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에 대하여: "천상의 피조물 Heavenly Creatures" 을 곁들여 영화

"천상의 피조물"은 평화롭고 조용한 뉴질랜드의 교외를 중심으로 이 평화가 도리어 더욱 불안해 보이는, 피가 끓는 두 10대 여학생의 열정적인 사연을 다룬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는 실제로 있었던 일에 바탕을 둔 1950년대의 이야기이며, 상상과 공상에 푹 빠진 두 여학생의 상상장면을 필두로 다양한 초현실적인 장면에, 즐거움과 광기를 넘나드는 생동감이 넘칩니다. 여기에 간을 하고 양념을 뿌리는 섬뜩한 요소가 있고, 또 반대로 실제감과 대조감을 자아내는 아주 현실적인 연기와 배경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천상의 피조물 포스터)

흔히, 이야기에 대해 "스포일러"라고 부르는 것은 숨겨진 진상이나 의외의 결말을 미리 알려줘 버려서 재미 없게 만드는 일입니다. 말그대로 "망쳐버리는" 것입니다.

영화나 소설중에는 수수께끼를 던져 주고 과연 이 모든일이 무엇 때문일까 하는 의문에 대해 조금씩 차근차근 긴장감을 높여가다가 호기심이 끓어오를 때쯤 드디어 명쾌한 답을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혹은 전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시치미를 뚝 떼고 있다가 갑자기 상상도 못했던 일이 벌어지도록 해서 충격의 강렬함을 드높이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결말을 알고보면, 긴장감과 호기심이 덜끓어오르기 때문에 결론을 볼 때 재미가 약해지기도 하고, 벌어질 일을 알고 있기 때문에 충격이 떨어지거나 충격을 준비하는 중반부의 평이하고 잔잔한 묘사들이 지겹게 되기도 합니다. "절름발이가 범인이다"와 "누구누구는 귀신이다"는 한국에서 바로 이런 스포일러의 대표주자로 악명 높습니다.

그런데, "천상의 피조물"을 살펴 보면 상황이 약간 미묘합니다. "천상의 피조물"은 실화에서 줄거리를 가져 왔습니다. 세계적으로도 조금은 유명한 사건입니다. 설령 사건 자체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이 영화를 소개하고 광고하는 수많은 내용들이 이 영화 속에 살인에 관한 이야기가 중요한 요소로 포함되어 있다고 떠들어 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천상의 피조물"들은 살인사건이 벌어진다는 점과 좀 더 나아가 범인이 누구라는 이야기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는 상태에서 이야기를 보게 됩니다.

그렇지만 한편,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영화가 다루는 살인 사건에 대해 살인의 동기나 살인범의 역할 분담 같은 것은 잘 모르고 영화를 보게 됩니다. 간혹은, 아예 살인 사건에 관한 이야기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입부에 나오는 평화로운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상과 "천상의 피조물"이라는 아름다워 보이는 제목으로 시작했다가, 느닷없이 겁에 질리고 놀란 주인공들이 뛰어다니게 되는 부분은 그 자체로 충격적인 반전일 수 있습니다.

물론, 내용을 알고 보는 관객들에게도 조용함과 난리의 대조가 흥미를 돋구는 장치일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한 지나치게 따분하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오히려 따분해하는 등장인물들이 헛바람을 들게하는 면이 있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전달해 주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게 내용을 알고봐도 재미가 별로 줄어들지도 않는 이야기 입니다. 하지만, 또한 "천상의 피조물"은 어떤 내용인지 전혀 모르고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는 확실히 느낌이 달라지는 면이 있습니다. 대체 이런 평화로운 세상이 어떻게 파국적인 살인극으로 이어져 가는가에 대해, 훨씬 더 강한 호기심이 생기게 됩니다. 내용과 결말을 모르는 것이 영화를 보는데 일종의 덤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비슷하게, 결말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이야기이지만, 결말을 모를 때 다른 재미가 있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아예 이야기를 꾸민 작가 조차도, 보고 듣는 사람들이 결말을 알고 이야기를 볼 것이라고 내용을 만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말을 모른 채 이야기를 보는 것이 독특한 재미를 돋구는 경우가 드물지 않은 것입니다.

역사물이나 실화를 다룬 이야기에서 이런 일은 자주 생깁니다. 우리는 태종 이방원의 아들들 중에 누가 왕이 되는지 뻔히 알고 있습니다. 이 글을 보느라 한국어 문자를 읽을 때나 이 글을 읽기 위해 인터넷 회선 회사에 돈을 낼 때 쉽게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용의 눈물"을 볼 때 집중한 것은 어느 왕자가 왕이 되느냐는 중심 줄거리보다는, 왕이 되지 못한 첫째 왕자가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을 저질렀길래?"하는 의문에 집중됩니다. 세자를 바꾸는 일 자체는 아슬아슬한 결정적 순간으로 초점이 맞춰지지 못하고, 그보다는 그에 이르는 구체적인 과정의 내용들이 조명을 받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연을 전혀 모르는 외국인이나, 어린이들이 "용의 눈물"을 볼 때는 시각이 달라집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좀 더 그럴듯한 배우를 기용해 좀 더 그럴듯하게 꾸민데다가, 주인공 이방원이 각별히 아끼는 첫째 아들을 마음속으로 응원하게 됩니다. 이런 경우에는 세종대왕이 왕이 되는, 그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깝고 극적인 전환점으로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꼭 같은 일이지만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경험한 일도 있습니다. 중국사에 대한 상식이 없다하더라도, 한국의 삼국시대에 대한 내용만 배우다보면, 중국에서 후한이 망한다는 사실은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위-진-남북조 시대로 이어졌다는 사실도 곧 뻔하게 알게 됩니다. 하지만, 어린이들이 처음으로 "삼국지"를 읽을 때는 결국은 안타깝께 촉나라는 망하고, 조조도 아니요, 손권도 아니며, 심지어 사마의도 아닌 사마의 손자가 천하를 통일한다는 결론은 확실히 알 수 없는 인생무상의 반전에 가깝습니다.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기는해도, 관우가 죽는 장면은 안타깝기 그지 없고, 장비가 죽는 장면은 정말로 반전다운 반전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삼국지"에서 가장 뻔한 사실인 유비 삼형제와 제갈량이 천하통일에 실패한다는 점은 사실은 책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숨겨져야 더 중요한 사실일지 모릅니다.

반면에, 요즘의 많은 "삼국지" 판본들은 이런 개개의 내용을 갈등과 아슬아슬함으로 삼지 않곤 합니다. 대신 얼마나 운치있고도 박진감 넘치게 풀어내느냐 하는 연출의 묘미로 기울어지는 것들이 많습니다. 공전의 흥행작인 "고우영 삼국지"와 "이문열 삼국지" 이후로는 편자 자신의 인물과 역사관에 대한 비평을 곁들이면서, 사실에대한 해석을 재미로 삼기도 합니다. 두번째, 세번째 삼국지를 읽고, 다른 판본으로 삼국지를 읽을 때도 읽을 때마다 다른 재미가 있는 것은 이렇게 좀 더 다른 면에 초점을 둘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삼국지"를 처음 읽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요즘의 삼국지 판본들을 읽을 때 조차도 의도와는 다르게 "유비가 통일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결말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최후를 모른 채 읽는 것이 더욱더 재미있을 때가 있습니다. 모든 내용을 미리 알고 역사적인 관점이나 인물론이나 처세술로 삼국지를 대하는 것도 한 방편이겠지만, 또한, 조선시대에 동네 노인으로부터 삼국지 이야기를 듣는 어린이들처럼, 유비, 관우, 장비가 죽는 장면에서 너무나 안타까워 친구들과 다같이 눈물을 흘리며 붙잡고 슬퍼하며 집에 돌아오는 묘미도 놓치기 아까운 경험일 것입니다.

역사물이나 실화가 아니라 하더라도 아주 많이 알려진 고전에서도 비슷한 면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책을 읽은 사람도 세상에 많고, 책을 읽지 않은 사람에게도 내용이 너무나 널리 퍼져 있는 유명한 이야기는 뒤늦게 접하게 되면 대체로 결말을 알고 보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필리어스 포그는 세계 일주를 80일간에 성공시킬 수 있겠습니까. 장발장은 탈출에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철가면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입니까.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들이라서 결말을 아는 채 내용을 볼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어찌보면 꽤 불행한 면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때 선생님께서 하셨던 잔소리들 중에서 어릴 때 좋은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하셨던 말씀정도는 맞는 말인지도 모릅니다.

몇 년 전에 화제거리가 되었던 트로이와 그리스의 전쟁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일리아드" 이야기야 세계적인 고전이고, 이미 고대 로마 시대부터 "일리아드"의 결말은 그렇게 가려져야 할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적지 않은 한국 관객들에게는 트로이가 망하고 그리스가 이긴다 정도만 널리 퍼진 상식일 뿐, 누구누구는 죽고 누구누구는 살아남는가하는 점은 모른채 궁금증을 갖고 이야기를 즐긴다는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헥토르의 이별과 최후는 고전 중에서도 빛나는 명장면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들을 만난 헥토르의 투구를 보고 그 아들이 무서워서 울음을 터뜨리는 기막힌 장면에 감탄하고, 그리고나서 헥토르가 최후를 맞는 장면을 처음으로 읽던 어린시절의 안타까움은 잊혀지기 어려운 감상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혹여 아직 "일리아드"를 읽지 않은 많은 어린이와 어른들에게는, "헥토르가 죽는다"라는, 심지어 호메로스 조차도 반전으로 여기지 않았을 내용조차도 중대한 스포일러 역할을 할 수도 있습니다.

흥부-놀부 이야기나 심청이 이야기야 권선징악 분위기가 결말까지 일변도인데다가, 워낙에 신비롭고도 해학적인 이야기라서 좀 다르긴 합니다. 그래서 놀부가 망한다거나 "심청의 귀환"으로 이야기가 끝난다는 점을 미리 알아도 중반부의 다채로운 내용들 때문에 재미가 덜해지거나 하는 부분은 적습니다. 그러나 또 반대로 결말을 밝혀도 실례인가 아닌가 하는 갈등을 좀 더 불러일으키는 고전들도 있습니다. 스칼렛과 레트의 관계는 어떻게 결론이 나는 겁니까. 아직도 보지 않은 관객이 적지 않을 "카사블랑카"나 "로마의 휴일"은 결말을 쉬이 발설해도 되겠습니까.

그나마 이런 후자의 예들은 애초에 작가가 갈등으로 이야기 내용을 꾸민 것이고, 갈등의 해소 방법에 대한 호기심으로 독자를 빨아들이는 구조가 선명하게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말을 모른채 처음으로 이야기를 즐기는 것이 훨씬 더 재미있게 내용을 즐길 수 있는 분명한 예라고 짚고 넘어가도 큰 무리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들 중에는 이상의 예들과는 또 다르게, 갈등의 전개 양상이나 결말의 사건은 밝혀도 아무 문제가 안되지만, 연출 방법 자체가 마치 반전처럼 작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린왕자"의 예를 들어 봅시다. 별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이상한 신기루 같은 어린이와 정드는 이야기가 어떻게 결말을 맺겠습니까. 결말이야 느긋하며, 어린왕자를 묘사하는 마지막 장면도 장중하고 안타까울지언정 의외의 결정타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리고나서 한 페이지를 더 넘기면 어떻게 됩니까. 어떤 책들은 이 중요한 편집을 제대로 못해서 한 페이지를 더 넘기기 전에 먼저 내용이 나타나 버리는 실수를 하는 경우도 있고 펼친 페이지의 오른쪽에 드러나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정상적인 책이라면, 내용이 다 끝났다는 생각이 들고나서 한 페이지를 넘겼을 때 썰렁한 삽화가 있고, 짤막한 덧붙임 말이 나오게 됩니다. 줄거리나 사건상으로는 아무런 내용이 아닙니다만, 이런 의외의 덧붙임 덕분에, 내용의 진실함과 감정의 간절함은 더욱더 깊어지고, 갑자기 이 환상적인 이야기에 기묘한 현장감마저 넘치게 되어 버립니다. 사건이나 드러나는 갈등과는 별개로, 이것을 담아낸 연출방식이 의외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감동적이고도 충격적인 반전이라 할만합니다.

연출방식의 의외성으로 반전효과를 내는 대표적인 옛 명작 중에 하나로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를 들 수도 있을 겁니다. 이 이야기는 유쾌한 듯, 슬픈 듯, 밝은 듯, 궁상맞은 듯한 냉정하게 현실적이면서도 따뜻하고 공상적인 면이 살아 있는 멋진 내용입니다. 이 이야기의 말미에, 꼭 "어린왕자"의 마지막처럼 덧붙는 이야기 하나가 한 페이지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페이지의 연출은 벌어진 사건 줄거리 자체에는 아무런 개입을 안합니다. 하지만, 그 힘은 전체 이야기 성격을 쥐고 흔들만큼 강렬합니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에서 주인공이나 주변 인물들의 성격, 누가 어떻게 되는가. 하는 내용은 미리 알고 있어도 내용을 즐기는데 거의 아무런 흠이 안됩니다. 그런데, 별 반전이 없는 내용 끝에 드리워진 이 의외의 연출효과는, 그런 연출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볼 경우에 감동의 소용돌이에 사람을 빠뜨려, 책장을 덮고나서도 책을 처음 읽은 어린이를 한 며칠 헤어나지 못하게하면서 인생의 의미를 고민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의외의 연출은 영화에서도 반전 처럼 효과를 줄 때가 있습니다. "지옥의 묵시록"에서 베트남초가집에 로켓포를 날리는 헬리콥터의 등장은 당연한 사건입니다. 하지만, 이 때 배경음악으로 문득 익숙한 오페라 배경음악이 깔려드는 모양새는 사람을 놀라게 하고, 기막히게 하며, 발상이 재치있다고 감탄하게 만듭니다. "친절한 금자씨"가 악당과 어떤식으로 대결하고 사람들이 무슨 일을 저지르는가 하는 장면도 흥미롭습니다만, 이것을 미리 알고 본다 하더라도 그렇게 재미가 줄어들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영애가 흙을 덮은 후에 마지막으로 짓는 표정을 스크린샷으로 미리보고 영화를 본다면, 확실히 기대감과 의외성이 주는 재미를 꽤 놓치게 될 것입니다. "씬 시티"야 어차피 개 같이 싸우다가 거지 같이 누구 하나 죽으면서 끝나는 이야기일텐데, 그 와중에 타르 구덩이에 빠진 사람을 어떻게 영화 화면으로 묘사하고 있는가 하는 점은 깨달으면서 보면 감탄을 자아내는 전율이 있습니다.

한편으로 경우에 따라서는 작가가 의도적으로 반전을 꾸며낸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반전을 다 알고 볼 때 색다른 재미를 더 주는 것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사람들이 언급하는 영화는 "장화, 홍련", "식스 센스", "아이덴티티"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영화들은 반전을 모르고 볼 때와 알고 볼 때 각각 다른 재미를 줍니다. 두번째로 영화를 보면서 세세한 복선과 단서들을 스스로 조합하고 추리하는 재미는 많은 관객들을 즐겁게 했습니다. 이 때 느껴지는 대단히 흥미로운 감정이입과 마치 실제 사건에 뛰어든듯한 생생한 현장감은 영화에 또다른 가치를 느끼게 합니다. 관객이 직접 단서를 조합하고 내용을 합리적으로 풀이하면서 스스로 영화내부의 사건을 조사하게 됩니다. 때문에 반전을 알고 영화를 볼 때에는 처음 영화를 그냥 펼쳐지는 이야기로 감상할 때 보다, 더 능동적으로 이야기에 빠져들게 됩니다.

한술 더떠서 어떤 이야기들은 아예 반전과 결말을 알고 봐야 오히려 모르는 것보다 더더욱 재미와 흥이 돋구어 지는 기이한 경우도 있습니다. "살인의 추억"을 보는 해외 관객들은 종종 "과연 범인은 어떤 놈일까"라는 궁금증에 영화를 보는 초점을 맞추곤 합니다. 이렇게 영화를 보게 되면 또다른 독특한 몰입감이 생기는 부수적인 효과가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이래서는 마지막 결론이 좀 싱겁고 무책임하게 느껴진다는 느낌이 살짝 끼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호기심으로 결말을 기대하는 사이에, 영화의 중요한 다른 부분들을 놓쳐버릴 위험도 있습니다. 그러나 화성 연쇄 살인 사건 수사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점을 알고 영화를 보게되면, 그 영화가 잡아내는 세상 사람들의 군상 면면에 주목을 하게 되고, 가장 유력한 범인으로 후반에 등장하는 박해일의 인물에 대해서도 또 다른 시각을 갖게 됩니다. 그 결과로 영화의 마지막은 그냥 "무적의 살인범"에 대한 정체를 수습하는 마무리짓기를 초월하는 듯 합니다. 대신에, 마치 인간 사회의 악이라는 것이, 조금씩 연기처럼 피어올라서 보이지 않는 악마로 구체화된 뒤에 저주처럼 이 세상에 드리워졌다는 묵시록적인 비전으로 느껴질 잠재력이 있는 것입니다.

"현기증"이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 대해서도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둘 다, 결말을 모르고 볼 때 의외의 결말에서도 충분히 충격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기증"은 결말을 모르고 볼 때는 반전 아이디어 하나를 써먹기 위한 영화치고 너무 천천히 끌면서 오래 때운 영화처럼 보이고, 따라서 자칫 지루하게 보일 우려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반전을 알고 영화를 보게 되면, 수수께끼의 결말을 조급하게 기다릴 필요 없이, 화면 속에서 풍성하게 펼쳐지는 세세한 감정변화들과 우울하고도 환상적이면서 낭만적인 분위기에 느긋하게 빠져들 수 있습니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는 처음 볼 때는 "그래서 어떻게 되는거지?"라면서 후다닥 책장을 넘기며 줄거리를 바삐 따라가게 됩니다. 하지만, 그때보다는 결말을 다 알고 있으면서 농담 한 마디 한 마디, 언어유희 하나 하나를 경쾌하게 즐길 때 더 즐겁습니다. 그래서 두번째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읽고나면, 경쾌하게 헛소리를 하는 우주선 컴퓨터나 은하계 최고의 술에 대해서는 기억이 날망정, 막상 결말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별로 잘 생각도 안날만큼 신경도 쓰이지 않을 지경입니다.

반전과 스포일러에 대해 긴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다시 "천상의 피조물"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이상의 여러가지 결말과 반전에 대한 요소들을 한꺼번에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처음보는 사람들에게 파국의 내용이나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을 흥미롭게 호기심을 갖고 관찰하게 해 줍니다. 한편, 이 영화는 두 번 이상 보면서 빠져들게 된 사람들이나 뉴질랜드의 옛 일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현실의 벽을 내키는데로 벗어던지려는 두 주인공의 여러가지 생각과 감정을 엿보게 해줍니다. 또한 "말죽거리 잔혹사"처럼 "대한민국 학교" 운운하는 직접적인 대사 없이도, 비판적인 나머지 신기해 보이는 50년대 학교 정경을 살피게 해줍니다. 거기에는 화려하게 빛나는 화면들이 가득하고, 모든 배우들이 다들 좋은 연기를 보여주고 있는 노련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슬프고 암담하게 가라앉는 결말 뒤에 마지막으로 짧은 한 장면이 들러붙어 있습니다. 이 들러붙은 장면은 연출의 의외성이 그 추하고 쓸쓸한 상황을 냉정한 관점의 충격으로 강화해 주는 효과까지 있습니다. 그리하여 "천상의 피조물"은 내내 냉정하고 평점심을 잃지 않는 시각과 환상적이고 흥겨운 내용을 동시에 결합시켜 재미를 돋구고 있습니다. 중후한 사건과 사람에 대한 통찰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끝으로 이 영화에서 환상적인 부분과 냉정한 부분을 결합하기 위해 사용한, 대표적인 세가지 방법을 간략히 짚어 보겠습니다.

첫째, "천상의 피조물"에는 선악구도가 모호하며, 모든 등장인물들은 적당히 이해할만한 인물들입니다. 일단 주인공들의 맞은 편에 서 있는 주인공들의 부모들은 그냥 평범한 부모들입니다. 현명하다거나 훌륭한 양육과 교육을 줄 수 있는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사악하고 멍청한 인물들도 아닙니다. 평범한 사람으로서 감성과 고민, 우려와 걱정에 사로잡혀 있으면서, 그들의 딸을 아끼고 있는 부모입니다. 그런 평범한 한계 때문에 갑자기 몰아닥치는 이 아이들의 변화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반면에 주인공들은 주인공으로서 세상의 한계를 겪기도 하고, 팍팍한 현실에서 뛰쳐나와 공상의 세계를 꿈꾸기도 하는 사람들로서 꽤 공감할만한 부분이 있지만, 또한 은근히 비웃음의 시각을 받고 있기도 합니다. 주인공들의 터무니 없는 과대망상은 그대로 읊조려지며, 몇몇 장면에서는 어림없는 헛소리를 하면서 바보스런 낭만에 빠져드는 장면을 조금 추하게 잡아주기도 합니다. 아무런 구체적인 수단이나 철저한 대비 없이 그저 막연한 자아도취에만 빠져서 헛된 일만을 하고 꿈꾸는 모습은 서슴없이 드러납니다.

둘째, 이 영화는 전체적으로 차분한 점층법과 함께 거기에 어울리는 청출어람 이야기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의 출발점은 평화로운 중소도시 정경과 약간 퉁명스러워 보이는 주인공의 모습입니다. 갈수록 주인공의 대사와 독백은 많아지며, 하는 행동은 적극적이고 과격해지며, 공상 장면의 화려함은 점점 커집니다. 막판에 가면, 공상 장면은 무슨 기사와 마법사의 서사시처럼 되어버리고, 주인공은 펑펑 울면서 인생의 비극에 절규해버립니다.

이런 점층법에 재미를 더하는 것은 두 주인공의 전체적인 위상변화입니다. 초반부에 영국 출신의 전학생이 나타나면서 주인공 두 명이 갖추어지는데, 처음에는 이 전학생이 특이하고 과격하며 일탈적인 인물인듯 보입니다. 열기가 넘치면서 살짝 광기어리고 종잡을 수 없는 취향의 사람을 연기하는데 케이트 윈슬렛은 완전한 적역이며, 다른 주인공은 이 전학생에게 호기심을 느끼며 서서히 영향을 받는 구도로 이야기는 진행됩니다. 이때 살짝 성적인 매력을 이용해서 이야기 진행을 빠르게 하고나면, 장단이 맞아드는 두 사람이 묘사되고, 나중에는 이 주인공이 전학생보다도 더욱 과격해집니다. 이런 전개는 영향을 받고 사람이 변해간다는 점을 나타내기에도 좋고, 십대의 광기라는 영화의 중요한 소재를 무슨 폭력장면이나 반항하며 덤비는 장면 없이 표현해주는 매끄러운 수법입니다.

세째, 두 주인공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점을 손쉽게 표현하기 위해 두 주인공을 미친듯이 달리게 했습니다. 광기를 표현하는 방법은 이상한 짓을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화속 등장인물이란 것이 일상적이지 않은 인물이거나 과장된 인물이기 쉽기 때문에 왠만해서는 이상한 짓처럼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적지않은 영화들은 광기를 표현하기 위해 인물들이 정말 화끈하게 맛간 짓을 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영화가 갑자기 너무 암담해집니다. 장승업, 모차르트, 존 내쉬 같은 사람들을 다룬 영화들은 이렇게 주인공이 좀 미쳤다는 것을 보여준 후로는 우울하고 절망적인 감성에서 벗어나기 어려워 졌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다양한 이야기나 풍부한 소재를 언급하기가 어려워 지고, 기껏해야, 그런 와중에서 어떻게 다시 헤어나는가 하는 점을 감개무량하게 보여주는 정도에 머물러야 합니다.

때문에, "천상의 피조물"들은 케이트 윈슬렛을 지붕에 올라가서 울다가 웃으며 술을 마신다던가하게 하지 않고, 그냥 줄기차게 뛰어다니게 했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계속 뜁니다. 웃으면서 뜁니다. 아주 간단하게 일탈적이고 광란증적인 면모를 드러내면서도 분위기는 가볍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배경 음악은 이런 질주 장면과 이 영화의 낭만에 대한 동경에 어울리는 화려하고도 빠른 마리오 란자와 그 밖의 오페라 노래들입니다. 제대로 된 그라운드를 제공해준 뉴질랜드 남섬 각지의 정경도 잘 잡혀서 아름답게 펼쳐져 있습니다.


그 밖에...

공상 장면들은 즐겁고 연출이 훌륭합니다. 점토가 살아 움직이는 연출들은 놀라운 기술은 없지만 경제적이면서도 현란하고, 해변에 쌓은 모래성 창문 밖으로 주인공의 거대한 얼굴이 보이는 장면은 실제 현실의 바로 그 사람이 지금 거기서 그런 공상을 하고 있다는 선명한 연결을 드러내 주는 절묘한 장면이었습니다.

살인범들의 근황을 알고 싶으시다면, 듀나님이 쓰신 글 http://djuna.cine21.com/movies/heavenly_creatures.html 의 마지막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핑백

  • 게렉터블로그 : 기나긴 이별 The Long Goodbye 2007-08-16 00:01:16 #

    ... 다. 그런데, 이 영화의 결말에 대해 이야기 할 때는, 어디까지 이야기하는 것이 스포일러 아닌 스포일러가 될 것인가 하는 면에 대해서, " 천상의 피조물 http://gerecter.egloos.com/2849512 " 과 비슷한 정도로 좀 복잡한 면이 있습니다. 요즘 자주 언급되는 이야기입니다만, 영화에 보면, 당시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되었던 ... more

  • 게렉터블로그 :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The Reader 2009-03-30 12:50:54 #

    ... 공교롭게도 케이트 윈슬렛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천상의 피조물" http://gerecter.egloos.com/2849512 이야기를 할 때 언급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영화에 반전이란 것을 미리 아느냐/마느냐 하는 점은 여러가지 측면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 more

  • 반짝이는 침엽수 : The Reader-내가 너무 감동적으로 본 영화 2009-03-31 11:54:39 #

    ... "천상의 피조물" http://gerecter.egloos.com/2849512 이야기를 할 때 언급드린 적이 있습니다 ... more

  • 게렉터블로그 : 500일의 썸머 (500) Days of Summer 2010-02-07 15:16:43 #

    ... 화는 이미 남녀 주인공들이 헤어지고 말았다는 점을 시작하면서부터 알려주고 출발합니다. 따라서 누가 누구와 엮이는가 깨어지는가 하는 것은 이 영화의 반전( http://gerecter.egloos.com/2849512 ) 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영화에서는 줄거리나 내용은 대충 미리 알아도 됩니다만, "형식"이 미리 알면 재미가 줄어들 만한 점입니다. (Su ... more

  • 게렉터블로그 : 폭력은 없다 (1975) 2011-07-27 09:48:14 #

    ... 영화 내용을 미리 알면 재미가 떨어지는 것에 대해 여러 가지 경우 ( http://gerecter.egloos.com/2849512 ) 가 있겠습니다만, 이 1975년작 한국영화는 이 영화의 "감독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모르고 본다면, 그게 재미를 떨어뜨리는 경우가 ... more

  • 게렉터블로그 : 스타트렉 다크니스 (Star Trek Into Darkness, 2013) 2013-06-03 21:04:36 #

    ... 즐거운 영화였다고 생각 합니다. 그 밖에... 스포일러라는 것에는 단순히 결말을 말하는 것 이외에도 갖가지 방식을 생각해 볼 수 있다는 이야기를 예전 글 http://gerecter.egloos.com/2849512에서 했던 적이 있었는데, 이 이야기는 결말이나 중요한 내용도 내용이지만, 군데군데 어디에 옛날 스타 트렉을 돌이킬 수 있는 이야기, 오마주, 패러 ... more

  • 게렉터블로그 : 버니 (Bernie, 2011) 2013-07-19 23:56:21 #

    ... 말이 났는지 다 알려진 영화입니다만, 그런 자료 없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보는 것도 맛인 영화 입니다. “영화 결말을 알려 주는 스포일러”에 대한 여러가지 경우에 대해 이야기 했던 글 http://gerecter.egloos.com/2849512 에 한 가지 사례로 꼽아 볼 만한 이야기였다고 생각합니다. ... more

  • 게렉터블로그 : 클로버필드 10번지 (10 Cloverfield Lane, 2016) 2016-06-21 17:10:02 #

    ... 사실, 그 제목 덕택에 대피소에서 나간 후 바깥 세상에서 무엇을 보게 될 지를 어느 정도 암시하게 되므로, 궁금증을 갖고 초반부를 지켜 보는 맛을 까먹지 않겠나 싶었습니다. 여러 유형의 스포일러 중에서도 제목이 스포일러인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제작진이 이런 것은 아예 염두에 두고 만들었을텐데, 그렇다고 하기에는 또 그런 궁금증을 중시하는 다른 영화, TV물과 ... more

  • 게렉터블로그 : 파멸 (La Rupture) 2016-09-06 10:17:52 #

    ... 영화의 반전에 여러 가지 경우가 있겠습니다만, 1970년작 “파멸”은 이 영화가 도대체 무슨 장르에 속하는 영화인지가 반전이 되는 영화입니다. 포스터만 보면 악당의 공격과 음모에 휘말린 한 여 ... more

덧글

  • 미디어몹 2006/12/01 18:02 # 삭제 답글

    곽재식 회원님의 상기 포스트가 미디어몹 헤드라인에 등록되었습니다.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