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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독파와 그 해석, 토론을 교양의 거의 모든 것으로 여겼던 우리나라 중세시대에, 당연히 가장 유명한 중국사 전쟁담인 "삼국지" 이야기는 널리 알려졌습니다. 한 시대의 유행을 만들었던 조조의 시는 문예가들 사이에 즐겨 읽혔고, 제갈량이 쓴 출사표 같은 글에 감동하는 관료 지망생들은 한 둘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조선 후기로 갈 수록, "삼국지연의"의 내용이 너무 폭력적이고 자극적이며, 중독성이 강하다고 해서 삼국지를 읽는 것은 좋지 못한 취미라고 하는 의견이 돌게 되기도 합니다만, 이것은 오히려 그만큼 삼국지연의가 인기를 끌었다는 증거이기도 할 것입니다.
(박희진이 연기했던 고우영 삼국지의 손부인) 공부에 방해가 된다고 삼국지를 경계했던 중세시대의 전통을 생각해보면, 최근 논술 열풍과 어울린 "이문열 삼국지"의 유행은 확실히 좀 꼬인데가 있어 보입니다. 그렇긴 합니다만, 흥행과 삼국지 유행에 있어서 이문열 삼국지의 위치는 무시하기 어렵습니다. 원판의 많은 이야기를 최대한 다루려고 노력한 점이나, 예스러운 문체를 살리면서도 현대 작가의 생각을 잔뜩 덧붙인 점 같은 것들은 최근의 한 유행이 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컴퓨터 게임의 유행과 함께 뿌리깊게 자리잡은 KOEI의 소프트웨어들도 최근의 삼국지 유행에서 작은 자리를 점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문열 삼국지를 중심으로하는, 이러한 우리나라 삼국지 분위기의 뿌리를 찾아 본다면 사실 고우영 삼국지라는 만화를 가장 열심히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고우영 삼국지는 고우영 최고의 인기작이자, 우리나라 독자와 작가들이 삼국지를 이해하는데 감히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만화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뿐만 아니라, 고우영은 삼국지를 비롯한 일련의 만화를 전후하여, 만화는 아이들만 읽는 유치한 것이 아니라, 독특한 매력을 가진 가능성이 많은 매체라는 사실을 입증하기도 했습니다. 이런면에서 보면, 고우영과 그의 대표작들은 단지 재미있는 만화 작품일 뿐만 아니라, 한국 대중 예술사에서 중대한 전환점을 기록하는 한 사건이 될만도 합니다. (박희진이 연기했던 고우영 삼국지의 오금) 이 고우영 삼국지를 따지고 들어보면, 일본 요시가와 에이지의 소설 삼국지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조조의 영웅적인 면이 주요하게 드러난 것이나, 도입부의 차 구하기 사건과 같이 인물들에게 생동감을 주기 위한 사건 구성 방법, 주요 장면의 명대사 같은 것들이 요시가와 에이지의 삼국지와 일치하는 면이 많습니다. 그러나, 고우영은 자신의 삼국지를 꾸미면서 자신의 그림과 글을 통해 이러한 요소들을 또다른 각도로 바꾸어 받아 들였습니다. 대표적으로, 고우영 삼국지에서는 유비는 무능하지만 응큼한데가 있는 능구렁이 같은 사람이고, 조조는 냉정한 사람이지만 뛰어난 두뇌를 갖고 있고 지도력도 뛰어나다는 시각을 숨기지 않습니다. 그런 시각을 처음부터 끝까지 많이 도입하고 있으면서도, 고우영은 인의있는 유비 - 간사한 조조라는 전통적인 삼국지 대결구도를 결코 저버리지 않습니다. 그림체와 언어 표현을 이용한 다채로운 묘사를 통해, 다양한 면을 유지하면서도 결코 예부터 내려오는 고정 관념 속의 고전 삼국지를 저버리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고우영 삼국지의 유머 감각 또한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시대를 마구 왔다갔다 하는 역-시대착오적인 농담이나 난무하는 각종 매체의 패러디들은 이후 나온 수많은 삼국지 유머들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고우영 삼국지에서 갑자기 트로트 유행가가 울려퍼지는 모습과, 요즘 인터넷에 게제되는 "삼국전투기"에서 동탁이 적을 공격했다고 공을 부풀리는 것을 표현한 명장면은 분명히 상통하는 데가 있습니다. 특히 고우영 삼국지가 멋진 부분은 이야기 전체에 감돌고 있는 풍류적인 허무주의에 이런 유머가 묘하게 어울리는 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고우영 삼국지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역사는 순환되고 인간은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있고, 인생 살면서 부와 권력을 탐하며 난리를 치지만 죽고나면 이 긴 세월에 무슨 흔적이 남느냐 하는 생각이 이모저모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바로 그런 생각이 시대를 왔다갔다하며 패러디와 뒤틀린 비유를 빚어내는 유머에 의해 자연스럽게 더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거기에, 갑자기 한도 끝도 없이 곁가지 이야기로 빠져버리기도 하는 전개방식이나, 작가가 직접 등장해 서슴치 않고 만화의 유머에 개입하는 장면도 많습니다. 고우영 삼국지에서는 뜬금없이 병사1과 병사3의 슬픈 사연이나, 백만대군이 쏜 화살 중 65만 8134번째 화살이 어디에 어떻게 박혀있다가 수백년 후에 유적으로 발견되고 또 수백년 후에 어떤 용도로 사용되는가 하는 어림없는 이야기들이 종종 끼어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들 역시 고우영 삼국지의 독특한 재미거리가 되어, 고우영 삼국지의 묘미를 더욱 살아나게 했습니다. 물론, 기존의 만화 삼국지와는 확연히 다르게, 기록에 의거한 유비를 그려냈던 유머넘치는 그림체도 개성이 있었습니다. 고우영 삼국지의 영향은 워낙커서, 관우와 제갈량의 미묘한 라이벌 의식이라든가, 혹은 유선이 머리를 다쳐 무능한 사람이 되었다는 농담 같은 이야기가 굉장히 널리 퍼질 정도 였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삼국지에 대해 평을 달거나 극화할 때 이런 사실에 대해 한 두마디 정도는 의식하며 이야기하게 되기도 했습니다. (박희진이 연기했던 고우영 삼국지의 조숭 부인) 이 고우영 삼국지는 2000년에서 2001년 사이에 MBC에서 라디오 드라마로 만들어지게 됩니다. 당시 MBC FM에서는 MBC 만화열전이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열혈강호" "레드문" 같은 만화를 라디오극으로 들려주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이 시리즈는 대강 열편에서 스무편 정도로 하나의 만화를 들려주곤 했는데, "고우영 삼국지"를 들려주게 되자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고, 결국 무려 백사십회를 돌파하는 대작으로 완성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몇십년전쯤에 유행이 사라진듯했던 라디오 드라마라는 것이 마치 고우영의 유머처럼 시대착오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습니다. 곧 라디오를 자주 듣는 택시 기사나 수험생과 같은 사람들사이에서는 거의 하나의 사회적 현상처럼 자리 잡으며 열혈 팬층을 탄생시키기도 했습니다. 우선 "배철수의 고우영 삼국지"는 고우영 삼국지가 갖고 있는 유머의 매력을 매우 잘 살리고 있습니다. 고우영 삼국지가 갖고 있는 근엄하고 영웅적인 인물들이 터무니 없는 패러디를 하는 유머를 라디오판 고우영 삼국지는 처음부터 잘 살리고 있었습니다. 일단 첫 시작부터가 거의 "격동 30년"을 연상시킬만한 서사시적인 웅장한 음악으로 시작하는데, 거기에 실없는 농담의 대가인 배철수가 "고우영 삼국지"라고 제목을 읊조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우영 삼국지에서는 삽입곡으로 온갖 유행가와 팝송, 잡다한 연주곡들이 넘쳐나고, 반대로 가끔은 어마어마하게 심각한 곡조가 "유비가 장비랑 게임하다 실수해서 벌칙당하게 되었다" 같은 잡다한 상황에서 터져 나오며 과장의 웃음을 줍니다. 전체적으로 라디오 드라마는 고우영 삼국지 만화의 줄거리를 따라가면서, 고우영 삼국지의 좋은 유머들을 상당부분 재연하고 있습니다. 한번 빠지면 한도 끝도 없이 삼천포로 빠지거나, 가끔 극히 사소한 문제를 묘사하는데 반대로 터무니 없이 긴시간을 소모하는 고우영 삼국지의 미덕도 유지하고 있습니다. 유비의 모습을 최대한 기록대로 표현하려한 전통도 충실히 재현해서, 배철수의 고우영 삼국지는 방통의 대사를 정말로 전부 말더듬이로 표현한 드문 예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한편 만화의 패러디들이 시대에 발맞춰 업데이트 된 부분도 많이 있어서, 유행하는 코메디 영화나, 타 방송사의 드라마들까지 마음대로 왔다갔다하며 패러디 소재로 활용되고 있기도 합니다. 또, 작가가 갑자기 만화 자체에 등장해서 농담을 이끌어내는 장면들은 해설을 맡은 배철수를 개입시키는 것으로 대체하고 있는데 이것 역시 훌륭합니다. 조조의 부하들이 서로 시를 지으며 여흥을 즐기는 장면은 "배철수"라는 이름으로 삼행시를 지으며 배철수를 놀리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렇게 다같이 노는 장면에서는 조조나 유비 같은 우두머리가 갑자기 해설자 배철수도 한번 재주를 보여보라고 참여를 시키는 등의 파격도 거침없이 벌어집니다. (박희진이 연기했던 고우영 삼국지의 하태후와 동태후) 반대로 만화에서 과감하게 포기해 버린 부분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제갈량의 인물입니다. 만화에서는 제갈량이 희비극이 교차하는 입체적인 인물이요, 여러모로 존경받을 만한 멋진 영웅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만, 라디오에서는 제갈량을 투니버스판 "케로로 중사"의 해설을 맡은, 이인성 성우에게 맡기고는 수다스럽게 설쳐대는 방정맞은 잘난척쟁이로 바꿔 버렸습니다. 즉 라디오 드라마는 만화에서 유지하고 있는 진지함을 포기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유머와 개그로 일관해 버렸습니다. 이런점은 어찌보면, "삼국지에서 역사, 철학, 사회, 과학의 모든 면을 논하고 조망하겠다"는 이문열 삼국지 같은 소위 "평역 삼국지"에 대한 반발처럼 보일 정도 입니다. "삼국지 경영학 - CEO 유비" 같은 책과 통하는 내용을 배철수의 고우영 삼국지에서 찾아내기란 정말 힘들 것입니다. 가끔은 배철수의 고우영 삼국지 같은 그냥 모든 것을 초탈한 태도가 오히려 억지스럽지 않게 느껴져서 더 자연스럽고 편안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심각한 부분을 포기하고 유머를 더 넓히기 위해서, 배철수의 고우영 삼국지는 라디오 매체에 걸맞는 유머를 최대한 활용했습니다. 배철수가 라디오 쇼 진행에서 잘 사용하는 "여백의 미"를 활용하는 농담 구사법이 펼쳐지는가 하면, 서영춘 선생의 고전 코메디와 같은 전통적인 수법이나 성대 모사, 음악 장난 과 같은 전형적인 수법들 또한 총동원되고 있습니다. 제갈공명이 오나라 대신들 앞에서 지식을 과시하는 장면, 조조가 화용도에서 관우에게 비는 장면이나, 마초가 전쟁터에 나타날 때 사기를 돋구기 위해 자신의 주제곡이라며, Village People의 "Macho Man"을 트는 장면 등은 그중 백미입니다. 11명이 등장하여 왁자한 느낌을 살리면서 수백명에 달하는 인물들을 다채롭게 연기하는 성우진들도 칭찬받을만 합니다. 주요 역할을 맡은 정성화, 문천식 같은 코메디언들은 본시 발성이 좋은 사람들입니다. 게다가, 성우다운 라디오 연기를 잘 해내고 있으면서도, 코메디 감각과 다양한 즉흥 유머 실력을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즉흥 유머의 제왕, 이인성을 필두로 코메디에 능한 여러 성우들의 활약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모든 출연진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성우는 코메디언 박희진입니다. 박희진은 혼자서 극중 등장하는 모든 여성 배역을 다 소화하는 괴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박희진은 정말 다양한 인물을 목소리로 표현하는데, 어느 것 하나 어색하지 않습니다. 특히 박희진은 성대모사와 개인기를 갖가지로 펼치면서도 극중에서 발음이 선명하면서 목소리도 매우 깨끗합니다. 손부인이나 미부인 같은 인물을 정말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음은 물론이요, 주유의 울화와 흥분을 돋구는 장면에서는 폭발적인 매력을 뽐내기도 합니다. "안녕, 프란체스카"에서 선보여 흥행시킨 안성댁 말투의 원류 역시 배철수의 고우영 삼국지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박희진이 연기했던 고우영 삼국지의 초선) 배철수의 고우영 삼국지는 워낙에 많은 인기를 끈 덕택에 사실 독이 되기도 했습니다. 고우영 삼국지가 끝이 나자, 상대적으로 만화열전이라는 프로그램의 인기가 터무니없을 정도로 급격히 줄어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MBC 만화열전이라는 프로그램 자체가 흐지부지 되어버리며 폐지되는 반작용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배철수의 고우영 삼국지는 우리가 갖고 있는 독특한 옛 이야기를 어떻게 다시 써먹을 수 있는지 잘 보여준 모범이었습니다. 또, 한물간 심심한 장르가 세상에 어떤 식으로 다시 즐거움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한가지 답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밖에... 배철수는 처음에는 장비 배역을 맡게 되었는데, 해설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워낙에 인기를 끈 것이라서, 아직까지도 인터넷을 여기저기 뒤지다보면 녹음본 파일을 구할 수 있습니다. * 광고말씀 하나 덧붙입니다. 제가 웹진 거울 http://mirror.pe.kr 이라는 곳에 단편 소설을 조금씩 올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전에 MBC 드라마국으로부터 판권 제의를 받아서 그 중 한편인 "판소리 수궁가 중에서, 토끼의 아리아 '맥주의 마음'" 이라는 것이 MBC 베스트 극장의 단막극 에피소드로 TV드라마화 되게 되었습니다. 이번주 토요일 밤 11시 45분 방송인데, 대본을 받아 보니 원작과 분위기, 유머, 인물, 그리고 결말까지 대폭 바뀐 점이 있어서 사실 좀 이상하다 싶은 부분도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분께 꼭 보시라고 말씀드리지는 못하겠습니다만, 혹여 늦은 시간까지 잠못이루고 계신 분 있으시거든, 한 번 시간 보내기 삼아 봐주셨으면 합니다. - TV쇼 예고편은 여기에 있으며: http://www.imbc.com/broad/tv/drama/best05/preview/index.html - 원작은 여기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http://mirror.pe.kr/zboard/zboard.php?id=kwak 물론 방송 후 1주일 이내에 리뷰 게시물을 이 곳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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