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라 Laura 영화

TV쇼 "레밍턴 스틸"의 레밍턴 스틸은 탐정 활동에는 별 재주가 없는 듯 보이지만 가끔 쓸모 있는 소리를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는 지금 펼쳐진 범죄 상황에 꼭 들어맞는 범죄 영화를 그 때 그 때 언급하는 영화광으로서의 재주가 있었던 것입니다.


(범인으로 추정되는 사람들과 형사)

대부분 레밍턴 스틸이 언급하는 영화의 반전과는 살짝 다르게 진상이 밝혀지지만 그래도 추리 영화로 추리를 하는 탐정이라는 듯한 이 설정은 재미있는 것이었습니다. 초기 에피소드에서 레밍턴 스틸은 그림에 얽힌 범죄를 수사하다가 갑자기 "로라"라고 합니다. 스테파니 짐발리스트가 연기한 로라가 자기를 부르는 줄 알고 돌아보자, 레밍턴 스틸은 동료 로라를 부른 것이 아니라, 1944년작, 영화 "로라"를 말한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로라"는 여자 주인공에 얽힌 범죄 이야기를 조사하는 슬쩍 울적하고 무뚝뚝한 남자 주인공 이야기로, 시작 장면부터 나래이션을 까는 모양새를 보면 꽤 그럴듯한 느와르 영화 분위기가 잡힙니다. 내용은 엄청나게 아름답고 우아한 로라라는 사람이 시체로 발견되었는데, 이 살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그를 둘러싼 사람들을 하나 둘 조사하고, 그들을 통해 로라라는 인물에 대해 하나 둘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반부를 넘어서면 보다 전통적인 명탐정이 활약하는 "범인은 바로 당신이다!" 이야기로 바뀝니다.


(로라)

"로라"의 가장 멋진 부분은 역시 초반을 장식하는 죽은 로라에 대한 생생한 회상담입니다. 이제는 살아있지 않는 사람이 되었기에 더욱 신비롭고 대단한 인물로 포장되는 "로라"에 대한 묘사들은 그 자체로 참 그럴듯해 보입니다. 이런 로라를 수사해 나가다가 매서운 데가 있는 뛰어난 형사는 점차 로라에 대한 많은 생각에 허우적거리게 되고, 결국 죽은 로라의 초상화를 보면서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즉 레밍턴 스틸의 말처럼, "초상화 속의 얼굴만을 보고 사랑에 빠진다"라는 것이 무척 재미있습니다. 이 소재가 이 영화에서 그렇게 극단적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문제의 초상화를 보여주는 장면 자체가 그다지 많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영화 전체에서 가장 흥미로운 내용으로 내세울 만한 것임은 틀림없습니다. 이 기이한 분위기에 절묘하게 어울리는 명작 배경음악도 한 몫 톡톡히 합니다.

이런 상황은 영화에 연기로 등장하는 꾸민 인물만을 가지고, 영화배우들에 대한 호감을 돋구는 영화라는 것의 특징과도 잘 부합해서 더 이야기가 재미있어지는 면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보여주기 위해 설정된 인물들도 잘 잡혀 있습니다. 겉보기에는 번듯한 사람이지만 어두운 구석을 하나씩 갖고 있는 대조적인 두 인물이 로라를 회상하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이 사람들이 로라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묘사를 통해서 형사는 더욱더 로라에 대해 부풀려진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것은 이야기를 전달해주는 사람의 성향을 드러내기에 좋은 구도이면서, 동시에 이야기의 내용이 되는 로라라는 사람에 대한 호기심을 더욱 부채질합니다.


(로라)

한 사람은 굉장히 명망 높은 작가이자 방송인인 마른 인상의 늙수레한 사람입니다. 나이 차이가 40년이나 나면서 필요 이상으로 로라의 사소한 이것저것에 관여하며, 굉장한 질투심에 가끔 불타오르기도 합니다. 이 자는 아주 은근히 변태적인 성향을 내비칠때가 있어서 환상적인 이야기 속에 암담함을 드리워 이야기에 실재감을 주고 있습니다. 길고 장황한 어휘를 사용해 사연을 읊어대는가하면, 또한 엄격하고 냉랭한 모습을 비칠때가 있습니다.

여기에 기타 여러가지 집착하는 모습들이 어울어진 결과, 이 사람은 직접 표출해 보여주는 장면이 거의 전혀 없이 애정결핍이라든가 고독에 시달리는 사람인듯한 성격이 암시됩니다. 이 사람이 로라에 대해 해 주는 이야기가 가장 많기 때문에 이 영화에서 이 사람은 약간의 동정을 받을만하면서도 또한 피하고 싶기도한, 느와르 영화속의 인물이 됩니다.

다른 한 사람은 젊고 쾌활하며 여유있어 보이는 사람입니다. 유려한 태도로 사교무대에 등장하며 그럴싸한 행색을 자랑하는 이 사람은, 그러나 따지고 보면 하는 일 없는 날건달로 이리저리 빌붙어 먹고 사는 사람일 뿐입니다. 여자 관계가 좀 복잡하고, 그 복잡한 관계란 것이 대부분 좀 구구해 보인다는 점이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앞서 등장한 인물과 겉모습에서부터 말하는 투까지 명백한 대조를 이루고 있어서 각자의 성격을 더 내세워 표현하는데 효과적입니다.


(로라)

이 영화가 약간 힘없어 보이는 점이 있다면, 중간 반전 장면의 묘사입니다. 반전 내용은 나무랄데가 없습니다. 오히려 기막히게 멋지다고 할만합니다. 신기하며, 재미있고, 로라에 대한 동경을 계속하여 강조해 온 영화의 전체 이야기와도 찰떡처럼 맞아 떨어지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꽤 충격적인 반전치고 너무 짧고 약한 연출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별 대단찮은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꼬인 음험한 분위기를 불러왔던 도입장면은 느긋하고 중후했습니다. 그보다 훨씬 중요한 내용일 수 있는 중간 반전은 화면 구도에서부터 음악에 이르기까지 좀 약한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인물이나 기타 반전외의 여러가지 요소들에 힘을 싣기 위해서 이 반전 자체의 묘사를 좀 자제했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정도 국면전환은 몇 초 정도는 좀 더 심각하게 다뤄주어도 별달리 전체가 휘둘리지는 않을 겁니다. 비슷한 시점에서 국면 전환을 시도하는 "현기증" 에서 좀 경박할 정도로 온갖 음악과 효과, 충격적인 감정을 동원하는 것과 "로라"는 무척 달라 보입니다.


(로라)

이 영화에서 연기할 거리는 별로 없어도 가장 중요한 인물인 진 티어니는 일단 그 아름답고 그럴듯해 보이는 모습이 다양하게 잘 잡혀 있습니다. 특히, 후반부에 나오는 장면 하나는 전면부에서 비치는 조명을 조절하며, 포토샵의 흐리게 빛나는 필터를 이용하고, 45도 각도에서 올려다보는 마치 21세기의 "웹캠에서 사진 잘 나오는 법"의 정석을 펼치는 듯한 것도 있습니다. 차분하고 가라앉은 모습이 바탕이 되어, 신비로운 모습도 현실적인 모습도 잘 비치고 있어서, 대단히 굉장한 배우라고 할만한 내용은 아닐 망정 분명히 영화의 중요한 요건으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이 영화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은 상당히 그럴듯한 막판 파국 액션 장면입니다. 막판 파국은 영화 전체에서 가장 강한 액션임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인 방법으로 주제를 이야기하는 음향이 흐르는 가운데, 조용하게 진행됩니다. 이런 조용한 장면은 황야에서 대치한 두 총잡이가 서로 노려보며 분위기를 잡는 5,60년대 서부 영화의 대결 장면 같은 효과를 갖고 있습니다.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나 나무 삐걱거리는 소리 따위의 소음을 들리게 해서 괜히 더욱 조용하다는 느낌을 들게하며, 화면 속 사람의 조마조마한 심경에 한껏 집중하게 만듭니다. 덕분에 이 영화 전체 흐르고 있는 동경과 현실의 뒤얽힘을 느끼게 해 줍니다.


(로라)

이 끝나는 파국장면을 보고 있으면, 그만큼 중요하다 할만한 다른 장면들도 좀 더 깊고 강하게 묘사되었으면 더 좋지 않았게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흔히 연애와 이별에서 걱정하게 마련인 집착, 소유욕, 추한 미련 등등에 관한 문제를 범죄와 환상적인 회상속에 부풀려낸 이야기는 좋은 고전 답습니다. 반면에, 이야기의 몇몇 요소는 전달이 좀 성급하게 넘어가서, 더 장중할 수 있는 이야기가 가볍고 짤막한 치정극으로 약간은 기울어진 듯하여 아쉬움도 느껴집니다. 단점만 보자면, 회상이라는 형식과 연애에 대한 집착 구도 때문에 TV쇼 "사랑과 결혼"의 에피소드스러움이 영화와 어긋날 때가 있습니다.


(로라)


그 밖에...

의외의 범인을 정한 수법이 아가사 크리스티의 대표작 중 하나와 똑같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보면, 배우 진 티어니의 기막히게 비극적인 사연은, 후에 아가사 크리스티의 다른 대표작 중 하나에 반대로 똑같이 차용되기도 했다는 사연이 있습니다.

진 티어니의 출연작들 중에서 거의 가장 쉽게 한국에서 DVD를 구할 수 있는 영화일 겁니다. 그러나, 영문 자막조차도 없는 심하게 단촐한 제품입니다. 무엇보다 씨네코리아에서 발매한 이 한국판 DVD에는 DVD껍데기 뒷면에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 영화의 기막힌 주제곡은 작곡가 데이비드 락신 David Raksin 이 아내에게 받은 편지에서 받은 감흥으로 작곡한 것이라고 합니다. 영화속 분위기와는 약간 다르지만, 웹사이트들 중에서는 이 이탈리아 사람의 연주 http://digilander.libero.it/Manlio.Bichelli 도 한 번 들어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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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FAZZ 2006/11/06 14:39 # 답글

    스크린샷을 보니 정말 로라라는 인물 매력적으로 생겼군요.
    언급하신 레밍턴 스틸은 그런 엉뚱하지만 사건의 핵심을 언급하는 레밍턴의 한 마디와 그것을 사건 해결의 실마디로 엮어내는 로라의 능력이 재미있었는데 2기때 부터는 레밍턴 스틸의 탐정 능력이 향상되고 비중이 커져서 재미가 떨어졌던 기억이 납니다.
  • 게렉터 2006/11/06 21:35 # 답글

    기회가 된다면 "레밍턴 스틸"도 시즌1을 중심으로 뭔가 좀 써보고 싶기도 합니다. 진 티어니는 잉그릿드 버그만으로 이어지는 40,50년대 흑백 영화에서 제대로 빛을 발하는 배우 계보의 우두머리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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