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다 Gilda 영화

"내게는 달러라는 것은 어떤 말로든 달러일 뿐이다. To me, a dollar is a dollar in any language." 라는 느와르 영화 독백 나래이션으로 시작하는 영화, "길다"는 도입부가 꽤 흥미진진합니다. "카사블랑카" 풍의 이국적인 배경에서 비도덕적인 인물들이 서로 만나고 현지 정부시책과 그 곳을 오가는 미국인들이 구분되면서 약간은 첩보 영화 같아지기도 하고, 혹은 낭만적이기도 한 분위기를 만듭니다. "카사블랑카"의 잉그리드 버그만과는 좀 다르지만, 인상적인 여자 주인공을 연기하고 있는 리타 헤이워드가, 바로 문제의 "길다" 역할로 뒤늦게 등장하며 분위기를 더욱 돋굽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밤거리)

"길다"의 내용은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길바닥에서 야바위나 다름없는 싸구려 도박판에 끼어든 남자 주인공을 보여주며 시작합니다. 어둡고 축축한 밤거리에 암울한 사람들이 오가고 있으며, 담배 연기가 자욱합니다. 남자 주인공은 치안이 불안한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뒷골목을 떠돌다가 한 카지노에 오게 되고 이곳에서 벨린 먼슨이라는 사람과 알게 되어 그의 부하가 됩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자리를 잡는 듯 하던 이 떠돌이 도박꾼의 삶은, 문제의 여자 주인공, 길다를 만나면서 꼬여들어 갑니다.

그러나 "길다"는 제목부터 말이 씨가 된 것인지, 좀 깁니다.(...) 영화의 상영 시간 자체는 결코 긴 편이 아니지만, 상영 시간 동안 갑자기 이래저래 영화가 방황합니다. 특히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인물인 길다는 별다른 연결이나 동기 없이 휘청휘청 합니다.


(길다)

앞부분 절반 정도에서 길다는 신비스럽고 퇴폐적인 매력이 흐르는 느와르 영화 여주인공입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비도덕적인 세상에서 우울증에 빠진 슬픈 여주인공이 되더니, 막판에는 갑자기 사랑에 실패해 괴로워하는 비련의 희생양이 되어 버립니다. 처음에는 황진이로 출발했다가 갑자기 "별들의 고향"으로 꺾이다가 막판에는 무슨 성춘향 비슷해져 버립니다. 이런 성격을 일관성있게 담아내면서 인물의 입체적인 갈등과 좌절을 나타낼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길다"에서 길다는 리타 헤이워드가 연기하는 볼거리일 뿐이며, 이야기 중심이 남자 주인공쪽에 많이 실려 있기 때문에 뚝뚝 끊겨 버립니다. 그래서 리타 헤이워드의 방황과 좌절은 갑작스럽습니다. 연출 역시 결정적이고 감정이 고조되는 장면을 보여주고나면, 그 장면이 강한 나머지 부드럽게 다음 장면으로 잇지를 못하고 화면을 어둡게 한 뒤 쉬고 다른 분위기로 바꿔 버립니다.

그래서 아주 신비롭고 불길한 매력이 넘치도록 등장시킨 길다라는 인물을 끝까지 잘 풀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비로운 인물은 그 신비로움 뒤에 감춰진 비밀이 드러나면서 충격을 주고 이야기를 격정적으로 흘러가도록 하는 것이 흔하게 이야기를 꾸미는 방법일 겁니다. 그런데, "길다"는 마땅히 충격적으로 드러날 비밀을 잘 설정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보니 재미없게 일일연속극 속의 불치병, 출생의 비밀, 며느리의 임신으로 고부간의 갈등이 해결되기를 써먹어 버린 셈이 됩니다.


(노래하는 길다)

결국 길다에서 펼쳐지는 길다의 정체란 것은 인물의 신비로움과 느와르 영화 고유의 1인칭 관점을 말아먹는 이야기로 빠져 버렸습니다. 갑자기 나타나는 반전 비슷한 것이 도무지 분위기나 신비로운 인물의 정체에 아무 도움이 안되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흡사한 구도를 사용하는 영화이지만 인물의 매력을 잘 끌어올린 "카사블랑카"와 대조적입니다. 이러한 점들은 도입부에서 느와르 영화 주인공 답게 암담한 도시 거리를 오가다가 갑자기 사건에 휘말리는 호기심 넘치는 부분이 꽤 재미있기 때문에 아쉬운 용두사미로 보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처음에는 평범한 관계에 대한 상식이나 도덕적인 기준 따위는 아무 관심도 없는 듯한 사람이었던 길다가, 갑자기 심심하지 않도록 갈등이 필요해 지면, 바람피운다는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초조해하며 거짓말하는 역할을 하고 있게 됩니다.

이렇게 엎치락 뒤치락 하는 이야기는 반대로 리타 헤이워드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기에 좋기는 합니다. 초반부에서는 정석대로 퇴폐적이며 신비로운 인물을 연기하고, 중반부에서는 방황하는 주인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결말부에서는 격정적인 감정에 빠져드는 모습을 연기합니다. 결코 이 모든 감정이 잘 흘러가며 연결되고 있지는 않지만, 개개의 하나하나는 배우의 매력을 적당히 살리고 있습니다. 영화 속에 세 번에 걸쳐 등장하는 그녀가 노래 부르는 장면도 좋은 편입니다. 마지막 곡은 직접적인 표현을 살짝 자제하면서도 자극적인 매력이 풍부합니다. 장갑을 천천히 벗어 던지며 추파를 보내는 그녀의 취한 표정은 이런 연출의 교과서라 할만합니다. 한 편 첫 곡은 "데스페라도"의 셀마 헤이엑 노래 장면의 원류라 할 만큼 낭만적으로 포장된 쓸쓸함이 잘 살아 있습니다.


(장갑을 벗는 길다)

남녀 주인공 이외의 다른 인물 중에서 가장 비중이 큰 인물은 여자 주인공의 남편이자 남자 주인공이 일하는 카지노의 소유주인 벨린 먼슨입니다. 한편 비중은 작지만 가장 재미있는 인물은 남자 주인공에게 처음부터 줄곧 말친구가 되어주는 카지노의 잡역부입니다.

카지노의 잡역부인 이 사람은 등장 인물들에게 약간은 비아냥 조인 농담을 계속 건내는 인물입니다. 시각도 비교적 평범한 사람의 가라앉은 감정에 맞춰져 있습니다. 대단한 인물이 아니지만, 안정감이 느껴지고,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들이 공감을 느끼기 좋은 인물입니다. 신비로운 여자주인공, 암흑가를 떠도는 남자 주인공, 국제적인 거물들과 얽혀 있는 듯한 벨린 먼슨 등등이 일상적이지 않은 삶으로 치달을 때 이들을 비교적 일상적인 분위기로 가라앉게 붙잡아 줍니다.

벨린 먼슨은 냉철하고 노련한 카지노의 소유주입니다. 재능있는 주인공을 단 번에 알아 보고 카지노 를 번창시켜 나가며, 더욱 거대한 사업을 번창시켜 나가는 인물입니다. 유럽풍의 날렵한 복장에 실크햇과 어울릴 법한 단장을 자신의 상징으로 지니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항상 속뜻이 살짝 숨겨진 말투로 대사를 하며, 은근한 쓴웃음이나 가벼운 비웃음을 말 속에 담기를 좋아합니다. 거대한 저택에서 살면서, 자신과 대비되는 덩치 큰 폭력배 풍의 부하들의 충성을 받고 있습니다.

벨린 먼슨은 주인공을 갈등에 빠뜨리고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러니 만큼 "길다"의 여러가지 이상한 점에도 계속 관계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처럼 냉철하고 근엄한 인물이지만, "길다"를 신비롭게 등장시키기 위해 어디서 뭐하다 온 지도 잘 모르는 이 여자와 갑자기 결혼해버리는가 하면, 아무 상관 없이 오직 이야기의 갈등을 밀어붙이기 위해 갑자기 생각 없는 싸움꾼 짓을 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중간에는 분위기 반전을 위해 갑자기 이야기에서 확 빠져버리기도 합니다.


(벨린 먼슨과 길다)

벨린 먼슨과 길다를 중심으로 한 대화도 이 영화의 중요한 특징이자 장점이고 단점입니다. 이 영화에서 이 세 사람이 나누는 대화는 똑바로 말하는 선명한 것이 거의 한 마디도 없습니다. 전부다 은근한 의도를 숨기고 있는 이상한 은유법과 반어법으로 가득차 있고, 괴상한 상징과 느릿느릿 읊는 "난 그 단어가 좋아. 그 어감이." 어쩌고 하는 감상주의와 역설로 치장되어 있습니다. 말을 많이 하고는 있지만 무슨 소리인지 잘 알아 들을 수 없는 폼잡기의 비중이 꽤 높습니다. 분위기를 돋구며 들어 맞을 때도 있고, 가끔 헛폼잡기 같을 때도 있으며, 오히려 쓸데 없이 이야기 전달을 방해하는 면이 있는가하면, 이야기 자체가 너무 허례허식과 가짜 같아 보이게 할 때도 있습니다.

남자 주인공을 맡은 글렌 포드 역시 이런 한계에서 헤메고 있습니다. 그는 거대한 일에 차근차근 말려들고 있는 갈데 없는 떠돌이를 연기할 때는 훌륭합니다. 하지만, 분위기가 마구 왔다갔다하는 가운데서 갑자기 진지하게 묵직한 분위기를 잡고 진지한 쓸쓸함과 강한 냉철함을 표출해야 할 때는 아무래도 힘겹습니다. 그래서 어색합니다. 안 좋은 쪽으로 과장하면, BB탄 기관단총 들고 성냥개비 문채 영화 포스터 앞에 서 보는 중학생 같을 때도 있습니다. 중간중간에 갑자기 끼어드는 느와르 영화 나래이션도 재미있는 표현으로 전달 되는 이야기에 장식을 해주는 기능보다는, 그냥 설명기능, 해설로 참여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만큼 더 급작스럽고 재미없게 느껴집니다. 글렌 포드 역시 이를 극복한다기보다는 여기에 묻혀서 재미없고 심심하게 나래이션을 읽을 때가 많습니다.


(어두운 조명과 밝은 조명)

"길다"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도시의 이면을 헤메는 와중에 이상한 인연에 휘말린 남자 주인공과 그런 그를 맞이하는 여자 주인공은 잘 잡아나가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하나의 긴 사건으로 짧고도 격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 영화는 여자 주인공의 여러 면을 보여주기 위해서인지, 마치 일대기처럼 긴 이야기를 보여주는데나 어울릴 전환점들이 들어가 있습니다. 특히나 결말은 "지옥화"도 아니고 형님이 비참하게 죽은 동생도 아닌데, 문득 "서울을 떠나 시골에 내려가서 할아버지가 물려준 땅에서 농사를 지으며 오손도손 살아갑시다"에 가깝게 흘러버립니다. 이 역시 영화 전체의 분위기와 정면으로 배치되어 좀 어색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두운 밤, 그늘진 조명 아래서 음산하고도 격정적인 대사를 나누는 장면들은 전통을 만들어 나가고 있으며, 한쪽 사람의 얼굴에 그늘을 드리워 서로간의 선악이 나뉜 범죄적인 느낌을 주는 방법들도 군데군데 볼만한 장면이 많습니다. 그래서 부족한 점들은 더 아깝게 느껴집니다.


그 밖에...

"쇼생크 탈출"에서 주인공이 감옥 벽에 붙여 놓는 포스터 중 하나가 리타 헤이워드의 포스터 입니다. 재소자들에게 보여주는 영화는 바로 이 "길다" 입니다. "쇼생크 탈출"에서 간접적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만, 리타 헤이워드의 인기에는 2차대전 참전 미군들이 들고 다니던 사진의 영향이 절대적이었습니다.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의 뺨을 때리는 장면이 있는데 남자 주인공의 이빨이 부러져 버릴 정도로 때렸다고 합니다. 글렌 포드는 그런대도 내색하지 않고 촬영이 끝날 때 까지 서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 옵니다.

IMDB Trivia에 따르면, 리타 헤이워드는 영화 촬영 완료후 몇 주일이 지나지 않아 출산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촬영 장면의 많은 장면에서 아슬아슬하게 리타 헤이워드의 몸매를 가리고 있습니다. 애 아버지는 오손 웰즈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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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2007/01/29 03:18 # 삭제 답글

    데이빗 린치 감독의 '멀홀랜드 드라이브'에도 이 영화의 포스터가 나와요.
  • 게렉터 2007/01/29 10:52 # 답글

    흠/ IMDB 검색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덧글 감사합니다.
  • Ritsuko 2007/02/01 04:46 # 답글

    정확하게는 길다가 아니라 힐다 입니다.
  • 게렉터 2007/02/05 12:28 # 답글

    저는 오페라 "리골레타" 생각이 많이나서, 말로 할 때는 습관으로 "질다"라고 하고 있습니다만, 통상 한국어 표기에서 "길다"라고 하는 예를 그냥 갖다 썼습니다. 이 블로그에서는 검색의 편의를 위해서, 제목을 그저 통용제목, 개봉제목을 갖다 쓰거나 밝히는 것으로 글을 써오고 있었습니다. 힐다-길다는 어떤 관계에 있는 발음인지 조금만 더 설명해주시면 더욱 감사하겠습니다.
  • Ritsuko 2007/02/18 06:45 # 답글

    스페인어식 발음표기로 G 는 ㅎ 발음이 납니다. 이거는 쇼솅크 탈출 DVD 부록에서도 나옵니다
  • 게렉터 2007/02/19 00:34 # 답글

    Ritsuko/ 미국인들과 미국영화지만 아르헨티나라는 배경에 충실했던 것이었습니까? 쇼솅크 탈출 DVD에는 리타 헤이워드 이야기는 얼마나 나오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 Ritsuko 2007/02/23 00:44 # 답글

    Pardon me for writing in English... Have you heard about the name Jose. It´s spanish version of Josh. In pronaunciation... Jose is like Ho - se. So Gilda could be 힐다.

    One more thing. In the additional DVD of The Shawshank Redemption, there are stories about Rita and Gilda... Director refered that one agent of a model would like to be Rita in the flick but... oviously there were no place for her in the film...

    And I am living in Argentina..
  • 게렉터 2007/02/24 16:07 # 답글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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