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골든아이 Goldeneye 영화

"007 골든아이 Goldeneye"는 제임스 본드 시리즈 최대의 불황기, 6년간의 공백기간을 두고 제작된 영화이며, 피어스 브로스넌이 제임스 본드로 나온 첫번째 영화입니다.


(본드, 제임스 본드)

냉전이 끝났으니 첩보원이 주인공으로 세계를 구하는 이야기는 한 물 갔다는 비관론이 팽배했으며, 제임스 본드 시리즈가 나올 때마다 쏟아지는 이 영화의 정치적, 도덕적 무가치함에 대한 비난도 어김없었습니다. 게다가 로저 무어 시절의 너무 웃긴 제임스 본드를 혐오하는 사람들이 코메디에 재능이 많은 피어스 브로스넌을 회의적으로 생각하기도 했고, 숀 코네리 시절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피어스 브로스넌은 지나치게 유약하고 섬세해 보이는 인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반대로, 망한 제임스 본드로 평가 받을 지언정, 소설 원작의 인상과 부합한다든가 날카로운 인상이 멋지다고 생각한 티모시 달튼을 좋아했던 사람들 역시 피어스 브로스넌을 탐탁찮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우려를 날려버리며, 피어스 브로스넌이 출연한 제임스 본드는 첫 영화인 "007 골든아이"부터 역대 제임스 본드 영화 사상 최대의 흥행기록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후, 시리즈가 거듭될 때마다 그 기록을 갱신하는 힘을 발휘했습니다. 결국 피어스 브로스넌은 네 편의 영화 동안 흥행기록이 계속 좋아지기만한 유일한 제임스 본드 배우로 남게 되었습니다.


(주제곡 장면)

"007 골든아이"는 냉전 승리 상황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영화이며, 피어스 브로스넌의 제임스 본드 인물도 그 분위기에 부합하는 모양을 갖추고 있습니다. "007 골든아이"인 즉슨, 냉전 이후 개판이 된 러시아에 각종 다양한 미친 놈들이 있는데, 그 중 몇몇이 "골든아이"라 불리우는 인공위성 비밀무기로 범죄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입니다. "007 골든아이"속에서 러시아는 아노미 현상이 팽배한 쓸쓸한 나라이면서, 동시에 부패한 관리들과 마피아들이 득실거리고, 소수 민족 문제와 정치 혼란으로 어지러운 그야말로 제임스 본드 같은 인간들이 설치기 좋은 곳으로 나옵니다. 이런 내용들은 소련 붕괴후 러시아의 초라한 상황을 안좋은 쪽으로 과장한 것인데, 황당한 과장이 이상할때가 있긴 해도, 적어도 시사적인 한 양상을 풍성하게 활용하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렇게, 무너진 "악의 제국"에 대한 승리자의 입장 때문에, 마치 제임스 본드는 100년전쯤 제국주의가 절정에 달한 서유럽, 벨 에포크 시절의 낭만적인 액션 스타와 비슷하게 설정되었습니다. 피어스 브로스넌의 제임스 본드는 어느 제임스 본드보다도 아르센 뤼팽이나 필리어스 포그 비슷한 인간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분명히 피어스 브로스넌은 코메디에 재능을 갖고 있고, 이 점에서 전임자인 티모시 달튼과 극적인 대조를 이룹니다. 그렇지만 지나치게 코메디로 치우친 로저 무어 시절의 제임스 본드 영화는 자칫잘못하면 망해먹을 위험성이 너무 컸고, 그렇다고 숀 코넬리 시절을 생각하자니, 숀 코넬리에 비해서는 피어스 브로스넌이 맷집도 떨어지고 좀 허약해 보이는게 사실입니다.


(등장장면부터, 피어스 브로스넌 시절 제임스 본드 영화의 특징인 M/본드 갈등구도로 나타나는 M)

덕분에 피어스 브로스넌은 우울한 강력 첩보원도 아니요, 웃긴 코메디 요원도 아닌, 말쑥한 신사를 연기하게 되었습니다. 날렵하고 재빠른 모습으로 뛰어난 도둑이나 사기꾼 같은 힘을 보여주면서, 거기에 19세기 말 유럽 부유층 같은 단정함을 바탕으로 코메디를 펼치게 한 것입니다. 매우 도둑질 스러운 침투 장면과 턱시도를 입고 가히 시대 착오적인 드레스로 치장한 몬테 카를로의 도박장으로 이어지는 도입부에서 그런장면은 명백하게 느껴집니다. 자동차와 총 디자인만 좀 바꾸면, 이 부분은 "수정마개"나 "포탄파편" 같은 이야기의 중간에 끼워넣어도 아무 이상이 없을 정도 입니다. 이것은 꽤 괜찮은 수법이었습니다. 현대의 현실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 수 있는 옛날 유럽 활극 소설 풍의 인물을 유머감각과 버무려 되살려 90년대로 가져오기에, 제임스 본드 같은 독특한 주인공이 들어맞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피어스 브로스넌 제임스 본드의 특징이 가장 잘 살아나는 부분은, 그가 출연한 모든 액션 영화 장면 중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시내에서 벌어지는 탱크 액션 장면입니다. 이 장면에서 여유만만하게 능숙하게 탱크를 모든 피어스 브로스넌의 모습은, 사뿐한 그의 몸집과는 반대로 투박하고 거대한 탱크와 대조를 이루며 강한 심상을 만들어 냅니다. 당연히 이 탱크는 온갖것을 받고 밟아서 부수면서 탱크의 무게를 내뿜습니다. 그러다 사방에 자욱해진 먼지와 파괴적인 진동속에서 피어스 브로스넌이 자신의 정장 옷매무새를 확인합니다. 이 때 슬쩍 넥타이를 바로잡는 모습은, 피어스 브로스넌식 제임스 본드의 압권입니다. 이 장면에서는 제임스 본드 주제곡 또한 매우 흥겹게 잘 결합되어 있습니다.


(정장입고 탱크 몰기 액션)

구체적으로 이야기의 내용을 살펴보면 "007 골든아이"의 가장 큰 특징은 여자 주인공의 비중이 매우 크다는 점이 특징으로 뚜렷합니다. 흔히 "007 네버다이 Tomorrow Never Dies"의 양자경이나 "007 어나더 데이 Die Another Day"의 할 베리가 비중 높은 여자 주인공을 연기했다고 언급되고 있습니다만, 이런 여자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제임스 본드의 화력지원조일 뿐입니다. 제임스 본드가 손이 두 개 밖에 없어서 총을 두 개 밖에 못쏘니까, 세 번째 총, 네 번째 총을 들고 있다가 같이 사격해주는 인물일 뿐인 것입니다. 이런 인물들이 없다고 설마 제임스 본드가 죽기야 하겠습니까. "007 두 번 산다 You Only Live Twice"의 하마 미에에비해서 쏘는 탄환의 수가 많다 뿐이지, 양자경이나 할 베리가 연기한 인물은 사라져도 이야기의 전체 줄거리에는 거의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하지만, "007 골든아이"의 이자벨라 스코럽코가 연기한 여자 주인공은 자신 만의 고통과 난관을 겪으며 복잡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인물입니다. 이자벨라 스크럽코는 마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나 "39계단"의 주인공처럼 평범하게 직장생활 잘 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어마어마한 국제적인 음모에 휘말리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갑자기 공권력과 악당의 추격을 동시에 받으며 온갖 지방을 나돌아다니며 도망다니고 또 추적하며, 도대체 이 모든 일이 왜 생겼으며, 어떻게 누명을 벗을 것인지 고민하는 인물입니다. 여자 주인공의 외모까지 이런 옛 영화들의 여자 주인공들과 비슷합니다.


(평화로운 직장인)

"007 골든아이"에서 이자벨라 스크럽코만을 중심으로 잘라내서 편집을 해도, 대강 "영 앤 이노센트"나 "나는 비밀을 안다" 아류작 비슷한 영화가 하나 나올 것입니다. 실제로 "베티 미들러의 사랑 소동 Outrageous Fortune"이나 "네트" 같은 영화는 이자벨라 스크럽코와 비슷한 분위기의 주인공이 비슷한 형태로 모험을 겪으며 액션을 펼치는 내용을 담고 있기도 합니다.

조금 시각을 달리하면, "007 골든아이"의 주인공을 아예 이자벨라 스코럽코로 보고, 피어스 브로스넌이 연기하는 제임스 본드는 결정적인 순간에서 그녀를 구해주는 조력자의 역할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제임스 본드는 2차대전 영화에서 위기에 빠진 미육군 주인공을 구해주는 공군의 공격이라든가, 가장 위급한 순간에 아라곤이나 프로도 일행 앞에 한 번 나타나 도움을 주는 간달프 비슷한 인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가 흘러가기 때문에 악당에게 붙잡힌 제임스 본드를 두고, 여자주인공이 하는 대사에서, 여자 주인공 중심의 줄거리와 그간 겪은 이 여자 주인공의 심경 변화를 잘 요약할 수 있었습니다.


(고생길)

아마 이런 "007 골든아이"의 여자 주인공 형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면, 이후의 제임스 본드 시리즈는, 갑자기 이상한 위기와 모험에 휘말리는 여자 주인공의 이야기를 더욱 중심으로 삼을 수 있을 겁니다. 각계각층, 세계 다양한 곳의 여자 주인공이 거대한 국제 음모에 휘말리고 거기에서 고생을 하고 수수께끼 같은 사건을 헤메는 것을 이야기로 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임스 본드는 중반 이후에 이 소동의 조력자가 되어주는 초특급 요원이라는, 약간은 비중적은 듯한 인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제임스 본드가 그만의 특징과 위엄을 유지하면서도 훨씬 다채로운 시사적인 상황에 어울리는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도둑 같은 숀 빈과 피어스 브로스넌)

그런 생각이 들만큼, "007 골든아이"의 이야기는 위기감을 조성하는 이야기가 제대로 잡혀 있는 편입니다. 물론 제임스 본드 시리즈의 의무중의 하나인 세계 각지를 여행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악당이 기차로 탱크를 들이받는 최악의 기막힌 바보짓을 하게 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 부분 외에는 그럭저럭 이야기가 항상 흥미진진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보리스 같은 인물은 비록 자아도취, 자기과시형 인간이라는 전형적인 영화속 해커에 불과하기는 해도, 선악을 슬쩍 가늠하기 어려운 묘한 말투와 표정, 그리고 정말로 그런 좀 이상한 성격을 가진 사람의 개성이 배우를 통해 현실감 있게 표현되어 있어서 여자 주인공쪽 이야기의 모험담을 꽤 재미있게 합니다.

악당들 중에 가장 재미있는 인물은 팜케 잰센이 연기한 소련군 특전사 출신인듯한 행동대장 역할의 인물입니다. 이 악당은 스스로 대사를 거의 하지는 않지만 급격하게 변하는 표정으로 강하게 심정을 전달하는 매력적인 외모의 인물입니다. 덕분에 이 사람에 대해서는 호기심이 계속 생기게 됩니다. 그런데, 이 호기심이 이 악당의 변태적인 취향과 잘 어울려서 더욱 강렬한 인물로 승화되도록 표현되어 있습니다. 팜케 잰센의 과시적이며 힘이 넘치는 연기 역시 이런 맛간 악당에 매우 잘 어울립니다. 숀 빈과 고프리드 존 같은 조연들도 자신들이 잘 한다고 보증받은 역할을 맡아서 역시 잘 해주고 있습니다. 로비 콜트레인은 과거의 전설을 떠올리게 해서 제임스 본드의 명성을 언급하는 데 역할을 해주고 있으며, 코메디와 함께 냉전 후 러시아 혼란상을 잘 표현하는데, 그 역시 주목할만합니다.


(호사스런 카지노의 팜케 잰센)

아마도 어줍잖다는 감상을 느낄 관객이 가장 많을 장면은, 막판 액션 직전에 등장하는 "쓸쓸한 제임스 본드 눈빛" 장면일 것입니다. 여기서 혼자 세상을 구한다며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최고의 실력을 뽐내지만, 따라서 그만큼 회의감과 외로움에 젖을 때도 많다는 점을 보여주려고합니다. 아마 "초록 눈동자의 아가씨" 같은 분위기를 내려 한 듯 보입니다. 그런데 앞뒤의 신나는 액션장면들과 전혀 상관없이 갑자기 낭만적인 저녁노을 장면이 쿡 튀어나와 있습니다. 맥주를 마시다가 마요네즈가 잔뜩 묻은 샐러드 오이조각을 잔 속에 퐁당 빠뜨린 듯한 느낌이 듭니다.

음악이나 어떤 복선 같은 것으로라도 어떻게 연결을 잘 해 놓았으면 그나마 나았을 텐데, 괜히 이장면에서 진지한 감정을 드러내 묘사하는데 화끈하게 깊게 빠져 버립니다. 이런 장면들은, "007 골든아이"가 아직까지도 피어스 브로스넌 시절 이전부터 내려오는 제임스 본드 영화의 피어스 브로스넌 답지 않은 전통을 고수하고 있는 면 때문에 더욱 더 튀어나와 드러나게 거슬립니다.


(갑자기 확 튀어나오는 낭만의 카리브해 장면)

피어스 브로스넌 시절의 머니페니는 그 감정을 드러내는 형태라든가 코메디 방식이 이전과는 좀 달라집니다. 그렇습니다만, "007 골든아이"에서는 외모에서부터 말투까지 아직 숀 코네리 시절과 로저 무어 시절의 머니페니 인물 그대로입니다. 피어스 브로스넌 시절에 들어서면서 M의 비중이 늘어나고 지휘자 M과 현장 요원 제임스 본드의 갈등이 살짝살짝 이야기에 가미되는데, 이 역시 처음부분에만 한 번 제시될 뿐, 아직까지 이야기에 중요한 요소로 개입되는 것은 아닙니다. 더이상 노골적으로 등장하지 않는 듣기만해도 한심한 웃음을 주어 왔던 여자 인물들의 이상한 이름도, 이 영화에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등장합니다.


(브로스넌이 연기하는 본드와 본드가 연기하는 머니페니)

피어스 브로스넌 분위기에 맞춘 시도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고, 새로운 전환점이 있는 영화이지만, 역시나 "007 골든아이"는 제임스 본드 영화 고유의 재미거리도 담겨 있습니다. 눈덮힌 산악지대, 지중해 절벽의 경치, 몬테 카를로, 상트 페테르부르그, 침엽수림지대, 카리브해안의 해변을 돌아다니며 온갖 멋진 경치를 담아내는 화면과, 영화속에 등장하는 멋진 옷과 자동차들, 매력적인 인물들도 자신의 아름다움을 한 껏 살리고 있습니다. 이후 제임스 본드 영화에 자주 사용되는 곡조인 낭만적인 사랑을 노래하는 음악도 주제곡 만큼이나 어울립니다.


그 밖에...

팜케 잰센은 이 영화를 기점으로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다들 팜케 "얀센"이라고 불렀습니다. 최근의 엑스 맨 시리즈에서는 피어스 브로스넌 제임스 본드 여자주인공들이 둘씩이나 나옵니다.

이 영화속의 로비 콜트레인은 은퇴한 KGB요원 역할로 "007 언리미티드 The World Is Not Enough"에서 다시 등장하고, 이 영화의 조 돈 베이커는 CIA의 주특기인 비밀리에 미국이 협조해주는 일을 담당하는 역인데, 같은 역을 하는 제임스 본드의 동료로 "007 네버 다이"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제임스 본드 시리즈에서 제임스 본드 다음으로 중요한 인물을 꼽으라면, 많은 사람들이 나오는 시간이 채 10분도 되지 않는 머니페니를 꼽습니다. 데스몬 르웰린의 전설 때문에 Q에 대한 평가가 높아지긴 했습니다만, 머니페니는 "살인면허" 요원이 관료제 조직의 일부라는 분위기를 살리기도 하면서, 제임스 본드의 연애에 대한 성격을 드러내는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로이스 맥스웰과 함께 가장 중요한 머니페니 배우라 할만한 "007 골든아이"의 사만다 본드는, 당연히 "본드"라는 숙명적인 이름 때문에도 인기를 끌었습니다.

러시아의 안 좋은 모습만 조롱하는 듯 보여주는 듯한 이 영화로, 무슨 협조를 얻었길래 도대체 어떻게 상트 페테르부르그 시내를 다 박살내는 장면을 찍었을까 싶습니다. 그렇습니다만, 이 부분은 대체로 세트 촬영으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피어스 브로스넌 제임스 본드 영화 중 2위로 꼽아 보았습니다.

핑백

덧글

  • marlowe 2007/01/11 13:16 # 답글

    쥬디 덴치에게 [007 위기일발]의 로사 클렙같은 배역을 맡겨도 재미있었을 것 같습니다.
  • 게렉터 2007/01/12 13:39 # 답글

    marlowe/ 동감입니다. 말씀하신 김에 생각을 다시 해보니, "007 위기일발" 로사 클렙 그 모습의 그 악연 연기의 달인이 하는 정말 악역 같은 모습도 무척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 bluenlive 2008/07/05 00:17 # 삭제 답글

    잘 읽었습니다. 지금 [골든아이] 리뷰를 적고 있는데, 많은 참고가 되었습니다.
    (전 표절 안 합니다. 노파심에서 말씀드리는데,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덧. 로자 클렙의 악역은 단연 압권이었죠. 마지막 죽는 장면까지도요...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