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머리 앤 赤毛のアン 영화

"빨강머리 앤"의 배경과 등장인물들을 살펴보면 여간해서는 얼마지나지 않아 무슨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날 듯합니다.


(초록색 지붕 집의 앤)

60이 넘도록 결혼하지 않고 남매끼리만 외딴 집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유는 동네사람들도 아무도 모르는 듯 합니다. 이들이 현실과 상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 고아를 입양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남매중에 오빠라는 사람은 대인기피증이 있고, 여성에 공포증이 있는 남자로 매우 말이 없는 사람이고, 결코 교회에 나가지 않는 고집 센 스피노자 주의자인 듯합니다. 남매중에 동생이라는 사람은 기분이 나쁠 때는 죽어라 집을 닦아대는 결벽증이 있고 엄격한 금욕주의자면서 동시에 마을 사람들 몰래 술을 빚어 마시는 사람입니다. 입양된 고아는 무생물과 대화를 하는가하면, 항상 웃어대면서 끊임없이 말을 하는 사람이면서도, 또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한 마디에 갑자기 미친듯이 화를 내거나 폭력을 휘두르는 어린이이며, 외모에 대한 지독한 자기혐오감에 빠진 사람입니다. 이 어린이는 갑자기 생전 처음 보는 옆집 아이의 손을 붙잡고 보자마자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 헌신적인 친구가 되자며 하늘을 우러러 맹세를 읊어 대기도 합니다.

이야기의 배경은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옆집에서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립된 시골집에, 마을 사람들은 꽤 종교적이라 할만한 청교도주의로 하나같이 통일되어 있고, 학교에 가면 가장 인기 있는 남학생이 주인공 고아를 놀립니다. 도끼를 든 사람이 날뛰게 된다든지, 지하실 벽을 파면 뭔가 섬찟한 것이 튀어나온다든지, 학교 행사가 난장판으로 변한다든지, 교회와 목사를 중심으로 정신나간 혈투가 벌어진다든지 할듯한 배경이기에 아주 적합해 보입니다.


(초록색 지붕 집의 영역으로 들어서는 앤 셜리)

그러나, 당연히, "빨강머리 앤"은 조금도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빨강머리 앤"은 착하고 성실한 어른들이 착하고 성실한 어린이를 착하고 성실한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서 길러서, 이 어린이가 착하고 성실하게 자라나는 내용입니다. 남매중의 오빠인 매튜는 말이 없고 수줍음이 많지만 그만큼 너그러운 사람이며, 남매중의 동생인 마릴라는 엄하지만 그만큼 의롭고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주인공인 앤 셜리는 호들갑스럽고 수다스러운 어린이이지만, 그래서 또 명랑하고 꿋꿋한 성격이고, 다양한 감정을 솔직하고 예절을 지켜 드러낼 줄 아는 어린이입니다. "빨강머리 앤"은 캐나다 동부 해안지역의 한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새로운 가정을 얻게된 11세의 앤 셜리라는 의지할 데 없었던 고아가 훌륭한 성인으로 성장할 때까지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의외로 이 이야기에서, 앞서 언급한 불안할 수도 있고 이상할 수도 있는 인물과 배경은 꽤 중요한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약간만 각도를 달리하면 매우 어둡고 폭력적인 내용으로 흘러갈 수 있는 요소들이 이야기에 현실감과 존재감을 키워주는 것입니다.

거의 이상향에 가까운 풍요롭고 평화로운 시골 마을에서 불쌍한 고아가 호의로운 사람들의 선량함으로 바르게 커간다는 "빨강머리 앤" 이야기는 거의 루소나 맹자 같은 사람들이 언급하는 우화의 줄거리와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가 생동감이 넘쳐 흘러서 모든 등장인물들이 마치 언제인가 실제로 있었던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바로 이러한 우울한 이면으로 비칠 수 있는 가능성이 이야기에 묘하게 깔려서, 눈에 띄지 않게 중후함을 주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어린이가 부유한 집안에서 여유롭게 공부해서 잘 자라난다면 TV보험광고속의 꿈일 뿐이지만, 주근깨에 열등감이 있는 앤 셜리가 생판모르는 이상한 나이든 남매와 함께 살면서 밝은 미래로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모습은 사연이 과하지 않을 때 오히려 더 그럴듯한 이야기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해질녘의 들판)

요컨데, "빨강머리 앤"의 이야기는 무척 흡인력이 있지만, 또한 조용한 이야기일 뿐입니다. 이 이야기는 시골 마을에서 약간은 특이한 어린이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일을 다루고 있지만, 요란한 소동극이나 심각한 갈등이 있는 멜로극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는 특징이 있는 것입니다. "톰 소여의 모험"이나 "애니", "올리버 트위스트" 같은 이야기와는 다르게, "빨강머리 앤"이 다루는 이야기들은 소박합니다. 어린이가 친구를 사귀고, 집안일을 돕고, 다른 환경에 낯설어 하고, 방학에 즐거워하고, 학교에서 공부로 경쟁을하는 평범한 이야기들이 누구나 겪을 법할 정도의 사연으로 전개될 뿐입니다. 다만 그런 속에서도 충분한 특징을 지닌 인물들이 있고, 그런 인물들 덕택에 그 사연들은 흥미를 끌게 되며, 따라서 시청자들이 일상생활에서 반추할 수 있는 감정과 감동으로 더욱 잘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 형태는 깊어지면 깊어 질 수록 이야기를 제시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뒤져볼 거리를 주는 법입니다. 예를 들어, "빨강머리 앤"에서는 앤 셜리가 남자 어린이 대신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앤과 다이아나와의 다양한 관계양상을 보고 있으면 이로 부터, 두 사람의 관계를 대화에서 언급되고 있는 것과는 다른 각도로 살펴볼 수 있을 겁니다. 또한 이것은 이 시대 혹은 이 나이 또래 여자 어린이들의 교우관계에 대한 한 단면을 탐구하게 하기도 합니다. 이외에도 "빨강머리 앤" 이야기에서는 캐나다의 정치 경제적 발전 양상에 대한 생각이나, 여성 권익, 사회 복지에 관한 생각을 찾아 낼 거리도 충분 합니다.


(에이본리 마을)

"빨강머리 앤"의 연출 방법은 이 이야기의 조용하고도 흡인력 있는 전달에 꼭 맞도록 되어 있습니다. 시간을 천천히 충분히 사용하고, 사람들의 대화를 담아내는데 치중하면서 인물들의 다양한 표정들을 보여 주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특히 "빨강머리 앤"에서 가장 멋진 부분인 첫부분에서는, 정말 천천히 이야기를 진행시켜서, 인물들의 한 마디 한 마디 마다 세세하게 변해가는 감정 동요를 하나하나 짚어갑니다. 그렇게해서 거의 실시간 진행에 맞먹을 정도로 차분하고 조용하게 감정을 전달하고, 주변 경치를 차분하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연출은 "빨강머리 앤"에 담겨 있는 중심 주제와도 잘 얽혀 있습니다. "빨강머리 앤"은 이렇게 한껏 아름답게 그려진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서, 어린 시절 겪는 소박하지만 소중한 경험들을 그려내고, 이를 통해 공감을 얻게 하고 또 동심을 되살리게 합니다. 한편으로 "빨강머리 앤"은 워낙에 어른들이 걱정하고 고민하느라 잊기 쉬운, 어린이를 어른들이 사랑하면서 얼마나 큰 정서적인 풍요로움과 인간적인 성숙을 경험하는지를 깊이 있게 새겨줍니다. 특히, 마릴라의 비중이 매우 높은 TV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은 이러한 주제를 양육자의 자애와 동시에 제시하는 데 매우 탁월합니다. 단순한 가족주의나 혈육에 대한 집착으로 부모의 사랑을 묘사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평생 가정이나 아이 키우기와는 거리가 멀었던 두 사람이 앤을 입양하고 키우는 모습은, 사람사이의 정서적인 유대와 사회화 과정 자체가 인생에서 어떤 의미인지 지적하기에 좋습니다.


(낯선 자기 집에서 맞는 첫 아침)

연출은 각각의 인물 묘사로 구체화 됩니다. 매튜나 다이아나와 같은 조연들의 모습은 그다지 개성적인 그림은 아니지만, 보기 좋은데다가 조연으로서 인물의 성격을 보여주기에는 무리가 없습니다. 이 점은 주인공 앤 셜리의 후반부 모습도 마찬가지 입니다.


(매튜와 앤 셜리)

한편, 11세, 12세 무렵의 초반부 앤 셜리의 모습은 기막히게 멋지게 이야기와 부합하는 절묘한 것입니다. 어린 앤 셜리의 모습은 시청자에게 쉽게 호감을 주면서도 앤 셜리가 느끼는 다양한 열등감과 부합해야 합니다. "빨강머리 앤"에서는 그런 앤 셜리를 뛰어난 솜씨로 형상화했을 뿐만 아니라, 섬세하게 변화하는 표정과 눈빛, 몸 동작과 움직임들을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혹은 살아 있는 사람 이상으로 내용을 잘 전달할 수 있도록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앤 셜리의 목소리 연기는 또 독특한 면이 있습니다. 한국판의 앤 셜리 목소리 연기는 다소간은 60, 70년대식 한국 성우연기의 양식화된 문어체 과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다른 인물들의 목소리나 일본판 앤 셜리 목소리와 비교해 봐도 확실히 그런 면은 현실적인 인물의 말하는 투와는 꽤 거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목소리가 한없이 문어체적인 과장된 표현을 끝없이 읊어대는 앤 셜리의 대사 자체와 어울리는 기묘한 데가 있습니다. 앤 셜리는 멀쩡한 집 앞에 심어둔 꽃나무를 보고 괜히 "눈의 여왕"이라고 큰 소리로 불러보는 사람인 만큼, 기나긴 감정 독백을 읊는 신파극 연기와 통하는 것입니다. 이런 한국판 앤 셜리의 연기는 배경이 되는 시대의 문학적인 분위기와 어울리기도 하고, 비슷한 방식으로 목소리 연기를 하는 단짝 친구 다이아나의 목소리 연기와도 장단이 잘 맞아서 묘하게 듣기 좋습니다.


(기쁨의 하얀 길)

앤 셜리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중요한 인물인 마릴라 역시 매우 잘 묘사된 인물입니다. 어떤 면에서 마릴라는 진정한 "빨강머리 앤"의 주인공이라 할 만합니다. 엄격하고 성실한 청교도 금욕주의자와 그 이면에 숨어 있는 열등감이라든가, 자애로운 면이, 굳이 드러내서 드러난다는 느낌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자연스럽게 조금씩 베어납니다. 표정 표현도 좋고, 작고 어린 앤이나 수척해 보이는 매튜에 비해 비해, 날카로운 인상을 잃지 않고 있으면서도 덩치 있게 그려진것도 인물간의 인상 비교를 주기에 무척 좋습니다. 이런 인물 외모는 다른 많은 "Anne Of Green Gables"의 드라마, 애니메이션들 중에서도 아이디어를 칭찬할만한 멋진 것입니다.

더군다나, 마릴라와 매튜의 한국판 성우들의 목소리 연기는 거의 그 인물 자체라 할 만큼 뛰어납니다. 특히 마릴라의 경우에는 연기력도 대단하며, 이야기 전체에 걸쳐 마릴라가 갖고 있는 그 다양한 감정들을 폭넓게 표현하기에도 좋습니다. 그러면서도 엄한 장년 부인이라는 마릴라라는 기본 인상은 굳건히 뿜어낼 수 있는 목소리입니다. 앤 셜리와는 대비되는 현실적인 어조와 감정으로 연기하고 동시에 다양한 문어체 표현들도 부드럽게 현실화해버리는 기술도 능수능란합니다. 좀 과장하면, "빨강머리 앤"에서 앤은 어린이의 돌이켜 보고 싶은 추억속의 감정들을 뿜어낼 뿐이고, 이 이야기속에서 인생의 흐름이라든가, 인간의 따뜻한 감정 교류 같은 것을 표현하는 연기는 마릴라가 거의 도맡고 있다고 할만합니다. TV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에서 마릴라의 묘사는 여러모로 그 몫을 잘해내고 있는 것입니다.


(마릴라와의 식사)

이야기가 조용하고 평화로운 가치를 일깨우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 만큼, 이야기는 자칫 너무 느리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잠깐 잠깐 따분한 이야기가 시청률 급락으로 빠져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느리고 담백한 이야기를 좋은 볼거리로 승화하기 위해서 두 가지 술수를 부렸습니다. 하나는 줄거리 자체에 들어 있는 것이고, 하나는 TV 애니메이션 제작진이 덧붙인 노고입니다.


(상상 장면)

앞의 것은 바로, 주인공이 고아라는 점을 십분 활용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정상적인 가정과, 정상적인 교우관계를 잘 경험해 보지 못한 고아가 평범한 어린이의 삶을 시도해나가는 과정이 조망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다스럽고 감성적인 주인공을 통해서 그냥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어린이의 삶을 하나하나 신기하고 즐거운 것으로 구체적으로 관찰하고 분석합니다. 이렇게 해서 호칭 문제라든가, 자기 집과 자기 방을 갖는 것에 대한 애착이라든가 하는 일상적인 것을, 중대한 이야기거리로 삼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평범한 일상의 평온한 느낌과 여행과 모험의 새로운 느낌을 동시에 줄 수 있는 좋은 수법입니다. 물론 사소한 일에 무한대로 감동해 버리는 앤을 이용해서 적절한 재치와 웃음을 표현하는 재미도 흥겹습니다.

초반부에 이 수법은 특징적인 연출의 힘을 얻어 화려하게 작렬해 나갑니다. 장면들은 애니메이션의 표현력을 십분 살려서, 앤 셜리의 상상 장면과 현실 장면이 아주 자연스럽게 교차됩니다. 이런 화면들은 대사와 어우러져 속도감있는 자료화면 처럼 이야기 전달을 돕습니다. 이 장면의 화려함들은 20년 후쯤에 유행할 "앨리 맥빌"의 비슷한 상상 장면을 간단하게 압도합니다. 한편 "빨강머리 앤"의 상징 연출이라 할만한, 끊임없이 앤이 이야기하는 모습을 담으면서, 다양한 배경에서 다양한 일을 하는 모습을 계속 연결해 나가는 장면 표현 방법도 있습니다. 이런 연출은 앤의 수다스러운 말투와 들뜬 감정을 잘 표현하면서, 동시에 시간의 흐름과 다양한 정경을 보여 줄 수도 있는 화면상의 박진감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특히 19세기말의 만화풍이 살아 있는 "이야기회"의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는 신나는 볼거리라 할만합니다.


(너무나도 비극적이고 충격적인 사랑 이야기)

뒤의 것은 가끔 막나간다 싶을 만큼 고생한 흔적이 역력히 보이는 괴력의 풍경 묘사입니다. 제작진은 거의 겸재 정선이 인왕제색도를 그리는 심정으로 이 캐나다 시골을 그린 듯 보입니다.

이야기 전개에 따라 펼쳐지는 사계절의 시골 풍경과 풍요롭고 자연과 가까운 신대륙 시골의 감상이 풍경화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몇 프레임만에 지나가는 애니메이션 장면이라고 하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심하게 아름답습니다. 이런 묘사들은 실제 캐나다 현지의 풍경을 참조하여 사실감을 갖고 있으면서도, 또한 회화적인 특징 설정과 적절한 표현기법으로 현실 보다 더욱 멋진 모습으로 화폭에 담겼습니다. "세계명작극장" 시리즈의 풍경 묘사가 전체적으로 정성스런 경향이 있긴 합니다만, 특히 "빨강머리 앤"은, 괜히 이름난 화가의 그림이라고 무조건 잘 그렸다고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대신, 이 마을의 언제 어디를 그린 장면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나를 감상으로 느껴보는 것이 초중학교 미술교육에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반짝이는 호수)

여기에 덧붙여, 화면에 담긴 19세기말의 생활상에 대한 표현 역시 좋은 볼거리 입니다. 완벽한 고증이라고 하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있습니다만, 매일 아침 점심 저녁 사람들의 음식, 식사 방식이나, 의상의 유행, 탈 것, 집, 경작 방식과 경제 생활, 종교 관습, 교육 과정이나 수업 방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일상생활의 특징들이 방대하게 조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요소들이 흡인력을 줄 수 있게 잡혀 있습니다. 몇몇 시대상을 보여주는 장면들은 이야기의 현실감과 가상적인 느낌, 사극의 느낌과 소박한 개인의 이야기가 교차하는 부분들과 더불어 더 효과가 큽니다.

예를 들어 정치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마을 어른들이 가고 난 날 밤, 앤이 다이아나 집에 가게 되는 에피소드 같은 것들은 이런 바탕 위에서 더 힘을 얻고 있습니다. 아예 케익, 딸기 주스 이야기 혹은 목사님 댁에 관한 이야기들은 이런 고증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학예회 전후의 에피소드에서 복선을 깔아온 볼록 소매옷을 이용하는 것은 회화적 표현과 더불어 큰 감동을 주기도 합니다. 좀 더 크게는 초기 자본주의 발전 모습 중 중요한 일면인 19세기 4/4분기 공황이라 불리우는 빈 거래소 공황, 프랑스 공황의 여파가 간접적이지만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마차의 모양과 마차에 오르는 모양)

한국과 일본에서 공히 큰 인기를 끈 "빨강머리 앤"에도 역시 부족한 점은 있습니다. 고아의 평범한 일상 모험이라는 이야기가 한 축을 차지하는 초반을 넘어가고 나서 졸업 무렵쯤이 되면 앤 셜리는 좀 재미없는 인물이 됩니다. 일상 생활에서 소중한 기억을 포착하는 밑천은 부족해진듯하고 모든 갈등은 그저 해피 엔딩을 향해 만사 고민을 잊고 달려갈 뿐입니다. "잘 생겼다"라는 특징만을 표현하는데 신경 쓰다가 무슨 선전 포스터 인물처럼 그려져 버린 길버트의 모습은 부실합니다. 길버트는 결말이나 주요 갈등마다 들먹이는 사람으로 시청자에게 중요하게 여겨지는 인물입니다만, "초특급 멋있는 남학생" 이라는 허상만으로 떠도는 인물이라서 가끔 전체 이야기에서 허하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결말은 그런 부실함을 덮어 버리고, 오히려 그 덕분에 이어온 여운이 강합니다. 또한 가끔씩 베토벤 6번 교향곡에 도전하려는 용기를 보여주는 듯한 낭만주의 배경음악도 이 시골 마을 표현을 장중하고도 아름답게 가꾸어 냅니다. 50회에 이르는 방영시간을 충분히 활용해서, 꾸준하고 거슬림없이 복선을 제시하고 있는 부분들과 과거를 돌이키며 회상의 아련함에 젖는 장면을 잘 이끌어낸 것도 훌륭해 보입니다. 역무원이 마중 나온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어린이를 보고 한 마디 하고 지나가는 짧은 장면은 그 중에서도 은근함이 극에 달합니다. 이런 많은 순간들은 따뜻한 고향 시골 풍경 속에서 앤이 성장하고, 마릴라 또한 새롭게 나아간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에 아주 잘 어울리고 있습니다.


(기차 역에서 기다리고 있는 앤 셜리)

그 밖에...

일본어 중역 투의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막판의 "You are my girl." 같은 대사는 굳이 "너는 내 딸이야"로 번역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오히려 여러가지 인용구라든가 시적인 표현은 잘 살아 있는 편입니다. 저는 가끔 일본어 중역이 좋은 점도 있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정말 사전 한 번 찾아보는 정도의 성의가 없어서 개떡같은 번역을 해놓은 영한 번역이 범람하는 때에는, 차라리 성의있게 번역한 일본어판을 좀 더 직역이 간편한 한국어판으로 옮긴 것이 여러모로 원래의 뜻을 즐겁게 읽어나가기 좋을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원작자인 루시 모드 몽고메리는 "빨강머리 앤"에 해당하는 "Anne Of Green Gables"의 인기 덕분에 죽을 때까지 속편을 계속 써내야 했습니다. "Anne Of Green Gables"은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자전적인 내용과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를 섞어 담아낸 인기작이고, 그 속편들도 워낙 한국에서 팬 층이 두터워 많이들 읽히고 있습니다. 앤 셜리가 취직하고 결혼하고 애낳고 늙어가는 모습이 끝없는 속편의 물결들 속에서 펼쳐집니다.

저는 1화의 느릿느릿한 연출 속에 풍경을 담아내는 모습과, 희망이 절망으로 뒤바뀌는 2화를 가장 좋아합니다. 대사들 중에서는 자기 이름을 굳이 본명 앤으로 부르시려거든, "Ann" 말고 e자가 붙은 "Anne"으로 불러 달라는 부분을 좋아합니다. 이름을 부를 때 글자가 머릿속에 지나가지 않느냐는 이야기가 재미있는 부분도 있고 공감가는 부분도 있어서 입니다.

역시나 많은 팬들에게 추모된 일입니다만, 앤을 연기한 성우 정경애는 대한항공 괌 사고 때, 가족들과 함께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발매된 DVD에는 KBS 더빙이 없는 부분에 다른 성우가 더빙한 장면이 조금 끼어 있는데, 이 장면에서 KBS 더빙판의 위력을 실감하게 해 줍니다. 실은 방송판을 거의 보지 못했는데, 이 DVD가 생긴 탓에 긴 시간 틈틈히 보다가 드디어 끝에 닿았습니다. 최근에 몰아서 본 것은 아마도 가을에 잘 어울리기 때문인가 합니다.

덧글

  • Lona 2006/10/17 13:29 # 답글

    대단합니다, 잘 읽고 갑니다.
  • Justin 2006/10/17 18:45 # 삭제 답글

    잘 읽고 갑니다. 50화에 도전하셔서 성공하셨다니 축하드립니다. 저는 어느순간 지루해지려고 하는 그 타이밈을 참지 못해 항상 비슷한 부분에서 멈추곤 했습니다.
    일본에서는 빨강머리 앤 투어가 있을만큼 대단한 인기였다고 하는데, 실제로 한국에서는 그정도는 아니었죠.
    오히려 같은 명작동화 시리즈 중에 하이디와 소공녀가 좀 더 인기있었다고나 할까요. 그러고보면 성우더빙은 우리나라도 굉장히 훌륭한 면이 많은데 사람들에 관심밖 영역이라 아쉽네요.
  • 게렉터 2006/10/18 10:21 # 답글

    Lona/ 감사합니다.

    Justin/ 길게 보면 한국에서 인기도 만만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투어 같은 붐으로 커지기에는, 인기 자체의 차이보다는, 아무래도 TV애니메이션을 수용하는 대중 문화의 분위기 차이가 컸다는 추정을 해 봅니다.

    여러가지 판의 빨강머리 앤이 재방송 까지 합하면 공중파에서 가장 많이 방영된 나라 순위에서 무척 앞쪽에 있는 나라가 우리나라이고, 인터넷에 떠도는 팬사이트들의 수준이나, 많은 사람들의 인지도를 봐도 "빨강머리 앤"에 그나마 견줄만한 세계명작극장 시리즈는 오히려 "플란더스의 개" 정도가 아닐지 싶습니다. 한국어 더빙판이 전편 발매된 DVD를 봐도 그렇다는 생각이 들고 말입니다.

    더군다나, "플란더스의 개"는 파트라슈와 네로에 대한 기억이야 전국민적이지만, 원작을 읽고 인물들 자체에 빠져 팬으로 웹사이트를 만들고 하는 쪽으로 발전하는 것에서는 확실히 "빨강머리 앤"에 좀 밀리지 않나 생각합니다.
  • FAZZ 2006/10/19 11:16 # 답글

    빨간머리앤 TV애니메이션에서 개인적으로 젤 괴리감이 느껴졌던 것이 바로 캐릭터들이 나중에 성장한 모습이 나오는 후반부였습니다.
    아이들은 성장했는데 옷이랑 머리 모양은 그대로라니..... 좀 바꿔주지....
  • 게렉터 2006/10/21 10:37 # 답글

    애니메이션의 표현을 위해서 한 벌, 한 머리 모양으로 수십년 동안 때우는 인물들은 소위 "캐릭터"란 것의 운명이 아닌가 싶습니다. 몇몇 만화가 들은 인물들의 차이가 오직 머리 모양으로만 표현되는 경우도 많고 말입니다.
  • 요한 2006/12/30 16:36 # 답글

    맞아요, 만화나 환타지류에서는 일종 복장 역시 캐릭터의 일부라고 봐야죠.
  • 게렉터 2006/12/31 17:38 # 답글

    예, 뽀빠이에서 담배 파이프를 빼고, 도널드 덕 보고 모자를 벗고 다니라고 하면, 이 인물들은 아마 자아정체성의 위기에 절망할 겁니다.
  • 2007/03/05 18:18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카오루 2007/03/07 08:13 # 답글

    안녕하세요. 이글정말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빨간머리앤 TV에서 해줄때 정말 열광적으로 봤었죠. 너무너무 재밌었었습니다. 스샷들 보면서 어제 본것같은 기분을 느꼈어요. 그만큼 열심히 봤던것 같습니다. 글 정말 잘읽었습니다.
  • 게렉터 2007/03/07 13:28 # 답글

    카오루/ 감사합니다. 저는 원작의 열렬한 팬과는 거리가 있기에 좀 더 입체적이고 세세한 이야기는 잘 몰라서 이를 빠뜨린 점은 좀 아쉽기도 합니다.
  • cheill 2007/03/12 13:07 # 삭제 답글

    빨강머리앤의 하우스 (미니어쳐,모형)구경하세요
    www.minigo.co.kr
  • Mohae 2007/03/20 19:59 # 삭제 답글

    세상에. 너무나 멋진 포스팅에 감동하고 갑니다. 빨간머리앤에 대한 이정도로 공감할수 있는 포스트는 처음보는군요.특히 맨 앞부분의 분석이 흥미롭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시무시한 일이 생길 것만 같은..' 이라는 묘사와 독특한 시각의 관찰력에 감탄했습니다 ㅋㅋㅋ 스크랩해갈게요!
  • 게렉터 2007/03/21 13:51 # 답글

    Mohae/ 블로그에 적혀 있듯이 부분인용과 링크는 무제한 허용합니다만, 전문 인용은 e메일로 허락을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 정예준 2007/08/05 15:14 # 삭제 답글

    사랑해요.
  • 게렉터 2007/08/06 12:19 # 답글

    정예준/ ... LG? (90년대 유머)
  • 다락 2008/05/05 23:37 # 답글


    오늘 ebs에서 앤을 우연히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재방을 하는 모양인데 시간이 참 난감하기는 했지만,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어 광폭해져버린 앤셜리의 모습을 보면서 반가운 마음에 어머나!를 연발했어요. ^^ 게렉터님의 글들을 하나 하나씩 읽어가면서 웃고, 감탄하다 그냥 지나치기 어려워 결국 이렇게 글을 남깁니다. 재미난 글에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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