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The Devil Wears Prada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일단 제목이 시선을 끕니다 . 흥미롭고 재치 있는 흥겨움이 느껴지면서도, 시류에 부합하는 분위기도 잘 살립니다. 그러면서 대강 아무 이야기에나 갖다 붙여도 때울 수 있을만큼 자유로운 제목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악마 이야기나 프라다 다큐멘터리 제목으로도 괜찮을 겁니다. 제목이 유도하는 흥행 분위기에 오히려 반감이 생긴다면 모를까, 이 정도 제목이라면, 제목만 갖고 판권을 사서 영화를 만드는 경우도 꽤 있었습니다.


(메릴 스트립)

(앤 해서웨이)

그런즉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줄거리는 좋은 제목에 쉬운 줄거리를 대강 갖다 붙인, 흔하고 보편적인 내용입니다. 부푼꿈을 안고 젊은이가 뉴욕에 와서 일자리를 얻는데, 인생살이 만만치 않아 고생을 하지만, 결국은 무엇인가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바쁘게 움직이는 뉴욕 사람들과 자동차와 보행자로 가득찬 뉴욕 거리, 드높은 고층빌딩들을 담아 보여주면서, 잘근잘근 이어지는 코메디를 재즈와 듣기 편한 록큰롤 속에 담아 펼쳐냅니다. 이야기 속에는 멋있어 보이지만 인정머리가 없는데가 있는 사람과 삭막한 도시 생활의 벗이 되는 몇 안되는 사람등등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 조연들은 딱 그런 인물이 펼쳐온 형식의 과장 농담으로 웃음을 줍니다.

지겨울 법도 한 이런 이야기 구조에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한 가지 좋은 도전 거리가 들어가 있습니다. 패션 잡지사를 무대로 한 이야기인만큼, 등장 인물들의 의상에 물량공세의 노력을 퍼부은 것입니다. 메릴 스트립과 앤 해서웨이는 영화속에서 수십초마다 한 번 꼴로 온몸의 옷차림이 모두 바뀝니다. 두 사람은 결코 수퍼마켓에 아이스크림 사러 갈 때는 입기 곤란할 법한 과시적인 옷차림들을 끝없이 보여줍니다. 이것은 영화 자체의 볼거리인 동시에, 이 옷 바뀌기 자체가 영화의 리듬이 되어 영화를 보는 박자를 흥겹게 만들고, 따라서 냉랭한 자본주의 도시의 업계에서 고생하는 젊은이의 감각을 더욱 빠르게 전달합니다.

이런면에서 가장 흥겨운 장면은, 뮤지컬 처럼, 음악의 마디, 동기마다 강박자에 찍히는 메릴 스트립 코트 벗어던지기 장면입니다. 화려함 속에 시각과 청각이 동시에 움직이며, 인물의 동작이 큰데다가 두 사람의 감정까지 솟아나는 모습이라서, 초반에 흥겨운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많은 도움을 줍니다.


(메릴 스트립)

(앤 해서웨이)

한편 이렇게 옷차림에 신경을 쓴 이야기 구조는 자연스럽게 화면 전체의 미술적인 구도로 연결되기도 했습니다. 정석대로, 바쁜 뉴욕을 보여주기 위해 치솟은 마천루 사이로 가득 밀린 자동차들을 보여주고 그 사이를 허겁지겁 뛰어가는 인물들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런 장면을 끼워 넣은 방식이라든가 화면 연출의 색채와 밝기 조정들은 통일감을 갖고 즐거운 화면으로 이어집니다. 거기에 높은 빌딩들의 수직구도로 주인공이 은근히 위압되는 느낌을 준다든지, 바닥에서 피어오르는 김이나 빌딩 틈 사이로 비치는 햇살로 아침 이른 시각, 저녁 늦은 시각, 오후의 한가한 시각을 마구잡이로 뛰어다니며 고생해야 하는 시간감을 잘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뉴욕에 온 젊은이 영화"가 너무나 많이 나온 덕택에 그 경치를 담아내는데 아무 성의도 없고 재미도 없는 영화들이 요즘에는 그득합니다. 아에 과감하게 옛날 유행을 과장하는 "다운 위드 러브"나 "허드서커 대리인" 정도를 제외하면, 최근 영화중에는 "어느 멋진 날 One Fine Day" 정도만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만큼 흥겹고 신나고 재미있게 뉴욕을 비추고 있습니다. "행운을 돌려줘 Just My Luck"이나 "슈퍼맨 리턴즈"의 풍경들이 영화 내용에 별 도움이 못되는 것보다 확실히 나은 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메릴 스트립)

(앤 해서웨이)

여기에 노골적인 언어유희나 엎어지고 뒤집는 장면 없이, 자연스럽게 코메디와 호기심을 유발할 수 있을만큼, 극단적인 인물이 있습니다. 패션 잡지의 수장격인 메릴 스트립이 연기하는 이 인물은 지나친 자신감과 굳센 권위가 태산처럼 높아서, 자기가 무슨 "하나회" 두목인 것처럼 행동하는 인물입니다. 이 인물은 장금이나 연생이 같은 신참 궁녀들을 바들바들 떨게 만드는 엄청난 까탈스러움과 지옥에서 갓 잡아들인 싱싱한 표정을 갖고 있습니다. 메릴 스트립은 이 인물을 표현하기 위해 기나긴 대사를 만담 느낌이 드는 듯, 현실적인 듯 줄줄줄 읊으며 연기하는데, 이것이 꽤 멋지고 재미있습니다. 마치 M처럼 화려하게 은발을 과시하는 모습도 인물 성격에 잘 어울립니다.

메릴 스트립은 이런 영화에 잠깐 나오곤 하는, "팥쥐 엄마도 나름대로 슬픈 인생이 있단다." 장면도 무난히 넘어가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한 발짝만 더 내딛었다면, 많은 한국 코메디 영화들이 깊게 파 놓은 신파극의 함정에 빠져 들었을 겁니다. 이 장면에서 화장과 안경을 이용해서 적절하게 분위기를 잡고, 메릴 스트립이 잘 줄타기를 하고 있기에 겨우겨우 아슬아슬하게 영화가 어색해지는 상황을 빠져나가게 됩니다.


(메릴 스트립)

(앤 해서웨이)

메릴 스트립 이외의 다른 배역들도 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앤 해서웨이는 옷이 잘 어울리는데다가 몸집과 얼굴 생김도 메릴 스트립의 인물과 잘 엮입니다. 목이 길고 내려다 보는 시선을 잘 보이는 얼굴이, 나름대로 소신과 자존심이 있는 처음으로 사회에 나선 젊은이를 연기하기에도 유리합니다. 다만, 연기와 각본 모두, 그다지 메릴 스트립이 펼치는 코메디에 별로 좋은 짝이 되고 있는 편은 아닙니다. 지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메릴 스트립이 주거니 받거니하면서 코메디를 펼쳐내는 모습은 그야말로 교과서적이었는데, 그런 장면은 거의 한 장면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실은, 이 영화의 메릴 스트립은 돈값을 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수많은 배우들이 '메릴 스트립을 존경합니다"라고 해온데 어울리는 그런 괴력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신데렐라 마차를 끄는 생쥐 정도인 조연이라서 그렇지 에밀리 블런트도 경쾌한 맡은 바를 잘 해내고 있고, 나이젤 역을 맡은 스탠리 투치는 메릴 스트립과 맞먹을 분량으로 재미있는 장면들을 도맡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이런 영화에 항상 등장하는 주인공을 뒤에서 도와주는 나이든 아저씨/아줌마 역할이 맡겨졌습니다. 보통 이런 역할은 자칫 호들갑스러운 광대 역할로 전락하기 쉬운데, 나이젤은 농담꾼이면서도 모든 등장인물 중에 가장 도덕적이며 위엄있는 인물이기에 성격이 진지함을 얻었습니다.


(메릴 스트립)

(앤 해서웨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화려한 볼거리를 구경시켜주면서, 그 사이에 "사회의 썩은 분위기에서 살다보니 나도 모르게 좀 썩는구나"하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선악 구도가 조금 모호한 것은 꽤 호기심을 돋구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가 되기에는 주인공의 친구들은 단순해 빠진 인공지능 컴퓨터 게임 캐릭터 같을 뿐이고, 주인공의 난관이란 것도 눈물 몇번 훌쩍이고 나면, 사실 별 전환 없이, 도시의 신이 도와줘서 모든 일이 잘 풀려서 "금발이 너무"할 뿐입니다.

결국 이 영화는 찰리 채플린 때부터 따분하지 않느냐는 지적을 들었던 자본주의 멋쟁이 구도로 흘러갑니다. 더러운 놈이고 잔인한 것 같지만 법만 어기지 않으면 경쟁은 결국 효율적이고 아름다운 것이요, 엄청나게 돈을 많이 받아서 사람들이 왕으로 모시는 사람은 그만한 초능력이 있을거라는 겁니다. 그 초능력 때문인지, 끝까지 주인공의 조합 논평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주인공이 불법 원고 잘 빼돌린다는 이유로 그녀의 능력을 모두 다 파악해서 해피 엔딩 분위기를 만들어버립니다. 에펠탑 밖에 안 보이는 파리 출장 장면은 "프렌치 키스"보다 더 몽롱하게 이유없이 "파리- 파리- 오오 나의 파리-"라고 공허히 부르짖기만 합니다.

다행히, 패션 잡지 회사의 골치아픈 사연들 중에서 멋있어 보일만한 모습들만 잘 잡아와서 이야기를 꾸몄고 그 사이를 "칼각"을 잡은 옷들이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기에 이런 점들은 묻혀 가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호소력 있는 어울리는 배경 음악이 있기만 했어도 좀 더 괜찮아졌을 겁니다.


그 밖에...

영화 자막에 논란거리가 있습니다. 이 영화에는 수많은 패션, 출판 업계의 상표, 회사이름, 인명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자막에서 이것을 굳이 이해하기 쉬운 내용으로 바꿔서 의역하려고 합니다. 말하자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라는 대사가 나오면 "악마는 비싼 상표만 입는다"로 자막을 깔아주는 겁니다.

당연히, 이렇게 하면, 어지럽게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상표가 난무하는 영화 분위기가 안 살기 때문에, "샤넬" "구치" 같은 것은 또 그 단어 그대로 자막으로 옮기고 있기도 합니다. 기준은 번역자 자기가 아느냐 모르냐입니다. 번역자가 자기가 아는 말은 그대로 두고, 자기가 모르는 말은 조사를 한 뒤에 알아 듣기 쉬운 설명 의역으로 바꿔 놓았습니다. 번역자의 지식 수준이나 감성과 혼연일체가 된 관객이라면 별 문제 없이 즐길 수 있겠습니다만, 아는 사람은 아는 데로, 모르는 사람은 또 어지러워 하면서 보도록 설명으로 의역하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게 좋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앤 해서웨이를 두고 살이 쪘다고 하는 대사가 나올때 마다 화면에 음료수나 팝콘 같은 것을 집어 던지면서 영화를 보면 어떻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영화 제작진들도 그다지 싫어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덧글

  • 용호씨 2006/11/03 01:03 # 삭제 답글

    저도 보는 내내 실제 배우들의 대화와는 조금 (많이) 다르게 의역된 자막을 보면서 어리둥절 햇습니다. 완전히 틀리게 나온 자막도 있었구요. 이번 번역은 누가 맡았던 건지-_-; 영화는 참으로 재미있었습니다만, 번역은 조금 아쉬웠어요^^;;
  • 게렉터 2006/11/03 11:37 # 답글

    우리나라의 영화 정보 데이터베이스나 웹사이트, 영화잡지에 한글 자막 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게제해 주는 것도 여러모로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 pyosoon 2009/06/16 03:00 # 삭제 답글

    정말이지 번역은 의역이 너무 심하더군요. 한국적인 정서를 살리려고 애쓴 느낌이 나네요. ㅎㅎ
  • 게렉터 2011/01/29 22:53 #

    아쉬웠습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는 브랜드를 끝도 없이 주절거린다는 자체도 분명히 이야기 거리 중 하나인데 말입니다.
  • asdf 2011/01/26 02:11 # 삭제 답글

    수업교재로 봤던 영화라서 어떻게 번역됐는지를 모르겠군요. 문득 궁금해집니다.
    잘 보고 갑니다.
  • 게렉터 2011/01/29 22:53 #

    영화판 번역과 DVD판 번역은 다른 경우가 많으니 이제 영원히 안녕인 듯 합니다.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