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티없이 맑았던 마음의 영원한 햇살 (이터널 선샤인)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영화

"이터널 선샤인"은 지루한 일상 속에서 무력함을 느끼고 있는 주인공이, 자유분방한 사람을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지는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차분하게 펼쳐지는 느린 화면과 현실적인 느낌을 주는 푸른 빛 감도는 색감, 조용하지만 감성 풍부한 음악에 힘입어서 사실적으로 사람의 심리를 그리는 듯 보입니다. 여기에 극적이기라기보다는 일상적인, 시덥잖은 이야기를 주고 받는 두 주인공 배우, 짐 캐리와 케이트 윈슬렛은 자기가 맡은 역을 설득력있게 잘 표현하고 있어서 이런 사실적인 느낌은 꽤 잘 살아 납니다.


(짐 캐리)

"이터널 선샤인"은 이야기가 본격화 되면서, 여기에 "환상특급"류의 공상적인 아이디어 하나를 첨가합니다. 그것은 뇌의학적인 방법을 이용해서 기억을 조작하는 시술에 얽힌 내용입니다. 다른 영화와 비교해보자면, 기억 조작 서비스를 화려한 블록 버스터 액션 신화와 결합한 것이 "토탈리콜"이고, 기억 조작 서비스를 "봄날은 간다" 분위기의 사실적으로 가라 앉은 연애담과 결합한 이야기가 "이터널 선샤인"인 셈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정적인 화면 전개로 나아갔던 "봄날은 간다"에 비하면, "이터널 선샤인"은 왕가위 감독이 한국에서 유행하던 시기를 떠올리게 하는 다양한 역동적인 화면구성 방법을 사용합니다. 꿈꾸는 듯한 화면 전환과 자유롭게 흔들리며 따라다니는 카메라에, 말없는 사람의 표정 클로즈과 여러가지 새어져 나오는 빛을 잡아내는 것 등등이 다양하게 펼쳐집니다.

"이터널 선샤인"의 멋진 점은, 그냥 화면 만들며 폼잡기에 도취되기 쉬운 이런 "중경삼림"식 화면 구성이 실제로 기억을 조작한다는 "몽환" 그 자체의 이야기와 결합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냥 화면만 술취한 듯 비틀비틀하게 하면 "뮤직비디오식 감각적 연출"이 된다는 답답한 예술 감각을 초월해서, 대사와 화면 구성이 이 불안정하고도 나른한 느낌을 잘 따라가면서도, 그것이 분명한 뜻과 선명한 이야기를 가지는 실체로 자리를 잡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방식은 "존 말코비치 되기" 같은 영화와도 비슷해 보입니다.

다소 따분하거나 심심할 수 있는 평범한 연애 이야기를 그대로 보여준다는 소재를 극복하기 위해서 좀 황당할 수 있는 환상적인 아이디어 하나를 살짝 섞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면서, 양쪽 모두에 적절히 어울리는 연출방식 덕분에 두 요소가 과하지 않게 잘 결합되었고, 그 결과로 영화에 독특한 맛이 살아나고 있는 것입니다.


(케이트 윈슬렛)

이런 의미에서 조연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좀 무책임한 태도의 젊은 직장인들 묘사도 분위기를 가꾸어 나가는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대충 일하면서 쓸데없이 멋있게 보이려고 하는데만 신경쓰고, 그러다가 일망치면 상사에게 욕안들어먹으려고 허둥지둥 하는 그 모습들은, 답답한 남자 주인공의 일상과, 여자 주인공이 상징하는 자유롭지만 불안한 젊은 심리를 투영하고 있습니다.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이 양 극단을 보여주고 있다면, 조연들은 그 양면이 적당히 섞인 평범한 모습의 표본이 되기에 무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터널 선샤인"의 이야기는 가면 갈 수록 많은 기억 조작 SF물의 정석을 따라갑니다. 하지만,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극적인 결투나 종말론적인 운명을 놓고 벌이는 모험으로 비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가벼운 촌극이나, 짤막한 단편 소설에 어울릴 만한 정도의 이야기로 기억속, 꿈속을 배회하는 주인공의 모험이 펼쳐집니다. 괜히 심각하게 이야기를 키우지 않고 있기에, 이 이야기는 그런데로 설득력을 가지는 추격전이 됩니다. 단편 특유의 복선이나 재치도 잘 살아 있습니다.

추격전의 요소가 작은 대신, 이 영화는 기억속에 남아 있는 사랑 이야기를 보다 중심으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별 대단할 것도 없는 연인들의 애칭에 얽힌 추억부터 50년대 정식분석학스러운 어린시절 기억이 사랑의 취향에 미치는 영향까지, 많은 현실적인 요소들을 과장이나 딱히 극적으로 강조한 갈등관계 없이 소박하게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영화가 지루해지지 않도록, 기억 조작에 얽힌 긴장감 있는 이야기의 전개에 따라 그런 이야기들을 잘게잘게 잘라서 교대로 보여주는 것도 재미있는 아이디어 입니다.


(기억 조작 병원)

짐 캐리는 코메디언으로서 보여주는 공상적으로 과장된 표정과 소리지르기에다가, 은근히 보편적인 극속의 인간다운 연기를 섞어치는 수법을 사용합니다. 짐 캐리는 "라이어 라이어"에서 시작하여 "트루먼 쇼"에서 이런 수법을 한 번 과시한 적이 있습니다. 짐 캐리는 "이터널 선샤인"에서 특히 과장된 연기의 비중을 꼭 필요할 때 사용하는 최소한도로 줄이고, 평범하고 조용한 감정을 살리는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짐 캐리의 연기는, 가끔 초현실적인 화면을 보여주면서, 전체적으로 잔잔한 연애의 진솔한 감상을 읊는 영화의 어조에 충분히 어울립니다.

케이트 윈슬렛의 여자 주인공 연기는 탁월합니다. 여자 주인공은 백수에 경제적으로 변변찮은 자신의 성취에 열등감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강하게 드러나는 모습은 굉장히 자유분방하고 상식을 초월하는 개성을 가지려고 하는 모습입니다. 문제는 그러한 그녀의 개성적인 표현에는 자신의 열등감을 숨기고, 그런 개성으로 자신이 독특한 존재임을 어떻게든 느끼고 싶은 10대 청소년 같은 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합적인 인물을, 보면 바로 느껴지도록 드러내서 표현한 것은 케이트 윈슬렛의 공입니다.

그러면서, 연애 이야기의 한 축이 되도록, 이런 인물 특유의 자유분방한 개성 때문에 나타나는 어떤 명랑한 면도 잘 살리고 있습니다. 그런 여자 주인공의 성격이, 급박하게 연결되는 인연이나, 만나고 헤어지는 소동의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여러가지 면이 섞인 인물을 연기하다보면, 자칫 엉뚱하게 말도 안되는 아무 현실감 없는 인물이 되는 함정에 걸려들기 쉽습니다. 그런데, 케이트 윈슬렛은 한계를 넘어서서 실제적인 인물의 성격을 아주 잘 담아냅니다. 이런 점은 그 함정에 정통으로 걸려든 바 있는 영화 출연 초기의 심은하나, 연출의 힘이 받쳐줘야만 헤어나올 수 있었던 옛 고소영에 대조됩니다.


(짐 캐리와 케이트 윈슬렛)

진지하고 현실적인 연인의 마음들을 전하면서 호기심을 끄는 환상적인 소재를 살짝 결합하고, 거기에 어울리는 화면 표현을 살린 것은 발빠른 재미와 깊은 감상을 모두 살리고 있습니다. 결말 부분에서 반전의 의무감과 헐리우드 영화식 대단원으로 밀어붙이는 덕택에, 여운을 남기는 편이 더 어울릴 전체 이야기 전개와 좀 멀어져서 아쉬운 면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만, 차분한 표현의 공감만으로 애절한 느낌마저 자아내는 이야기와, 환상물의 소재를 다만 이야기 구성상의 흥미를 유지하면서 절제하고 있는 방식은 다분히 감동적입니다. 기차의 훌쩍 떠나는 느낌이나, 겨울 바다의 외로운 심상을 모범적으로 사용하는 기본기도 충실합니다.


그 밖에...

독특해 보이는 기억 조작 용 컴퓨터는, 사실 십여년전에 나온 구형 랩톱 컴퓨터들입니다. 실제로 IBM에서 예전에 만들던 구형 컴퓨터들은 요즘의 iPod식 디자인에 비하면, 언뜻 그 모양이 더 거창하고 신기한 미래 기계처럼 보이는 면이 많습니다. 아무래도 디자인은 실생활에 익숙하게 변해가는 반면에, 특이한 모습일수록 영화의 미래 장면으로는 더 보여주기 좋아서 그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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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나무피리 2006/04/10 11:17 # 답글

    트랙백해주셔서 글 읽으러 왔어요.
    정말 좋은 감상글에 제 서툰 글을 엮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도 트랙백할게요.. 이터널 선샤인은 DVD를 사서 갖고 있는데, 가끔 꺼내보면 또 여러가지 생각이 들곤 해요..
  • ArborDay 2006/04/10 11:29 # 답글

    영화가 너무 좋아서 보자마자 코드2번 영국판을 주문해서 사버렸다지요. 대본도 있어 좋긴 좋은데 코드3이 그리 잘 나올줄이야. ㅠㅠ
  • 게렉터 2006/04/10 21:51 # 답글

    나무피리/ 저도 나무피리님 글 잘 읽었습니다.

    ArborDay/ 어떤 판을 사셨길래 무려 대본까지 입수하셨습니까. 지문이나 등장인물 소개까지 있는 진짜 영화제작에 쓰인 버전의 대본인지도 궁금합니다.
  • 2006/04/11 11:30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06/04/11 11:30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새침떼기 2006/04/11 21:03 # 답글

    트랙백 보고 놀러왔습니다.
    (본지 얼마나 됐다고;;)벌써 기억이 가물가물한 영화인데 덕분에 다시 떠올려볼 수 있었어요.
    둘러보니 재미난 글 많네요? 잘 봤습니다.:-)
  • 게렉터 2006/04/12 12:05 # 답글

    저 역시 새침떼기님 블로그에서도 많은 글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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