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효경찰 時効警察 (Jiko Keisatsu, 時效警察) 영화

"시효경찰"은 경찰의 한 부서를 보여주며 시작합니다. 이 부서는 관료제 경찰 조직의 구석에서 대강 자리 채우고 때우는 것만으로 월급을 받으며 일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있는듯 없는 듯한 무료하고도 평화로운 사람들입니다. 이 나른한 부서의 경찰인 주인공은 아무 이유도 없이 "심심해서" 미결사건의 수사를 재미로 하기로 마음먹습니다. 실없는 유머의 세계 속에서, 주인공을 짝사랑하는 교통경찰이 그를 따라다니고 있고, 그녀가 대충 와트슨 박사 역할 비슷한 것을 해줍니다. 왜 제목이 "시효경찰"인지는 매우 설득력 있게 첫번째 에피소드에서 설명해줍니다.


(경찰서)

"시효경찰"은 "형사 콜롬보"와 같은 형태의 범죄이야기 위에 어처구니 없는 코메디를 슬쩍 겹친 추리극 TV쇼 입니다. "형사 콜롬보"에서는 좀 어설퍼 보이고 괴팍한데가 있는 주인공 형사가, 근엄하며 진지하고 부유한 범인들의 완전범죄를 파헤치면서 묘한 대조의 쾌감과 다양한 성격중심의 유머들을 만들어 냅니다. "시효경찰" 역시 취미의 태도로 그냥 재미로 수사를 하는 얼치기 경관이 의사, 음악가, 배우, 교수 등등의 진지한 인물이 저지른 범죄를 밝혀냅니다.

"형사 콜롬보"는 정교한 완전범죄 아이디어를 미리 보여주고 시작합니다. 그래서 헛점을 찌르는 추리방식의 아이디어와, 점차 자신의 범죄가 드러날 위기에 놓이면서 불안에 떠는 범인의 심리를 드러내는 묘미가 있습니다. 비슷한 범죄 구도를 가진 "시효경찰"은 범행을 미리 보여주지는 않지만 범죄자를 처음부터 지목하는 점에서도 "형사 콜롬보"와 닮은데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만, 대조적으로 "시효경찰"에는 추리극의 절묘함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시효경찰"의 모양만 따지면, 수십년 전에 유행했던 아가사 크리스티 소설의 TV쇼판과 통하는데가 많습니다. 주요 등장인물들이 경찰이기는 하지만, 경찰로서 활약하는 장면은 전혀 없는 편이고, 경찰서는 그냥 주인공이 잡담하는 장소로 아주 잠깐씩만 활용될 뿐입니다. 남녀 주인공 이외의 경찰서 인물들도 강렬한 인물들임에도 불구하고 이야기 전개에는 아주 적은 시간이 할애되어 있습니다. 대신 주인공은 전형적인 아마추어 탐정, 사립 탐정으로서 해결되지 않은 아주 어려운 사건에 도전하고 있으며, 사건을 해결하고 나면 범인 눈 앞에서 "당신이 범인이다"라며 긴 설명을 합니다.

의외로 아주 잠깐씩 나타나는 음침한 분위기라든가 음악사용 방법도 에르퀼 포와로 시리즈나 미스 마플 시리즈가 잠깐씩 공포물 요소를 도입할 때와 비슷해 보일때가 있으며, 돈많고 사연 많은 범죄자들이 나온다는 점이라든가, 꼭 1930,40년대를 연상케 할만큼 낡아 보이는 경찰서 건물 내부 모습도 옛날 추리소설과 통하는 점이 있습니다. 극중에 실제로 아가사 크리스티는 한 번 언급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심야TV쇼 특유의 조명 사용방법이라든가, 은근히 환상적인 분위기 역시, 흘러간 심야 추리극의 재연으로 무리가 없습니다.


(포와로 탐정 흉내)

그렇지만, 역시 "시효경찰"의 줄거리에 추리극으로서의 풍성함을 기대한다면 빠지는 부분이 적잖아 있습니다. "시효경찰"의 중심 내용은 또 다른 곳에 큰 비중을 둡니다. 바로 "시효경찰" 특유의 코메디가 넘쳐 흐르는 것입니다.

"시효경찰"의 등장 인물들은 진지하고 냉정한 범인 정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맨정신인 사람이 없습니다. 터무니 없는 장난과 사소한 것에 대한 진지함, 진지한 것에 대한 태평함으로 가득찬 이 인물들은 스스로는 결코 우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이들은 이해할 수 없는 괴논리의 세계로 사람들을 이끕니다. 그러는 사이에 TV쇼 전체에 줄기차게 대량의 언어유희가 살포되고 있습니다.

"시효경찰"에 등장하는 유머들의 황당무계함이라든가, 그 등장 빈도는 "웃음을 찾는 사람들" 같은 무대 코메디쇼와 맞먹는 수준입니다. 그러나 "시효경찰"이 뿜어내는 웃음들은 이런 무대 코메디쇼와 꽤 다릅니다. "웃음을 찾는 사람들"에는 강한 감정으로 "제발 이번에는 웃어주오! 웃기지 않는가!"라고 울부짖는 듯한 소리지르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효경찰"에 넘쳐나는 유머들은 대체로 그냥 실없이 "뭐, 나름대로 웃기다고 생각하면 한 번 웃으시던가" 하면서 어물쩡 넘어가는 것들입니다.

그런즉, "시효경찰"의 웃음 장면들에는 그런 웃음을 극대화 시키는 배경음악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 많은 유머들은 냉정히 따져보면, 실제로 웃기다기 보다는, 실없는 허무함 때문에 사람의 호기심을 자극해서, 이야기를 발빠르게 만들어주는 효과가 더 크기도 합니다.

이런식의 무의미 코메디를 남발하면 자칫 "우비 삼남매" 처럼 만화책 흉내가 되기 쉬울 겁니다. "시효경찰"이 멋진점은 그런 웃음들을 연결하면서도 여러가지 영화, TV만의 연출에다 일부 사실적인 요소들을 화려하게 잘 사용해서 그럴싸한 개성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다각도로 잡혀드는 화면전환의 경쾌한 속도감과 리듬감은 특히 첫번째 에피소드의 경우에는 로버트 로드리게즈의 영화 못지 않습니다. 자주 등장하는 수평 수직구도의 아름다운 화면 제시 역시 멋진 장면을 만들어냅니다. 옛날 TV쇼속 탐정을 다루는 에피소드의 그림같은 바닷가 장면은 대표적입니다.


(후세 에리)

이러한 유머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마타라이 경관 역의 후세 에리 입니다. 후세 에리는 자신만의 코메디 실력으로 위대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만화속 등장인물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쉽게 볼 수 있는 좀 불친절한 시장 아주머니 같은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는 후세 에리는 보통 차분하고 냉랭한 평범한 연기의 말투를 잘 유지하면서 경쾌한 유머를 펼칩니다. 그러면서도 중요한 순간에 은근하지만 화려한 결과를 빚는 코메디의 소용돌이치기를 갖고 있습니다.

후세 에리가 워낙 이런 유머의 중심을 잘 잡아주고 있기 때문에, 에구치 노리코나 주인공을 연기하는 오다기리 죠도 이런 유머를 자연스럽게 연결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다기리 죠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괴상한 주인공을 그냥 기본기대로 연기할 뿐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주변 배역들의 활약때문에 충실한 줄거리를 전개하는 주인공의 역할 중심을 잘 잡고 있습니다. ("큭!" 하는 기묘한 웃음소리를 돌이켜 봅시다.) 과학수사 담당을 맡고 있는 미츠이시 켄 역시 비중이 아주 작을 뿐이지, 후세 에리 코메디의 정수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편, 반대로 "시효경찰"의 이 멍한 세계에 또다른 각도의 현실감을 생기게 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하는 인물은 주인공의 조수 역할을 연기하는 아소 쿠미코 입니다.

사실 아소 쿠미코라는 배우는 따지고 보면 심각하고 진지한 연기를 잘 해낼 수 있을 법하게 보이는 멀쩡함과 냉랭함을 갖춘 인상입니다. 그렇지만, 연기의 기본기가 충실한 까닭에 "시효경찰"의 코메디 연기를 그럴싸하게 해내고 있습니다. 그 덕분에 아소 쿠미코의 인물은 생생해지고 그 매력은 더욱 강하게 표출되고 있습니다. 특히, 초기 에피소드에서 상식적이지 않은 행동을 펼치는 등장인물들의 유머를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관찰자의 역할을 하는데, 이 때는 배역이 더욱 빛을 발합니다.

그러나, 에피소드가 진행되면 될 수록, 아소 쿠미코의 배역은, 철로에 깔린 자갈만큼 반복된 "주인공 조수 여자주인공"으로 지루하게 굳어져 갑니다. "사랑밖엔 난몰라" 태도로 살고 있는 남자주인공에 목숨건 짝사랑 여자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진행 될 수록, 아소 쿠미코 역시 다만 그냥 뻔한 한계에 걸린 유머에서만 활약하기 때문에 갈수록 조금씩 개성을 잃어 버리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아소 쿠미코)

아소 쿠미코의 위치와는 반대 각도에 있는 사람으로는, 토요하라 코스케라는 진지한 강력계 형사가 있습니다. 토요하라 코스케는 시트콤이나 만화에 자주 등장하는 어처구니 없는 자아도취 잘난척쟁이 입니다. 왕자병/공주병 코메디가 90년대에 유행한 이후에, 이제는 지겹기도 할만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토요하라 코스케의 왕자병 연기는 코메디 과장을 넘어서서 진짜 같은데가 미묘하게 숨겨 있습니다.

물론 토요하라 코스케는 어림없는 트렌치 코트자락을 휘날리며 미친듯이 과장된 폼잡기를 거듭합니다. 그런데도, 그 웃음소리라든가 목소리, 진솔한 표정연기 같은 것에는 아주 약간이지만 개성의 빛을 발하는 사실감이 슬쩍 들어가 있습니다. 토요하라 코스케는 이런 코메디 형사가 아니라, 정말 느와르 영화의 형사가 되어도 꽤 잘할 것 같다는 생각이 충분히 듭니다. 덕분에, 토요하라 코스케의 잘난척은 묘하게 인간적으로 이해되는 면도 좀 생기고, 영화에서 사실감과 코메디 사이의 다리 놓기로 활용될 때도 있습니다.

"시효경찰"의 문제점은 역시나 추리극이 취약하다는데서 나옵니다. 물론 추리극이 그렇게 심각할 필요는 애초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일단 추리극의 이야기 자체가 부실하고 아이디어도 그냥 옛날 명작 추리소설을 그대로 베껴 온 것이 전부입니다. 그렇다고 정말 "형사 콜롬보"처럼 마음의 여러 측면을 보여주는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범인과의 머리싸움이 박진감있게 벌어지는 경우도 잘 없습니다. 그냥 안이하게 흔한 추리극 소재를 반복할 뿐이라는 겁니다.

특히 몇몇 에피소드들은 이 추리극 소재를 지나치게 깊게 다루는 실수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추리극의 이면에서 범인이 느끼는 인간사의 희로애락이라든가, 격정적인 감정을 토로하는 장면들을 꾸미고 있습니다. 그러니 가끔가다가 설득력없이 싱거운 헛과장으로 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남녀 주인공간의 감정교류도 은근하게 분위기를 고조할 때는 매끄럽게 잘 흘러가지만, 격정적으로 흐를 때는 단선적인 식상한 수법을 반복하는 듯 보이거나 지나친 허세에 묻혀 버릴 때도 있습니다.


(토요하라 코스케)


그러나, 복고적인 분위기로 생활속 가까운 곳에서 살며시 기이함을 이끌어내는 심야극 분위기를 잘 유지하는데 추리극은 톡톡히 한 몫 합니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는 "시효경찰" 특유의 허무맹랑한 유머감각을 돋구는데도 여러모로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또한 웃음의 세계에 있는 주인공들이 무거운 살인사건속의 추리극을 헤집는 모습에서는, 인간세상만사에 대한 낙천적인 태도를 드러내는 진정성도 알게모르게 스며 있습니다. 당연히, 잠못이루는 깊은 밤을 가볍게 즐기며, 다음날의 일과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싶을 때, "시효경찰"은 적당히 값을 합니다.


그 밖에...

"스윙걸즈"의 "세차장 주인 아저씨" 배역이 초기 에피소드의 용의자로 잠깐 등장합니다.

아소 쿠미코는 "간장 선생"의 주역이기도 했습니다.

도쿄 출장 중에 본 것입니다. 제가 일본어를 모르기 때문에 같이 본 이가 무슨 옛날 영화의 변사처럼 이야기를 하나하나 설명하는 것에 의존해 보았습니다. 때문에 내용 설명이나 평에 오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발견즉시 정정 부탁드립니다.

덧글

  • 다쯔카게 2006/06/23 18:58 # 답글

    주인공인 오다기리 죠가 저 일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이렇다할 취미가 없는 것을 깨달은 상태에서, 공소시효가 지난 사건의 자료들을 보고는 이미 시효가 지난 사건을 파헤치는 것을 취미로 삼자고 하여 시작된 것이지요.
  • 게렉터 2006/06/23 19:04 # 답글

    제가 나름대로 최대한 스포일러스러움을 감추려 하다가 약간의 오해의 소지가 있게 소개글을 썼습니다. "취미"가 꼭 "심심해서 하는 일"이라고 할 수만은 없는 것이었건만.
  • FAZZ 2006/06/23 21:52 # 답글

    뭐 비슷한 케이스의 부호형사를 꽤 재미있게 봤던지라 이 시효경찰도 꽤 재미있을 거 같다는 느낌에 드는군요
    한 번 꼭 봐야겠습니다.^^
  • 게렉터 2006/06/24 21:46 # 답글

    FAZZ/ 저는 FAZZ님 때문에 반대로 "부호형사"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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