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 전략 사령부 Fail-Safe 영화

"핵전략 사령부"는 이제는 피자 시켜 먹다가 남아서 쌓아둔 포장된 오이 피클만큼이나 흔한, "세계의 핵전쟁 멸망을 막기 위해 정부가 온갖 노력을 한다"는 내용 입니다. 심지어 그게 내용 전부 입니다. 줄거리에서 특징적인 점이 있다면, 제임스 본드나 굿스피드-메이슨 팀이 온갖 액션을 벌여서 핵전쟁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역정을 소재로 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지구를 누가 지키는고 하니, 가장 현실적으로 예상할 수 있는 바 그대로, 정부 고위 관리들과 군사 관계자들, 외교 관계자들이 핵전략 사령부를 둘러싸고 진땀나는 고민을 거듭하는 것입니다.


(핵전략 사령부)

"핵전략 사령부"는 이런 이야기입니다. 처음 시작하면, 이른 아침 같은 시각의 뉴욕, 내브라스카, 알래스카, 워싱턴 D.C. 를 보여주고 큰 상관이 없어 보이는 군과 정부 조직의 인사들의 출근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그 날이 채 저물기도 전에 좀 어처구니 없게 갑자기 실수와 사고에 의해 세계는 핵전쟁 위기에 휘말리고, 이 사람들은 서로 이 위기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하나의 거대한 팀이 됩니다. 그들은 이 혼란속에서 별의별 생각을 다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냉전이 첨예한 이 세계는 핵전쟁을 향해 점차 치닫는 듯 합니다.

이 영화의 가장 쉽게 눈에 뜨이는 특징은, 역시, 냉전이 가장 살벌했던 시기의 대립과 핵전쟁 공포를 충실하게 영화의 중심으로 잡았다는 것입니다. 1964년작인 이 영화는 아직 비틀즈가 미국에 제대로 유행하기도 전에 나온 영화이고, 악명 높은 쿠바 미사일 위기 사건이 터진 때와 비슷한 시기에 개봉된 것입니다. 이 영화는 같은 시기에 나온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와 거의 똑같은 내용과 전개 방식을 갖고 있습니다만, 그러면서도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처럼 별다른 희화화나 위기 상황을 통해 조직과 인성을 풍자하는 데 기울어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저 우직하게 냉전과 핵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빈디케이터 폭격기)

당연히 "핵전략 사령부"는 핵무기와 냉전에 대해 사람들이 논쟁하던 가장 중요한 이야기들을 짚어 냅니다. 우선 왜 핵무기가 이처럼 무서운가에 대해서, 핵무기는 작은 실수나 판단 착오, 사고나 광기에 의해서 그 즉시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김정일씨가 헤롱거리고 있을 때 북한 군인들이 자기들끼리 아웅다웅하다가 누군가 좀 막가는 마음에 딱 한 번 "클릭"하면 그 즉시 그 누구의 개입이나 비판도 없이 서울에 핵폭탄이 터지고 한 방에 백만명이 죽는다는 겁니다. 또한 이 영화는 냉전에 대해 사람들이 제기하던 문제도 전형적인 이야기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서로가 극단적인 반목으로 치닫고, 대화가 단절되며, 의심과 공작만을 일삼는다면, 만약의 경우에 그러한 불신과 정신병적인 집착이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고 더욱 치명적인 결과로 나아가도록 가속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거의 시사 보도 프로그램 시나리오처럼 냉전 시대 핵문제의 대표적인 양상을 있는 그대로 영화로 만들다보니, 영화는 정말 교양 프로그램처럼 좀 따분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핵전쟁 위기 직전쯤에 전자 장비가 어쩌고 인간이 어쩌고 하는 부분은 산업혁명 초기에 증기기관 시대 때부터 전해내려오는 반기계주의를 그냥 그대로 울궈먹는 듯 해서 잠시 좀 케케묵은 듯한 느낌도 듭니다. 그렇다고, 무슨 최첨단 장비의 거대함이나 속도감을 보여주는 화려한 특수효과나 거대한 대규모 액션 장면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 영화는 거의 대부분 그냥 지하 핵전략 사령부의 사람들과 그 대화를 보여주면서 진행될 뿐입니다.


(백악관 지하 사령부)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핵전략 사령부"는 시종일관 흡인력을 잃지 않는 영화입니다. 그것은 경제적으로 힘이 넘치는 연출과 흔들림 없이 기본이 충실한 각본 때문입니다.

이런 영화에는 반짝거리는 전자 장치들과 복잡하고 현란한 자동문, 엘레베이터를 보여주는 장면으로 분위기를 잡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핵전략 사령부"의 세부적인 연출들 속에 그런 장면은 거의 없습니다. 거의 벙커속의 IBM 사무실 같은 지하 사령부와 그 황량한 건물들을 그냥 그대로 활용할 뿐입니다. 보고 있으면, 제작비 참 많이 아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영화는 오히려 현대미술적인 배경 묘사 방법을 사용한 연극과 매우 흡사합니다.

매우 심한 명암대비로 흑백화면에서 사람의 윤곽선과 표정을 드러나게 한 뒤, 아무것도 없는 흰 벽면 앞에 이 사람이 말하는 장면만 한참 잡는 것입니다. 이런 극단적인 화면은 상황과 어울리는 긴장감을 높이기도 하고, 이 사람의 고민과 번뇌의 감정을 한 껏 드러내기도 합니다. 또한, 텅빈 배경과 홀로 잡히는 사람의 구도가 고독감이나 살벌함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이런 연출들은 약간 남용되는 듯도 하지만, 효과적으로 강하게 살아 있어서 넘치는 감정과 거친 현실감을 동시에 전해 줍니다. 그러면서, 마치 비구상 미술 요소가 듬뿍들어간 의상과 배경을 이용한 셰익스피어나 그리스 비극을 보는 것처럼, 은근히 그런 구도가 이 종말론 이야기에 어떤 신학적인 느낌이 생겨나는 듯도 합니다.


(대통령)

그 외에도 연출이 멋진 부분은 적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곳에 있는 전략 관계자들의 화면을 연결 할 때, 이들이 공통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상황 스크린 장면을 통해 연결해 나가는 수법은 자연스럽고 조용하면서도 역동적입니다. 그러면서 전쟁에서 정보의 가치라든가, 수천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지휘를 해야하는 사람들이 마치 잠수함에서도 음파탐지기 소리를 듣고 모든 것을 판단해야 하는 듯한 고민을 보여주는 효과도 있습니다. 거대한 전략 속에서 장기판의 졸 신세인 사람들을 상황판 화면을 통해 정말 장기판의 졸처럼 보여줍니다. 그러면서도 적막한 소리와 사람들의 표정, 반응을 잘 연결해서 냉랭한 진짜같은 느낌이 있습니다. 맥 없을 수도 있는 결말에 살짝 수를 써서 마지막에 장중한 느낌을 덧붙이는 것도 좋고, 70년대 괴기 영화 같은 곳에서 볼법한 정신병적인 연출을 아주 살짝 끼워 넣는 것도 강세를 주는 효과가 선명합니다. 한 사람 얼굴과 그 표정만 잡아서 시각적인 것에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가 뒤 이어지는 효과음으로 청각적으로 대조적인 충격감을 주는 연출도 정석 그대로 입니다.

이 영화가 냉전의 대표적인 고민을 그대로 형상화한다는 점 때문에 간과되기 쉬운 요소가 이 영화의 좋은 각본입니다. 언뜻 이 영화의 각본은 "콩쥐팥쥐"나 '흥부전"을 "뽀뽀뽀"에서 영상화한 것처럼 그냥 단순하고 선명한 교훈극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인물과 사건을 그려내는 일관성은 주목할만합니다.

이런 영화는 "유령"이나 "쉬리"처럼 막나가는 테러리스트 비슷한 미치광이와 온건하고 이성적인 주인공의 대립으로 영화를 이끌어나가기 마련입니다. 즉 맛이간 악당과 똑똑한 우리편이 있어서 이들이 대립적인 입장에서 싸우고 토론하면서 이야기를 만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핵전략 사령부"는 그렇게 이야기가 구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야기의 등장인물들은 모두가 다 핵전략 사령부의 성실한 일원들이며 냉전시대의 정상적인 사고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인물들입니다.


(조종사들)

그러면서도 이 영화는 그런 인물들 간의 사상 차이, 입장 차이, 사고 방식의 차이를 단계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런 점들은 이 우화적인 이야기에서 인물들에게 현실감을 불어넣어 줍니다. 냉전에 회의적인 공군 장교와 냉정하고 치밀한 민간인 군사 고문 같은 인물들은 다소 과장된 형태임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틀 안에서 개성적인 인물로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런 설정 속에서, 그 속의 미묘하고 다양한 갈등들을 조금씩 포착하여 뿌려둔 덕에, 어떻게 이러한 군사, 외교적인 문제를 복잡하고 혼란스럽게 만드는지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형적인 악당 없이도 의심과 갈등은 끝이 없고, 그 갈등 자체를 한심하게 생각해 볼만한 관찰의 기회도 줍니다.

환호성을 지르는 병사들 장면이라든가, 말 못하는 장교들 장면은 그러한 설정이 탁월한 부분입니다. 영화에는 공황 상태에 빠진 장면을 구체적으로 강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딱 한 장면있는데, 이러한 이야기 설정이 깔려 있었기 때문에, 이 장면은 꽤 설득력있으면서도 기괴한 힘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절제된 구성이 끝까지 이 영화의 특징인 군사조직과 관료조직 분위기를 잃지 않게 합니다. 미묘한 감정을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대통령-통역의 2인 구도를 활용한것도 잘 만들어져 있습니다. 한편 이 영화속의 소련인들은 제임스 본드 영화에서 나온것과 별다를 바 없이 음험하면서도 어두운 유머 감각을 가진 사람들입니다만, 그런 고정관념속의 개성을 드러내면서도 과함이 없게 절제하고 있는 점도 좋습니다. 짤막한 몇 마디로, 2차대전과 냉전의 기원에 대한 의문을 환기하는 것도 그럴듯해 보입니다.


(통역)

이러한 각본 구성상의 요소는 연출 방법과 어우러져 정말 독특해 질 때도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핵전쟁 위기가 발생하는 순간은 정말 자연스럽습니다. 특별히 파국적인 느낌도 없고, 과장된 당황도 없이, 스물스물 은근히 일이 슬쩍 꼬이는 모습을 담아냅니다. 딱히 난리치면서 소리지르는 사람도 없고, 서류를 들이밀며 멍청한 상사에게 이것좀 들여다보라고 하는 기술자 장면도 없이, 모두가 작전 대응 계획을 생각하는 가운데 천천히 움직이는 상황실 스크린을 통해 핵전쟁 위기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 영화는 거의 배경음악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데 때문에 이 진지한 분위기와 이야기의 차가운 느낌과 주제와 통하는 기계 소음들을 선명하게 들리게 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은 충격적인 소식을 전한답시고, 무슨 슈팅 게임 배경 음악 같은 경박한 음악을 깔아대는 YTN 뉴스 특보와 대조적입니다.

지금 이 영화를 되돌아보기에는, 요즘에는 논의의 유행이 지나간 핵전쟁과 관련된 여러가지 고민거리들을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영화의 중심으로 자리잡아 있는 핵무장의 예민성과 냉전 상대국들의 대화 필요성에 대한 이야기는 물론이고, 제한 핵전쟁이나, 전략-전술 핵전쟁의 개념, 최종기계/멸망의 날 기계 doom's day machine 라든가, 상호확증파괴, 선제 핵공격 같은 전형적인 이야기들을 다시 접할 수 있습니다. 복잡한 감정 표현과 상황 전달을 화면에 혼자 잡혀서 해내고, "핵전쟁 위기를 겪는 대통령"이라는 상상하기 쉽지 않은 인물을 흥미롭게 구체화해낸 대통령역의 옛 배우, 헨리 폰다 역시 단연 칭찬할만합니다.


그 밖에...

원제는 영화 내용에 비해서 역설적인 "Fail-Safe" 입니다.

이 영화에서 초특급 전략폭격기로 나오는 "빈디케이터 Vindicator" 폭격기의 모습은 미공군의 B-58 촬영 필름을 써먹고 있는 것입니다.

영화 마지막 자막 올라갈 때 나오는 이 영화에 대한 미군 당국의 견해를 첨부한 것은 영화의 내용과 어울려 오히려 영화에 효과를 더하고, 미군으로서는 역효과를 생기게 합니다.

40년이 넘게 지난 영화지만 요즘 같을 때는 여전히 시사적인 느낌마저 느낄 수 있을 겁니다.

덧글

  • aerycrow 2006/10/10 12:26 # 답글

    저 개인적으로는 큐브릭의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보다 이 영화를 높히 평가합니다. 좋은 평 읽고 갑니다.
  • 키키 2006/10/10 13:14 # 답글

    통역으로 나오는 배우가 "아내는 요술쟁이"에 나오는 지니의 남편역 배우 . 이름은 까먹었음. 20년 쯤 전에 텔레비젼에서 하는 걸 본 기억이 납니다.
  • Lona 2006/10/10 13:17 # 답글

    Fail-Safe는 핵전쟁을 막을수 있는 어떤 선을 뜻하는 용어입니다. 그 선을 넘어가버리면 사령부에서는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상황이 되는거죠.
  • 미디어몹 2006/10/11 09:05 # 삭제 답글

    곽재식 회원님의 상기 포스트가 미디어몹에 링크가 되었습니다.
  • 게렉터 2006/10/11 11:05 # 답글

    aerycrow/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쪽에서 영화가 너무 비슷해서 이 영화에게 소송을 걸었다는 뒷이야기도 있습니다. 덕분에 이 영화는 좀 손해봤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키키/ Larry Hagman 이었습니다. 달라스, 닙 턱 등에도 출연한 배우임을 알았습니다. 정보 감사합니다.

    Lona/ "fail-safe"는 원래 전자공학이나 기계공학등에서 일종의 안전장치, 예비장치를 말하는 설계요소 였습니다. 요즘 인터넷에서는 프로그래밍쪽에 관한 내용으로도 많이 사용되는 용어이고 말입니다. 영화에서는 말씀하신 의미도 있고, 반대로 폭격기 입장에서 외부의 어떠한 방해가 오더라도 무시하고 폭격을 하는 능력을 나타내고 있기도 합니다. 당연히 지구멸망이나 대량살상의 "안전장치 fail-safe"가 너무나 부족한, 핵무기 체계의 문제점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용어이기도 합니다. 어감상으로는 "safe"라는 것에 "fail"라는 듯한 느낌을 주는 효과도 있습니다.

  • Lona 2006/10/11 12:22 # 답글

    참, 이 영화의 리메이크도 있습니다.(조지 클루니가 나오던가?)
    보진 않았지만, 원 테이크로 갔다는 소문이 있던데.
  • 게렉터 2006/10/11 12:59 # 답글

    "원 테이크" 를 넘어서서 무슨 "우주전쟁" 라디오쇼 처럼 생방송으로 보여준 TV물이었다고 합니다. 비교적 최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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