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스타 영화

"라디오 스타"의 중심 줄기 중에 하나는 아무 생각 없이 마구잡이로 한, 방송, 공연, 출판이 의외로 그 파격적인 느낌이 대중들의 호기심을 자극해서 인기를 끄는 이야기 입니다. 진지한 셰익스피어 공연을 제대로 소화해 내지 못해서 엉망으로 실수투성이 연극을 해버리는데, 이것을 굉장한 코메디로 여기고 관객이 기뻐해 준다는 식의 이야기 말입니다. "바보 이반"과 같은 대표적인 동화에서부터 매우 오랫동안 반복되던 이야기입니다. 오직 그 하나만을 내용의 전부로 하고 있는 "프로듀서스" 같은 영화도 있고, 많은 TV쇼나 TV 만화영화 시리즈에서도 자주 쓰이는 수법입니다.

당연히 "프렌즈" 같은 시트콤에서도 사용된 적이 있습니다. 피비의 어처구니 없는 노래 덕분에 피비가 어린이들에게 "진실을 노래하는 가수"로 인기를 끈다는 이야기가 잠깐 나온 적이 있습니다. "라디오 스타"에서는 이와 거의 같은 방식으로, 완전히 퇴물이 된 왕년의 인기가수가, 열받아서 모든 것을 포기한 방송을 하고 덕분에 진솔하고 특이한 방송으로 인터넷에서 인기를 얻는다는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박중훈)

"라디오 스타"는 이러한 핵심 아이디어에서부터 대부분의 장면 구성 방법, 이야기 연결 방법이 이처럼 많은 이야기에서 한 번 성공해 본 것들, 멋져 보였던 것들을 이리저리 짜맞추는 방식으로 되어 있습니다.그래서 진부한 부분들과 그 연결이 뻑뻑해서 어색한 부분들이 이래저래 꽤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엉성한 부분은, 방송이 처음으로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부분, 어떻게 보면 가장 결정적이어야할 부분입니다.

"일견 천박해 보이지만 따뜻하고 순박한 모습이 도리어 많아 보이는 다방 종업원"이라는 인물이 이 부분의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이런 인물 자체가 "죄와 벌" 이후로 온갖 곳에서 가히 저 넓은 가을 논의 벼 낱알 처럼 난무한지라, 거의 진부함의 상징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데다가 이 인물이 하는 일이란 것도, 그 많은 헐리우드 영화에서 실패의 나락에 빠져든 위험을 똑똑히 경고해 왔던 "감동적인 일장 연설" 장면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장면의 연출은 부족함 없는 정석대로이고, 연기지도나 연기도 충실합니다. 그렇습니다만, 아무래도 이런 너무나 전형적이고 뻔한 장면의 틀 때문에, 진실함은 죽고 꾸민이야기 같다는 느낌이 슬금슬금 묻어나기에, 아주 아슬아슬합니다.


(한여운)

다른 장면도 다른 영화나 드라마에서 많이 써먹었던 수법 후다닥 갖다가 또 써먹는데가 수두룩 합니다. 전국 방송으로 방송이 퍼져나가고 있다는 장면을 표현하는 방식이라든가, 익살꾼 기질이 많은 중국집 배달부 같은 인물은 한국 TV 연속극에서 "다음 이시간에"나 "곧이어 어느 연속극이 방송됩니다" 같은 문구 만큼이나 틀에 박혀 굳어 버린 것입니다. "꽃집 종업원의 짝사랑 이야기"라든가, "술 취해서 이야기한 거친 말 속에서 진실의 충격을 받는 장면" 같은 것도 정말 이야기거리 없을 때마다, 영화에 보이는 연출방식 그대로 많은 연속극에서 갖다 붙이던 장면들입니다. 말쑥한 양복을 입고 예의바른 말투를 사용하면서 의좋은 주인공들의 적수가 되는 갑부 인물 같은 것은 좀 도가 지나칠 정도로 "꼭 나오는 인물" 그대로 입니다.

방송이 사람들의 웃음을 이끌어내는 방식으로 중간에 제시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명쾌한 답을 주는 상담자" 유머가 활용되는데, 이것은 미국 스탠딩 코메디에서 출발해서 80년대 한국 농담 잡지, 농담 책에 소개 되었다가 다시 90년대 PC통신에 유행하기도 하고, 또다시 인터넷을 돌다가 최근에 TV 코메디 라이브 쇼에서 또 써먹기도 한 것입니다. 이 농담을 울궈먹은 수법은 재탕 삼탕 정도가 아니라 거의 구증구포의 수준이라 할만합니다. 영화에서 그나마 다행인 것은 "뱀" 이야기는 박중훈의 자포자기 가수 연기와 아주 잘 어울려서 펼쳐지고 있고, "자격증" 농담의 경우에도 어느 정도 변형하려 했다는 성의는 보이고 있다는 점 정도 입니다.

많은 써먹었던 수법 그냥 가져다 붙이기 방법 중에서도 그나마 횡단보도를 건너며 "애비로드" 자켓 표지를 오마주 하는 것이라든가, 진 켈리도 한 번 밖에 안했지만 안성기를 또다시 빗속에서 우산을 들고 짧게 노래하도록 하는 장면 같은 것은 분위기에 잘 어울리게 잡혀 있기도 하고, 인물 설정이나 배우들의 연기 방식과 들어 맞아서 효과가 살아나는 것도 있습니다. 이렇게 작은 몇몇 부분들이 "라디오 스타"의 많은 진부한 부분들 속에서 나름대로 개성을 드러내는 조그만 영역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안성기)

평범한 장면들을 계속 연결하는 이 "라디오 스타"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88년에 가수왕을 먹은 후로 이래저래 사고만 치면서 퇴물이 된 록 가수가 있습니다. 이 록 가수를 감싸고 도는 사람이라고는 평생 함께 해 온 매니저 밖에 없습니다. 두 사람은 계속 망하기만 하다가 결국 먹고 살려고 통폐합 직전의 지방 방송국에서 작은 방송 프로그램의 DJ를 맡기에 이르는데, 이게 이들의 삶에 작은 반향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는 겁니다.

"라디오 스타"가 보여주는 것은 바로 이 "작은 반향" 입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엄청난 일을 벌이거나 새로운 도전을 하는 사람들도 아니고, 이야기의 전개를 봐도 그렇게 결정적인 대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가지 일들을 겪고 싸우거나 화내는 사람들이 많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분위기는 동강 주변의 영월 풍경과 함께 잔잔하고 나른한 분위기를 활용할 때가 많습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라디오 프로그램이라는 것도, 사람들을 선동해서 뛰쳐나가게 하거나, 인생의 격변을 일으키는 충격적인 내용이 아니라, 지극히 사소한 일상사와 지역 주민들과 밀착된 평범한 주변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결국 "라디오 스타"가 잡아내는 것은, 울적하게 망한 사람들이지만, 그 울적한 분위기 덕분에 수십년간 서로에 대한 의리가 쌓인 가수와 매니저의 유대 관계가 살짝 살짝 드러나는 모습들입니다. 당연히 두 배우의 감정 교류 연기가 중요할 것입니다. 그런데, 가수와 매니저를 연기하는 박중훈과 안성기, 두 사람의 연기는 사실 부족한 구석이 이래저래 있습니다.


(최정윤)

우선 영화에서 분위기를 결정하는 인물을 연기하는 록 가수 역의 박중훈은 옛 박중훈의 한계를 그대로 드러냅니다. 박중훈은 터무니 없는 코메디 연기에서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한 솜씨를 갖고 있으며, 반대로 비굴한 상황에 빠진 사람을 매우 현실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하는데도 아주 능합니다. 그러나, 박중훈의 치명적인 문제점은 영화나 연극에서 종종 필요한, 극적으로 과장된 감정을 마치 사실적인 것처럼 꾸며 보여줄 때에 실력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치밀어오르는 슬픔이나, 분노의 감정을 담아 대사를 쏟아 부으며 상대와 맞서는 장면 같은데서 박중훈은 아주 현실감 없이 어색해집니다.

마치 매니저들의 업무 강도처럼, 실제로 영화상에서 박중훈 보다 몇 배나 많은 대사와 상황들을 연기해야 하는 배우가 안성기 입니다. 안성기는 관객의 마음을 흔들만큼 참 고달프면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연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온갖 개인기를 보여줘야할 장면도 참 많습니다. 안성기는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너무나 선명하게 대사를 전달하는 대사 발음 방법이라든가, 관객에게 눈에 바로바로 들어오도록 표정과 동작을 연기하는 버릇들이, 오히려 현실감을 떨어뜨려버릴 때가 있습니다. 실제 사람의 말버릇이나 동작들은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닌만큼 그렇게 쉽게 눈에 들어오지는 않습니다. 사극이나 정신없이 빠른 코메디, 액션 영웅 같은 것을 다룰 때는 이런 방식이 효율적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잔잔한 반향을 다루는 "라디오 스타"와는 그렇게 잘 어울리는 수법은 아닙니다.


(비, 우산, 노래, 안성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 속에서 안성기와 박중훈은 다른 대체 배우들을 떠올릴 수 없을만큼 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어느 정도는 안성기와 박중훈이라는 실제 배우 자신들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투캅스"나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같이 보여준 화려한 모습 이후로, 안성기와 박중훈은 사실 주인공으로서 크게 두드러져 본 적은 없습니다. "실미도" 같은데서 가끔씩 짭짤한 건질 거리라도 있었던 안성기와는 달리, 박중훈은 상황이 좀 더 심합니다. 한때 "박중훈 코메디"라는 거대한 영역을 만들기까지 했던 박중훈은 막상 한국 영화가 중흥기를 맞은 최근에는 연속된 실패 속에서 예전의 화려함에 비하면 몰락이라 할만한 처지가 되기도 했습니다.

바로 그런 두 배우들이, 마치 "투캅스" 시절처럼 호흡이 척척 맞는 콤비가 되어 다시 펼치는 영화가 "라디오 스타"입니다. 이 영화에서 퇴물 록 가수와 그 유일한 친구를 연기한다는 점이, 영화 속의 연기 외에도 배우에 대한 생각을 이용해서 관객의 감정과 감동을 자아내는 면이 있는 것입니다. 비교적 동안인 박중훈와 어느새 늙은 얼굴이 더 잘 살아나는 안성기는, 각각 철없고 감정적인 록 가수와, 온갖 세상의 풍파를 헤쳐나가기 위해 끝없이 웃는 얼굴로 허리를 굽신거리면서 한 없이 록 가수를 돌보아주는 매니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의 모습도 배역에 잘 어울립니다. 그래서 너무나 닳고 닳은 세상 살이 방법들에 대조적으로 사람사이의 오랜 정을 보여주고, 그 정이 우울한 몰락의 시절의 남는 끈끈함으로 여러 복합적인 감정을 잘 드러냅니다.

지나치게 평범한 몇몇 장면들이 억지로 늘어서 있는 모습은 확실히 부족한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장면들로 또다시 뻔한 극적인 이야기 대신, 조용한 감정 표현에 만족하려 했다는 계획이 영화를 전체적으로 다듬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효과가 명확한 배역 선정과 이 배역들과 한 세대 전의 한국 록큰롤 명곡들을 주욱 잘 엮어 놓았다는 점은 특징적으로 뛰어난 점입니다. 짤막짤막하긴 합니다만 연주 장면들도 박중훈과 안성기, 그리고 제작진이 들인 공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 밖에...

영화 마지막에 올라가는 자막을 보다보면, 영화에 잘 들어 맞는 일단의 이름들이 보입니다.

조연 비중이 참 부족한 영화입니다. 최정윤의 인물 같은 경우에는 아무 필요도 없지만 여자 배우도 좀 많이 등장시켜보자는 의도를 위해 나타난 정도입니다. 다만, 정석용이 자신의 주특기 방식으로 코메디를 펼치는 부분만은 매우 위력적입니다.

박중훈은 학교 다닐 때 정말로 밴드 활동을 한적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안성기는 도대체 어떻게 기타 연주 장면을 해낸 것인지 궁금합니다.

덧글

  • returnet 2006/10/01 09:04 # 답글

    꼭보고 싶은 영화이지만.. 역시 당장은 볼 기회가 오진 않을듯..
    안성기라면.. 이방인을 찍을 때도 그랬지만 배우려는 자세가 여타 배우와는 남달라서 영화에 필요한 장면이었다면 혼신을 다해 연습했을테지..
  • 게렉터 2006/10/08 16:08 # 답글

    과연, 역시 그 모든 것이 단지 "연습" 두 글자로 설명되는 괴력이었다는 말인가.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