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리비안의 해적: 망자의 함 Pirates of the Caribbean: Dead Man's Chest 영화

오랫만에 이글스 멤버들이 다시 모이고, 현란한 기타 솔로의 도입부가 연주됩니다. 한참 그러면서 기타 솔로가 끝을 맺을 즈음, 거기에 뒤따라 너무도 익숙한 "Hotel California"의 곡조가 시작됩니다. 듣고 있던 이글스의 익숙한 팬들은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원 재집결)

"망자의 함"에서 가장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부분도 마찬가지 입니다. 시리즈의 1편, "블랙펄의 저주"에서 제시되었던 인물들이 하나 둘 다시 돌아와 뭉칠 때 느낄 수 있는 반가움 말입니다. "망자의 함"에는 "블랙펄의 저주" DVD 코멘터리를 녹음했던 주요 배역들 뿐만아니라, 해적선원1, 해적선원2나 심지어 끝나는 자막 올라갈 때 쿠키에 나온 대사 한 마디 없는 배역 조차 꽤 중요한 "돌아온 탕아"로 등장해 줍니다. 이렇게 옛 등장인물들이 이전의 성격과 버릇, 말투와 했던 일들을 하나 둘 거들먹거리면서 재미를 주는 장면들은 영화의 도입부에서부터 영화가 끝날 때까지 계속 줄기차게 이어집니다.

때문에 "망자의 함"은 일단은 "블랙펄의 저주"를 별로 재미있게 보지 않았거나, 재미있게 보았다 하더라도 등장인물 한 명 한 명들에게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면, 그 정도만큼 재미가 없어지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예로, 감동과 웃음의 도가니로 기획된 문제의 "바다거북을 잡아서 어쩌고" 대사가 있습니다. 이 말은, 1편의 대사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아닌 헛유머에 그칠 뿐입니다. 소극적인 다른 예를 들자면, "망자의 함"에 나오는, 교양논리학에서 가끔 재미삼아 예시로 뽑곤하는 것과 비슷한 농담대사들을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그 자체로 재미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블랙펄의 저주"에서도 같은 방식의 농담 수다들이 여유롭게 군데군데 끼워져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 더 재미있게 느껴질 것입니다.

덕분에 언뜻 "망자의 함"은 영화 자체의 재미가 좀 부족하지 않은가 하는 선입견이 쉽게 생길 수도 있습니다. 소지는 꽤 있습니다.


(동인도회사)

우선 첫째로, 소재 자체가 좀 싱겁게 사용된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동인도회사는, 마치 현대 배경 영화에서 정부마저 위협하는 악덕 다국적 대기업처럼 등장하는데, 등장할 때의 위풍당당한 위세와 그 두목의 무서운척하기에 비하면 실제로 별로 악당으로서 하는 일은 없습니다. 이 패거리들은 3편에서 몰려나와 뭔가 일을 벌이려고 미리부터 분위기를 잡아 놓은 듯 합니다. 그렇습니다만, 해적들의 이야기라면 민간인들을 공격하거나, 해적토벌대와 싸우는 내용이 해적 이야기의 핵심이 되는만큼, 어떤식으로든 좀 이야기에 참여했어도 고전적인 해적 이야기의 재미를 주는데 큰 도임이 될 수는 있었을 것입니다.

더욱더 아까운 소재는 "플라잉 더치맨" 전설입니다. 승무원들이 다 죽은 빈 배가, 이리저리 바다를 떠다니다가,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조류와 해류에 휩쓸려 마치 스스로 찾아오듯 항구에 떠밀려 나타나는 이야기는 많은 호기심을 생기게 합니다. "플라잉 더치맨"은 이런 이야기의 변형된 형태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일 것입니다. 바다 전설에 관심이 없더라도, 바그너의 오페라 하나가 "방황하는 화란인"이라는 제목으로 옛부터 알려진 덕분에 한국 관객에게도 무척 친숙한 전설입니다.

그런데, "망자의 함"에는 "플라잉 더치맨" 전설을 중심 소재로 계속 들먹이면서도, 거의 전혀 활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망자의 함"은 그냥 바다를 떠돌아다니는 선장에 대한 아주 대단한 전설이 필요하니까 "플라잉 더치맨"을 갖다 붙인 것 정도에 가깝습니다. "플라잉 더치맨" 전설 특유의 음산하고 고요한 분위기는 전혀 없고, "플라잉 더치맨"에 해당하는 인물 역시 경망스러워보이기까지한 문어인간에 불과합니다. "망자의 함"에서 핵심이되는 심장 어쩌고하는 정확하게 잘 설명도 되지 않는 마법같은 이야기도 "플라잉 더치맨" 전설 분위기와는 완전히 어긋납니다.


(윌리엄 터너)

"망자의 함"은 이렇게 써먹을만한 소재들을 많이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1편에서 가장 성공했던 소재를 또 들먹이고 있지도 않습니다. 즉, "망자의 함"은 "블랙펄의 저주"에 비하면 잭 스패로우 선장의 활약이 대폭 축소되어 있는 것입니다.

"블랙펄의 저주"는 기둥 줄거리 자체도 물론 꽤 재미있는 편이었지만, 그 독특한 흡인력은 대체로 잭 스패로우라는 주인공의 대활약에서 나왔습니다. 비겁하고, 헛점많고, 야비한 인간입니다. 그런데 또한 바다의 고난과 역경에 대해 수없이 많은 경험이 있고, 나름대로 세상사에 대한 노련함이 있으며, 정신없이 낙천적인데다가 항상 술취한듯하며 가끔 맛간 헛 낭만에 젖기도 하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망자의 함"에서는 대체로 그냥 비겁한 유머를 중간중간에 삽입하는 유머담당 전문 정도로 잭 스패로우의 비중을 줄였습니다. 대신 "망자의 함"에서 정말 가장 중요한 인물로 활약하는 인물은 윌리엄 터너로 바뀌어 있습니다.

가장 상징적인 것은 잭 스패로우의 나침반입니다. 배 위에서 고장난 자기 나침반을 한 참 들여다 보다가, 그걸 보고 어디로 가자고 항로를 외치는 잭 스패로우의 모습은, "블랙펄의 저주"에서 낭만과 무모함, 생각없음과 노련함이 마구 뒤범벅되어 있는 상징적인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망자의 함"에서는 "정말로 고장난" 나침반을 잭 스패로우가 보는 장면을 나오지 못하게 해 버린 것입니다.


(잭 스패로우)

이상의 몇 가지 문제에도 불구하고, 사실 "망자의 함"은 재미있는 영화입니다.

일단, "망자의 함"은 방향설정이 명확합니다. "블랙펄의 저주"는 해적영화에 마법적인 유령이야기를 연결한 모양새였습니다. 그러나 "망자의 함"은 해적영화라는 굴레 따위를 거의 다 걷어 치워 버렸습니다. "망자의 함"은 흔히 해적 영화라고 하는 영화라기보다는, 그냥 바다를 주무대로 하는 환상물, 검과 마법 이야기에 가깝습니다. 신비의 구슬 같은 것을 찾기 위해 기사와 마법사 일행이 산넘고 물건너 괴물과 싸우는 이야기로 "망자의 함"은 완전히 방향을 굳혔습니다.

때문에 특별히 해적 영화스러운 장면을 보여줘야겠다고 고민하지 않고, 그냥 자기 이야기를 위해서만 장면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해적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적당한 실제감을 제공해 주는 것은 이 영화의 유리한 점입니다. 만약 "블랙펄의 저주" 식으로 이야기를 꾸몄다면, 우스꽝스럽게 생긴 해산물 모듬 괴물들이 쓸데없이 안어울리고 분위기도 거슬려서 지루한 장면이 많아졌을 겁니다. 하지만, "망자의 함"에서는 일견 우스꽝스럽고, 일견 기괴한 이 괴물들은 그런 괴물로서의 위치에 잘 머물러 있어서 나름대로 역할을 다하고 있습니다.

전반부에 나오는 원주민들도 비슷합니다. 해적이나 해적을 추적해 온 정부군이 이런 원주민과 맞닥뜨렸다면, 결국 잔인하고 멍청한 원주민들을 문명인들이 꾀나 과학기술로 농락하고 탈출하는 좀 진부한 이야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망자의 함"은 그런 전통적인 시대적인 분위기나 인물들의 현실적 위상을 정하는데 별 생각이 없기 때문에, 그냥 분위기를 살려서 주인공측까지도 멍청하고 한심한 분위기를 흠뻑 머금도록 해 놓았습니다. 덕분에 이 부분은 고전적인 미개인 이야기의 틀에 갖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웃음을 찾아 볼 수 있기도 합니다.


(엘리자베스)

이런 이야기는 주인공 일행의 모험이 신나는 감정이입을 얻기 좋게 노련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적절한 시점에 악당이 등장해 주고, 적절한 시점에서 1차 격퇴되고, 잊을만하면 악당들이 이를 갈면서 2차 공격을 하고, 주인공들은 더 많은 고민과 노력으로 2차 격퇴에 도전합니다.

이런 구성은 악당들과 주인공이 재미난 라이벌 관계처럼 보이게 하면서, 나름대로 악당이 친숙하게 여겨지게 됩니다. 덕분에 악당과 주인공의 싸움을 더 흥미진진하게 보이는 효과를 얻습니다. 이런 방식을 정석으로 활용하는 거대괴물과의 마지막 일전은 좋은 예입니다. 해적선 "블랙펄" 하면 떠올릴 수 있는 많은 특징들을 골고루 잘 활용하면서, 대형 거대 괴수 영화다운 정신없는 블록버스팅과 주인공 영웅들의 활약이 잘 담겨있습니다.

다른 액션들의 내용은 1편보다 오히려 더 "원작"에 충실한 형태로 바뀌었습니다. "망자의 함"의 액션들은 대부분 주인공들이 꼭 놀이공원의 놀이기구 같은 것에 들어가게 되어 가지가지 방법으로 굴러다니고 날아다니면서 허둥지둥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주인공들의 목숨을 보전할 수 있는 한도내에서 이런 빙빙돌아가는 액션들은 굉장히 무게가 크고 복잡한 동작들이면서도 꽤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허둥되면서 계속 엉뚱한 상황에 처하게되는 주인공들의 상황도 재미있고, 그런 가운데 복잡하고 어지러운 대소동으로 위기가 커져나가는 모습도 즐겁습니다.

이런 모습들은 자칫 무의미한 부수기 장면으로 전락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습니다만, 배우들이 이런 장면에 필수적인 허둥대는 웃긴 연기들을 아주 잘 펼치고 있는데다가, "블랙펄을 움직이는데는 6명이면 충분하다"처럼 군데군데 재미있는 아이디어들도 그럭저럭 끼어 있어서 충분히 힘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물체들의 중량감과 실제감이 잘 담기도록 화면에 담아낸 미술적 감각과 특수촬영의 힘 역시 탄탄하게 뒷받침되어 있습니다.


(다람쥐통)

영화 전체에 가득 차 있는 특유의 유머 감각도 효과를 발휘합니다. 잭 스패로우의 비중은 확 줄어들어 유머 담당 조연쯤으로 되어 버렸지만, 그 유머 담당의 역할을 잭 스패로우는 톡톡히 수행합니다. 농담을 위한 대사와 표정은 흥에 겹고, 다른 배우들과의 어울림도 아주 좋은 편으로 줄기차게 영화 전체에 웃음을 몰고 다닙니다. 백사장에서 삼파전 칼싸움을 하는 장면 같은 것은 별 아이디어가 없는 장면인데도, 등장인물들끼리의 성격대립이 웃음으로 잘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재미가 있습니다. 게다가 잭 스패로우는 이러한 웃음속에서 바다의 낭만을 담아내는 1편의 미덕도 충분히 발휘하고 있어서 술집에서의 모자 바꿔쓰기나, 마지막 결전 장면쯤에 이르면 꽤 멋을 부리기도 합니다.

해적 영화에서 검과 마법의 모험 영화로 바뀐 것이 웃음을 돕는 면도 있습니다. 해적 이야기의 전통과 별 상관없이 자유롭게 소재들이 이어지기에 편하기 때문에 더 풍성한 재미거리를 배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전편 역시 그런 요소가 없지는 않았지만, 덕분에 "망자의 함"은 더욱 고전 컴퓨터 게임인 "원숭이 섬의 비밀" 시리즈와 비슷해 보이는 면이 있습니다. 특히, 주술사를 찾아가는 장면은 90년대 어드벤처 게임의 추억, "리척의 복수"를 생각하지 않기 어려울 정도 입니다.

"망자의 함"은 전설과 비밀의 내용은 앞뒤가 맞지 않고, 인물들의 행동 동기도 딱부러지게 설명되지 않는 어색한데가 있습니다. 정신없이 튀어나오는 약간씩 괴기스러운 소품들이 그런 어색함을 잊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잔인하다거나 놀래킨다고 할 정도는 아닙니다만, 부작용으로 뼈다귀나 시체조각들이 1편에 비해서 남용되고 있어서 좀 난잡하다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평범하지만 호소력 있었던 1편의 신나는 음악이 이번에도 다시금 멋지게 사용되고 있고, 꽤 긴 상영 시간도 힘들고 지친 초자연적인 모험 서사시에 적당히 어울립니다. 소품과 의상들, 그것을 보여주는 화면들도 최고급의 솜씨를 자랑합니다. 아무 이유없는 "해적 찬양"으로 부풀어 있기만 했던 1편의 인간 관계는 2편에서 훨씬 더 인간 답게 변해서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고 있다는 장점이 또한, 다시 돌아온 주인공들의 웃음과 아찔함이 난무하는 모험을 장식합니다.


그 밖에...

실제로 "원숭이 섬의 비밀" 게임과 "캐리비언의 해적'은 같은 원작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montesur님이 소개해 주신 "주지한 바" 블로그의 멋진 글 http://blog.naver.com/jihanj/120012744431 을 읽어볼 만 합니다. 그러고 보니, 감옥을 벗어나기 위해 개에게서 열쇠를 얻는 장면 역시 정확히 게임과 영화에 같이 등장하는 장면입니다.

처음에 부제 "망자의 함 Dead Man's Chest"가 "죽은 자의 가슴"으로 소개된 적이 있는데, 그냥 오역이라고 하기에는 나름대로 중의적으로 그런 뜻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럼주도 그물에 담아라" 장면에서 가장 많이 웃었습니다.

"제국의 역습" 운운하는 평들이 많습니다만, 과연 찾아보면 볼 수록 그것만으로 스포일러가 될 정도입니다: "제국의 역습"에서는 공주와 껄렁한 친구가 한 팀이 되어 떠돌고, 착실한 친구가 혼자 또 고생을 합니다. 세 친구들이 삼각관계 비슷한 것에 휘말리는 한편, 이 사람들이 마지막에 어떻게 되는지도 생각해 볼만합니다. 주인공은 적진 한 가운데서 소속이 이상한 아버지를 만나고, 일행의 배가 괴물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애쓰는 장면도 있습니다. 음침한 굴속에 산신령 같은 요다가 등장하는 모습도 유사하다면 유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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