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이 포 벤데타 V For Vendetta 영화

"브이 포 벤데타"는 만화를 원작으로 한 액션 영웅물입니다. 가면속에 정체를 숨기고 대단한 솜씨지만 초능력이라고는 할 수 없는 비교적 현실적인 능력의 주인공이 다소 암울한 분위기로 다닙니다. 이 점들만 생각하면 "배트맨"과 비슷한 구석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대한 차이점이 있으니, 바로 이 이야기의 악당이 영국을 지배하고 있는 전체주의 정권이라는 점입니다.

이 주인공은 "배트맨"에서 한술 더떠서 부도덕한 정부 자체를 적으로 삼고 있고, 세상 전체, 공권력 전부에 쫓깁니다. 이런 점은 "쾌걸 조로"와도 통하는 데가 있습니다. 암담한 과거를 지닌 주인공이 근대적인 테러로 사회를 뒤엎으려 한다는 데 초점을 맞추면, 일본 만화 "몬스터"나 이우혁의 소설 "파이로 매니악"과도 비슷한 데가 있습니다.

"브이 포 벤데타"는 "배트맨"이 박쥐를 자신의 마스코트로 삼는 것 처럼, 자신을 17세기의 폭탄 테러리스트인 가이 포크스를 마스코트로 삼고 있습니다. 때문에 이 영화의 주인공은 복고적이고 귀족적인 성향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유머마저 느껴지는 빠르고 장황한 언변을 달고 다니면서 항상 여유를 과시합니다.

수다스러운 괴도 뤼팽 풍인 이 테러리스트는 복수심을 숨긴 채 다니는 여유로운 귀족풍 응징자라는 점에서, 사실 "몽테 크리스토 백작"과 가장 비슷합니다. 실제로 이야기 속에서도 주인공은 "몽테 크리스토 백작" 영화판의 팬인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괴기스럼고 암울한 분위기 역시 "몽테 크리스토 백작"과 직통하고 있습니다. "몽테 크리스토 백작"이 나폴레옹 시기를 전후로한 미친 프랑스 역사의 여러 면면을 배경과 소재로 삼고 있다면, 이 이야기는 여러모로 나치스에서 힌트를 얻은 면도 많이 보입니다.


(나치스 흉내)

이 영화는 그 서술시각이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크게 두 명의 관찰자가 등장하는데, 두 사람은 관객들에게 감정과 사생활을 어느 정도 보여주고 있는 평범한 시민인 방송국 직원과 형사 입니다. 악랄한 압제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열혈 투사인 것도 아닌 두 사람의 시각으로 이야기를 조망하고 있기에, 정부와 맞서는 주인공의 활동은 좀 더 감상하기 흥미로운 쇼가 됩니다. 게다가, 방송국 직원은 약간은 열혈 투사에 기울어져 있는 편이고, 형사는 악랄한 압제자에 약간 기울어져 있는 편이기에 이야기는 구석구석 다양한 요소를 끼워넣기에도 좋습니다.

이러한 평범한 사람의 1인칭 관찰자 시점은, 가면으로 정체를 숨긴채 홀연히 나타나는 주인공의 신비로움을 강조하기에도 좋습니다. "더 록"에서 메이슨과 굿스피드가 함께 활동하는 것과 같은 효과 입니다. 당연히 주인공의, 말그대로 "영웅적인" 인상은 더 강하게 다가오게 됩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방송국 직원은 주인공의 뒷 이야기를 서서히 알아가는 방향으로 설정되어 있고, 형사는 정부의 검은 음모를 서서히 알아가는 방향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이야기의 중심을 흐리지 않으면서도 충분한 이야기를 펼쳐낼 수 있는 이점도 얻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줄거리 구성상에 좋은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특히나, 약간 반항적인데가 있는 21세기 10대 소녀같은 방송국직원과 20세기 중엽 느와르 영화 속 탐정 같은 좀 우울하고 지루해하는 인상의 형사는 성격이 대조를 이룹니다. 그러면서도 서로가 밝혀내는 이야기의 느낌에도 어울리기에 더욱 이야기를 만들기가 좋아집니다. 이 두 인물은, 다른 영화들에서 많이 나타난바 있는 꾸며나가기 쉬운 인물이라는 점에서 더욱 편리합니다.


(형사)

줄거리상의 유리한 점들을 언급했는데, 사실 이 영화에서 정말 재미있는 점은 주인공의 화려한 테러 행각입니다. 오랜 옛날의 기괴한 가면을 쓰고 건물과 도시 구석구석을 뒤집고 다니는 그 모습 자체로 흥미로움이 있는데다가, 가면의 인상적인 모양도 눈에 쉽게 들어오고, 발빠른 주인공의 손놀림을 번쩍거리게 하면서 오고가는 화면바꿔나가기도 속도감을 더합니다. 이러한 액션은 이미 일본 닌자 영화와 무협영화에서 수없이 연구된대로, 주인공이 주무기를 단검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정석을 잘 펴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주인공의 진정한 필살 무기는 폭약 이라는 점을 소홀하지 않게 아주 명백하게 줄창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화의 액션이 이연걸 영화의 지겨운 아류작으로 내려 앉는 것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배경음악이나 계란 요리 장면과 같은 가벼운 장치로 주인공의 독특한 성향을 와닿게 드러내는 것도 노련합니다.

무엇보다 주인공의 진정한 멋은 그 끊임없이 읊어대는 장황한 말투입니다. 주인공은 사실 말투만 놓고보면 비슷한 액션 영화에서 미치광이 악당이나 미친 박사에 가까운 분위기 입니다.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터무니 없는 짓거리를 계속 펼치고, 가끔은 거대한 파괴행위와도 닿아 있으면서도, 그 말투는 항상 흥겨운 장단으로 신속하게 흘러갑니다. 이 말많은 괴인은 죽음의 위기나 최악의 상황에서도 결코 여유를 잃는 일도 없고, 잘난척과 설교를 중단하지도 않습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흉내도 잠깐 내는 이 사람은 음악이나 예술에도 조예가 깊은 듯 묘사되어 아르센 뤼팽 흉내도 좀 냅니다.

가면 쓴 영웅에 대해 잠깐 설명을 늘어 놓을 때 처럼, 주인공이 말하는 내용 자체가 재미를 줄 때도 있지만, 주인공의 대사 재미는 대체로 그 말투와 말하는 방식 자체에서 옵니다. 건조한 폼잡기와 냉정함, 거기에 흥겨움, 비아냥거림, 미치광이의 우울함이 섞여 있는 그 대사 방식은 듣기 즐겁습니다. 이는 이 목소리 연기를 맡은 휴고 위빙의 솜씨가 영화의 재미를 거의 이끌고 나간다고 치하할만합니다.


(방송국 직원)

연기를 따지고 보자면, 휴고 위빙 뿐 아니라, 다른 배우들도 뛰어납니다. 이 영화는 전체주의 정권의 냉철한 독재자를 최강의 악당으로 삼고 있는데, 이를 맡은 존 허트 역시 연설 연기만으로 영화 전체의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영화는 이 악당의 압제적인 느낌을 강조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잡히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큰 화면으로 이 사람의 얼굴을 거대하게 확대해 비추는 장면이 많습니다. 이런 화면에서 굳은 어휘들로 엮이는 말들을 아돌프 히틀러 수법마저 연상케 하는 힘이 넘치는 단호한 어조로 말하고 있습니다.

울적하고 날카로워 보이지만 그래도 평범한 선량함을 비치는 스티븐 리아와 작은 몸집으로 보호 받아야 될 대상이라는 느낌을 강조하면서 슬픔과 화남을 번갈아가며 보여주는데 능한 나탈리 포트만도 제격 입니다. 중간의 변장쇼 하나는 나탈리 포트만의 이런 겉모습을 백분 활용하는 정통적인 수법이기도 해서 꽤 괜찮습니다. 스티븐 프라이나 시네드 쿠삭 같은 배우들 역시 짧아도 한 가닥씩 그럴듯한 모습을 연기할 장면들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의 고정관념을 살짝 걸고 넘어지는 스티븐 프라이의 수법은 비꼬기 코메디 솜씨를 잘 살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나탈리 포트만)

"브이 포 벤데타"가 갖고 있는 허점이 있다면, 몇몇 장면에서 잠깐씩 너무 교훈적으로 나가려는 데가 있다는 점입니다. 영화에 삽입된 전형적인 "좋은생각"에 실릴 법한 감동적 이야기도 그렇고, 한국의 예절 관련 공익광고를 연상시키는 후반부의 장면도 좀 어긋나 보입니다. 이런 몇몇 요소들은 주인공 자체가 좀 미친 테러리스트인 이 영화의 막나가는 분위기와 뿌리가 좀 다른데 박혀 있는 것이라 할만합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주인공이 마지막으로 폼을 잡는 액션의 경우에는 주인공에게 스포트 라이트 비추기가 좀 과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다행히도 이 영화는 교훈 장면들까지도 편집과 대사를 잘 짜 넣은데다가, 좀 심심하다 싶을 순간에 배우들의 격한 감정 표출과 성격 대조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런 점들은 대략 잘 가려져 있습니다. 다만, 중반부에 나오는 반전 하나는 이런 교훈장면들이 미친 비도덕적 분위기를 약간 어긋나게 한 탓으로, 반전이 해괴하다는 느낌이 들 우려도 생기긴 했습니다.


(주인공)

그러나 "브이 포 벤데타"는 흥겨운 블록버스터 장면들이 더욱 부각되어 신나는 장면이 더 많은 편입니다. 초반부의 발빠른 액션 전개와 뒤이어지는 시한부 추격전은 "스피드"가 90년대에 개척한 빠른 액션의 진수를 잘 보여줍니다. 이런 액션의 핵심이라면 핵심이라 할 만한, 배경 활용도 제대로 하고 있습니다. 영국이라는 배경, 가면을 쓴 주인공이라는 특성도 아주 재치있게 잘 활용되어 있습니다. 이런 요소들은 단지 파리의 배경에 에펠탑이 한 번 등장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중대한 요소로 진지하게 활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적당한 참신함도 잃지 않고 있습니다.

결코 잊혀지지 않을 만한 것은, 차이코프스키의 "1812년 서곡"을 차이코프스키가 제시한 정석대로 잘 쓰고 있다는 점입니다. 쓸데없이 남들 따라한다고 표절 비슷하게 만든 오케스트라 블록버스터 배경음악을 끼워 넣거나, 액션 장면에서 따분한 헤비메탈 음악을 까는 많은 영화들에 비해, 그저 고전을 충실히 복습하는 것만으로 이 정도의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브이 포 벤데타"는 충분히 보여 줍니다.


그 밖에...

전체주의의 문제점을 제시하기에는 통행금지와 코메디 탄압 외에는 그다지 와닿게 문제상이 나오는 편은 아닙니다. 그냥, 거대 조직과 맞서 싸우는 해괴한 영웅담 정도 입니다. 그러나 공포를 대중 선동에 이용하는 데 대한 경계심만은 표현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딱 한 장면만 잘라내라고 한다면, 주인공이 유리창인지 거울인지 깨는 장면을 빼내겠습니다.



덧글

  • 어둠의왼손 2006/05/19 09:20 # 답글

    차이코프스키의 '1812'를 영화음악으로 사용한건 정말 좋은 선택이었던 거 같습니다.
    덕분에 조금은 순진해 보이는 영화상의 선동들이 좀더 박력 있게 다가오더군요.
    'V'가 '자기연민'같은 감정과는 거리가 한참 먼 캐릭터로 묘사 되어서인지 거울 깨는 장면은 저도 조금 어색하더군요.
  • 게렉터 2006/05/21 08:53 # 답글

    고전음악을 영화에 활용해서 잘 어울린 것은 "청연"같은 영화도 무난했습니다만, 정말로 옛날 방식 그대로 음악을 활용해서 이정도로 힘있는 장면을 만들었다는 점은 "브이 포 벤데타"의 멋진 아이디어 였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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