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록수 영화

"상록수"는 신상옥 감독이 만든 영화들 중에 가장 많이 퍼진 영화일 겁니다. "상록수"는 작정하고 교훈적이고 계몽적인 내용 덕택에 국경일에 여러모로 자주 상영되거나 방영되었습니다. 스승의 날이나, 한글날, 어린이날에 틀기에 만만한 영화였음은 물론이요, 배경이 일제강점기였고, 대표적인 독립운동 작가 였던 심훈의 유명한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는 점 때문에, 3.1절, 광복절에 종종 상영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상록수"라는 제목 때문에 식목일에도 대강 때울만 했습니다.

게다가 "상록수"는 농촌 재개발을 부르짖는 내용때문에 옛날 새마을 운동의 선전 영화로도 적극적으로 활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정부 주도로 이곳저곳 소형 영사장치로 상영되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여러 사람의 기억에 남아서, 국제적으로도 가끔 알려졌고, 칸느 영화제에서는 한국 영화로는 최초로 감독 회고전 작품으로 상영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상록수"의 줄거리는 농촌 계몽 자원 봉사 학생들의 파티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파티에서 단연 이목을 사로잡는 남녀 두 학생은 서로 끌립니다. 두 사람은 서로 교류하고 애정을 쌓고, 여자 주인공은 시골에서 작은 학교를 열어 운영합니다. 당연히 현실의 여러 역경은 뭔가 해보려는 젊은 그녀에게 녹록치 않습니다.


(최은희와 신영균, 신성일은 오른쪽의 조연)

많이 퍼진 영화이지만, "상록수"는 대표적인 신상옥 감독의 영화라고 하기에는 부실한데가 있습니다. 신상옥 감독이 만든 영화들 중에 21세기 관객들이 보기에 흥미진진한 것은, 호기심 생기는 소재를 옛날 영화의 원색적인 거친 화면으로 보여주는 "내시"나 "이조여인잔혹사" 같은 영화일겁니다. 영화를 처음 만들던 시절의 도전과 예스러운 느낌을 보고 싶다면, "지옥화" 같은 초기 걸작이 있습니다. 옛날 영화의 안타깝기까지한 누추한 특수효과와 부족한 기술을 신기하게 구경하려면, "천년호" 류의 영화를 보면 될 것입니다.

"상록수"라는 영화가 가진 재미와 힘은 대부분 심훈의 소설판 "상록수"에서 빚어지는 것입니다. 생생하게 열정적인 인물들이 향토적인 배경을 넘나들며 엮어내는 우직한 원작의 이야기의 생명력이 있는 것입니다. 따지고 들자면, 영화판 "상록수"는 사실, 전체적으로는 오히려 "상록수" 소설의 진가를 겨우겨우 따라가고만 있는 부족한 면도 있습니다. 물론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라는 어구를 떠올리게 하는 그럴듯한 마지막 장면처럼 더 나아진 면도 없지는 않습니다만, 아쉬운 점은 더 쉽게 눈에 뜨입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청각적 심상을 활용하면서 마을 전체를 다시 한 번 훑는 이 마지막 장면은, 종이라는 소재를 좀 더 일찍 등장시키고, 주요한 시점마다 자주 땡땡땡 때려왔다면 마지막 장면이 더 멋져 보였을 겁니다.

넘치는 시청각적인 심상으로 분위기를 한껏 돋구는 첫 장면은 대표적인 예입니다. 불빛이 가득한 도시의 밤, 그 한켠에 왁자하게 학생들이 모인 강당이 있습니다. 강당을 밝히는 이런저런 조명사이에, 소박하지만 즐거운 파티가 있습니다. 이 모임의 계몽적인 성격때문에 파티는 부드럽게 강연회 같은 사람들의 연설로 연결됩니다. 그러면서도, 학생들의 현실감있는 유머 감각이 군데군데 서려 있고, 기타로 하바나 내지는 카리브해 풍의 멜로디를 연주하며 흥겹게 만드는 재주꾼 학생도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행진곡의 왕, J.F.바그너의 즐거운 "Unter dem Doppeladler(Under the Double Eagle, 쌍두취행진곡)"이 울려퍼집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이 장면이 과거 회상 장면으로 처리되어 있어서, 소설 도입부에서 화려한 인상으로 호기심을 환기하는 기능을 놓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널찍한 강당이 조그만 회의실로 바뀌고, 생기넘치는 학생들과 왁자한 음악의 분위기가 건조한 보고토론회로 바뀌어 버려서 가라앉아 버리고 맙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인연이 만들어지면서도 주인공들의 성격이 단적으로 제시되는 소설의 흥미진진한 요소가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맙니다. 특히, 학생답게 이런저런 경험담을 이야기하면서 은근하고 자연스럽게 그 의지와 열정을 드러내는 소설의 남자주인공 묘사에 비해, 영화에서는 아래서 위로 올려잡은 무시무시한 화면에 시장 선거쯤 되는 거창한 웅변조로 되어 있어서 인물의 성격마저 어색하게 어긋나고 맙니다.

많은 사람들이 "상록수"에서 가장 재미난 장면으로 꼽는 "임시학교 정원초과" 장면도 영화에서는 약하게 되어 있습니다. 소설에서는, 약간 거짓말을 섞은 이유로 위협한 경찰 때문에, 여자주인공은 어린이들에게 약간 거짓말을 섞어서 눈물겨운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저마다 "개가 숙제를 먹었어요" "숙제 했는데 안가져왔어요" 같은 류의 긴치 않은 핑계를 대는 약간의 거짓말을 하며 버티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서로가 서로에게 거짓말을 하는 그 꼬인 모습이 강한 동정심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나서, 마음을 추스리고 책을 읽기 시작하는데, 책의 구절 내용또한 이 상황에 거짓인 역설적인 내용입니다. 그리고 나서 서서히 진행되지만 장엄하게 이어지는 멋진 사건의 결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강한 역설의 묘를 주는 아이들의 대사를 삭제해서 재미를 줄이고 있습니다. 게다가 천천히 자연스럽게 진행되어 역동적으로 펼쳐져야할 아이들의 군중 묘사와 결말 장면이, 무슨 갑자기 나타나는 공포영화나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새"의 장면처럼 되어 있어서 자연스러운 감동이 아니라 급작스런 전환으로 그쳐버리고 맙니다.

배우들의 연기는 후시녹음 연기의 예스러운 어색함에서 떠돌고 있긴 합니다만, 그래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할만합니다. 하지만, 결코 잘 들어맞는 인상으로 배역을 맡겼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우선, 가장 중요한 주인공을 맡은 최은희는 강해 보이는 눈썹과 턱선에, 짙은 화장이 잘 어울리는 표정 때문에 도회적인 직업인이나 공격적인 역할에 어울립니다. 때문에 "상록수"의 자애로운 시골 선생님으로는 그렇게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말아쥔 종이를 들고 외치는 소설상의 첫장면처럼 연기력으로 겨우겨우 이런 인상을 극복하고 있어서 제 역할을 해내는 것인 셈이라서, 외려 윤정희 같은 배우가 연기했으면 더 좋을 역할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남자주인공은 좀 더 심각합니다. 신영균은 열심히 연기하고 있긴 하지만, 꽤 나이가 들어보이는 데다가, 듬직하고 뚝심 강하며 억울함에 울분을 표출할 두터운 사람처럼 보입니다. "상록수"의 이야기에 어울리는 젊은이 다운 순수한 열정이 넘치는 사람, 그러면서 현실적인 좌절도 겪고, 순박하면서도 이지적인 데도 있는 그 모습과 신영균은 거리가 있습니다. "상록수"의 박동혁 보다는 오히려 임꺽정에 어울리는 신영균은, 영화에 잘 삽입된 불끄기 장면 같은데서는 도움되는 면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정작 이 장면에서는, 솔로몬의 재판에서 아기를 더 사랑하기에 아기를 포기하는 생모와 같은 처지에 놓인 그 반어적인 감정을 절절히 보여주지 않고 놓쳐버립니다. 표정이나 어쩔줄 몰라하는 목소리를 보여줘서 감정을 끌어낼 기회인데, 그냥 먼데서 불나는 것을 끄는 동작을 보여줄 뿐입니다.

조연들은 그에 비해 매우 잘 자리잡고 연기하고 있습니다만, 그 비중조절이 좀 아쉬운데가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신성일은 "그 신성일"인지 금방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조연에 푹 파묻혀 있습니다. 신성일은 낙천적이고 순박하고 성실한 농촌의 똑똑한 총각을 잘 연기하고 있고, 걸음걸이에서 손동작까지 인물에 적절히 들어 맞습니다.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것을 스스로 깨우치는 작은 장면으로 농촌에 숨겨진 가능성을 상징하면서 여자 주인공의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주는 모습도 좋은 인물을 표현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에 비해 극적인 역할이 너무나 부족하고, 전체적인 등장 비중도 매우 적습니다. 여러 아낙네들이나 주민1, 주민2의 대화로 상황을 알릴 장면에 조금만 더 신성일의 인물을 참여시켜도 좋았을 것입니다.

반면에 허장강 같은 인물은, 허장강이 연기를 잘하고 있긴 하지만, 갑자기 시청각적인 표현을 중요시하는 이 영화에서 기나긴 일장 연설을 하고 있어서 도무지 어울리지를 않습니다. 전체 이야기로 보면 거의 아무런 비중이 없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장시간 동안 땅바닥에 주저 앉아 울부짖고, 기둥 부여 잡고 눈물흘리기 등등의 옛날 영화 특유의 "우는 모습 과장 쇼"를 펼치는데, 이야기의 흐름을 끊어 먹을 뿐만아니라, 갑자기 무게가 엉뚱한 곳에 실리는 편집상의 어색함도 적지 않습니다.

그밖에도, 극동 아시아의 시골이 청교도 개통의 개신교와 결합하는 독특한 한국의 문화적 양상도 잘 살려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개신교 문화의 비중은 결코 적지 않은데, 멋지게 살려내기 보다는, 영화속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찬송가나, 사실감이 부족한 동떨어진 독백 기도 장면으로 나타날 뿐입니다. 이런점은,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가 전체적으로 시대의 묘미를 살리려는 고증이 전무하다는 점과 함께 꽤나 아쉽습니다. 긍정적인 정신으로 가득한 이야기의 배경음악이 따분하게 남용된 현대음악조의 관현악으로 넘쳐나는 점이나, "상록수"라는 여러모로 써먹을 수 있는 심상을 그냥 영화시작과 끝부분에 상록수 나무 한 번씩 보여주고 마는 점도 아깝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빗겨나가지 않는 똑바로 나가는 계몽 영화는 참 나오기 어려운 것입니다. 실제로 전쟁의 여파와 정신나간 부정부패, 흉년에 가난이 휘몰아치던 시기에 만들어진 이 영화는 그래서 이후로는 결코 비슷한 처지로 시도될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영화가 가진 진지한 태도는 바로 그러한 영화가 제작되던 사회 상황에 걸쳐진 면이 있습니다. 원작자인 심훈 스스로가, 1930년대 영화계에 직접 참여하면서 많은 활동과 작업을 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처럼 박진감 넘치는 사건과 시각적인 심상, 청각적인 효과가 가득한 소설은 언젠가 적당한 시기에 한 번쯤은 영화화 될 법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상록수"라는 제목은, 젊은이들의 풋풋한 순수함과 열정을 나타냅니다. 동시에 변치 않는 강한 의욕을 나타내기도 하고, 여러 역경을 헤쳐나가는 불굴의 의지를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녹음이 가득한 시골의 정서와 여름의 싱그럽고 왕성한 생명력, 추억과 모험을 느끼게 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상록수"라는 영화는 1961년 불과 1년 동안에, 자신의 대표작이자 흥행작인 "연산군" "성춘향"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상록수"를 줄줄이 만드는 기염을 토한, 신상옥 감독의 젊은 시절을 상징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 신상옥 감독 고별 특선으로 올리는 글입니다. 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 밖에...

최은희는 이 영화로 제1회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습니다.

이 영화에서 조연으로 출연하는 신성일은 신상옥 감독과 함께 본격적인 연기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신상옥의 아내로 항상 여자주인공을 도맡았던 최은희와 신성일이 연배차이가 꽤 나는 바람에 신성일은 결코 신상옥으로부터 남자 주인공을 맡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성일이 신상옥으로부터 벗어나면서부터 주연을 맡고 초대형 영화 배우로 성장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당시 막 5.16을 일으키던 무렵의 박정희 장군은 "상록수"를 보고 감동해 울었다고 합니다. 새마을 운동을 하면서 "상록수"를 여러번 돌려본 박정희는 이를 인연으로 신상옥 감독과 각별해 졌고, 신상옥 감독은 덕분에 안양촬영소를 얻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염군사와 카프의 회원이었던 원작자 심훈이 알았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꽤 궁금합니다.

공교롭게도, 이번 영화는 2002년판 하필 또 "환상특급 Twilight Zone"의 첫번째 에피소드와 제목(Evergreen)이 같습니다. 도시에서 벗아난 사람들이 한적한 마을에서 벌이는 이야기라는 점을 빼면 전혀 상관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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