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어나더 데이 Die Another Day 영화

"007 어나더 데이 Die Another Day"는 중반부까지는 꽤 괜찮습니다. 제임스 본드는 유래 없이 이상한 일을 당하는 경험을 하고, 이국적인 악당들과 궁금증을 자아내는 실체가 조금씩 드러나며, 액션들은 과함이 없이 경쾌합니다. 내용인즉, 북한의 과격파 미치광이 대령 한 명이 북한 정부를 뒤엎어버리고 한반도에서 뭔가 큰 사고를 하나 터뜨리려 하는데, 이것이 제임스 본드를 배신한 조직 내부의 비밀첩자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본드, 제임스 본드)

초중반부에서 무엇보다 칭찬할만한 점은 전세계를 일주하는 여정으로 다양한 지역을 유람하는데, 그 세계 일주를 빠르고 경쾌하게 연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건이 계속 펼쳐지면서 제임스 본드는 단숨에 비무장 지대에서 중국, 쿠바, 영국, 아이슬란드로 이동해 나갑니다. 장면이 바뀔 때마다 여행과 모험의 설레는 심상을 가득 뿜어냅니다. 어두운 영화관을 반짝거리는 홍콩의 야경으로 장식하는 홍콩 등장장면은 미술적으로 극적이며, 멋드러진 음악사용과 함께 쿠바의 하바나로 이동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장면전환은 여러모로 정교하다는 생각을 들게 합니다.

이러한 발빠른 장면 전환들은 그 사이사이 영화에 가득차 있는 제임스 본드 시리즈에 대한 기념 장면들 때문에 구경거리가 더 많아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007 어나더 데이"는 20번째 제임스 본드 영화이며, 제임스 본드 영화 40주년 영화이고, 또 데니스 르웰린이 Q배역을 떠난 후 만들어진 첫 제임스 본드 영화이면서, 결과적으로 피어스 브로스넌의 마지막 제임스 본드 영화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 영화속에는 옛 제임스 본드 시리즈와 그 전통을 되살리고 돌이키는 부분들이 군데군데 있으며, 심지어 그런 예들을 웃음거리로 삼는 장면들도 있습니다. Q가 시계를 건네 줄 때의 대사라든가, 비행기에서 보드카 마티니를 받아드는 장면은, 20탄 까지 나온 시리즈 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 유머 입니다.


(북한에서 휴전선으로)

"007 골드핑거 (황금작전)" 이후로, 풍광 유람과 패션쇼를 여유롭게 즐길 수 있게하는 것은 제임스 본드 시리즈의 주된 멋이었습니다. 듣기 좋은 음악과 농담에 능숙한 주인공이 호기심 생기는 사건들을 펼치면서 수많은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장소들을 거쳐가는 것이 마치 미스터리 스릴러의 양념을 친 "세계 여행 항공패스와 함께하는 풍물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중반까지의 "007 어나더 데이"는 상당히 성공적입니다. 넘치는 미인계와 제임스 본드의 날카로움과 여유가 잡탕이 되었으면서 살짝 진지한 스파이 영화 냄새도 베어 있는 사건도 재미있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홍콩의 호텔 장면은 흐뭇할 정도입니다.


(휴전선에서 홍콩으로)

액션들도 충분히 괜찮다고 할만합니다. 초반 액션은 어색한 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빠르고 시각적인 액션으로 난리를 치다가 느리고 청각적인 종소리와 실없는 농담 한 마디로 끝을 맺는 것은 확실히 꽤 괜찮은 구성이라 할만합니다. 할 베리가 달리면서 사격하는 장면이라든가, 설원의 카체이싱도 능숙한 액션 영화 달인의 솜씨처럼 생각될 수준입니다.


(홍콩에서 하바나로)

문제는 중반 이후부터 터져나오기 시작합니다. 기본적으로 문제의 바탕을 이루는 것은 "최첨단 기술"이라는 수식어구만 붙이면 아무렇게나 보여줘도 뭐든지 다되는 줄 아는 황당무계함입니다.


(하바나에서 런던으로: 마돈나와 피어스 브로스넌)

"007 두번 산다 You Only Live Twice" 같은 영화도 허무맹랑한 상상력이라면 둘째가기 서러운 영화이고, "007 문레이커 Moonraker"의 경우에는 SF 설정이 도가 지나쳐서 영화 전체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듯 하기까지 했습니다. "007 어나더 데이"는 두 영화에 조금도 뒤쳐지지 않을 정도의 허무함을 자랑합니다. 투명자동차나 우주 레이저포는 기본입니다. 이 정도는 차라리 넘어가기 쉽습니다. "스타쉽 트루퍼스"나 "파워레인저" 유니폼 보다 더 이상해 보이는 강화복이나, "유전자 어쩌고"만 붙이면 뭐든지 다해 낼 수 있는 기술이 된다고 착각한 듯한 둔갑술은 정말 분위기를 흐립니다. 결정적으로 제임스 본드 설원에서 살아남기 장면은 심지어 특수효과까지 가짜티를 내는 경악스러운 불사신 주인공 장면이 되어 버립니다.

이런 장면들은 어느 정도 진지한 맛이 있어야 재미가 사는, 옷차림 보여주기, 경치 보여주기라는 제임스 본드 영화의 묘미를 없애 버립니다. 정말 거기 있는 관광명소 같은 아이슬란드 빙원의 호텔이, 졸지에 스파이더맨과 원더우먼의 세계에나 나올 법한 게렉터의 비밀기지처럼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정말 비현실적인 제임스 본드 시리즈일 지언정, 이런 좀 위험한 공상스러운 장면들은 조금만, 그것도 마지막판에 몰아서 배치하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런데도 "007 어나더 데이"는 그걸 주체 못하고 남용한 면이 있습니다. 이 짓 덕분에, 꽤 그럴듯한 악당이 될 수 있었던 구스타프는 손해보는 점이 많습니다.


(런던에서 아이슬란드의 설원으로)

그리하여, 악당들의 역할은 그저 그런 편입니다. 인민 무력부장쯤을 지낸 듯 보이는 장군의 아들인 문 대령은 시작은 그럴듯한 인물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과 갈등이 있고, 그러면서 급진적인 사상에 약간 맛이 간 성격이 살벌한 군인 모습 속에 녹아 있습니다. 이러한 문 대령과, 온건파이며 무엇보다 가장 제정신인 인물인 듯 보이는 문 대령 아버지와의 갈등은 흥미로운 소재가 됩니다. 이 소재는 이래저래 이야기의 전체 흐름에 공헌하는 바도 많습니다. 한국 관객에게는 문대령 아버지의 한국어 발음이 최악이기에 좀 거슬리긴 합니다만, 이 문대령 아버지 배우는 배역 설정, 연기 형식도 조화롭습니다. 노래 가사 처럼 손자병법 "영어판"을 읊는 어색함이나, 바보 같은 장풍 쏘는 기능이 있는 강화복만 없애 버렸다면 훨씬 더 좋은 이야기가 되었을 겁니다.

"자오"는 아마도 중국계 한국인 내지는 한국계 중국인으로 보이는 사람으로, 체 게바라를 들먹이고 다닐 것이 분명한 국제 테러리스트입니다. 릭 윤은 자오의 버전1.0 모습과 버전 2.0 모습을 모두 잘 연기하고 있고, 다이아몬드가 박힌 얼굴이라는 설정도 귀가 큰 한명회, 애꾸눈 궁예 못지 않게 그럴듯한 모양입니다. 다만, 자오는 모든 대사를 무조건 "무섭게 겁주는 목소리로 한다"라는 규칙을 따르고 있습니다. 릭 윤은 이 대사도 못하는 편은 아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무서운 목소리만 하다보니까 아무래도 좀 가짜 같고 재미 없어질 때가 있습니다. 이런 극단적인 초특급 무서운 인물은 터미네이터나 다스 베이더 정도로 완성하지 못하는 한은 실패하기 쉬우니 말입니다.


(주제곡 장면)

천박한 농담을 살짝 안 천박한 척 하면서 들먹이는 것은 제임스 본드 영화의 잔재미라 할만합니다. "007 어나더 데이"도 마지막 장면의 "오스틴 파워"스러운 농담따먹기를 제외하면 그런 점들은 대강 들을 만합니다. 또 이 영화는 내부 배신자라는 이야기 구성 요소 때문에 제임스 본드의 상관 M의 역할이 중요한 편인데, 제임스 본드에게 냉정한 척 하지만, 사실은 무척 부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피어스 브로스넌 본드 시절의 M 성격을 잘 살릴 수 있도록 이야기가 구성되어 있다는 점도 좋습니다. 주디 덴치의 연기나, 이런 점을 표현하는 장면의 배경이 007의 고향, 영국 런던의 대표적인 상징들이 집합된, "빅벤이 올려다 보이는 템즈 강변의 지하철 역"이라는 점은 더욱 맛을 돋굽니다.


(빅벤이 올려다 보이는 템즈 강변의 지하철 역으로 들어서는 제임스 본드)

다행히 "007 어나더 데이"는 기념비적인 성격이 영화의 단점들을 좀 가려주는 면이 있습니다. 한편 할 베리를 기용했고, 제임스 본드 이상으로 멋을 부리는 데다가, 쿠바의 섬 탈출 장면에서 대활약을 하는 등 매우 유능한 요원으로 나오지만, 모든 여자 배역을 도합해 놓고 봤을 때는 오히려 여자 배우의 역할이 크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제임스 본드 영화이기도 합니다.


(뭇 한국 밀리터리 매니아들의 이야기거리가 된 "창천1동 대"라고 인쇄된 정체불명의 유니폼)


그 밖에...

동계 올림픽에서 시작된 반미 감정이 유행했던 시기에 개봉해서 한국에서는 흥행에 큰 재미를 못 본 영화입니다. 이 영화가 북한을 다룬다는 점 때문에 인터넷을 통해 007에 나온다는 한국 비하 장면들에 대한 이야기가 유행하기도 했는데, 적잖은 한국의 멀쩡한 신문사들이 아무 사실 확인 없이 사실과 다른 뜬소문을 지면에 기사화하는 무성의함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죽이고 싶을 따름입니다.. 여러분. 친구의 부탁이니 이 글을 퍼트려 주십시오.. 힘 약한 우리나라에 울분이 터져서.. 부탁합니다.. 한국 웹에.. 부탁합니다.."라는 말로 끝나는 이 글은 영화를 보거나, 영화를 본 사람에게 물어보기만하면 바로 따져 볼 수 있는 내용들이었습니다. 정치적인 유행에 따라 오락 영화의 흥행이 결정되는 것이야 당연한 일입니다만, 사실과 왜곡이 어떤식으로 전파되어 나가는지에 관한 생각해 볼 거리는 되는 일이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자오가 제임스 본드를 처음 만났을 때, 시각을 확인한 후 "나는 자오요. 당신은 늦었군." 이라고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중국어에서 자오가 "일찍"이라는 뜻의 早 로 들릴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나름대로 언어유희가 되는 장면입니다.

적어도 쿠바 작전때까지는 "정말로 제임스 본드가 고문 당해서 중요정보를 북한에 불어 버린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하는 의심을 관객이 하도록 유도하는 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관객들은 제임스 본드 고문 담당이었던 북한군 장교가 나가면서 최종보고를 하는데 "자백을 받는데 실패했습니다"라고 하는 말을 먼저 듣고 제임스 본드의 무고함을 미리 알아챌 수 있습니다. 뭐, 007 영화를 보면서 누가 본드를 믿지 않겠습니까만은.

피어스 브로스넌 시절의 머니페니는 제임스 본드를 좋아하고 있지만 또 질투심 때문에 미워하는 면도 있고, 좀 망가지면서 웃기는 장면을 많이 연출하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그런 중에서도 "007 어나더 데이"는 머니페니가 제임스 본드에 대한 사모하는 마음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거의 유일한 영화라 할만 합니다.

피어스 브로스넌 출연작 제임스 본드 영화 중에서 3위로 꼽아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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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00 2006/12/03 07:59 # 삭제 답글

    4년전에 극장에서 보았는데요. 그때 매표소 앞에서 시민단체 회원분이 꽤 오랜시간동안 1인시위를 하고 계셔서 '007주세요'하고 말하기가 조금 미안했었지요
  • 게렉터 2006/12/03 10:57 # 답글

    좀 엉뚱한데로 불꽃이 튄 편이 없지는 않은 시기였다고 생각합니다. 어쩔 수 없는 유행, 선풍 같은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 2008/08/11 12:44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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