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스틴 블럭스 16 Blocks 영화

폴 매카트니는 10대를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 넣는 노래를 만드는 능력을 타고 났고, 제니퍼 코넬리는 어린시절 지구의 사랑을 얻었던 아름다움을 타고 났으며, 손민한은 마무리로 나와서 기막히게 야구공을 던지는 재능을 갖고 있습니다. 한편 세상에서 술 덜깨서 머리 아파하며 다니는 표정을 가장 그럴듯하게 짓는 재주에 감히 제일이라 할만한 자가 있으니, 그가 곧 브루스 윌리스 입니다. "식스틴 블럭스"는 브루스 윌리스가 무기력, 분노, 좌절, 슬픔, 절망, 집착, 공포 등등이 휘몰아치는 감정에 사로잡히는 영화인데, 브루스 윌리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줄기차게 바로 그 표정으로 때워버리는 괴력을 발휘합니다. 이 영화는 "다이하드 3"의 2편이라도 되는지, 브루스 윌리스가 술 덜 깬 형사로 나와서 생전 처음 보는 선명한 흑인 어투를 쓰는 사람과 함께 교통 혼잡한 뉴욕에서 하루동안 죽을 고생을 하는 이야기입니다.


(브루스 윌리스)

"다이하드 3"와 이 영화의 차이점을 따져 본다면, 우선 이 영화가 살짝 서글프고 울적한 느와르 영화스러운 분위기를 갖고 있다는 것을 먼저 짚어 볼만 합니다. 이 영화의 내용은 어느날 아침 호송 임무를 맡은 피곤에 쩔은 경찰이 아침과 오전 중에 뉴욕 시내에서 골치아픈 추격전에 휘말리는 것입니다. 법원 건물까지 딱 열 여섯 블럭만 가면 되는데, 이게 어찌나 가기 어려운 지 10시 전까지의 아침시간이 기운이 쭉 빠지도록 길게 느껴집니다. 도시의 골목을 누비는 지친 형사, 권총을 들고 천천히 대치하는 분위기, 범죄에 발을 붙여 출발했다가 뜻하지 않게 더 깊은 범죄의 수렁으로 자꾸만 침몰하는 이야기로 연결됩니다.

아침이 배경이라서, 밤과 전등 불빛을 이용하는 기괴한 조명 대조가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좁은 골목과 어두운 건물 내부를 주로 배경으로 이용해서 마치 느와르 영화의 밤 분위기와 흡사한 음습하고 악하지만 낭만적인 분위기를 조장합니다. 그리고 그런 건물 사이사이로 새어드는 햇빛이 인물들의 얼굴에 어리어, 야밤에 전등이 얼굴 표정을 기괴하게 했던 고전 느와르 영화의 수법을 그대로 살리고 있습니다. 되려, 건물 밖으로 나갈 때 잠깐씩 쏟아지는 아침햇살이 이런 장면을 대조적으로 더 강해 보이게 만들기도 합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과 냉혹하지만 나름대로 사정이 있는 악당들이 있으습니다. 초장에는 신비로운 여자 주인공이 있을 듣한 느낌이 있기도 하고, 주인공이 느와르 영화식 독백 나래이션을 좀 써먹기도 합니다.


(독백 나래이션과 함께 시작하는 흑백 화면)

옛날 느와르 영화와는 다르지만, 그 영향을 받은 60,70년대 영화들이나 소위 홍콩 느와르 영화같은 장면도 꽤 됩니다. 긴장감에 가쁜 숨을 고르는 사람들이 서로 총을 겨눈 채 긴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꽤 멋지게 잡혀 있습니다. 얼굴 표정을 화면 가득 보여 주면서, 배경 음악 없이 천천히 이야기하는 등장인물의 대사 한 마디 한 마디에 집중하게 만듭니다. 기묘한 갈등 상황과 고달픈 대치 상황이 주는 꼬인 느낌과 힘든 느낌이 잘 전달 됩니다. "더 록" 이후로 이런 식의 무뚝뚝한 총 든 사람 역에 완연히 정착한 듯 보이는 데이빗 모즈의 연기 때문에 더 힘을 얻습니다. 낮은 목소리에서 약간은 인간적이면서도 또 존 보이트 스러움도 살아 있는 감상이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이런 느와르 영화다운 분위기는 복잡하고 바쁘며 따라서 삭막해지기 쉬운 도시 정경과 꽤 잘 어울립니다. 느릿느릿 대사를 읊는 감상적인 면모와 스스로 비정함을 숨기지 않는 것으로 살짝 영화의 멋을 부리는 구도도 감정을 진실되게 보이게하고, 지쳐가는 도시 일상의 심상을 비춰 내고 있습니다.


(데이빗 모즈)

지루할만하면 삽입되는 액션 장면 또한 여기에 맞아 들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뉴욕 시청 주변과 차이나 타운 일대의 악몽 같은 교통 체증을 액션의 주요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이동하기 힘들어지고, 뛰어 다녀야하고, 답답한 느낌과 초조한 느낌은 더 커집니다. 교통 체증은 일이 꼬이고 열 여섯 블럭 떨어진 곳 까지 가는 게 죽도록 힘든 영화의 사연의 굳건한 배경이 됩니다. 모험과 감정에 일관성이 생기게 하며, 고달프고 머리 아픈 주인공 브루스 윌리스와도 잘 어울립니다.

특히, 이러한 교통 체증과 비슷한 심상을 갖는 높은 인구밀도도 좋은 재료로 어울리고 있습니다. 좁고 쇠잔한 아파트들과 어딜 가나 눈에 띄는 낯선 "행인1" "주민2" "구경꾼3" 등등이, 마치 아시아의 거대 도시처럼 교묘하게 뉴욕 분위기와 맞아 떨어집니다. 배경을 잘 활용하면서, 동시에 이 영화는 점층법을 활용해서 점점 액션의 강도와 갈등의 고통을 높여갑니다. 처음에는 한두명 사이의 총격전이었던 것이, 나중에는 경찰 한 팀이 얽힌 사건이 되고, 곧 경찰 떼거리들, 나중에는 도시를 시끌벅적하게 하는 규모로까지 커져갑니다. 점층법은 지금 보는 액션에 대한 호기심을 유지하고, 이후에 대한 기대를 높여주며, 처음의 조용한 분위기와 끝없는 비교를 이루면서 지금 벌어지는 상황의 단단히 잘못된 느낌을 전해 줍니다.


(교통 체증 액션)

이 영화가 좀 어색해지는 부분은 갑자기 도덕적이고 경쾌한 교훈극으로 돌변해버리는 결말 부분입니다. 어둡고 고달픈 분위기로 줄기차게 흘러온 영화가 너무나 급작스럽게 현명하고 인자한 사람들의 훈훈한 이야기가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이런 결말의 입구를 장식하고 있는 것은 이상한 반전입니다. 이 반전은 나름대로 브루스 윌리스 인물의 성격이나 표정, 영화의 살짝 어두운 분위기와도 잘 어울리는 설정이긴 합니다. 하지만, 이 반전은 전혀 예고도 되지 않은 것일 뿐만 아니라, 영화의 앞부분 내용과는 어디 하나 어울리는 기색이 없습니다. 사건의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도 우수수 넘쳐나게 됩니다. 때문에 더더욱 주입식 도덕교육 같아지는 마지막에 거부감이 생기게 합니다.

이와 발맞추어 영화에 삽입된,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 차를 두 명만 탈 수 있는 이야기"도 함께 이상해 집니다. 이 이야기는 시카고 내지는 일리노이 일대의 한 코메디언이 무대에서 말한 것이 뉴욕으로 퍼져나갔다가, 이것이 다시 라스베가스와 LA에서 유행한 뒤, 어떤 사람의 자기 개발 서적에 인용되고, 이후에는 자기들이 참신한 인재 채용 방법을 갖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회사들의 면접관들에게 면접 문제로 도용되어 떠돌다가,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실리고,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베껴 라디오 방송에 보낸 한 중학생과 음식점 아르바이트생에 의해 좋은 이야기로 옥주현이나 박정아 같은 사람에 의해 전국에 읽히고, 이것을 들은 사람이 좋은 생각이나 샘터에 엽서를 보내어 다시 출판 되고, 마침내 한국의 펌질하는 네티즌들이 인터넷 이곳저곳에 몇 백만 바이트치는 족히 복사해 놓은 듯한 이야기 입니다. 이야기 자체는 상당히 멋진 이야기입니다만, 결말과 반전이 억지스럽게 꼬여드는 탓에 이야기 자체도 괜히 억지로 멋있는 척 하려는 닳고닳은 가식적인 느낌으로 전해지는 면이 있습니다.


(모스 데프: "죄송합니다만, 교통 카드 한 번만 찍어 주시겠어요.")

배우들 중에 가장 멋진 인물은 브루스 윌리스가 호송하는 사람을 연기한 모스 데프 입니다. 이 사람의 인물은 거의 노예해방 이전 해리엇 비처 스토 부인이 쓴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에나 나올 법한 인물입니다. 어딘지 벽이 느껴지고 "천하다"라고 불리우는 사람이지만, 인간적인 따뜻함과 소시민적인 솔직함이 착하게 느껴지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보면 참 고리타분할만한 설정이기도 한데, 배역 설정도 그렇고 연기도 꽤 잘 어울립니다. 이 사람은 진짜 오두막집에서 톰 아저씨에게 배워 온 듯한 말투로 시종일관 이야기하면서, 느릿느릿 꼭 조금 모자란 사람처럼 꿈꾸는 듯이 이야기 합니다.

이런 대사들을 진짜처럼 들리게 연기하고 있으면서, 또 이로써 가라앉은 가운데 긴장을 고조하는 느낌을 살리면서, 동시에 더 약하고 순해 보이는 느낌을 집어 넣습니다. 약간 맛이 간듯한 이 어리숙한 인물이 잘 연기 된 덕택에 심지어 이 비정한 영화에 기묘하게 따뜻한 느낌이 서리고, 고생하는 가운데 끈끈하게 느껴지는 인간의 정까지 전해집니다.


(복잡한 차이나 타운 일대)

액션 장면은 빠른 도시 추격전과함께 조용한 가운데 긴장감을 고조하며 총을 들고 대치하는 서부 영화스러운 부분도 자주 나오고 있습니다. 음악은 후자쪽에 좀 더 집중하면서 흑인 음악 정서의 도시 느낌도 함께 담아내고 있습니다. 비록 화려하고 재기 넘치는 액션 장면이나 중후한 감정이 넘치는 영화는 아니라 할지라도, 짜증나는 아침을 고달픈 긴 하루 이야기의 활극으로 충실히 완성하고 있습니다.


그 밖에...

데이빗 모스는 또 그런 인물로 TV쇼 "하우스"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감독자리를 맡은 리처드 도너는 우리에게 익숙한 영화들을 옛부터 많이 연출해 왔습니다. "오멘" "슈퍼맨 1,2" "리셀웨폰" 시리즈들 등등에 감독으로 참여했습니다. "식스틴 블럭스"는 그의 최신작일 겁니다. 애니메이션 성우를 제외하면 "패스트 푸드의 제국"과 함께 브루스 윌리스의 최신작이기도 합니다.


덧글

  • 닥슈나이더 2006/11/16 11:25 # 답글

    재미있게 봤던 영화입니다... DVD가 싸지면 살것 같은...(벌써 샀나??..ㅡ,.ㅡ;;)
  • fmlee 2006/11/21 16:18 # 답글

    저도 재미있게 봤던 영화입니다. 그러고 보니 모스 데프의 말투는 느리고 어눌한 듯하면서도 매우 분명한 발음이었네요.
  • 게렉터 2006/11/27 13:37 # 답글

    닥슈나이더/ 결말과 후반이 좀 약하고, 그렇게보면 전체적인 분위기에 큰 개성이 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은 문제로 지적되곤 합니다. 하지만 도입부와 중반부까지는 충분히 흥미진진하고 연출, 연기 모두 일정 수준 이상을 잘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fmlee/ 진부한 인물이지만 성실하고도 훌륭하게 잘 해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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