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잠 (명탐정 필립) The Big Sleep 영화

레이몬드 챈들러는 비정한 도시 뒷골목을 무대로 하는 울적한 사립탐정이 이 모든 것들을 감상주의에 가득찬 배경으로 생각하며 푹 쩔어 버리는 이야기들을 썼습니다. 소위 하드 보일드 추리물이라고 불리우는 것들이 많은 그의 이런 범죄 이야기들은 느와르 영화의 주요한 소재가 되었고, 레이몬드 챈들러가 직접 "열차 안의 낯선 자들"등등의 몇몇 영화 각본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가장 대표적인 주인공은 필립 말로우라는 LA의 고독한 사립탐정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첫번째 장편 소설인 "거대한 잠"은 필립 말로우가 주인공이며, 1946년 영화로 만들어졌습니다.


(남자 주인공 필립 말로우와 술취한 여자 등장 인물)

험프리 보가트가 필립 말로우를 연기하고 로렌 바콜이 주인공 앞에 문제 덩어리를 끌고 나타나는 여자 주인공을 연기한 "거대한 잠"은 남자 주인공이 한 협박 사건에 휘말린 퇴역 장군을 만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퇴역 장군의 두 딸과 관련된 협박 문제를 해결해 주기로 한 필립 말로우는 장군 뿐만아니라, 두 딸 역시 각각의 관점으로 사건에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점차 두 딸들의 주변사에 휘말려 가던 필립 말로우는 협박 사건이 다른 여러 범죄자들과 얽히고 섥힌 도가니에 빠지게 됩니다.

당장 느껴지는 아쉬움은 느와르 영화 독백 나래이션이 없다는 점입니다. 복잡하게 꼬여드는 상황이나 시선을 사로 잡는 여자 주인공, 가끔씩 비가 내리는 밤을 배경으로하고 있다는 점 등등은 적당히 어울리는 나래이션이 끼어들 법해 보입니다. 상황을 강조하고 이야기를 윤택하게 해주는 가벼운 유머나 적절한 수사어구가 어울릴 만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이 없어서 아쉽습니다. 이것은 반대 관점에서 보면, 그만큼 이야기 속의 그럴듯해보이는 장면들이 전체 이야기의 응집성있는 흐름에는 잘 안 어울려서 꼭 나래이션이 보조를 해주면 좋겠다는, 비는 느낌이 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탐정 사무소를 찾은 여자 주인공)

예를 들면 가벼운 만남으로 지나가는 여자들과 유혹적인 언사를 주고 받는 남자 주인공의 모습을 따져 볼만합니다. "거대한 잠"에서 주인공 필립 말로우는 어찌 보면 좀 바람둥이 처럼 스쳐 지나가는 인연에서 갑자기 끈끈한 관계를 끌어냅니다. 별로 현실성 있어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어쨌거나 주인공의 매력을 강조한다거나, 반대로 주인공이 피상적인 관계만을 갖고 있다는 냉랭한 분위기를 끌어가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거대한 잠"에서 이런 주인공의 인기는 별 뜻없는 농담장면의 역할로 이용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긴 코트에 중절모를 쓴 필립 말로우의 쓸쓸하고 피곤한 모습을 오히려 방해 합니다. 두 명의 장군 딸들에게 휘둘리는 감정 때문에 점차 사건의 소용돌이에 빠져드는 집중, 집착에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갑자기 필립 말로우에게 관심을 갖는 서점 점원)

한편, 장면 장면은 흥미로운 부분이 있습니다. 느와르 영화 다운 실루엣과 담배 연기를 보여주는 시작 장면도 재미있고, 영화가 시작하자 마자 살짝 헝클어진 차림의 필립 말로우 앞에 나타나는 매력적인 장군 딸의 모습도 인상적입니다. 이 모습 앞에서 주인공을 맡은 이 반쯤 대머리인 배우가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굳건함과 눈이 홀려 정신을 못차리겠다는 빠져듬을 미묘하게 동시에 보여줍니다. 나중에는 너무 "흔들림 없는 폼잡기"로만 굳건해지는 듯 합니다만, 이 즈음해서는 낮고 조금 쉰 듯한 험프리 보가트의 목소리도 겉멋 부리는 대사에 적합합니다. 영화 분위기에는 거의 도움이 안될지라도 중간의 로렌 바콜 노래 장면은 좋은 그 시절 음반처럼 잘 녹음되어 있습니다.

범죄 영화 분위기의 총격전이나 범행 장면에 멋지게 어울리는 살해 현장 발견 장면이나, 첫번째 총격 장면, 마지막 총격 장면들도 모두 멋집니다. 아름답지만 불길해 보이는 여자 주인공과 퇴폐적인 분위기를 살해 현장에 한꺼번에 담아내는 장면은 그럴듯합니다. 여자 등장인물과 시체가 상하로 나뉘에 배치되어 있는 미술적인 구도나, 지금껏 감정적으로 과장된 배경음악을 사용하다가 고요하게 흥얼거리는 소리만 강조하는 수법도 좋고, 어두운 방안에 새어드는 불빛으로 인물들을 비추는 것도 괜찮았습니다. 모순된 대사와 함께 급작스럽게 등장하는 첫번째 총격 장면은 적당한 충격을 주며, 짧은 시간안에 급격한 공격력의 점층법을 보여주는 마지막 총격도 대미에 어울립니다.


(둘째 딸)

하지만, 역시나 전체를 놓고보면, 핵심에서 겉도는 부분이 많습니다. 적극적인 표현과 감정, 선명한 악역인물들을 사용했다면, 대체 "누가 왜 죽인 것인가?" 라는 이 이야기의 수수께끼를 부각 시킬 수 있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과연 궁금할만한 내용이기도 하고 진상에 대한 접근 과정이라든가 결국 드러나는 결론 역시도 흥미를 끌만한 내용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필립 말로우는 외롭고 냉철한 탐정과 격정속에 흔들리는 사람 사이에서 왔다갔다 할뿐, 엮이지는 않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어느 하나 선명하게 인상적인 악당인물이 없는 덕에 진상이라든가 범인에 대한 의문, 공포는 그다지 긴 감상을 남기지 않습니다. 여자 주인공 보다, 여자 주인공 동생이 훨씬 더 인상적이고 내용상 비중이 크면서도, 막상 여자 주인공과의 관계 설정은 매우 미약하다는 점도 인물에 집중력을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그 밖에...

"명탐정 필립" 이라는 제목으로도 영화는 소개되어 있고, "거대한 잠"은 소설판 번역본들의 제목으로 통용 되는 것입니다. "명탐정 필립" 보다야 "거대한 잠"이 더 어울리는 번역 제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관사를 떼고 "빅 슬립" 이라고 불리우기도 합니다. 보통 "명탐정 홈즈"나 "명탐정 포와로"라고 하지, "명탐정 셜록"이나 "명탐정 에르큘"이라고 하지는 않는데, 왜 "명탐정 말로우"도 아닌 "명탐정 필립"인 것인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IMDB Trivia에 따르면, 레이몬드 챈들러로부터 소설 판권을 구입하는데 5만달러를 지급하라고 영화사에서 돈을 줬다고 합니다. 하워드 혹스는 5천달러에 거래를 성사시키고 4만 5천 달러를 자기가 챙겼다고 합니다.

둘째딸역의 유혹적이고도 방황하는 연기가 너무 훌륭해서 여자 주인공 연기를 잡아 먹는 것 같다고 레이몬드 챈들러가 지적했다고 합니다. 아닌게 아니라 정말 그런 감이 있는데, 그래서인지 둘째딸 역의 비중을 억지로 잘라내 버린 부분이 꽤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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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2006/11/14 10:17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FAZZ 2006/11/16 10:46 # 답글

    스크린샷만 봐도 여자주인공 보다는 둘째딸이 더 이뻐 보이는데요 ^^
  • 게렉터 2006/11/27 13:36 # 답글

    두 배우는 이후에 다른 영화에서 또 한 번 더 만나서 또 비슷한 평을 겪는 악연이 있기도 합니다.
  • 한심이 2007/08/06 06:50 # 삭제 답글

    그러게요. 영화 보고 나서 둘째는 도대체 뭘까 많이 생각했는데 훨씬 매력적인데도 비중도 없고 이건뭐.. 첫째딸은 오히려 서점직원보다 못한 것같아요.
  • 게렉터 2007/08/06 12:18 # 답글

    한심이/ 서점직원 참 좋았드랬습니다. 이 영화 원작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언제인가 한 번 하려고 하는데, 그때 좀 더 말을 곁들여 볼까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 GKWJDDHR 2008/07/03 10:02 # 삭제 답글

    이 영화 한번 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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