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혹 (서스피션) Suspicion 영화

취직일 수도 있고, 이직일 수도 있고. 중요한 면접이 있는 날. 그날 저녁에는 친구들과 한 잔 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친구들이 모인 술집에 약간 늦게 나타나 보니, 모든 친구들이 궁금한 표정으로 물어 봅니다.

"야, 오늘 면접 어땠냐?"

그러나, 말없이 시무룩한 표정. 아마 욕만 얻어 먹고 돌아왔거나, 아깝게 일이 성사되지 못했나 봅니다. 그래서 실망이 아주 큰 듯한 분위기 입니다. 친구들은 제대로 안된다 보다 생각하고, 안타깝고 불쌍히 여깁니다. 그리고 뭐라고 위로의 말을 해야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갑자기 장난스럽지만 아주 유쾌한 표정으로 돌변하여.

"2배 좋은 조건으로 붙어버렸단다!"

하고 환한 웃음과 함께 말합니다.

매트 르블랑의 인물이 TV쇼 "프렌즈"나 "조이"에서 자주 하기도 한 이 장난은 어떻게 보면 별거 아닌 사소한 성공을 아주 즐거운 것으로 느끼게 만듭니다. 기대를 전혀 안하게 하고 있다가 혹은 아주 나쁜 쪽으로 기대를 하고 있다가, 즐거운 일을 안겨주니, 조금만 즐거워도 아주 반갑습니다. 바람둥이의 밀고 당기는 연애 관계에서도 활용될 수 있는 이 수법은 일본 사람이 만든 "필승의 대화술" "이것이 난세의 협상기법이다" 정도의 제목이 붙은 책에도 단골로 실려 있을 내용입니다.

"의혹"에서 캐리 그란트의 인물도 바로 이런식의 장난에 능한 사기꾼 바람둥이 입니다. 좋게 말해서 장난이고 농담이며 나쁘게 말하면 협잡이고 우롱입니다. "의혹"에서 대부분의 갈등은 바로 이 인물이 이런 식의 여러가지 행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극적인 재미를 위해서 장난과 우롱의 정도는 처음에는 사소하고 가면 갈 수록 어마어마해 집니다.


(조운 폰테인)

"의혹"은 조운 폰테인이 "레베카" 바로 다음으로 출연한 영화로, 이번에도 조운 폰테인은 뭔가 이상한 비밀에 휩싸인 남자와 사랑에 빠져서 속을 까맣게 태우는 역을 맡았습니다. 다만 정반대인 점은, "레베카"에서는 가난한 조운 폰테인의 인물이 어마어마한 저택을 가진 갑부의 집에 나타나게 되지만, "의혹"에서는 조운 폰테인의 인물 스스로가 꽤 그럴듯한 호화 단독 주택의 주민이었는데, 어디서 나타난지 알 수 없는 낯선 인물인 캐리 그란트의 인물과 엮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의혹"의 이야기는 인물 중심입니다. 예측불허의 사기꾼 바람둥이 캐리 그란트가 온갖 일을 하고 다니면, 조운 폰테인 도대체 캐리 그란트가 어쩌려고 저려는 것인지, 어디까지가 진심이고 얼마만큼이 거짓인지 혼란스러워하고 고민하고 조사하고 추측하고 절망하고 다시 안심하는 내용의 연속입니다. 캐리 그란트의 행동에 따라 조운 폰테인이 느끼는 혼란과 걱정도 가면 갈 수록 커져나가기 때문에 그 점층법은 관객들에게 기대와 재미를 갖게 합니다.


(이번에는 나도 레베카 못지 않지.)

그 원천이 되는 캐리 그란트의 인물은 비슷한 시대에 캐리 그란트가 연기했던 많은 스크루 볼 코메디 인물들의 허상만을 뽑아온 형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자는 끝을 모르는 여유와 베짱, 낙천성으로 넘쳐나는 인물이지만, 동시에 반성을 모르는 경박함과 무책임함, 정직하지 못한 뻔뻔함으로 버무려진 인간입니다.

"서울의 달"의 홍식이는 이 자에 비하면 정직하고 성실한 청년이며, "범죄의 재구성"의 김선생은 이 자에 비하면 대쪽같은 중후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표정과 이 사람을 관찰하는 사람의 표정, 사용하는 소품을 번갈아 보여주면서 짧은 장면으로 이 사람의 성격의 단편을 제시하는 첫 열차 장면은 그런 성격의 맛배기를 훌륭히 제시 해 줍니다. 이 인물은 정상적인 도덕에 대한 생각이라고는 아랑곳도 하지 않고, 그야 말로 상상초월로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행동하는데, 이것이 캐리 그란트의 여유 부리는 모습과 터무니 없는 약은 모습 연기로 제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의혹"에 등장한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

"의혹"의 이야기는 관찰자 입장인 조운 폰테인의 인물에 좀 더 깊은 초점을 맞추고 이 인물이 느끼는 감정의 기복을 관객들에게 전달합니다. 영화의 시점을 조운 폰테인에게 맞춘 덕택에 이 영화에서 캐리 그란트의 인물은 터무니 없는 뻔뻔한 여유는 잘라서 보여 주면서, 묘사하기 귀찮은 부분은 숨기고 의도나 본심은 감출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행동을 할 지 예측하기 힘든 이 인물의 임기응변 능력을 더욱 궁금하게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렇게 캐리 그란트의 인물이 이리저리 형태를 바꿔가며 등장해 속만 긁고 사라지게 함으로서 호기심을 키우고, 또 여자 주인공의 마음과 함께 관객의 속을 뒤집어 놓는 감정의 호소를 강하게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인간 다운 인간을 묘사하려면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죄책감이나 양심의 가책, 허둥지둥하는 모습 같은 것들은 최대한 숨겨서 캐리 그란트 인물의 초인적인 완결성을 강조합니다. 이렇게 잘 짜인 이야기 구도와 편집 덕분에 캐리 그란트의 인물은 뭔가 사연이나 계획이 있는 듯 하다는 생각까지만 전달해 주면서도, 구체적인 이 인물의 실상을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캐리 그란트의 인물은 속 터지게 하는 인간이고, 영화속에서도 말도 안되는 일을 벌이고 다닐 수 있으면서도, 은근히 입체적인 인간인 듯하게 보이며 또 더욱 내막에 대한 호기심이 들게 합니다.

영화 중에 나오는 휘파람 소리 장면 같은 것은 이런 요소들을 재미있게 활용해 짚고 넘어가는 장면입니다. 조용한 가운데 캐리 그란트가 옛 멜로디의 휘파람 소리만 들려오고, 화면은 조운 폰테인의 표정을 비춥니다. 조용한 배경과 휘파람 소리, 경쾌한 멜로디와 어두운 표정이 함께 등장하므로, 조운 폰테인이 느끼는 좌절섞인 의혹과 캐리 그란트의 알수없는 뻔뻔한 여유는 대비됩니다. 그리고 다음 장면은 휘파람을 불던 캐리 그란트가 전축을 고치는 장면과 더불어 오케스트라 배경음악이 나오게 하므로 음악, 화면의 자연스럽게 이어진 전환과 함께 감정도 확 터져나오게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연출은 평범하지만 각본의 교묘함을 맛볼 수 있는 전보 보여주기 장면 역시 가장 재미있는 장면 중 하나입니다.


(영화에 절벽의 도로가 나온다, 그렇다면.....)

두 인물의 좋은 연기와 흥미를 끄는 구도는 건재하지만, 사실 이야기 전개는 문제가 있는 부분도 꽤됩니다. 대표적으로 조운 폰테인의 인물이 사랑에 빠지는 부분의 묘사는 여러모로 터무니 없습니다. 캐리 그란트의 인물은 조이의 "How are you doing?" 정도의 설득력도 없게 묘사된 이빨도 안들어갈 법한 방식으로 수작을 거는데, 그나마 이것을 받아들이는 상대방의 전후 묘사도 못지 않게 설득력 없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말도 안되는 저주 같은 우연으로 조운 폰테인의 인물에게 약간의 감정을 자극할만한 요소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어림없는 것은 마찬가지 입니다.

그런 와중에도 "빈 기질" 왈츠로 이어지는 장면은 잘 흘러갑니다. 인물의 전형적인 모습들이 음악과 들어 맞게 펼쳐지는데다가, 짧은 왈츠 자체도 전문 춤꾼이 아닌 사람이 그냥 성실한 아가씨를 꼬드기며 호기를 부리기에 더할 수 없이 그럴 듯하기도 합니다. 앞서 언급한 처음 열차 장면과 함께 이 장면은 짧지만 배우들의 특기와 인물의 성격이 조화를 이루어 쉽게 내용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그런 몇몇 좋은 장면들 파편 때문에 전체 조운 폰테인의 사랑 빠지기 내용 전체가 무의미해지지는 않겠습니다만, 그래도 이것들이 잘 이어지지도 않고, 조운 폰테인의 인물이 납득할 수 없을 정도로 갑자기 변하는 것도 금방 와닿지 않습니다. 차라리, 그냥 이부분을 생략하고, "조운 폰테인은 자기와 성격이 많이 다른 듯한 캐리 그란트를 사랑하고 있다"는 설정 자체를 애초에 전제로 두고 출발하는 것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 입니다.

결말을 비롯한 다른 부분도 군데군데 그런 부분들이 많습니다. 조운 폰테인의 활약으로, 별별 일을 다 겪으면서도 그래도 사랑의 마음에서 벗어날 수 없는 괴로워하는 마음은 간신히 그럴 수도 있는 생각으로 전달 됩니다. 심지어 가끔은 감정이입 비슷하게 될 때도 있습니다. 사랑의 손아귀에 걸려들면, 고와도 내사랑 미워도 내사랑으로 정신 차리기 어려운 것이 "Smoke Gets In Your Eyes"라는 생각까지 듭니다.

그렇지만, 결말을 비롯한 가장 주요한 갈등 장면과 그 해소 장면을 별다른 영상, 음향, 사건의 충격 없이, 대사 몇마디로 그냥 "그건 사실 이랬던 거야" "어머나, 정말로? 그렇다면 좋아. 하하호호"라고 가볍게 넘어가는 것들은 성의 없어 보입니다. 그에 비해 "오명"에서 멋지게 재활용 될, 누워 있는 사람에게 마실 것 갖다 주기 장면 같은 것은 간단하고 일상적인 일에 의심을 더해 무서운 느낌을 주는 재미가 살아 있긴 합니다. 그렇습니다만, 반대로 이런 것들은 전체 이야기 전개에 별다른 전환점이나 결정타인 부분으로 활용되고 있지도 않습니다.


(여인을 바라보는 바람둥이 남자의 눈)

흥미로운 인물의 표현과 그런 인물에 대한 다른 인물의 감정 전달로, 이 영화는 "속 썩이는 '장안 유협 경박자를 꿈 같이 만나'" 벌어지는 이야기를 끝까지 부드러운 상류층의 이야기 속에서 담고 있습니다. 배경음악 "빈 기질"은 여러 모로 변주되어 근대 혁명 직전 생각 없는 귀족들의 생활을 떠올리게 하기도 하면서 더욱 분위기를 돋굽니다. 캐리 그란트는 조운 폰테인을 "원숭이 얼굴"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데, 그 괴상한 표현이 무슨 좋은 연애 말솜씨라도 되는냥 들리는 듯하게 분위기를 잡는 것은 전적으로 두 사람 연기의 공입니다.

그런만큼, "의혹"과 같은 내용을 담아 결말은 서투른 면이 있습니다. 꼭 악몽 같은 배드 엔딩으로 결말을 낼 필요는 없다하더라도, 좀 더 강하게 여운을 담아서, 앞으로 두 사람의 관계가 심히 궁금해지고 염려되는 연출 정도는 하는 편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지금의 결말도 순수한 헤피엔딩이라고 하기에는 누구나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이야기할만한 "의혹"이 생깁니다만.


그 밖에...

캐리 그란트의 인물 전직에 대해서 "뭐, 아무나 하고 다니는 해외특파원 같은 거 한적 있다고 설치더니"라며 비아냥 거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해외특파원"은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이 "의혹" 한 해 전에 만든 영화d이며, 이 영화의 남자 주인공은 해외특파원으로 여러모로 캐리 그란트가 자주 연기했던 인물에 가깝습니다.

공교롭게도 "의혹"이라는 영화의 제목은, CINE KOREA의 한국 발매 DVD에는 "서스피션"으로 되어 있습니다. 영화 웹사이트에 따라서는 이 영화 제목을 "써스피션"이라고 표기하기도 하며, 제목의 철자법 때문인지 "서스픽션"이나 "써스픽션"으로 표기된 사이트도 종종 있어서 어느 것을 기준으로 해야할지 의심스럽습니다.

한국 발매 DVD에는 색깔 조작 컬러판이 수록되어 있습니다만, 원래 흑백 영화로 촬영 되었습니다. 색깔 조작의 완성도가 그다지 높은 편은 아닙니다.


핑백

  • 피쉬 테마스토리 » Blog Archive » 보상받지 못한 사랑의 선택 [색, 계] 2007-11-14 09:09:39 #

    ... 숨어지낸다. 은둔자가 된 왕치아즈는 어설픈 스파이 노릇에 몸도 마음도 지친 상태다. 유일한 낙은 혼자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일. 일본어 수업을 마치고 알프레드 히치콕의 (1941)를 보는데 뉴스릴이 영화 감상을 방해한다. 극장을 빠져 나오는데 그녀의 뒤를 광위민이 쫓는다. 이번에 정식 저항군이 된 상태다. 또다시 이 대장을 유혹 ... more

덧글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