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밍턴 스틸 Remington Steele: 112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영화

에드가 앨런 포의 소설들과 셜록 홈즈의 등장 이후로 수없이 많은 추리물들이 세상에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래서 왠만큼 그럴듯한 범행이나 추리 수법이 나와서는, "그건 어느 소설에서 써먹은 수법이잖아" "이건 무슨 영화의 반전을 베낀거네"하게 되기에 맥이 빠지기 쉽습니다. 이제는 절대 하지 말라는 말이 워낙 많이 퍼져서 찾아 보기는 힘듭니다만, 그동안 "개가 짖지 않았으니 면식범"이라고 하는 이야기라든가, "가장 놀란 신고한 사람이 범인이었다니 이럴수가"라는 이야기는 참 트럭으로 몇 대 분량은 될만큼 넘쳐 났습니다. 대신에 요즘에는 절름발이가 범인인 이야기나, 살았는 줄 알았는데 죽어 있는 이야기들이 또 다른 트럭에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는 중입니다. 80년대 추리TV쇼 중에 한국에서 가장 성공을 거둔 것이라 할만한 "레밍턴 스틸"은 바로 이런 소재 고갈 문제에 자포자기처럼 정면으로 뛰어든 이야기입니다.


(어떤 추리 수법을 사용하는 것이려나)

"레밍턴 스틸"은 옛날 영화에서 나온 범죄 수법이나 추리 수법이 나올 때 쯤이 되면, 영화광인 남자 주인공 "레밍턴 스틸"의 입을 빌어, 극중에서 직접 그 영화 이름을 실토 해 버립니다.

TV쇼의 처음 부분에서, 주인공 레밍턴 스틸은 탐정 사무소 홍보용으로 설정된 가상 인물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챕니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이 바로 그 가상 인물이라고 주장하고 실제 인물인냥 행세하면서 이 모든 모험에 뛰어들게 됩니다. 그러면, "레밍턴 스틸"은 에피소드가 본 궤도에 오르자마자, "북북서로 진로를" 돌리는 장면을 보여줘 버리는 겁니다. 한편, 첫번째 에피소드부터, "훗날 이걸 이야기 할 때는, 곱게 말해주시오. 데보라 커가 존 커에게, '홍차와 동정심' MGM 1956년. 'When you mention this in the future, and you will, be kind.' Deborah Kerr to John Kerr. 'Tea and Sympathy'. MGM, 1956" 이라고, "레밍턴 스틸" 답게 영화 제목을 읊습니다.

"레밍턴 스틸"은 한 발 나아가 이런 요소를 적극적으로 밀어 붙여서 매우 특이한 탐정상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것은 영화광 주인공이 옛날 영화에서 본 내용을 바탕으로 추리를 하고 범인을 밝혀 낸다는 겁니다. 아마 오리엔트 특급을 탔을 때 살인이 일어난다거나, 나이아가라에서 장기투숙하는 아름다운 여자와 얽힌 사건이 벌어지면 추리가 성공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만, 역시나 영화는 영화일뿐인지라, 이 영화광의 추리는 조금씩만 들어맞을 뿐 상당부분 어긋납니다. 이런 어린이 같은 순박한 기대와 꼬여가는 상황은 좋은 코메디의 재료가 됩니다. 그리하여, 심각해야할 살인사건 수사가 얼렁뚱땅 엉성하고 어슬픈 주인공에 의해 어림없게 풀려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로라 홀트)

바로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춰 보면, "레밍턴 스틸"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코메디입니다. 여자 주인공인 로라 홀트는 홍보용 인물일 뿐인 레밍턴 스틸과 달리 실제로 사건을 해결하고 노련하게 문제를 대처해나가는 사람입니다. 대조적인 이 두 사람은 티격태격 하는 사이입니다. 그렇습니다만, 서로에게 의지하는 면이 있는데다가 둘다 그럴싸한면이 있기 때문에 좀 끌리는 데가 있어서 자연스럽게 미묘한 감정이 오가기도 합니다. 이런 구도가 바로 옛 스크루 볼 코메디의 전형적인 상황이 되어, 풍성한 농담들을 싹트게 합니다. 특히 주인공인 레밍턴 스틸은 중요한 내용을 가볍게 말하고 가벼운 내용을 현란한 수사법으로 말하며, 은유법을 써야할 때 직설적으로 말하고, 직설적으로 말해야할 때 은유법을 쓰는, 길고 빠른 말로 웃음을 자아내는 대사들이 즐겁습니다. 피어스 브로스넌의 코메디 연기는 대사는 무난한 수준이지만 표정과 동작은 무척 뛰어납니다.

너무 요즘 영화의 내용을 가져다 이야기하면 갑자기 스포일러가 되어 버릴 겁니다. 그리고, 허우대만 멀쩡한 말끔한 영국 신사로 설정되어 있는 레밍턴 스틸에게는 낭만적인 흘러간 옛 영화들이 좀 더 어울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레밍턴 스틸"에서 주로 언급되는 영화들은 옛날 범죄 영화들입니다. 그러다보니 우울한 조직폭력 영화나 느와르 영화들이 대거 인용됩니다. LA의 사립탐정이라는 직업도 이런 영화들에 잘 들어 맞습니다. 레밍턴 스틸은 많은 옛 영화배우 중에서도 특히나 험프리 보가트의 팬으로 설정되어 있기도 합니다.


(로라 홀트 탐정사무소)

그리고 이러한 추리극과 코메디의 연결점에 "레밍턴 스틸"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표출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양성 평등 운동에서 발췌한 소재입니다.

스크루 볼 코메디를 느와르 영화 혹은 아가사 크리스티 분위기의 어두운 추리물로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고리이자, "레밍턴 스틸" 이야기의 가장 굳건한 기둥이 되는 것이 바로, 80년대에 이르러 어느 정도 위치를 점한 여권신장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내용을 진지하게 주제로 삼는 것은 아니요, 오히려 퇴행적인 시각으로 안이하게 엮어 먹는 편도 적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만, 어쨌거나, "레밍턴 스틸"이 소재를 다루는 중심축이 연애 이야기와 맞물린 양성평등 문제라는 것은 선명합니다. 이러한 소재의 발굴이 다양한 인물상과 코메디, 사건을 엮어오는 자연스러운 열쇠역할을 한 것입니다.

일단 이야기 뿌리부터가 눈에 들어옵니다. "로라 홀트"라는 여자 이름을 걸어 놓은 탐정 사무소가 지지리도 영업이 안되고 있었는데, "레밍턴 스틸"이라고 남자 이름을 걸어 놓자 나날이 번창했다는 겁니다. 이런 배경 설명은 그 자체로 양성평등 화제에 관한 전설적인 우화와 같습니다. 이후에도, 이야기 속의 고객들은 실제로 모든 업무를 도맡아 하는 로라 홀트를 무시하고 얕봅니다. 그러면서 홍보용 가상 인물일 뿐인, 레밍턴 스틸을 대단한 유명 인사로 받듭니다. 이런 불합리한 내용들은 그 자체로 재미있는 갈등과 투덜거리는 유머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레밍턴 스틸 탐정사무소)

무엇보다 이런 소재가 즐겁게 구체화 된 것은 레밍턴 스틸이라는 인물입니다. 레밍턴 스틸은 옛날 영화에 푹 빠져서 특히 옛날 느와르 영화의 폼잡는 탐정, 형사 인물들을 멋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때문에 좀 무능하면서도 여유와 베짱에 가득차 있으며, 재치있는 농담을 달고 살며 대단한 사립 탐정 회사 사장인냥 행세하면서도, 실은 아주 평범한 소시민스러운 실수를 자주 저지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레밍턴 스틸은 자신의 영국식 억양을 종종 강조하면서, 무슨 19세기 유럽 귀족 같은 각별한 예의와 품위로 사람들을 대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대부분의 여자들에게 복고적인 사교계 풍의 친절한 태도를 지키고 있으며, 항상 단순하지만 깔끔한 정장 차림으로, 괜히 리무진 기사를 고용해서 오가곤 합니다. 특히나 피어스 브로스넌 특유의 허리를 꼿꼿히 세운 채 달리는 걸음걸이로 뛰어다닐 때는, 정말 빅토리아 시대 활극 소설 속의 등장인물 같아 보입니다.

이런 갖은 옛날 영화속, 소설속 남자 주인공들의 멋부리기가 집대성된 구시대의 유물 같은 인물이 레밍턴 스틸입니다. 그런데 실은 이 사람은 80년대 LA의 허구 속 존재일 뿐인 말그대로 유물인 부실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로라 없이는 아무 것도 못하고 사고만 치는 사람이라서, 그만큼 시청자들이 쉽게 공감할만한 보통 사람으로서의 위치를 갖고 있기도 합니다.

레밍턴 스틸이 절묘한 것은 이렇게 어슬픈 인물이면서도, 또한 매우 수수께끼같은 신비로운 인물이라는 점입니다. 그는 어디서 무엇을 하다 온 사람인지, 심지어 진짜 이름이 무엇인지도 알려지지 않은 사람입니다. 과거를 알려 달라는 질문을 맨날 요리조리 피해 다니고, 덕분에 무슨 엄청난 사연이 있는 듯 하기도 합니다. 이런 내용은 레밍턴 스틸이 이 많은 코메디들 속에 사실은 좀 슬픈 상처를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막연한 추측을 불러 옵니다. 코메디와 느와르 영화가 뒤섞인 이야기의 내용 또한, 가벼운 농담의 대가이지만, 진지한 실체를 알 수 없는 레밍턴 스틸을 어딘지 외로운 이면이 있는 듯한 분위기로 끌어갈 때가 간혹 있습니다. 이런 레밍턴 스틸의 과거 - 정체 이야기는 로라 - 레밍턴의 연애 이야기와 함께 시리즈 전체에 흐르는 이야기 거리가 되기도 합니다.


(레밍턴 스틸)

로라 홀트는 레밍턴 스틸의 허상에 가려져 있는 불운한 실상이기도 합니다만, 동시에 이런 레밍턴 스틸을 보살펴 주고 이끌어 주는 고마운 사람이기도 합니다. 이 점은 레밍턴 스틸 역시 강하게 느끼고 있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사건상으로도 레밍턴 스틸은 로라 홀트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에 불과하고, 감정적으로도 레밍턴 스틸 스스로도 로라 홀트에게 깊이 의지하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과거를 숨기고 살고 있는 레밍턴 스틸에게 외로움을 잊고 정말로 가까이 지낼 만한 사람은 로라 홀트 밖에 없기에, 이러한 감정은 짧고 가볍게 묘사되는 것이긴 해도 꽤 설득력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내용은 레밍턴 스틸의 열등감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것이 약간 입체적인 구도를 만들기도 하고, 몇몇 편에서는 그 자체로 재미있는 이야기거리를 만들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이 헐렁한 사람이 정말로 로라가 위험에 처했을 때, 갑자기 목숨 걸고 달려드는 모습이 극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레밍턴 스틸이 옛 느와르 영화속 주인공 행세를 한 껏 해본다는 이야기가 "112. 높이 나는 스틸 Steel Flying High"입니다. 이 편에서 험프리 보가트가 나온 많은 느와르 영화들에 대한 이야기들 속에서, "레밍턴 스틸" 고유의 앞서 언급한 요소들이 틈틈히 살아 있습니다.


(그대의 눈동자에 건배. Here's looking at you, kid.)

"말타의 매 The Maltease Falcon" 대신에, 캘리포니아의 흰머리 독수리가 나오는 이 이야기는, 전형적인 느와르 영화처럼 시작합니다. 억마장자 남편이 죽어서 엄청난 유산을 상속 받게된 한 매력적인 여자가 남자 주인공을 찾아 오면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레밍턴 스틸은 갑자기 "가장 더러운 살인, 마가렛 러더포드, MGM 1964년. Murder Most Foul, Margaret Rutherford, MGM 1964."라고 읊더니 대단한 살인 음모가 있다고 외쳐서 세상을 놀라게 하고는 사라져 버립니다. 소식을 들은 로라 홀트는 "어쩌자고 이 인간은 경찰도 사고사라는데 저 혼자 살인사건이 났다고 떠들어댄거야"라며 짜증을 팍팍 냅니다.

이 연출은 TV 시리즈의 멋이 잘 살아 있는 부분입니다. 시청자들은 레밍턴 스틸이 영화를 읊으면서 사건을 추리한다는 버릇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는 레밍턴 스틸이 직접 저 대사를 하지도 않고 영화속 등장인물들도 이를 알아 듣지 못하고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하고 어리둥절해 합니다. 그렇지만 TV 밖의 시청자들은 레밍턴 스틸이 무슨 생각으로 무슨 이야기를 한 것인지 TV 속 인물들보다 더 잘 추측할 수 있게 됩니다. 직접적인 보조 설명이 없이도, 지금까지 이어져온 TV 시리즈였기 때문에 인물들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시청자들이 환하게 알고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TV안으로 들어가서 TV속 등장인물들에게 "레밍턴 스틸은 영화로 항상 설명하곤 합니다. '가장 더러운 살인'은 영화 제목인 것입니다"라고 알려주고 싶은 충동을 일게 합니다. 이런 연출은 TV속 주인공을 실제 인물처럼 더욱 친근하게 만듭니다.


(로라 홀트와 레밍턴 스틸)

이 에피소드는 흰머리 독수리 보호 구역 지정과 관계된 토지 매매에 의뢰인이 얽혀든 복잡한 사건 입니다. 레밍턴 스틸은 사건 분위기 때문에 스스로 느와르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으로 여겨서 참 철없는 어린애처럼 들떠 합니다. 로라 홀트는 차분하게 사건의 진상을 파헤쳐 나가면서 이런 레밍턴 스틸을 한심하게 여깁니다. 예를 들면, 레밍턴 스틸은 악당 비스무리한 사건 관계자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돌아와서는, 로라가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자:

"베논 이라는 어떤 족제비 같은 놈이 날 샙했어요."
"'샙'해요?"
"40년대 은어로 패다, 때리다, 뭉게다죠."
"어디 있었는데요?"
"'말타의 매'에 나오는 바로 그 장면 속에 있었죠. 거기서 난 개스퍼 거트맨이 그대로 살아나와 있는 듯한 그런 악당과 맞서고 있었어요. 난 물론 샘 스페이드였죠. 살짝 그늘진 탐정 말이오. 우린 진짜 영화처럼 딘커스를 두고 딘커링했어요. 그 자는 그걸 물건이라고 불렀지만요."

"I got sapped by some weasel named Vernon."
"Sapped?"
"40's jargon for slugged, hit, bashed about."
"Where were you?"
"In a scene right out of 'The Maltese Falcon'. There I was, confronting the very incarnation of Casper Gutman. I, of course, was Sam Spade, the slightly shady shamus. And, we were dinkering for the dinkus, only he called it an item."


(로라 홀트와 레밍턴 스틸)

이 에피소드에서도 레밍턴 스틸은 농담과 엉뚱한 짓을 저지르는 한 편 로라를 잘 보조하여 사건해결에 도움을 줍니다. 레밍턴 스틸이 옛날 느와르 영화 속 대사같은 비꼬는 수사법으로 가득찬 거친 말투로 말하는 장면도 많습니다. 이런 모습들은 살짝 시대 착오적인 느낌으로 희화화 됩니다. 정말 험프리 보가트 처럼 담배를 말아 피려고 하는 장면이나 중절모를 쓰고 다니면 어울리지 않겠냐고 하는 장면은, 80년대 한국 청소년들이 성냥개비를 씹고 선글라스를 쓰는 모습 같이 어리고 웃겨 보입니다.

재미있는 농담거리와 철없지만 예의바른 레밍턴 스틸 - 똑똑하고 실력있는 로라 홀트 구도는 끝까지 잘 펼쳐 집니다. 하지만, 결론은 심심한 편입니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게 된 인물들 중에 딱히 진범이 되는 것 외에는 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자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진짜 범인입니다. 추리 방식은 레밍턴 스틸의 특징을 역이용하는 면이 약간 있어서 재치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래도 설득력 부족한 정확도가 떨어지는 것입니다.

레밍턴 스틸이 끌려가 붙잡힌 채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정말로 옛날 느와르 영화 분위기를 되살려 보여 주는 물씬 나는 조명과 구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만, 후반에 등장하는 자동차 액션은 스턴트맨과 가짜 파괴가 티가 나는 어색한 면도 있습니다. 신비로운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이라는 레밍턴 스틸의 성격이 거의 무시되고 바보스러운 모습만 강조된 단조로운 점도 문제라면 문제입니다.


(로라 홀트)

"레밍턴 스틸"은 시즌2로 넘어가면서 시즌1의 가장 중요한 조연이었던 머피를 빼버리고, 밀드레드를 투입했습니다. 레밍턴 스틸과 달리 머피는 정말로 80년대 유행에 걸맞는 사람으로 진지하게 로라 홀트와 함께 일하는 직원입니다. 당연히 레밍턴 스틸과는 연적 구도로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레밍턴 스틸의 특성에 대조감을 주기에도 적당했고, 연기도 썩 잘 어울렸으며, 적당한 덩치와 금발도 피어스 브로스넌과 좋은 대비를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삼각 관계 구도를 너무 오래 끄는 것이 가벼운 활극풍의 TV쇼 분위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이렇게 좀 현실적인 인물은 느와르 영화와 스크루 볼 코메디가 휘감기는 복고적인 분위기를 밀어 붙이는데 큰 도움이 못되는 면도 있었습니다.

시즌2는 주제곡을 우리에게 익숙한 레밍턴 스틸 주제곡으로 내세웠습니다. 헨리 만치니의 유명한 주제곡의 주제 동기 자체는 시즌1에서도 배경음악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하지만, 좀 더 밝고 경쾌하며, 옛 영화에 대한 회상 성격을 살리며, 예스러운 영국 신사 풍의 피어스 브로스넌 인물과도 어울리게 재편성되었습니다. 처음부터 멕시코 로케이션으로 시작되더니, 시즌2는 대체로 보다 규모가 큰 모험극 중심인 경우가 많게 됩니다. 그리고, 피어스 브로스넌의 초기작이었던 이 시리즈에서 레밍턴 스틸 인물의 인기가 기대 이상으로 많아지면서 레밍턴 스틸의 비중이 점점 커져버리게 됩니다.

그리하여 이후, 시즌3, 시즌4로 가면 갈 수록, "홍보용 가짜 탐정과 진짜 탐정이 호흡을 맞추는 이야기"라는 원래 성격은 약해집니다. 대신, 코메디를 살짝 강조한 점만 빼면, "돌아온 제5전선 Mission Impossible"이나 "전격 Z 작전 Knight Rider" 과 별다를바 없어 보이는 모험물이 되었습니다.

후반 에피소드에도 종종 호사스러운 저택 살인 사건스러운 일이 벌어져서 그나마 개성을 유지하기는 합니다. 다니엘 찰머스에 얽힌 막판 사연은 오랫만에 "레밍턴 스틸" 초기 이야기를 돌이키고 있기에 꽤 감동적이기도 합니다.


(로라 홀트)

1982년 하반기 부터 시작해서 1986년 상반기까지 "레밍턴 스틸"은 이런식으로 80여편에 달하는 에피소드들이 4개 시즌으로 이어졌습니다. 뒤이어 1987년 상반기에 나온 몇 편의 특집 에피소드들 같은 것들을 모아서 흔히 시즌5로 부르고 있습니다.

"레밍턴 스틸"은 "사립 탐정"이라는 그다지 현실에 바로 와닿기 어려운 내용을, 양성 평등 유행을 중심으로 복고풍 소재들을 잘 갖다 붙여서 즐겁게 풀어낸 수작입니다. 이야기의 무대가 되는 LA 역시 "레밍턴 스틸"은 잘 활용하고 있습니다. 거대도시로 성장한 LA는 옛날 영화 속의 뉴욕 모습과 캘리포니아 모습을 동시에 담아내서, 서부 활극 부터 도시 연애담까지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론 LA를 느와르 영화와 스크루 볼 코메디의 무대로 활용하는 전통적인 수법도 잘 해내고 있습니다. 캘리포니아 대도시 이민이 늘어난 덕택에, 이국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싶을 때는 샌프란시스코가 아니어도 아시아계 이민자 이야기를 할 수 있고, 엘 파소가 아니어도 히스패닉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도 재미난 활용법이었습니다.


(레밍턴 스틸과 로라 홀트)

한국판 더빙은 로라나 머피, 밀드레드의 역할은 무난하고 보편적이었습니다. 레밍턴 스틸의 성우는 피어스 브로스넌 목소리와 닮은 편은 아닙니다. 그러나 "레밍턴 스틸"의 코메디 부분을 살리기에는 충분히 어울렸습니다. 80년대 초중반에 나온 시리즈인데, 우리나라에서는 90년대초에 방영되었기에 약간씩 시사적인 소재나 배경문제가 어긋나는 부분이 엿보이기도 합니다.


그 밖에...

에피소드 112 에는 "말타의 매" 와 "가장 더러운 살인" 외에도, "빅 슬립 The Big Sleep" 이 언급되기도 하고, 레밍턴 스틸에 장단을 맞춰 로라 홀트가 "차이나타운 Chinatown" 을 언급하기도 합니다.

다니엘 찰머스를 연기한 에프렘 짐발리스트 Efrem Zimbalist Jr. 는 로라를 연기한 스테파니 짐발리스트의 친 아버지이자, 50년대부터 온갖 조연을 다 맡아 온 배우입니다. 한편 머피 역을 맡은 제임스 리드는 어느새 50대가 되었습니다. 그에게도 "레밍턴 스틸"은 초기작이었는데, 그는 최근에 "금발이 너무해 Legally Blonde" 시리즈에서 주인공 엘 우드의 아버지 역할로 나왔습니다.

역시 제임스 본드 이야기를 빠뜨릴 수 없습니다. 시즌4 무렵 즈음해서 시청률 하락과 제작비 상승으로 NBC는 제작 중단을 결정했고, 피어스 브로스넌은 때마침 제임스 본드 역 제의가 들어왔으므로 이를 수락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재방송 시청률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는 피어스 브로스넌이 제임스 본드가 된다는 소식이 사람들의 이목을 끈 탓도 있었을 겁니다. 서둘러 NBC는 제작 중단을 철회했고, 피어스 브로스넌은 방송국의 변덕으로 제임스 본드 자리를 놓치게 됩니다. 결국 티모시 달튼이 007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피어스 브로스넌은 짤막하게 끝난 레밍턴 스틸 시즌5를 마치고, 티모시 달튼 시절의 제임스 본드가 다 말아먹은 뒤에야 "007 골든아이"로 결국 참으로 오랫만에 제임스 본드 역을 따냈습니다.

1991년 사망한 카산드라 해리스는 "007 유어 아이즈 온리"의 출연자였으며, 피어스 브로스넌의 아내이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레밍턴 스틸에서 피어스 브로스넌의 옛 애인 역할등으로, "105 스틸하지 말지어다 Thou Shalt Not Steele", "220 스틸의 여인 Woman of Steele", "401 스틸 찾기 Steele Searching"에 등장합니다. 그리하여 피어스 브로스넌은 본드 걸 배우와 결혼했던 본드 배우로 불리우기도 했습니다.

샤론 스톤이 "116 그 모든 세월이 지나고도 스틸 미친 Steele Crazy After All These Years" 에피소드에서 미인 대회 우승자로 출연합니다. 지나 데이비스는 스테파니 짐발리스트가 각본에 참여한 "320 칩 속의 스틸 Steele in the Chips" 에 등장합니다. 보시다시피, 모든 에피소드 제목에는 "Steele" 이라는 말이 들어갑니다. 여기에는 약간의 언어유희가 있을 때가 많습니다.

스크루 볼 코메디와 느와르 영화가 결합한 복고적인 80년대 TV시리즈 중에 "블루 문 특급 Moonlighting"을 꼽을 수도 있을 겁니다. 조금 더 느와르 영화의 전통에 부합하는 이 시리즈는 "레밍턴 스틸"의 작가, 제작자 중 한명이었던 글렌 고돈 캐론 Glenn Gordon Caron 이 레밍턴 스틸을 때려치우고 시작한 TV쇼 입니다. "블루 문 특급" 에피소드 309 에, LA에서 영업 중인 탐정들인 주인공들 앞에, 피어스 브로스넌이 경쟁업체 탐정인 바로 이 레밍턴 스틸로 깜짝 출연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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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닥슈나이더 2006/11/08 16:55 # 답글

    어디서 구해서 보셨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TV 쓰리즈를 꼽자면 바로~!! 레밍턴 스틸입니다...

    일요일 12시 (1시부터는 출발 비디오여행) MBC는 무조건이었습니다...^^;;
  • rumic71 2006/11/08 20:52 # 답글

    크리스티 할머니가 이미 써먹은 수법이긴 하지만요.
  • 게렉터 2006/11/08 21:21 # 답글

    닥슈나이더/ 얼마전에 케이블 텔레비전에서 재방송을 했드랬습니다. 출장갔다가 사놓은 DVD도 있고. 캡쳐한 사진은 인터넷을 떠도는 시작장면 동영상에서 잡아낸 것입니다. 미국판 DVD가 그다지 비싼편은 아닙니다만, 한국에서 왜 발매되지 않는지 아쉬운 TV드라마 중 하나입니다. 분명히 꽤 인기 끈 TV드라마라고 생각합니다만.

    rumic71/ "레밍턴 스틸"의 유머 구도의 기틀이 아가사 크리스티의 "부부탐정"을 답습하고 있음을 말씀하시는 듯 합니다. 나중에 "블루 문 특급 Moonlighting"에 대해 이야기 할 기회가 오면 한 번 엮어서 정리해 보겠습니다.
  • 닥슈나이더 2006/11/09 16:48 # 답글

    ebay뒤져봤더니 씨즌당 약 2만원꼴이군요...ㅠㅠ;;;
    어디서 구할데가 없을까나...ㅠㅠ;;;

    블루문 특급도 구하고 싶고..ㅠㅠ;;;

    나바론 요세2도 구하고 싶고.....
  • FAZZ 2006/11/10 22:31 # 답글

    말씀데로 어렸을적 TV에서 레밍턴 스틸을 봤을 때 보고 빠졌던 가장 큰 이유는 1기때의 특징 때문이었습니다. 엉뚱한 레밍턴, 뒤에서 사건을 해결하는 로라. 그리고 둘 만의 미묘한 감정들.
    그런데 2기때부터 레밍턴의 비중이 너무 커지고 둘의 갑정은 미묘함을 넘어 아예 연인화 되가고.... 1기때의 특징들이 빠지게 되자 재미없게 되더군요. 이점은 늘 아쉽게 생각하고 있는 점이었습니다. 1기때가 제일 좋았던거 같습니다.
  • 게렉터 2006/11/10 22:39 # 답글

    닥슈나이더/ 그 정도라면 과감하게! 레밍턴 스틸보바도 블루문 특급은 꽤 대단한 인기 시리즈였으니 좀 더 쉽게 구하실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FAZZ/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라의 미인계 작전, 레밍턴이 유혹당하는 장면 등등이 많이 나온다는 이유로 시즌2 이후도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 예.... 있습니다. 있지요.
  • 나르사스 2006/12/12 13:59 # 답글

    밸리를 탔다가 이렇게 찾아뵈고 링크 신청을 드립니다.
    레밍턴 스틸은 정말 재미있게 봤던 작품이었기에 너무 반갑네요.

    앞으로도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 게렉터 2006/12/13 12:14 # 답글

    나르시스/ 감사합니다.
  • asdf 2007/03/06 11:16 # 삭제 답글

    성우는 김도현님 레밍턴 스틸 이후로 피어스 브로스넌 전담 성우가 되었죠 ㅎㅎㅎ
  • 게렉터 2007/03/06 12:59 # 답글

    asdf/ 때문에 이후 몇몇 제임스 본드 시리즈 방송에서 다른 분이 목소리를 맡으시면 굉장히 어색하게 느껴지는 부작용도 있었습니다.
  • 실비아 2007/03/10 13:23 # 삭제 답글

    레밍턴 스틸의 광팬이었던, 지금은 서른 중반이 된 사람입니다. 포스트 너무 잘 쓰셔서 재밌게 읽고 갑니다.
    본드도 좋지만 전 스틸쪽의 피어스 브로스넌에 더 애정이 가네요.
  • 게렉터 2007/03/12 13:54 # 답글

    실비아/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피어스 브로스넌의 멋드러진 코메디 연기는 레밍턴 스틸에서 화려하게 꽃 피웠다고 생각합니다.
  • 산그림자 2007/04/17 21:16 # 삭제 답글

    젤 좋아했던 레밍턴 스틸... 참 힘들고.. 설레게 봤는데... 다시 제대로 보고픈 맘이 간절한데... 다시 볼 수 는 없나요?...ㅠ
    진심으로 그립네요... 님... 덕분에... 갈증으로 조금이나마 해소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 게렉터 2007/04/30 12:39 # 답글

    산그림자/ 영국, 미국 등지에서 DVD가 정식 발매되어 있습니다. 인터넷으로 구입하시면 어렵잖게 DVD를 입수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최근 케이블 TV에서 방영하기도 했으므로, 다른 경로로도 보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 saem 2008/09/08 14:21 # 삭제 답글

    어릴적 빼놓지 않고 재밌게 시청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네요. 자세한 설명에 목마름이 해소된것 같아요. 저는 초중학생때였던것 같아요. 약간 가볍게도 이상하게도 보였던 피어스 브로스넌..근데 저도 모르게 중독..같았었던것 같아요, 그의 매력에.. 근데 나이들면서 더 멋지네요. 동일 인물이었다는 것을 잊고 있었어요. 그저 아 저사람 많이 봤었는데.. 언젠가.. ㅎㅎ 어린마음이 세뇌되었었나봐요.
  • 게렉터 2013/01/11 00:03 #

    저는 DVD판으로 빠진 에피소드 채워가면서 보는 재미가 있어서 다시 보는 것이 즐겁기도 한데, 또 더빙본이 그립기도 해서 아쉽기도 합니다.
  • 갱이 2013/01/08 22:31 # 삭제 답글

    지금 다운받아서 보고 있어요. 피어스 브로스넌 너무 멋지고,,ㅋㅋ 예전에 김도현성우님 목소리 너무 멋졌었죠~
  • 게렉터 2013/01/11 00:03 #

    원래 피어스 브로스넌하고는 약간 차이가 있는 것이 보면 조금씩 느낌이 다르기도 해서 또 재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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