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짜 영화

"타짜"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공장노동자로 살아가던 순진한 주인공 청년이 공장에서 밤에 벌어지는 도박판에 재미로 잠깐 끼어들었다가 그만 도박의 수렁에 빠집니다. 집에 돌아갈 면목조차 없다고 생각한 주인공은 날린돈을 되찾으려고 이리저리 떠돌면서 도박판을 전전하게 되고, 그러다 스승을 만나기도 하고 동료를 만나기도 하면서 매우 뛰어난 수법을 익힌 전문 사기 도박꾼이 됩니다. 이후 주인공은 비정한 노름판에서 생긴 두어건의 사건에 대해 복수극을 펼치려 합니다.


(스승과 제자)

박진감있는 타악기 소리가 강조된 현대적인 재즈 계통의 음악과 빠르게 나뉘어 전환되는 화면들은 흥겹습니다. 영화 전체에 퍼져 있는 이러한 장면들은 정신없이 돌아가는 도박판의 속도감을 나타내기에도 좋고, 선악이 모호한 도박판의 심리를 나타내기에도 적합합니다. 몇몇 구도나 음악에 있어서는 70년대 미국 TV쇼 액션물 수법을 간간히 사용하기도 하고, 반대로 몇몇 장면에서는 거의 90년대 홍콩영화 같은 번쩍거리고 비틀거리는 화면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범죄물의 음험한 분위기 속에서 이런식으로 음악적인 빠른 리듬감을 살리는 장면만들기들은 "데스페라도" 같은 영화에서 부터, 많은 헐리우드의 여유로운 사기꾼 영화들, "카우보이 비밥" 같은 TV 애니메이션 시리즈와 닮은 면이 많습니다. 이 중에서 찾아본다면, 슬쩍 울적한 분위기와 주인공과 조연의 구도 같은 것들은 "카우보이 비밥" 과 가장 비슷하고, 탈출 장면 하나는 "데스페라도"의 한 장면과 꼭같이 연출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전통적인 도박영화들이나, "내일을 향해 쏴라" 같은 범죄영화들의 수법들도 많이 가미되어 있습니다. 복수극 구조도 인물 폼잡기 장면들을 살리면서도 이야기의 재미를 적절히 유지하는 전통적인 도구로서 활용됩니다.


(정마담)

그런데, "타짜"는 이런 영화들보다는 조금 더 살벌하고, 살짝 더 암담한 느낌이 들어서 도박판의 어두운 현실감을 전달하는 힘이 있습니다. 영화 사이에 자극적으로 간간히 들어가는 유혈낭자 장면이라든지, 설득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보는 것만으로 혀를 차게하는 도박 폐인들의 여러가지 작태들은 영화 전체에 골고루 나뉘어 배치되어서 계속적으로 감정을 돋구고 호기심을 생기게 하기도 합니다. 게다가 "타짜"에는 살금살금 사회 풍자적인 설정들이 조금 들어 있습니다. 이런 내용들을 표현하는데 쓸데없이 기울어지지 않으면서도, 각각의 요소들을 은근히 영화 내내 조금씩 조금씩 비치고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빠른 액션리듬이 잘 유지가 되면서도, 도리어 현실적인 느낌은 특별한 과장없이 더 살아나는 듯 하기까지 합니다.

자극적인 양념 요소들과 속도감 있는 주인공의 무용담 사이에는, 실제 도박사건에서 이래저래 아이디어를 얻은 설정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비닐하우스 같은 곳에서 깊은 밤에 벌어지는 현금 도박판의 광경은 대표적입니다. 헛간이나 다를바 없는 곳에 그 많은 돈이 무슨 폐지 재활용 공장처럼 널브러져서 어지럽게 오갑니다. 그 안에 가득찬 도박꾼들,운영자들과 다양한 소리가 기묘하게 소란스러워지는 모습이, 화면상에 펼쳐질 때 강한 대비감과 양감이 생기도록 과장되어 박력있게 펼쳐져 있습니다. 이런 장면들은 혼란스럽고 영화 화면상으로 풍성한 과장효과가 잘 드러나면서도, 동시에 실제 도박판 풍경을 옮겨 놓은 개성적인 모습이 됩니다.

그 밖에 "타짜"에는 기술이 노련한 부분도 꽤 됩니다. "타짜"에는 한국영화에서 이야기 흐름을 전환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틀에 박힌 방법들이 이래저래 들어가 있습니다. 순박한데가 있는 주점 운영자 2인조라든가, 설명 장면에서 말실수 한 마디를 꼬투리 잡아서 거대한 추리극의 결정적인 증거라고 몰아붙이는 장면들은 특히 눈에 뜨입니다. 이런 장면들은 자칫 뻔하고 지겨우며 억지스럽고 흐름을 어긋나게 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타짜"에서는 배우들의 연기, 앞뒤 장면간의 연결 연출을 최대한 성실하게 살려서 이런 장면조차도 큰 거슬림이 없게 만들어 두었습니다. 격투 장면에서 "비정한 세상"을 그다지 어둡지 않게 보여줄 때 내장산의 단풍잎처럼 흔하게 사용되는 방법인 "클린트 이스트우드 옷입기"는 좀 따분한 느낌은 듭니다만, 역시나 이런 장면에 크게 비중을 싣지 않고 있어서 가볍게 넘어갑니다.


(예림이)

연기자들 중에서 가장 훌륭해 보이는 사람은 조승우와 유해진입니다. 첫부분의 멋모르는 공장 노동자 청년을 연기할 때 조승우는 몇몇 멜로, 가족물의 출연 경험이 솟아나는 듯 보이는가 하면, 거의 홍콩 느와르 급으로 치닫는 막판 장면에서 조승우는 머리숱만 많다 뿐이지 적룡처럼 변신해버립니다. 영화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좀 껄렁하고 건방지고 반항적이면서도, 영화속의 "착한 편"에 좀 더 가까워 보이는 그 모습은, 그 옛날 제임스 딘, 주윤발 같은 사람들의 연기들이 이리저리 잘 본받아져 있습니다. 영화속 잘난척하고 폼잡는 모습에 도취된 듯 보이는 조승우는 이런 범죄 영화의 전형적인 주인공상을 깔끔하게 연기해내고 있습니다.

유해진은 말많고 호들갑스러우면서 비겁한 도박꾼을 연기하고 있는데, 좀 과장된 표현이 영화상에서 풍성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그런 모습사이에서 느껴지는 소박한 일상인의 모습이 나중에는 감정을 이끄는데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웃음을 유발하는 장면을 도맡은 부분에서는, 대사 자체가 그다지 격한 농담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 인물상을 잘 쌓아온 덕택에 자연스럽게 유머를 살리기도 합니다.


(도박판의 2인조)

백윤식과 김혜수 역시 자기 몫을 똑똑히 다 하고 있습니다. 백윤식은 10여년째 지켜온 "대한민국 최고의 사기꾼 연기"가 역시나 허명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너도 미처가고 있구나" 같은 대사는 자칫 아무 힘도 없는 그냥 설명 대사일 뿐일 수도 있는데, 백윤식의 말투와 그간의 인물 설정 덕분에 웃음을 줍니다. 백윤식은 비교적 낯선 사투리를 사용하고 있고, 말투자체가 거기에 크게 적응되어 있지도 않음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목소리와 말하는 속도 조절 때문에 어색한 느낌은 거의 들지 않습니다. 김혜수는 영화에서 필요한 방식으로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뿜어내면서 다양한 장면에서 여러가지 극적인 연기를 뽐내듯 보여줍니다. 그러나, 김혜수가 별로 경험해 본적이 없는 거친 언어를 사용해서 연기하는 장면이나, 현실적인 대사와는 거리가 상당히 먼, 나래이션 대사에서는 설득력이 부족한 어색한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습니다.

"타짜"는 절묘한 줄거리의 상상력이라든가 휘몰아치는 감정이 있는 영화는 아닙니다. 마치 "오션스 일레븐"처럼, 유려한 흐름 속에 끼어든 장면 장면의 볼거리로 충분히 흥미진진한 시간을 주는 쪽에 가깝습니다. "오션스 일레븐"이 농담과 옷차림에 기울어져 있다면, "타짜"는 비정함과 도박폐인 스케치를 좀 더 살리는 쪽입니다. 과함없이 끼어든 짤막짤막한 액션 장면들도 정성들여 연출되어 있고, 음악의 비중이 큰 영화답게 음악도 대체로 듣기 좋은 편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주요 등장 인물 외에도, 지독한 전통적인 악인으로 부족함이 없는 아귀라든가, 이런 영화에서 좀 비현실적이지만 이야기의 부드러운 전개를 위해 꼭필요한 능력을 갖고 있는 조연인 너구리같은 인물들까지, 여러 등장인물들의 개성들도 적당하게 살아 있습니다.


(아귀)

그 밖에...

허영만의 원작 만화 "타짜"와는 다른 부분이 꽤 됩니다. 주인공 고니의 인물과 인생사는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지만, 다른 등장인물들의 비중 조절은 많이 바뀌었습니다. 아귀는 역할은 비슷할지언정 성격은 전혀 다르고, 정마담과 함께 가장 중요한 조연인 유해진의 인물, 광렬은 원작에 비해서는 완전히 새로운 인물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원작이 친근한 배경과 지역적인 느낌, 일대기적인 느낌을 많이 살리고 있는데 비해서, 영화는 라스베가스 도박 영화나 옛날 홍콩 도박영화에 조금 더 가까워진 면이 있어서, 좀 더 비일상적인 세계라는 느낌이 강합니다. 어휘, 도구면에서의 차이도 있어서, 원작에서 중요하게 사용되는 "실화"라는 말이라든가, "작두" 같은 것도 달라졌습니다.

김혜수는 정마담 뿐만 아니라, 예림이 일때도,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 여전히 충분한 저력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10대 배우로 김혜수 정도의 아름다움으로 인기를 끌었던 사람이 결코 많다고 할 수는 없을 텐데, 그러나 근래에 김혜수가 맡게 되는 역할들을 보고 있으니, 흐르는 세월이 야속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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