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 (브이) 영화

아마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TV시리즈 "V"를 떠올리신 분이 있으실 겁니다.


("V"라면 역시, 쥐 잡아 먹기, 새 잡아 먹기)

아프가니스탄은 80년대에도 전쟁에 휘말린 적이 있는데, 그 때는 미국이 아니라 소련이 공격했습니다. 마치 월남전 때 미국이 그랬던 것 처럼, 소련은 반란군들을 막지 못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정부를 도와주기 위해 군사 관계자들을 하나 둘 보내다가, 결국 직접 소련군이 들어와서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을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베트남에 소련이 AK소총을 보내줬듯이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저항조직에 M16을 보내줬습니다. 결과는 소련이 패배하고, 아프가니스탄의 공산당 정부는 와해되는 것이었습니다. 탈레반을 주축으로한 이슬람 저항조직들이 득세한 것이 바로 그때부터 였습니다.

냉전이 최후의 발악을 하는 듯 하던 80년대의 이런 난리들은 SF물을 즐기고 만드는데 여러모로 분위기를 제공해 줬습니다. 마치 50년대 고전 SF물들이 나오던 시대처럼, 핵전쟁에 대한 공포, 다른 나라와의 대결심리가 유행하기도 했고, 서로 상대방과 겨루느라 다양한 분야에서 과학을 과시하면서, 생활과 별상관없는 첨단기술을 주목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 스티븐 스필버그나 조지 루카스 같은 사람들이 기막히게 멋진 SF계열 영화를 만들어서 유행을 불러 일으켰고, 일본에서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전성기라 불리우는 시대를 장식했던 작가들이 맹활약 하기도 했습니다.


(외계인 함대의 장교들)

냉전 말기의 대표적인 무력충돌이었던 아프가니스탄 내전의 흥미로운 점은, 이번에는 미국이 게릴라 반군편이라는 점입니다. 베트남 전쟁 때는 게릴라 반군들이 상대편이었지만, 이번에는 아군이 된 것입니다. 갑자기 무슨 쾌걸 조로나 홍범도 장군처럼, 중앙정부에 맞서서 신출귀몰하는 게릴라 이야기들이 새롭게 주목을 받는 유행이 슬슬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압제적인 중앙정부에 대항하는 반란군들은 남미의 이야기들이 그전부터 많이 떠돌곤 했습니다. 체 게바라의 무용담이나 파나마 침공 같은 사건과 이야기가 결부되기도 하고, 로메로 신부의 이야기라든가 세르지오 레오네의 영화처럼 인기를 끈 것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람보"라도 등장할 듯한 분위기가 감돌면서, 독재정권이 자유를 억압하고 있는 악의 제국 소련과 대결하는 분위기가 조성되다보니, 풀뿌리 조직의 무장저항운동이 또다른 느낌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1980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한 항의로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모스크바 올림픽에 참가를 거부했습니다. 1984년 LA올림픽에는 반대로 소련의 동맹국들이 참가를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흔히 그 다음 올림픽인 1988년 서울올림픽이 냉전 종식을 알리는 사건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바로 그 1988년에 한국에서는 "살바도르"라는 영화가 제작후 개봉을 허가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영화속에 나오는 군사 정부에 대항하는 저항 조직의 이야기가 사회적으로 불온하다는 이야기가 돌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애니메이션들과 "맥가이버"를 제외하고는 한국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미쳤던 SF물, "V"는 바로 이, "살바도르" 저항 조직을 예찬하면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살바도르)

"V"의 내용은 어느 날 갑자기 외계인들의 함대가 지구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 외계인들은 처음에는 평화적인 척 하지만, 점차 지구인들 사회에 들어오더니, 나중에는 누명을 씌워서 일부 사람들을 없애버리려하고, 여기에 사람들이 반항하자 지구 각국의 정부들과 연합하여, 지구 전체를 살벌하게 감시하며 통제하려듭니다. 중반부로 가면, 외계인 반대파로 몰려 생명의 위협을 받는 사람들과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외계인 반대 저항운동을 펼쳐서 외계인들과 싸우는 것이 내용이 됩니다. 각계 각층의 다양한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비춰 집니다만, "살바도르" 저항 조직을 취재하던 방송기자인 마이크 도노반과 이 사람이 관찰하는 주변 사람들이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V"의 가장 멋진점은 꼭 50년대 SF물처럼 시류를 타고, 외계인 지구 침공을 소재로 삼아서, "스타워즈"의 경이로운 시각효과를 손에 잡힐 듯한 현실 세계 속에 끌어들였다는 것입니다. "스타워즈"는 기막히게 멋진 우주선과 외계인, 무기와 우주군대가 나오지만, 이야기 자체는 환상적인 검과 마법 이야기나 그리스 로마 신화처럼, "long long time ago, far far away"를 무대로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V"의 무대는 L.A.의 뒷골목이나, 교외의 주택가, 대도시 주변의 공장지대 같은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사는 곳입니다. 이런 현실적인 배경에 "스타워즈"의 일들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은 직접 놀라운 일을 체험하는 듯한 압도적인 흥미를 불러옵니다.


(교외 거주 지구에 등장한 우주 함대)

그리하여, "V"의 시각효과들은 "스타워즈"의 직계 자손입니다. "V"에서 가장 멋진 기계인 "모선"은 기하학적인 전체 모습은 다르지만 표현 방법자체는 "스타워즈"의 "스타 디스트로이어"와 비슷하고, 그 내부 모습은 "스타워즈"의 거대 우주선 내부와 거의 똑같을 정도 입니다. 헬리콥터 같은 용도로 사용되는 외계인의 소형 우주선의 하얀 모습은 80년대에 유행한 단순한 곡선미의 미래형 자동차 디자인인데, 이것이 움직이고 날아다니는 모습은 "스타워즈"의 "타이 파이터"와 닮았습니다. 외계인 군대의 계급 제도, 말투라든가 동양적인 옷차림 역시 "스타워즈"의 영향을 받은 듯 하며, 외계인 총의 모양을 봐도 "스타워즈" 제국군 쪽과 계약한 우주군수업체가 이쪽 종족에도 납품한 듯 보입니다.


(타이 파이터식 공중전)

"태극기 휘날리며"가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밴드 오브 브라더스"를 배워 오듯, "스타워즈"를 잘 배워온 "V"의 이런 우주 장비들은 "외계인 지구 방문"이라는 사건으로 현실에 등장하면서 비로소 "V"의 특징이 되었습니다. "V"는 "외계인 지구 방문"이라는 사건을 구성하기 위해서 아서 클라크의 소설 "유년기의 끝"의 내용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습니다.

중반직전까지만보면, "V"는 "유년기의 끝"을 그대로 영상화 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 입니다. 우주선의 모양, 등장 방식, 지구인들의 반응, 외계인들의 행동, 외계인들의 모습, 진화론을 들먹이는 태도까지 SF고전 "유년기의 끝"이 제시한 재미난 아이디어들을 하나 둘 구체화하고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역시 도시 전체에 그림자를 덮을 만한 거대한 원형 우주선이 세계 각지에 출현하는 시작 장면일 것입니다. 물론 계속 진화에 관한 이야기로 밀고나가는 "유년기의 끝"과는 전혀 다르게, "V"는 중반부를 지나면 본격적으로 치고 받는 저항조직의 낭만적인 싸움이야기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의 분위기는 상당히 다릅니다만, "유년기의 끝"이 "V"의 중요한 뼈대 구실을 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뉴욕 상공을 뒤덮은 거대 우주선)

이야기를 서서히 전체주의 집단의 탄압과 소수의 눈물겨운 저항운동으로 흘러가게 하기 위해서, "V"는 바로 냉전의 전성기를 장식했던 SF영화들의 수법을 사용합니다. 멋진 모습으로 나타나 귀를 솔깃한 말을 하는 외계인들은, 사실은 구밀복검, 우리를 속이고 우리를 "집어 삼키려는" 우리의 적입니다. 이들은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우리를 속인채 우리 속에 서서히 침입해 들어오고, 멋모르고 이들에게 동조해서 우리를 망하게 하는 작자들도 꼭 있습니다. 통제, 언론 검열, 세뇌와 같은 소재들도 당연히 매우 중요하게 사용되고 있으며, 외계인의 붉은색 옷과 UN을 활용하는 외교 같은 소재에서도 냉전시대 SF영화들의 수법이 보입니다.

드디어 "V"의 이야기가 본격적인 무장 저항에 이르면, 이제는 아프가니스탄, 이란, 콩고, 살바도르, 베트남에서 펼쳐졌던 그 무장 저항 이야기들이 외계인과의 전투에 활용됩니다.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이 정치적인 입장차이로 서로 갈등을 빚게 된다든가, 원래 압제 정부에 별 불만 없이 오히려 거기에 협조하던 사람들이 가족을 허무하게 잃고 저항 운동에 투신한다든가 하는 주요 갈등 구도들은 이런 무용담의 단골 소재였습니다. 외계인 중에도 아군이 있고, 아군 중에도 외계인편이 있는 구도도 실제로 벌어진 내전의 대표적인 양상입니다. 그냥 분노해서 정부 욕하는 사람 중에 한 명이었던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서 무리를 짓고, 숨어서 이야기를 나누며 조직을 결성하고 거사를 준비하며, 무기를 획득하는 모습들 역시 많은 반 독재 운동, 게릴라 이야기에서 가져온 요소들입니다.


(정부의 탄압에 연행되는 사람. 보통 어린이나 노약자로 설정하기 마련.)

영웅주의가 가미된 이런 이야기들은, 비록 무기체계는 좀 다르지만, 헤지고 낡은 옷을 입은 남녀노소가 겨우 훔친 AK소총을 들고, 제복을 입은 정규군과 대결하는 전형적인 다큐멘터리속 게릴라의 모습으로 표현되곤 합니다. 특히나, 외계인의 우주선을 공격하는 장면은, 싸구려 RPG로 최첨단 제트 전투기를 떨어뜨리는 저항 무장세력을 낭만적으로 묘사하는 상징이라 할만한 모습과 일치합니다.


(RPG와 AK는 아닐지언정)

"V"의 특징 중에하나는 이런 항일 독립운동 내지는 중동지역의 내전 같은 이야기가 미국을 무대로하는 분위기에 잘 어울릴 수 있도록, 이런 이야기를 헐리우드 고전 속의 2차대전 레지스탕스, 첩보원 이야기와 잘 섞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유태인 학살을 언급하는 장면이나 나치 선전 포스터와 똑같은 구조로 설계된 외계인 선전 포스터, 은근히 나치를 연상케하는 외계인의 문자 문양이라든가, 외계인의 군복은 쉽게 눈에 들어오는 예입니다. 한편, "나치 장교복을 입고 변장을 한체 독일군이 가득한 곳에 잠입한다"라는 거의 2차대전 영화의 의무 삽입 장면과 같은 것도, 똑 같이, 외계인 군복을 입고 모선에 잠입하는 이야기로 다시 등장합니다. 이런점들은 유태인 할아버지 인물에 의해서 대놓고 언급되면서, 아예 이야기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멋있게 활용되기도 합니다.


(군복 바꿔입고 잠입하기)

이렇게 짜여진 이야기와 소품 속에서 활약하는 인물 면면을 보면, "V"가 시대의 사회문제로 지적된 다양한 요소들을 활용하고 있는 점도 눈에 뜨입니다. "V"는 기본적으로 전 지구가 맞이한 사건이라는 점을 나타내기 위해서, 각계 각층의 다양한 사람들을 서로 분산해서 주인공으로 삼고 있고, 이런 다양한 인물들이 자신의 시각에서 겪는 일들을 보여주는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이런 구성은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하나의 저항조직으로 뭉친다는 점을 표현하기에도 좋지만, 다양한 곳에서 펼쳐지는 최근의 문제들을 펼쳐서 제안하기에도 좋습니다. 여러 직업과 신분의 사람들을 통해, 가정문제, 신빈곤층 문제, 궤도에 오른 양성평등주의, 갑자기 강화된 일부 종교 경향, 크랙 코카인과 범죄 폭증, 궤도에 오른 인종평등주의 등등을 제시합니다.

이렇게 은근히 드러나는 시사적인 내용들은 "외계인의 함대가 지금 우리가 사는 곳에 나타났다"는 그 시대성, 현장감을 살려줍니다. 어제 신문에 실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곳에, 바로 다이아나의 우주 함대가 공격한다는 느낌을 주는 것입니다.


(양민을 공격하는 외계인 우주선)

뭐니뭐니해도 "V"에서 빠뜨려서는 안되는 인물은 다이아나 입니다. 다이아나는 SF계열 악당 중에는 다스 베이더 정도만이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의 멋을 갖고 있습니다. 다이아나는 일단 저 거대한 외계인의 모선 만큼이나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데다가, 매력적인 외계인으로서 호기심을 생기게하는 모습이, 이 악당의 변태적인 취향과 기묘하게 어울려서, 더 강한 폭발력을 갖고 있습니다. 다이아나가 무시무시한 지시를 내리면서 악당답게 살짝 웃는 미소도 그 연기가 기막힌 것이지만, 과학 전문가로서 주로 사람을 고문해서 세뇌시키는 것이 취미라는 것 또한 그럴싸한 설정입니다. 저 악명 높은 줄리엣 세뇌 장면은 줄리엣의 모습 때문에 유명한 것이기도 하지만, 줄리엣을 세뇌하는 것을 즐기고 있는 다이아나 때문이기도 한 것입니다.

더군다나 다이아나는 그냥 단순한 아마존 제국의 여왕이 아닙니다. 다이아나는 외계인들 사이에서도 처음부터 악당 총두목 같은 거대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만, 스스로 온갖 책략과 노력으로 점차 "그 무서운 다이아나"가 되는 이야기가 있는 인물입니다. 덕분에 "V"에서 가장 신비로운 요소 중의 하나인 다이아나와 도노반의 묘한 감정 구도가 슬쩍 잡혀 나옵니다.


(악명높은 다이아나의 줄리엣 세뇌 장면)

다이아나의 반대편에는 줄리엣이 있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나와서 주인공인척 하는 마이크 도노반이 있긴 합니다만, 이 사람은 아놀드 슈왈츠제네거 같은 몸집으로 뛰어다니면서 험프리 보가트 같은 말투를 사용하는 것으로 간단히 요약됩니다. 그 역할도 그냥 이런저런 사건을 연결해 보여주기 위해 등장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줄리엣은 덩치작은 과학자로 심지어 다리를 다쳐 절뚝거리며 다니는, 참, 기막히게 착하게 생긴 사람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어도 무시무시한 압제자에게 당하는 연약한 시민을 연기하고 있는 듯 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덕분에 이 사람이 무려 저항군 총대장이 되어서 사람들을 이끄는 모습에 가히 마하트마 간디 스러움이 있습니다. 다이아나와 빚는 이 극단적인 대조는 서로가 서로를 더 돋보이게 해서, 이야기에서 가장 매력적인 인물들로 두 사람이 자리잡게 합니다.


(줄리엣)

그 외에 조연진들도 연기가 출중한 편입니다. 껄렁패역의 마이클 라이트는 초반에 꽤 긴 연극같은 슬픔 표출 독백연기를 하나 하도록 되어 있는데, 결코 멋진 대사라고 할 수 없는 각본임에도 불구하고, 연극 무대 같은 연출과 성실한 연기력으로 감정을 살리고 있습니다. 단조로운 교훈을 주는 할아버지 역할에 불과하지만 정말 진지하게 인물을 표현한 유태인 할아버지, 레오나르도 시미노도 뛰어납니다. 다이아나와 줄리엣에 완전히 묻혀 버렸지만 설득력 있는 평범한 사람의 감정 변화를 보여준 로빈역의 블레어 테프킨도 잘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의 "악몽" 속에 나왔던 로버트 잉글런드가 착한 외계인을 연기한 모습은 이 배우가 가진 실력의 폭을 보여 줍니다. 한편, 정말로 어디 발칸반도쯤에서 용병으로 뛰다 온 것처럼, 미친듯이 현실적인 전투 전문가 연기를 보여준 마이클 아이런사이드도 대단합니다.


(저항세력 두목, 줄리엣)

"스타워즈"를 현실 세계로 이끌고 오는 일을, "V"는 이처럼 갖가지 사회 유행에 잘 들어맞게 충실히 해내고 있습니다. 공산주의 공포증으로부터 독재 저항운동에 이르기까지, 일견 모순되게 보일 수 있는 다양한 유행들이 포괄되어 덧칠된 덕택에 영화의 시사적인 느낌은 더 살아납니다. 공포물과 연애물의 선정적인 요소들을 어울리게 살짝살짝 빚어내서 흥미를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것도 TV쇼의 인기에 한몫했을 겁니다.

그러나 워낙에 다이아나와 줄리엣의 힘이 커서 이 사람들이 안나오는 부분은 상대적으로 지루해 보이는 비는 점도 있습니다. "V"는 몇몇 유머 장면들이 좀 실없다는 점이라든가, 충격적인 표현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 약간은 인종적인 편견에 가까운 시각을 초반에 도입한 점은, 경제적이었을지언정 전체 분위기와는 좀 어긋납니다. "V"의 앞부분에서, 이 외계인들이 무척 손발이 찬 종족이라는 점과, 육회를 심하게 좋아한다는 점을 제시하고는, 단지 이것만으로 무슨 엄청나게 혐오스런 악마인냥 몰아치는데, 이 때문에 압제 정부에 대항해 떨쳐 일어선 정의로운 무리들의 이야기와 좀 꼬여드는 부분이 잠시 생깁니다. 좀 한심하게 생긴 출산장면의 인형은 그 한 부작용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역시, 덕분에 웃고 있는 가면 속에 드러나는 본 얼굴이라는 설정으로, 나중에 냉전 SF물의 극치라 할만한 그럴듯한 화면을 만들어낸 점은 그런 부정적인 면을 잊게 합니다. 아름답고 멋진 외계인들의 겉모습과 대조적인 정체를 한 화면에서 시각적으로 대조해 보여줄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저항 조직의 싸구려 공격을 소형 우주선에 얻어맞고 다이아나의 진짜 얼굴 일부가 드러나는 장면은 정말 멋집니다.


(위엄 떨어지고 있는 다이아나)

부분 부분 그럴듯한 모범적인 연출도 풍성합니다. TV를 통해 사건의 추이를 바라보는 각지의 사람들을 비춤으로써, 거대한 사건을 쉽게 표현하면서도 거국적인 현장감, 현실감을 주는 것은 한 예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카운트 다운 장면을 삽입해서 긴장감을 높이는 정석 수법도 제자리에 활용되었습니다. 2차대전 영화 같은 오케스트라, 군악대 음악이 전자 음악에 살짝 섞여드는 주제곡도 분위기에 잘 들어맞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결말도 좋습니다. 개성이 넘치고 특이하지는 않을 지언정 아주 모범적입니다. 결론의 SF 아이디어가 저항 조직 이야기 분위기와 잘 얽혀 있어서 응집성이 살아 있습니다. 전쟁 이야기인 만큼 누가 화끈하게 이겨서 왕이 되었다거나, 다 죽고 위기를 겪은 남녀가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끝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내전과 저항 운동을 소재로 하는 이야기라면, 아무렴, 이런 식으로 내전과 저항 운동의 정신답게 끝내는 것이 감상을 돋굽니다. 당연히 끝장면이니 만큼 가장 멋진 기계였던 외계인의 거대 우주선도 오래오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감개무량한 낭만주의 오케스트라로 어마어마한 무게를 잡으며 보여주는, 스프레이로 벽에 낙서하는 장면)


그 밖에...

냉전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제작자들은 2차대전 레지스탕스 이야기를 SF화하는 것을 중점적인 이야기 핵심으로 설정했다고 합니다.

"실없는 유머" 중에 나름대로 실있게 느껴졌던 것은, 지구인과 친해진 외계인이 비디오게임을 즐기는 장면입니다. 외계인은 게임을 좀 못하는데, 이 게임인즉 80년대의 명작, 스페이스 인베이더 입니다.

시작 부분에서 외계인들은 유엔 사무총장을 대표로 보고 가장 먼저 대화하려 하는데, 유엔 사무총장이 스웨덴인이라고 스웨덴어로 말을 걸어 옵니다. 요즘에 다시 온다면, "007 어나더 데이 Die Another Day" 때의 한국어와 한 번 비교해 볼만 하겠습니다.

마이크 도노반의 동료역을 맡은 에반 킴이 한국계 인듯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80년대 중반 당시, 김형곤이 TV코메디 쇼에 나와서 헛웃음 주는 소리 한 마디 한 걸 가지고는 방송국에 전화해서 온갖 협박을 다하던 정부측 관계자 양반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과연 이 TV쇼가 한국에 방송되어 엄청난 인기를 끄는 것을 어떻게 생각했을 지 궁금합니다. 광주 사태의 책임자들이 꼭대기에서부터 아래까지 그득하던 시절에, "V"는 소형 우주선에서 강하하는 병사들을 상대로 맞서서, 화염병 던지는 시위대와 무기를 탈취한 민간인들이 싸워 이기는 장면이 들어가 있습니다. 오 헨리의 단편과 별로 성격이 다를 것도 없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검열을 피하느라 이상한 고민을 많이 했다는 이야기가 돌지만, "V" 방영 당시에 TV속 저항군의 상징이었던 붉은색 V자 낙서가 온 동네 벽마다 가득 새겨지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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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rozeholic 2007/03/29 22:24 # 삭제 답글

    좋은 글 감사드리고 링크 좀 합니다. 쓰시느라 애 먹으셨네요. v는 정말 재미있게 봤던 시리즈인데
    요즘 보면 눈이 고급이 되어서 영 재미가 없더군요.
  • 이준님 2007/05/14 19:26 # 답글

    1. 첫 미니시리즈를 보면 전형적인 수미 상관 구조이지요. 앞부분의 도노반이 남미 게릴라 조직 (그러니까 승산이라고는 전혀 없는)을 취재하는 장면과 마지막회에서 줄리엣이 풋나기 의대생에서 게릴라 여전사로 탄생하는 부분-즉 승산이 없는 저항조직의 일원이 된다는)장면이 아주 일치합니다. 우리나라는 이 시리즈와 후속 시리즈를 같이 틀어주는 바람에 의외로 감동이 줄어들었죠.(원래 외계 침공과 레지스탕스 결성 부분이 시즌1, 그리고 몇년뒤에 제작되어 외계인을 몰아내는 스토리가 시즌2였지요 -_-;;)

    2. 의외로 이런 거대 미니시리즈 시즌별로 배우가 바뀌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는 그런게 없었지요.

    3. 외계인의 문양이 "나치"스러운거나 그 할아버지가 "유태인"이라는 설정은 묘한 대조를 이룹니다. (이 할아버지는 듄 극장판에서 남작의 의사로 잠시 나왔지요)

    4. 몇몇 장면은 무려 "문화 대혁명"의 장면을 따왔습니다. 외계인을 몰아내고 세계적으로 축하하는 장면에서요 -_-;;;
  • 이준님 2007/05/14 19:33 # 답글

    5. 사실 이 작은 의외로 알려진 페이퍼백용 SF 물이 원작이라고 합니다.(확인은 하지 않았습니다.) 세계가 정복된후 정부가 몰락한 상황에서 게릴라들이 투쟁하고 결국에는 "모종의 절대무기"로 완전히 몰아낸다는 설정은 "우주전쟁"의 그걸 크게 버젼업한거지요-물론 무차별 학살은 아니지만.- 사실 이런 류의 작품중에 파충류 외계인이 1942년에 도래한다는 설정인 Harry Turtledove의 World War 연작과 묘한 비교를 이루고 있지요. 후자의 경우는 외계인이 첨부터 침략을 위해 싸웠고 몰락하지 않은 몇몇 정부들이 불완전한 동맹을 맺어서 외계인과 투쟁한다는 스토리이지요. (이 작도 점령지 미국에서의 기병 게릴라 -_-;;운동 묘사나 기타 이야기는 완전히 V를 땄습니다.)

    6. 뒷 시리즈 (그러니까 TV 드라마로 바뀐후)가 쫄딱 망한 이유는 아무래도 근본적인 이야기의 구조때문인것 같습니다. 저렇게 과학적으로 발전한 종족이 절대무기를 극복하여 재침공을 할수 있는지의 문제이지요. 그러다 보니 "영원한 투쟁"으로 지루해질수 밖에 없습니다. 사실 우주 침략자에 대한 스토리의 결정적인 약점이기도 하지요. 제가 말씀드린 소설은 이런걸 피하고자 지구인과 외계인이 남반부와 북반부로 나뉘어져 공존하고 두 문명이 섞이는 바람에 결국에는 다음세대의 지구인들도 자신만의 우주 여행이 가능하다는 스토리로 가지요.
  • 이준님 2007/05/14 19:34 # 답글

    ps: 화염병 문제로 악명높은게 율브린너와 리처드 버튼이 나온 유고 빨치산 영화일겁니다.(이건 미국 -유고 합작입니다.) 명절특선로 했는데 마봉춘 판에서는 빨치산들이 화염병으로 독일 전차를 파괴하는 장면을 모두 삭제했습니다. 뭐 잔인한것도 아니고 지루한 장면도 무지 나오지만 아무래도 화염병이라고 하면 덜덜 떠는 분들이 계신거지요
  • 게렉터 2007/05/15 14:53 # 답글

    rozeholic/ 이런 것은 이런 내용인 줄 모르고 TV돌리다가 갑자기 봤을 때 확 충격받으면서 재미를 느끼는게 또 묘미 아니겠습니까.

    이준님/ "알려진 페이퍼백용 SF 물"이 원작이라는 점은 꽤 놀랍습니다. 저도 "문화 대혁명" 장면 보고 좀 놀란 기억은 생생합니다. 어쩌면 87년 이후라서 쉽사리 방영되고 유행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 찬찬히 87, 88년 잡지, 만화 같은 것을 돌아보니, 민주화 직후라서 외려 과감한 이야기나 직설적인 비판이 90년대보다 더 많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 정호찬 2007/05/15 22:10 # 답글

    그 시절임에도 브이가 방영된 이유는 무엇보다 "빨간놈"이 적이니까가 정답 같습니다. 아프리카에서 고군분투하는 용병부대를 그린 와일드 기스도 군사정권에 의해 투옥된 민주화 인사를 구출한다는 내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버젓이 상영되었죠.
  • 게렉터 2007/05/21 18:11 # 답글

    정호찬/ 동의 합니다. 사실, V는 아프가니스탄 내전을 상정한 어느 정도의 반공물 성격도 없잖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 나나 2007/07/12 11:29 # 삭제 답글

    여자하고 어린이가 파란 하늘 아래서 놀고 있는 스샷 속에 마징가 완구가 있군요!
  • 게렉터 2007/07/12 12:59 # 답글

    나나/ 그렇습니다. 오른쪽의 E.T.인형과 함께 70~80년대 전환점시기의 SF물을 상징하면서, 80년대 SF유행을 나타내는 모습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 짱깨 2008/07/18 23:52 # 삭제 답글

    브이에 관한 글을 살펴보다가 우연히 타고들어왔는데...
    히야.. 완벽하게 브이를 소화하신듯 합니다. 출처 남기고 글좀 스크랩 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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