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목장 (해저정찰대, 해저패트롤 海底パトロール) The Deep Range 기타

아서 클라크는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 중에서는 단연 으뜸이라 할만큼, SF의 한 전통을 세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서 클라크의 전성기를 잡는 다면 참 긴 시간이 포함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만, 그 중에서 초기라 할 수 있는 1957년에 쓴 "The Deep Range"는 한국에서는 어린이용 축약판으로, 아이디어 회관 SF시리즈 18권인 "해저 정찰대"로 발간되었습니다. 또한, "고래목장"이라는 제목의 판본으로도 수십년 전부터 널리 한국 전역을 나돌아 다녔습니다. 이 책은 1968년, 福島正実가 번역하고, 松永謙一가 그림을 그린, 일본 岩崎書店의 SF世界の名作 시리즈 "해저 패트롤 海底パトロール" 를 다시 번역한 것입니다.


("고래목장(구판)"에서도 그대로 사용된 "해저 패트롤 海底パトロール"의 표지 )

"고래목장"의 내용은 돈 벌리라는 노련한 해상 기지의 기술자가 월터 프랭클린이라는 우주비행사 출신의 젊은이를 훈련시키라는 임무를 맡고, 그러는 과정에서 두 사람이 여러가지 모험을 겪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마치 TV미니시리즈나 연재소설에 어울릴만큼, 작은 에피소드들이 하나 둘 펼쳐지고 맺어지면서, 동시에 두 사람의 인생사에 얽힌 전체적인 사연들이 조금씩 밝혀져 가는 이야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면에는, 한정된 지구라는 공간에서 도대체 폭발적으로 불어나는 인구와 자원 수요를 예정된 멸망과 마주쳐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에 대한 갖가지 사회학적이고 경제학적인 고민이 깔려 있습니다.

처음에는 거대한 식량 자원의 생산기지인 바다 구역을 관리하고 정리하는 임무를 맡은 돈 벌리의 시각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그러다가 돈 벌리가 냉소적이고 뻣뻣한 월터 프랭클린을 훈련시키면서 점점 두 사람은 의리가 생기게 되며, 그러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이야기는 돈 벌리와 월터 프랭클린 두 사람의 사연을 다루는 시점으로 성격이 바뀌어 진행이 됩니다. 이야기가 흘러흘러, 월터 프랭클린의 한많은 인생사가 밝혀짐에 따라 결말에 다가갈수록, 이야기는 불쌍한 월터 프랭클린의 시점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월터의 불쌍함)

자칫 이야기가 줏대 없이 뒤흔들릴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뭔가 비밀과 사연이 있는 듯한 월터 프랭클린에 대한 호기심을 중심에 두고 서서히 이야기하는 관점이 바뀝니다. 돈 벌리가 월터 프랭클린에 대한 이야기를 밝혀 내려 하면서 월터 프랭클린의 비중이 커지고, 마침내 완전히 비밀이 드러나고 나면, 월터 프랭클린 쪽으로 비중이 옮겨 갑니다. 이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관점이 전환되기 때문에 이야기는 충분히 일관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다양하고 풍부한 이야기와 여러 사람의 성격, 갈등을 묘사할 수 있게 됩니다. 더군다나, 이러한 구성 자체가, 몹시 친해지기 어려운 사람인 월터 프랭클린과 어떻게 친숙해져 가는가 하는 점을 인간적인 교류의 이야기로 진행하는 그럴듯한 효과를 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고래목장"의 이야기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익숙해지고, 적응해나가고, 그러면서 바뀌어가는 극적인 묘미로서 일단 나쁘지 않은 뼈대를 갖추고 있습니다. 산호 따기 에피소드는 정말 TV미니시리즈 같은 데 단골로 나올만한 것입니다.

벌어지는 사건들과 깔려 있는 배경을 살펴보면, 전체적으로 "고래 목장"을 장식하고 있는 것은 아름다운 지구 자연과 생태계에 대한 예찬입니다. 일단 신비로운 해저 세계를 순회 하면서 뜨거운 태양이 내려쪼이고 끝없이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를 가로지른다는 일상 자체가 상당히 자연적인 면이 있습니다. 바다라는 인간이 익숙하지 않을 수 밖에 없는 자연환경을 본격적인 무대로 삼았기 때문에, 주인공들은 개인용 잠수정과 음파 감지기, 초음파 울타리 같은 첨단의 기계 문명을 잔뜩 활용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활용해서 벌이는 일 자체는 오히려 생명이 가득찬 야생의 세계에서, 고래를 몰고 상어와 싸우며 해저의 신비로운 생물을 뒤쫓는 이야기가 됩니다. 따라서, "고래 목장"은 정보 통신과 전자 기계 전문가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농부나 사냥꾼 같은 일을 하는 이야기로 묶여서 자연을 느끼게 해주는 색다른 감상을 전해 줍니다.


(고래들끼리 위협을 알리는 초음파를 흉내내 고래를 쫓아내는 초음파 울타리)

이런 "고래 목장"의 분위기는 우리가 생태계라고 느끼는 자연 환경과 가장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살벌한 우주공간과의 대조를 통해 더욱더 강조됩니다. "고래 목장"의 멋진 점은, "고래 목장"이 그럴듯한 첨단 문명의 환상으로 꾸며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돈 벌리와 월터 프랭클린등의 대원들은 관료제 상의 소박한 직업인일 뿐이라는 데 있습니다. "파일럿"의 비행기 조종사들이나, TV드라마 속의 "실장님"들은 옷차림에서 허풍섞인 직업적 고뇌까지 직업 자체로 기이한 멋을 부립니다. 그러나, "고래 목장"의 주인공들은 이런 태도에서 한 발 물러서 있습니다.

이들은 새끼 고래의 소리를 내는 초음파를 이용해 고래를 유인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지만, 사회를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어쩔 수없이 한 구석에서 일해야하는 공장 근로자나 정미소의 탈곡기 기술자와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일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지만, 누구나 동경하는 멋진 허상이라기보다는, 산업 사회의 한 귀퉁이일 뿐입니다. 우리가 책을 볼 때 펄프 기술자를 생각하지 않고, TV를 볼 때 디지털 TV 알고리즘을 구현한 개발자를 잘 생각하지 않듯이, "고래 목장" 세계의 사람들은 매일 고래 고기와 고래 유제품을 먹고 여러 해저 식물로 만든 다양한 약품과 소비재를 사용하지만, 그런 것을 만들고 관리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별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각은 중요한 주인공인 월터 프랭클린이 모두가 동경하며, 진정한 인류 기술의 극치를 장식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우주비행사로 설정되어 있기에 설득력있게 담겼습니다. 우주 비행사인 월터 프랭클린이 바다 일을 자신이 인생에서 낙오되서 하는 일쯤으로 받아 들이고, 돈 벌리를 비롯한 바다 사람들을 한 등급 낮은 사람들로 바라보는 듯한 분위기를 만듭니다. 돈 벌리와 그 동료들은 기분이 나빠지고, 월터 프랭클린은 더욱 엇나가서 건방져질 뿐으로 대립을 이룹니다. 이런 대립이 바다 세계를 멸시하는 듯한 시각이 있기 때문에, 이야기의 중심 소재가 되는 바다 업무는, 막연한 미래사회에 대한 꿈이라기보다는, 정말로 있을 법한 직업 세계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미국 "The Deep Range"의 최근판 표지)

이야기는 진행 되면서, 월터 프랭클린의 기를 죽이기 위해서 다른 대원들이 위험한 내기를 거는 장면이 있고, 기이한 신경증과 묘한 자폐증스러운 묘사를 하면서 이야기의 긴장감을 북돋우기도 합니다. 특히 여유만만한 우수 대원이었던, 월터 프랭클린이 갑자기 무슨 발작처럼 부들부들 떨면서 수건으로 입을 틀어막고 겁에 질려하고, 이런 그를 보고 돈 벌리가 놀라면서도 침착하게 대응하는 부분은 호기심을 불러 오면서도 인물 성격에 대한 멋을 동시에 풍깁니다. "네스 호의 괴물"이나 "빅풋"을 이야기할 때 느껴지는 자연에 대한 환상 같은 동경을 매우 그럴듯하게 끼워 넣은 바다의 큰 뱀에 관한 에피소드도 꽤 신비롭게 펼쳐집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진행되면서, 월터 프랭클린은 폐인스러운 좌절과 비뚤어진 모습은 점차 아물게 되고, 월터 프랭클린은 새로운 무대에서 새 마음으로 적응해서 다시 진정한 삶에 대한 용기와 밝은 의지를 되찾습니다. 이렇게 월터 프랭클린이 되찾는 평화는 기술 문명과 자연이 공존하는 바다 생활속에 어울어집니다. 이것은 "시골에서 마음의 여유를 찾는다" 처럼 단순한 구도를 넘어설 수 있도록, 은근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런식으로 대자연 속에서 힘을 얻는다는 것은 꼭 연애하다 실패한 후에 지리산이나 한라산 올라가는 마음스러운 느낌도 좀 느끼게 합니다. 막판에 사건과 역경을 하나 더 추가해서, 이렇게 새롭게 적응한 월터 프랭클린이 정말로 다시 적응 했다는 것을 보여준 것도 극 구성상의 좋은 수법이었습니다.


(고래도살)

이러한 전체적인 자연 사랑 분위기와 더불어 보다 노골적으로 생태 문제에 대한 고민을 드러내는 부분도 "고래 목장"에는 많습니다. 일단, 내용 자체가 지나치게 많은 지구 인구를 감당하기 위해 바다의 고래와 해산물, 해양 미생물들을 인류의 식량 자원, 기타 천연 자원으로 삼는다는 중심 설정 자체부터가 생태계 균형에 대한 위태로운 순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인공인 돈 벌리가 임무 수행을 위해 상어를 잡아 죽인 후에 느끼는 평범한 인간다운 죄책감을 담담하게 강조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보다 더 멋진 것은 돈 벌리의 퇴장 장면이 이러한 시각들에 대한 반어적이고 역설적인 분위기로 되어 있어서 단순히 "자연을 지킵시다"가 아닌 복합적인 이해를 드러내려 하고 있기도 합니다.

어린이판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원판에는 불교와 불교적 세계관과 결합된 자연관이 상당히 부각되어 있기도 합니다. "고래목장"의 시대에서는 전설과 신화 같은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안 일어난 일인지 모두 고고학적으로 판정할 수 있는 기술이 생깁니다. 그래서 종교적인 신화가 다 거짓으로 드러나고, 때문에 신화가 아니라 철학에 중심을 두고 있는 불교가 세계에 유행했다는 내용은 거의 홍보스럽다할만 합니다.


(상어를 물리친 후)

한편, 윤회론적인 분위기와 철학적이고 현실적인 고민하는 모습을 슬쩍 빌어서 아주 심각하고 진지한 분위기를 조성한 후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고래의 지능을 비루한 것으로 보고 도살해도 상관없다고 할 수 있다면, 만약에 우주 개발이 더 진행되어 지구인을 초월하는 지능을 가진 외계인을 만나면, 이들이 지구인을 보고 하찮은 지구인을 도살하거나 멸종시킨다고 할 때에도 별수 없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마치 "The City and The Stars and The Sands Of Mars" 같은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고래 고기 생산 보다는 고래 젖 생산 쪽으로 운영방향을 전환해 나가는 운동을 시작한다는 내용도 "고래 목장"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원판에는 없는 어린이판만의 멋진 점은 역시 멋드러진 삽화 입니다. 松永謙一가 그린 삽화들은, 입체파를 연상케 하는 흥미로운 만화풍으로 간략하게 도안화한 그림으로 여러가지 상황들을 상징하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로써 사실적인 미감이나 형태를 보여준다기보다는, 그림이 실린 부분의 내용이 담고 있는 정서적인 느낌을 상징적으로 부각시키는 기호처럼 그림을 사용했습니다. 월터 프랭클린의 절망감을 담아낸 그림들은 불조심 포스터 같은 것에 사용되는 상상력있는 솜씨처럼 무척 훌륭합니다.


(월터의 절망)


그 밖에...

"한국독서지도회"라는 곳에서 발간한 정체 불명의 판본으로 최근에도 떠돌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발간한 "공상과학문고"라는 시리즈는 "아이디어 회관 SF"시리즈와 겹치는 것도 있고, 제목만 다른 것도 있으며, 대부분 원작과 원작자를 밝히지 않는 엉뚱한 모양새로 되어 있습니다. 이 판본의 "고래목장"은 삽화가를 "남문원"이라는 뜻모를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딥 레인지"라는 공포스러운 영화와는 다른 내용입니다.

"고래 목장 The Deep Range"은 단편 소설판으로 되어 있는 것도 있습니다.

채식이나 개고기 먹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는 오히려 순전히 인본주의시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고래 목장"의 내용과 통하는 면이 있을 겁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장 중요시할만한 것은 서로 따뜻하게 인정을 갖고 아끼는 마음일진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동물을 처죽이거나 칼로 따버리는 일은 징그럽고 잔인하게 여기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에 다른 적당한 대안이 있고, 또한편 세상에 살벌함을 의식적으로 좀 빨리 줄여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동물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인간들간에 살벌한 분위기를 조성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인간이 좀 감정적인 타격을 덜 받을 방향으로 동물 도살을 차차 줄여나가자는 것입니다.

이런 시각이라면, 일단은 많은 사람들이 애완으로 마치 인간처럼 정을 쏟곤하는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을 우선적으로 제외시키는 것이 빠른 수순이 될 것입니다. 실제로는 아무도 안죽지만 어린이들에게는 칼질 공포영화를 안 보여주는게 좋다는 생각이 옳다면, 귀엽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은 개나 고양이는 우리 이제부터는 삶아 먹지 말자고 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핑백

  • 게렉터블로그 : 스타트렉 다크니스 (Star Trek Into Darkness, 2013) 2013-06-03 21:04:36 #

    ... 기르고, 실험이나 놀이에 인간을 활용해도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겠습니까? 이런 문제는 옛날 아서 클라크 같은 작가가 본격적으로 소설에서도 다루기도 했고( http://gerecter.egloos.com/2856605 ), 많은 SF물에서 다양한 형태로 소재가 되어 왔던 이야기 입니다. 그런만큼, 이번 영화에서도 이 소재를 충분히 잘 펴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 more

덧글

  • returnet 2006/12/05 12:06 # 답글

    추억의 책일세..
  • FAZZ 2006/12/05 20:55 # 답글

    저도 저 책을 아마 위에서 말씀하신 불법 해적본으로 어렸을 때 본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저 삽화는 정말 단순한거 같으면서도 강렬하게 와닿았던 기억이 나는군요.
  • 게렉터 2006/12/05 22:03 # 답글

    returnet, FAZZ/ 이 시절 松永謙一의 삽화를 보며 책을 읽고 싶으시거든,

    http://paedros.byus.net/sfjikji/book/b48.html
    http://paedros.byus.net/sfjikji/book/b36.html

    이 링크들로 들어가 보십시오.
  • 전설의실버팽 2006/12/12 13:33 # 답글

    링크타고 와서 쭉 글을 보던중...
    어릴적 읽던 해적판에 대한 추억이 떠올라 리플을 남기고 갑니다.

    FAZZ님 처럼 일러스트가 아주 강하게 와 닿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어릴적 읽던 것 이상으로 내용이 깊었구나.. 하는 것도 느낍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__)
  • 게렉터 2006/12/13 12:15 # 답글

    전설의 실버팽/ 한국/일본에서 돌아다닌 아동판에는 좀 고민거리가 되거나 사회적인 내용은 대부분 잘려 나가 있습니다. 그래도 흔적은 엿보입니다.
  • Yuius 2006/12/18 02:13 # 답글

    아..저도 이 책 읽었던 기억이 나요..
  • 게렉터 2006/12/20 11:27 # 답글

    Yuius/ 아이디어 회관 SF 시리즈나 그 계열 시리즈는 적잖은 편이 한국 어린이 독자들에게는 굉장히 많이 읽혔다고 생각합니다.
  • 원한의 거리 2010/06/27 14:13 # 삭제 답글

    처음에 좀 아리송했는데 저 삽화를 보니 뚜렷하게 기억이 납니다.
    아마 한 10년 전쯤에 친척집에 있었던 이 책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