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셋 대로 Sunset Blvd. 영화

"선셋 대로"는 야자수가 가로수로 늘어선 캘리포니아 식의 썰렁한 길입니다. 대중교통수단이 그다지 발달하지 않았고, 자동차가 없으면 다니기 힘든, 널찍널찍하게 자리를 잡고 사는 동네의 도로입니다. 이 길이 유명한 것은 첫째는 LA에서 헐리우드 중심부와 부자들이 사는 저택 동네를 연결하는 도로라는 점 때문입니다. 둘째 이유로는 매우 느와르 영화스러운 나래이션으로 시작하는 고전 영화, "선셋 대로" 를 꼽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선셋 대로)

"선셋 대로"의 도입부는 대체 무슨 일이 생길 것인지 궁금하게 하는 일들을 계속 연결해나가면서 펼쳐집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점차 이상한 소용돌이에 빠져드는 느와르 영화 주인공의 독백 나래이션이 계속 깔립니다. 갑자기 저택에 딸린 수영장에 빠진채 죽어 있는 살인사건이 묘사되는가하면, 신용불량자가 되어 자동차마저 압류당할 처지에 놓인 사람이 여기저기 다녀보는 일이 연결 됩니다. 그렇지만 급하게 돈 빌리는 것마저 실패하는 일도 벌어집니다. 이런 사건들은 군더더기 없이 대화와 내용 짚기 중심으로 발빠르게 진행되고, 양념으로 독백 나래이션은 계속 끼어듭니다.

이렇게 난무하는 독백은 조금만 잘못하면, 멋부리다가 실패하는 중학생 연애편지처럼 망할 위험성이 있습니다. 각본가 딴에는 멋있으라고 쓴 대사지만 어림없는 과장과 잘난척만 가득하게 들릴 수도 있고, 오늘은 꽤 그럴싸해보이지만 내일, 모레쯤 가면 형편없는 것이 되는 등 유행을 탈 수도 있습니다. 무진장 진지하게 만든 록 음악이나 비극적인 슬픈 노래의 나래이션이 10년후 노래반주기에서 얼마나 우습게 들리게 될지 생각해 본다면, "선셋 대로"에 삽입된 나래이션의 양은 위험스러워 보입니다. 그러나, 나래이션이 호들갑스러운 수사법의 치장보다는 가벼운 농담이나 조소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가 스스로를 비웃는 느낌이 있어서 적당히 진실된 느낌을 갖고 있습니다. 게다가 주인공인 윌리엄 홀든이 나래이션 읽는 솜씨가 정확하고도 든든하고, 자연스러운 리듬감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몇몇 불안한 부분만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이런 나래이션은 잘 들어맞습니다.


(압류위기의 자동차)

막상 이야기가 본론으로 들어가면, "선셋 대로"는 반전이라면 반전 비슷한 다른 분위기로 빠져버립니다.


(살인 사건)

곧 이 영화는 문득 거대한 으시시한 저택에 가난하고 평범한 주인공이 살게되는데, 차차 저택의 비밀을 알아간다는 식의 고딕소설 분위기로 돌변해 버립니다. "선셋 대로"라는 제목을 보나, 이야기의 도입부를 보나, 도시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총격사건이나 범죄자들이 나오는 어두운 시가지 아파트의 일이 펼쳐질 듯했습니다. 느와르 영화 특유의 나래이션도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그렇지만, "선셋 대로"는 괴기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감도는 저택에 들어선 길잃은 주인공 이야기가 됩니다. 주인공은 평범한 태도로 저택에 정착하게 되지만, 저택에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한 껏 감돌고 이상한 비밀을 숨기고 사는 듯한 좀 변태스러운 저택 주인과 불안한 관계가 이어지는 겁니다. 절대 들어가지말라는 지하실이나, 굳게 잠겨 있는 죽은 아내의 방, 아버지의 방 등이 꼭 있을 겁니다. 이 영화에는 수영장이 그런 용도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이런 스산한 어두움은 주인공이 쥐를 보고 기분나빠 하는 장면등등을 통해 효과적으로 분위기를 잡고 있습니다.

19세기말, 20세기초에 왕창 유행한 소설에서는 보통 음험한 남자 귀족이 사는 썰렁한 저택에 가난하지만 착한 어린 아가씨가 방문하는 이야기 였습니다. 이 영화가 강렬한 묘미를 주는 가장 큰 이유는 착한 어린 아가씨 대신, 느와르 영화 주인공다운 별로 안 착한 남자가 삶의 고달픔에 무뚝뚝한 유머를 달고 저택에 나타나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택 주인을 늙은 왕년의 인기 배우로 설정한 것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멋지게 이야기가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으스스한 저택과 음침한 하인)

결국 "선셋 대로"는 두 사람이 끝없이 외로워하면서 점점 파국적인 분위기로 몰아가는 이야기가 됩니다. 왕년의 인기의 부작용으로, 여자 주인공인 저택 주인은 다 늙어서 시대에 뒤쳐졌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정신병에 가깝게 과거의 환영에 젖어 살고 있습니다. 50대의 나이에 이르렀지만, 아직도 10대 후반의 매력을 내뿜는 화려한 배우의 모습에 자신의 진정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온갖 사치품으로 치장된 거대한 저택에 혼자 살면서 허망하게 흘러가는 시간과 빠른 퇴직 후의 심심한 무의미를 달래기 위해 별짓을 다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이 인물은 글로리아 스완슨이라는 막강한 배우를 통해 기막히게 표현되었습니다.


(왕년의 인기 배우)

이 배우는 주책맞게 과거의 인기를 탐닉하는 정신병적인 성격의 부자를 괴기스럽고도 처량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배우가 읊어대는 대사들은 그다지 설득력 있는 감정이 잘 실려 있는 편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인물이 아니라, 좀 맛이 간 혼자 사는 백만장자 역할의 대사이기 때문에 별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식으로 대사가 흘러다니기 때문에 가끔 정말 그 정신나간 성격이 치솟는 부분에서는 기괴함이 팍팍 살아 납니다. 한편 대사에 비해 표정연기나 몸짓은 완벽하다 할만합니다.

그녀는 홀로 영화에 강한 박력을 불어 넣을 만한 능력이 있습니다. 이 영화 속의 글로리아 스완슨은 메릴 스트립이 "죽어야 사는 여자" 나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등에서 보여준 호사스러움에 탐닉하는 사람 연기의 좀 더 진한 형태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간질 전화를 속삭이는 등의 유치한 짓을 하는 침대 위 장면에서는 사람 딱해 보이는 발버둥 치는 모습이 음침하게 살아나고, 남자 주인공의 뺨을 때릴 때의 파괴력은 전성기 크리스토퍼 리의 백작 선생과 맞먹을 정도 입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의 왜곡된 심리가 넘쳐나는 모습은 가짜 송곳니 붙인 크리스토퍼 리의 인상에 조금도 뒤질바가 아닙니다.


(글로리아 스완슨)

이러한 그녀의 모습은 요란한 20년대 풍의 과장된 미술적인 요소로 치장되어 있습니다. 특히 멋진 자동차들을 이용하고 있는 장면들은 고전 영화의 멋이 살아 있는 볼거리입니다. 한편 다양한 화장에 미용수단이 도가 지나쳐서 괴상해 보이는 모습도 잘 활용되고 있습니다. 오이 조각을 얼굴에 붙이거나 한없이 많은 플라스틱 막대를 머리에 꽂은 퍼머 장면은 요즘에는TV드라마 연출자들이 제 멋에 겨울 때 난무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선셋 대로"에서는 결정적인 장면에서 진중하고 격정적으로 이런 모습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여자 주인공의 모습이 그저 괴상한 인간의 이상한 짓일 뿐만 아니라, 과거를 그리워하고 노화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인간의 불쌍한 모습이라는 느낌이 풍깁니다.

조연들도 제몫을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세실 드밀이나, 버스터 키튼 , H.B. 워너 같은 실제 영화계의 거물들이 자기 자신을 연기하는 장면들은 단순한 카메오 재미거리가 아니라 진짜 같은 이야기를 다룬다는 현실감을 주는 쪽으로 멋지게 공헌하고 있습니다. 고딕 소설 분위기에 꼭 등장하기 마련인 음침함을 돋구는 집사역을 맡은 에리히 폰 스트로헤임도 잘 어울립니다.

낸시 올슨은 여자 주인공과 대비되는 발랄한 극작가 지망생을 연기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모습은 마치 왕년의 르네 젤위거처럼, 평범하고 일상적인 세파 속에 뛰어난 어린 사람을 연기하면서 동시에 외모와 말투에서 사람 끄는 매력을 내뿜습니다. 특히 연말 파티 장면에서 주인공과 농담 따먹기를 하는 장면은 멋진 코메디 연기이면서 동시에 경쾌한 감정 교류를 표현하는 각본의 즐거움을 한껏 살리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들이 인상을 굳히는 덕에, 대조적인 여자 주인공의 모습은 강해지고, 막판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레트 버틀러를 흉내내며 이상한 방식으로 멋있는 척을 하는 남자 주인공도 빛을 발하게 합니다.

사이사이 작은 연출과 세세한 조작이 멋지게 보이는 부분도 많습니다. 세실 드 밀이 거물 감독이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이 사람에게 한 마디 말이 전달 되기 위해 여러 사람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장면이라든가, 가벼운 유머로 후끈 달아오르는 분위기로 나름대로 말 되는 이야기까지 표현하는 코에 입맞추기 장면도 고개를 끄덕이게 합니다.


(낸시 올슨과 농담 따먹기)

"선셋 대로"는 음악 또한 정말 해머 영화사의 공포 영화처럼 으스스한 성의 불길한 사람들에 어울리는 곡조입니다. 이것은 단순무식하게 걸맞긴 하지만, 이 영화에 흩어져 있는 비정한 도시의 느와르 영화 분위기를 잊게 만드는 점도 있습니다. 이것은 이 영화가 이런 복합적인 성격때문에 훨씬 뒤에 나올 현실적인 비극 영화스러워 보인다는 점 때문에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됩니다. 영화의 결말 역시 조금은 뻔한 면이 있습니다. 중반쯤에 갈등구도가 드러나는 즉시 그대로 이어지는 별달리 곡절없는 평범한 것입니다. 그래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며, 어떻게 일에 휘말리는지 궁금증을 불태우게한 초반부의 기대에는 못 미칩니다.

하지만 이 결말의 대미를 장식하는 극적이고 거창한 마지막 장면이 있습니다. 이 장면은 영화가 초반에 불러온 인상과 초지일관하고 있지도 않고, 남녀 주인공과 조연등 인물 비중을 좀 무너뜨리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만, 슬픔과 회한이 흐르면서 괴기스러움 역시 넘쳐나는 몹시도 화려한 것이며 커다란 화면을 볼거리로 과시하면서 반대로 대사는 없애 버려 집중도를 높인 장면입니다. "선셋 대로"는 연예산업 흥망성쇠의 쓸쓸한 이면을 무겁게 드러내는 이야기 입니다. 이러한 구체적인 분야와 특정한 인물의 이야기를 통해, 이 영화는 급작스런 성공 뒤에 찾아온 비참한 말로에 대한 보편적인 이야기로, 삶의 열정과 성취에 대해 돌아보게 하는 면이 있습니다.


그 밖에...

여자 주인공을 맡은 글로리아 스완슨이 실제로 9년만에 돌아온 (not comeback but "return") 영화 입니다. 모든 영화속 여자 주인공의 젊은 시절 사진은 배우 글로리아 스완슨의 전성기 사진들입니다. 중간에 등장인물들이 보는 영화 역시 실제로 글로리아 스완슨이 출연한 영화 "Queen Kelly" 입니다. 이 영화의 감독은 집사역을 맡았던 에리히 폰 스트로헤임이었습니다. IMDB Trivia에 따르면, 이 영화를 틀자는 제안도 에리히 폰 스트로헤임이 했다고 합니다.

중간에 세실 드 밀이 영화 찍고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은 정말로 실제 영화를 찍는 장면입니다. 이 영화는 교회, 성당, 크리스마스 특선 영화에서 한국에서도 매우 친숙한 바로 그 "삼손과 데릴라" 영화 입니다. 이 "Stage 18" 세트는 흔히 세실 드 밀 스테이지라고 불리웠다고 하는데, 요즘에는 거기서 "스타트렉" 을 촬영한 탓에 "스타트렉" 스테이지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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