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베스트 극장: 토끼의 아리아 영화

* 어찌 스포일러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MBC베스트극장 의 635회 에피소드로 방영된 "토끼의 아리아"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엉겁결에 달갑지 않은 연애에 말려든 듯한 주인공이 있고, 그 주인공이 거대 기업과 사회를 상대로한 파란만장한 과거를 회상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여기에 모두가 의견이 분분한 반전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김하균과 김승욱)

"토끼의 아리아"를 보면 원래의 줄거리와 각본에 비해 연출이 뛰어나고, 그 연출에 비해 배우들의 연기는 더욱 뛰어나다는 점이 가장 먼저 들어옵니다.

사실 원래 줄거리라는 것이 "도시 전설"들 세네개 정도를 뒤섞은 것에 불과해 보입니다. 섞다 보니, 이야기가 어딘지 모르게 판소리 수궁가를 연상케 하는 것이 있어서 좀 더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닮게 한 수준입니다. 그나마 개성을 좀 주려고 원작 작가가 허구헌날 울궈먹는 사랑의 순정 이야기를 양념삼아 집어 넣고, 전체적으로 맥주 예찬을 중심으로한 언어유희스러운 상황들을 곁들여 살짝 데쳐 버무린 것입니다. 거기서 만들어진 각본이란 것도 이런 이야기를 멋지게 극화 하였다기 보다는, 급박하게 대본을 만들고 쉽게 찍기 위해서 TV쇼를 위한 전형적인 각본을 짠 것입니다.

TV쇼는 흔히, 급박하게 사람들을 자극하고 진부하면 진부할 수록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기 때문에 기본 시청률이 나온다는 특징을 생각해보면, 이야기를 가벼운 희극으로 바꾸고 인물들을 다른 사람으로 설정한 것은 할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덕분에 인물들이 누구하나 착한 사람없이 속임수 잔치인 것으로 하면서 인간 자체를 풍자하는 듯 하게 나갈 수도 있으니 부수효과도 괜찮아 보입니다. 때문에 인물들은 간단하고 전형적인 사람들로 바뀌었고, 유머들도 개인기와 속어에 의존하는 간략한 것으로 대체되었습니다.


(김승욱과 김미연)

그런 상황에서 결말까지 힘을 기울이기 위해서 세상의 모든 반전 중에서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반전인 "유주얼 서스펙트"의 반전을 써먹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따져 보면, 최소한의 개성을 위해서 "유주얼 서스펙트"의 반전에 "PM 11:14"의 반전을 함께 곁들이고 있습니다. 걸어가는 발 보여주기 장면과 화면 분할 장면을 그대로 따라해서 이런 따라하기들이 흥겨운 오마주임을 나타내고 있기도 합니다.

이런 변화 때문에 이야기에 꽤 큰 구멍이 생긴 부분이 두어군데 있습니다. 우선 주인공이 왜 이 여자 주인공을 피하려고 하는지 동기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스캔들에 대한 겁먹은 마음이 있긴 합니다만, 그걸 어떻게 해보고자 90년대 기업사를 자기 마음대로 바꿔 설명하는 큰 거짓말을 지어내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설득력이 부족 합니다. 거기다 주인공이 무슨 알콜중독자 처럼 맥주를 입에 달고 사는 것에 대해서도 설명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어차피 맥주통의 역할이라는 것이 이야기의 호기심을 환기하는 소재이고, 이야기 자체가 빠르게 오락가락하니까 끝까지 설명이 없어도 재미만 따지자면 안될 건 없습니다만, 그래도 허전한 구석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김승욱과 김하균)

그에 비해 배우들의 연기는 급박한 제작기간을 생각해 보면 더할나위 없을 수준입니다.

우선 배역 선정 자체가 매우 좋습니다. 김미연과 김하균 같은 배우들은 자신들에게 많이 맡겨진 역을 다시 맡아서 노련하게 잘 펼쳐내고 있습니다. 김미연이 맡은 주인공의 전처 배역은 원래 이야기가 극화되면서 가장 성격이 많이 변한 인물인데, 김미연은 코메디가 거의 들어가지 않은 건조한 이야기를 흠잡을 때 없이 잘 연기하고 있습니다. 주인공의 상담자이자 동료인 최박사역을 맡은 김하균은 언제나처럼 극적으로 신나게 대사를 읊을 수 있는 뛰어난 실력을 보여줍니다. 이공계에 대한 고정관념에 발목이 잡혀서 대사가 불안한 데가 많습니다만, 김하균은 그런 함정들을 연기의 힘으로 헤쳐 나갑니다.

주인공 김승욱 역시 평범한 사람의 비겁함과 얍삼함을 갖고 있으면서도 억울한 상황에서 헤메는 인물을 연기하는데 부족함이 없습니다. 김하균과는 달리 불안한 대사에서는 어쩔 수 없이 약간 불안해지기는 합니다만, 역시나 이야기의 흐름을 끊지 않을 정도로 유려하게 넘어갑니다. 반대로 주특기가 드러나는 코메디 연기나 미묘한 감정 변화를 과장된 표정으로 보여줄 때는 괴력을 발휘해서 이야기 자체를 흥겹게 만듭니다.

여자 주인공을 연기한 박그리나는 아직까지 지명도가 부족한 배우라는 점이 안타까울 정도로 최고입니다. 여자 주인공의 인물은 원래 이야기에 비해 TV쇼에서 훨씬 더 평면적인 인물이 되었고, 대사들이 대체로 일본 만화들의 대사칸에 나올법한 것이 많기에 어떻게 연기할 지 쉽게 감이 잡히는 인물이 된 것도 유리하긴 했을 겁니다. 그렇습니다만, 그 평면적인 인물을 박그리나는 현실감있고 정감가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다양한 표정들도 좋고, 실재감을 갖고 있는 몸짓과 대사 어조도 적당합니다. 게다가 인물이 원작에 비해 판이하게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감자요리를 먹으면서 "이거 의외로 맛있네요" 같은 대사를 할 때의 분위기는 원작이 의도했던 바를 완벽히 영상화 하고 있습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여자 주인공의 대본상의 대사는 사실 꽤 답답합니다. 아무리 TV쇼를 위해서 편하게 만들기 위한 개작이 필요했다고 하지만, 남자주인공은 무조건 여자주인공에게 반말을 하고, 여자주인공은 남자주인공에게 무조건 높임말을 쓴다는 이 굳건한 전통은 어째서 유령처럼 언제어디나 들러붙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원작에서는 직장 동료인 최박사와 주인공 간에서까지도 서로 높임말을 쓰고 있습니다만, 그런 방식으로 대사를 만들면 어려워지기 때문에, TV쇼에서는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듯한 "나이 많은 사람은 무조건 반말부터 한다"를 도입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점들은 어쩔 수 없는 한계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껄끄러운 느낌이 드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박그리나)

단역에 가까운 작은 배역들까지 맡은바 역할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주웅길 회장의 역도 훌륭하거니와, 병원에서 통역으로 등장하는 장미화 같은 코메디언 배우는 매우 반가웠습니다. 그녀는 아주 작은 역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코메디언으로서 자신의 재주를 아주 어울리는 방식으로 선명하게 잘 살려내고 있습니다. 이 모든 배우들의 호연은 제작비를 과하게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어느 한장면 어색하지 않게 만들어낸 연출에 힘입어 더욱 돋보이고 있습니다. 특히 주인공에게 판사가 재판 결과를 읊는 장면 같은 것은, 썰렁한 소도구와 소수의 인원을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육중한 긴장감을 제대로 표현해내는 좋은 장면이었습니다.

오랫만에 사회적인 내용을 소재로 삼았다는 점이 베스트극장 이번 에피소드의 특징이라면 특징일 겁니다. 원작보다 그러한 점은 더욱 강조되었습니다. 그런 중에 장점을 찾는다면, 실력있지만 이름이 덜 알려진 배우들의 진가를 잘 보여준 에피소드라는 점이 주요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밖에...

원작에는 배경음악으로 오페라 리골레토의 많은 격정적인 음악들을 떠오르게 하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또 무대가 되는 술집의 이름이 뮤직맨 인 것도, 중간 중간에 등장하는 뮤지컬 뮤직맨의 삽입곡과 견주기 위해서였음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은 TV쇼에는 전혀 들리지 않습니다. 가끔 "She's Gone"같은 너무 평범한 선곡이 있긴 했어도 TV쇼에서 쓰인 음악도 나쁘지 않고 깔끔했습니다.

극중의 거룡 그룹은 용궁과 용왕을, 테스투딘 이라는 회사이름은 자라를 나타냅니다.

마지막즈음에 병원에서 잠깐 등장하는 장미화는 실제로 박성길 공학박사의 아내이기도 합니다. KAIST에서 박사학위를 딴 박성길 박사는 대기업 연구원 생활을 하다 사표를 쓰고, 현재 벤처기업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일전에, 장미화는 잡지에서 "정말 업무강도가 높은 남편의 건강이 현재 가장 큰 걱정"이라는 인터뷰를 한 일이 있습니다.

덧글

  • 프리스티 2006/04/25 01:08 # 답글

    원작도 매우 좋았습니다 :-)
  • 게렉터 2006/04/28 10:23 # 답글

    감사합니다. "토끼의 아리아"의 원작을 즐겁게 여기셨다면, "낙하산" 같은 것도 한 번 읽어봐 주시는 것도 재미있으실 것 입니다.

    http://mirror.pe.kr/zboard/zboard.php?id=kwak
  • 흰짱구 2006/04/30 00:49 # 답글

    게릭터 블로그, 항상 재밌게 읽다가 자꾸 찾기 힘들어서 블로그 링크했습니다. 너그럽게 봐주시길 :-)
  • 게렉터 2006/05/02 10:41 # 답글

    제 블로그는 모든 링크에 대해서 무한히 허용하고 있습니다. 전문을 게제 하실 때에만 e메일로 연락하시면 됩니다. 재밌게 읽어 주셨다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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