영국에 깔린 다른 나라 스파이를 쫓는 영국편 스파이인데, "The 39 Steps"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스코틀랜드에 가야 된다느니 어쩌니 합니다. 이 여인 때문에 스파이 조직이 주인공을 주목하고, 그런저런 일 끝에 살인 누명까지 쓰게 된 주인공은, 스파이 조직과 경찰의 추적을 동시에 받으면서 스코틀랜드의 목적지에 가고, 스파이를 밝혀내고, 누명을 벗으려는 과정에서 모험을 벌입니다.


(대공황의 향취가 남아 있는 버라이어티 쇼)

이 영화는 우선 각본에 신경을 기울인 아이디어들이 꽤 있습니다. 추리와 사실성이라는 면에서는 무시하고 서둘러 대강 넘어가는 면이 있긴 합니다.하지만, 그래도 교묘하게 사건이 얽어지도록 부드럽게 복선들을 제시하고, 관객들이 쉽게 돌이켜서 사건 전개를 감탄할 만큼 그 복선들을 잘 활용하며 이야기를 펼칩니다. 덕분에 관객들의 감정 완급과 감탄을 끌어내는데 유리합니다. 이런 점은 여기저기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각처를 싸돌아다니며 다양한 위기를 겪는 주인공의 이야기들에게 일관성을 주고 있습니다. 도대체 "39계단"이 뭔지 궁금해하면서 이야기를 기다리는 관객들에게도 꽤 그럴듯한 설명을 줍니다. 해답이 사실적으로 명석하다는게 아니라, 그 밝혀지는 과정이 이전의 복선들을 짚어 넘어가고 있어서 영화 전체를 즐겁게 보았다는 느낌으로 아울러주는 것입니다.

또 "39계단"은 아직 이런 이야기의 영화에 대한 고정 관념이 채 굳어지기도 전에 나온 시대의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고정관념으로 상상하게되기 쉬운 이야기 상의 기대를 조금씩 벗어나는 도전을 하기도 합니다. 인물들이 죽는 시점, 주변 인물들이 협조하거나 괴롭히는 시점이 조금씩 이런 영화의 관례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물론, 열차에서 액션을 하면 달리는 열차에 매달리는 장면처럼, 고전적인 전통을 예의바를 정도로 충실히 지키는 면도 있습니다. 이러한 덧대기 덕분에, 의외의 사건이 더욱 호기심을 자극하게 하는 면도 있습니다. 이는 예전 영화들 뿐만 아니라, "삼총사"나 "보물섬" 같은 활극 소설이 유행하던 시절에서부터 내려온 이야기를 따져본 결과일 겁니다.

이 영화에는 기능적인 아이디어 장면도 군데군데 충실합니다. 악당 인물의 주된 특징은 "새끼 손가락의 일부가 없다"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이 설정은 잘 써먹을 수 있습니다. 화면에 새끼 손가락이 없는 손을 비추는 것 만으로, 누가 등장한 것인지 바로 알려 줄 수 있습니다. 이런 영상은 손가락 절단의 심상 때문에, 바로 곁에 악당이 있다는 느낌, 위험함, 위기감을 드러내기에도 일품입니다.


(묶여 있는 손)

또 한가지 이 영화에 짚어 둘만한 부분은, 영화 후반에 나오는 수갑으로 묶인 남녀가 어쩔 수 없이 한 침대를 사용하는 장면입니다. 아이디어 자체야, 많은 액션 영화, 코메디 영화에서 수없이 반복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39계단"에서는 연예인 게임 TV쇼 처럼 대강 농담으로 불편함을 표현하고 있지 않고, 정말로 두 남녀가 약간은 살벌하게 대립합니다. 여기에 고전적인 장치인, 젖은 옷, 스타킹, "묶여 있는 손", 아픔, 숨김 등등의 요소가 어우러져 있습니다. 그리하여 연애 장면으로 응용되었을 만한 상황에, 불쾌한 공격성, 정돈된 예의를 잠식하는 과격함을 첨가해서 정말로 묘한 분위기를 띠게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신사 숙녀의 이야기 속에 선명한 무례함을 넣어서 이야기의 매력을 돋구는 것은, 초반 극장 앞에서의 제안이라든가, 열차안의 대화 등등 여러 부분에서 계속 시도되고 있습니다.

달리는 열차에 탄 다음에야 액션 영화에 대한 예의를 갖추 듯, 한 번 매달리는 액션을 하는 것이나, 주인공은 별별 행운이 뒤따라서 위기를 극복하는 것, 이상하게 주인공이 만나는 여자들은 하나 같이 주인공에게 야릇하게 엮이는 것 등등, 이런 부류의 영화들이 갖는 전형적인 요소들도 고전 답게 충실히 표현되어 있습니다. 제임스 본드의 여인 꼬드기기는 정말 심하게 막나가지만, 어쨌거나 이런식으로 의외스런 인연과 상황이 이어지는 것은 이러한 일탈적인 추적 소동에 어우러질 수 있고, 관객들의 관심을 환기하기도 합니다. 특히 "39계단"에서 거대한 철교의 원근감이 잘 살아나도록 하여 더 거대한 느낌, 높은 곳에 위험하게 있는 느낌을 살린 연출이라든가, 항상 웃음이 감돌도록 모든 인물들이 유머와 재치있는 대사들을 수위조절하며 읊고 있는 것도 장점입니다.


(달리는 열차에서라면 매달려 주는 것이 액션 영화의 예의)

"39계단"에는 영화에는 고전 영화로서, 시대에 따른 볼거리들도 충분히 많이 있습니다. 우선, 아직 자동차가 그렇게 널리 보급되지 않은 탓에, 꽤나 장거리 주행임에도 불구하고 줄기차게 비포장 도로로 다녀야 한다는 영화 중반부 자체가 볼거리입니다. 앞서 언급했던데로, 경제 대공황의 영향이 짙게 베여 있는 웨스트엔드 쇼 무대에 대한 표현과 당시 유행을 잠시 짚어갈만한 속옷에 관한 이야기도 봐 둘만 합니다. 아주 잠깐이지만, 이 영화에는 초기모델의 헬리콥터가 잠깐 등장하는데, 이 영화가 개봉된 시대가 아직 미국 공군이라는 것이 창설되기도 전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것도 눈에 뜨입니다.

복선의 충실한 활용과 약간씩 고정관념을 어긋나는 위기 장면은 항상 속도감있게 펼쳐집니다. 그에 비해 분명하게 부족한 점을 꼽는다면 주인공 인물의 성격이 현실감이 부족해 이입을 방해한다는 것이 걸립니다.

주인공을 제외한 비중이 적은 다른 인물들은 매우 설득력 있습니다. 소소한 많은 역할들도 전부 다 구체적인 성격과, 이런 성격을 선명히 드러내는 연기를 하고 있으며, 특히 산골 마을 부부의 경우에는, 남편보다 한참 어린 아내와 이 아내를 들들 볶아대는 퉁명스런 늙은 남편이 정말 제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 집착과 오해, 확 터질 것 같은 과격해 보이는 모습이 인상에 어울리는 연기로 제대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문제가 많은 부부와 주인공)

하지만, 가장 중요한 주인공은 예외입니다. 주인공은 초반에는 어쩔 수 없이 쫓기고 두려워서 쉼없이 행동해야만 하는 불안하고 초조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후반에는 느긋하게 사건을 바라보면,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고, 다른 관계자들에게 호통을 치거나 냉철한 분석으로 앞서가는 무슨 살인면허소지자 같은 흉내를 내고 있습니다. 로버트 도낫은 놀랍게도 두 부분의 연기를 모두 다 설득력있게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낙천적인 표정의 희극 연기가 여유로운 분위기에 유리한데다가, 그러면서 당황한 평범한 사람을 연기하는 것도 잘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문제가 되는 것은 배우와 한 장면이 아니라, 영화 전체에서의 전환에 걸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의 성격이 이처럼 급작스럽게 바뀌는 이유나 과정이 거의 설명되어 있지 않아서, 영화 전체의 사실감과 신뢰감이 떨어지는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아마 주인공이 마음을 고쳐먹는 계기를 삽입하거나, 그게 귀찮았다면 애초에 주인공의 직업과 태도를 조금 고쳐놓고 처음부터 주인공을 적당히 여유와 자신감을 갖는 인물로 표현할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39계단"에서는 별다른 설명없이, 갑자기 화면이 두 번쯤 전환되고 나더니, 뚝끊겨서 소시민 주인공이 갑자기 베짱넘치는 여유부리는 첩보원인냥 나타납니다. 어느 쪽으로나 지속적으로 이어지며 흥미를 주는 코메디 상황, 그리고 여기에 결합해 표현하는 로버트 도낫의 연기 솜씨가 아니었다면, 이러한 주인공 성격 돌변의 구멍은 훨씬 더 크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39계단"에 등장한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

"39계단"은 호기심과 의외성을 약간 가미하고 추격과 탈주의 긴장감을 잘 표현하면서, 복선의 재미를 충실히 살린 영화입니다.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다른 여러 비슷한 소재의 이야기를 생각해보면, 좀 화려한 파괴 장면이나 비슷한 블록 버스팅 장면을 영화 중반부 쯤이나 그 뒤에 끼워 넣는 것이, 영화의 긴박하고도 국제 음모의 육중한 분위기를 살리는 데 좋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해도, 계속 등장하는 재미난 인물들을 거치며 끊임없이 아이디어가 뽑혀져 나와서 차례로 펼쳐지는 수많은 추격전 액션들은 여러모로 재활용될 원천으로 자리잡을만 합니다.

* 필름포럼의 알프레드 히치콕 걸작선 상영을 맞이하여 도배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루에 하나 이상은 올리지 않으려고 하건만.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 밖에....

번역 제목은, 영어 제목을 거의 그대로 가져가는 "39 스텝" 정도가 여러모로 좋았을 법 합니다. "39계단"은 좀 엉뚱한데가 있는 제목입니다.

존 버칸의 원작 소설도 빼 놓을 수 없는 고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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