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근 (일과 후) After Hours 영화

커 보이는 기업의 워드 프로세서 기술자인 주인공은 일과 후에 우연히 식당에서 한 사람을 만납니다. 보고 있던 책에 대한 잡담으로 시작해서,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곧, 그녀에게 데이트 신청 비스무리한 것을 받게 됩니다. 주인공은 그날 밤 낯선 동네에 그녀를 찾아 갑니다. 그러나 영화의 상영시간은 1시간 30분 정도에 달하니, 데이트는 간단하게 풀리지 않습니다. 소호 근처 뉴욕의 골목들을 배경으로 그날 하루밤은 여러가지 일들이 벌어지며, 주인공은 꼬이고 골치아픈 긴긴 밤을 겪게 됩니다.


(식당에서 헨리 밀러의 책을 보다가 데이트 신청 비슷한 것을 받게되는 주인공)

많은 이야기들이 아주 골치 아픈 하루 동안 벌어지는 일을 다루거나, 혹은 아주 골치 아픈 한 밤동안 벌어지는 대소동을 다루곤 합니다. 정해진 시간 안에 일이 점점 커지는 점층법은 기승전결을 꾸미기에도 좋고 막판 대파국을 만들어 내는데도 좋습니다. 액션 영화에서 "다이 하드" 시리즈는 상징적이고, "표적 Run" 같은 영화는 정석대로며, 한국영화중에도 "런어웨이"나 "라이터를 켜라" 같은 영화가 있습니다. 대소동 이야기이니만큼 코메디 영화에서는 더욱 자주 사용되는 소재이기도 합니다. "몽키 비즈니스", "온 더 타운(춤추는 뉴욕) On The Town" 에서부터, "미녀와 세 꼬마(야행) Adventures In Babysitting", "방송국 사고파티 Radioland Murders", "유턴 U-Turn" 한국 영화 "개 같은 날의 오후" "광복절 특사"까지 다양한 영화들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특근"의 가장 큰 특징은 이렇게 비정상적인 골치아프게 괴로운 하루 밤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상당히 사실적이고 진지한 분위기를 내는 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초반 20분 정도 동안에는 정말로 차분하게 주인공의 행동과 시선을 하나하나 짚어갑니다. 그래서 좀 건조하고 나른한 분위기로 차분히 구석진 골목 모퉁이에 있는 뉴욕 시내의 집과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을 보여줍니다. 이 부분에서는 인물의 잡다하고 사소한 갈등과 욕심을 사소하게 보여주는 것일 뿐 딱히 큰 긴장감도 없고, 웃길 것도 별로 없습니다. 초반부는 좀 지루할 법도 한 모양새입니다. 따라서 이 영화 "특근"은 별 기대 안하고 시간 보내려고 심야 케이블TV 영화로 보다가 서서히 빨려들어서 끝까지 볼 때 가장 흥미로울 것이라고 짐작해 봅니다.


(일할때만 해도 오늘 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도 못하는 기업의 워드프로세서 기술자)

지루함을 가셔 주는 것은 충분한 현실감을 갖고 있으면서 살짝 울적하고 약간 자극적인 인물들의 행동입니다. 주인공이 이 긴 하루동안 만나는 사람들은 8할정도가 사소한 정신병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대체로 인물들은 혼자 사는 도시 생활의 젊은 사람들로, 외롭고 나른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외롭고 나른하다고 칭얼대는 사람들 내지는 그렇게 칭얼대면 유치해 보이니까 참고 있는 사람들, 내지는 그렇게 유치하다고 참고 있는 것은 더 유치하니까 칭얼대는 사람들 기타 등등입니다.

이 사람들은 이 사람들 보다 조금 더 정상적인 주인공의 시각으로 관찰됩니다. 그래서 그들의 살짝 이상한 행동, 버릇들이 호기심을 유발하고, 볼거리가 되어 줍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약간은 두려워하며 또한 약간은 측은하게 여기는 주인공의 시각이 관객의 시각이 됩니다. 그래서 관객이 주인공을 자신으로 동일시하게 도와주는 부수적인 효과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영화는 도시 독신자들의 외로움이나 불안함을 보여주고, 그것이 어떤식으로 어둡게 표출될 수 있는가 하는 면을 큰 과장없이 보여주는 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느린 이야기인 가운데에서도 가끔씩 역동적으로 중요한 사물을 드러내 보여주고 빠르게 화면을 교대해서 호기심을 돋구는 기교는 재미를 차츰 끌어내는데 도움이 됩니다.


(소호에서 처음으로 마주친 사람)

"특근"은 이렇게 사실적이고 진지한 분위기를 잡아서 시작한 덕에 느린 속도로 일이 꼬이고 사건이 커지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서서히 주인공을 돌아버릴 것 같은 분위기로 몰아갑니다. 정통파 코메디 영화나 액션 영화에서 이렇게 "긴 하루" "긴 밤"을 다루게되면, 아무래도 "웃긴 장면" "달리거나 싸우는 장면"을 넣게되다보니까 조금은 급작스럽게 일이 진행되는 면이 있습니다. 그에 비하면, "특근"은 이렇게 이야기 속도를 조금 천천히 잡은 상태에서 사소한 인물의 행동들과 표정들을 번갈아 보여주면서 긴장감을 조금씩 조금씩 높여 나갑니다. 그래서 여느 영화들보다 그 점층법이 더 잘 살아 있습니다. 살짝 걸렸다가 한 바퀴 두 바퀴 꼬이면서 휘말리는 느낌이 사실적이고 더 크게 와닿습니다.

이러한 사실적인 분위기는 무채색과 탁색이 잘 드러나는 느와르 영화의 밤거리 같은 모습과, 도시의 불빛과 밤안개, 시멘트 바닥에 고인 물의 축축한 느낌을 잘 드러내는 화면에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현장감이 풍부하면서도 신비롭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 모습은 "비열한 거리"나 "택시 드라이버"의 밤거리 장면들만큼이나 보기 좋습니다. 때문에 수백만이 우글거리며 사는 도시지만, 조금만 안가본 구역에 오게 되면 느끼게 되는 낯설고 신비로운 느낌이 전해집니다. 깊은 밤 오랫만에 한 번도 안가본 서울 한 귀퉁이에서 옛 친구를 만나 술잔을 기울이다가 차가 끊겨서 이리저리 거리를 헤메는 그 묘한 방랑하는 기분을 잘 담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별로 멀지도 않건만, 낯설어 보이는 동네에 오다)

이 영화에서 점점 꼬이는 일이 커지고 사태가 심각해 지고나면, 이제 이야기는 과감하게 재미있어집니다. 이때, 이야기의 재미는 초반의 느릿느릿한 이야기와 대조를 이루면서 더 흥미를 더하는 느낌이 듭니다. 여기에 "특근"의 훌륭한 장점이 하나 더 보태집니다. "특근"은 너댓가지 정도의 복선들을 잘 활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선들 중에는 흥미로운 것도 있고, 조금 억지스럽게 연결하는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차근차근 조금씩 진행시켜 왔기 때문에 복선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기억시키게 됩니다. 그리고 영화 상영시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장면도 서로 잘 연결할 수 있게 됩니다. 때문에 여러개의 복선이 서로 얽히고 섥히며 사건을 땋아 나가는 모양이 상당히 설득력 있습니다. 제대로 따져 밝히기도 어려운 골치아픈 소용돌이에 어쩔 수 없이 휘말린 느낌이 생기게 합니다. 이야기가 정교해 보이고, 상황이 더욱 기막힌 느낌을 주는 파국에 대한 공감도 더 강해집니다.


(너무 힘들어서요. 잠깐 비만 피하고 앉았다 가면 안될까요?)

이 골치아픈 소용돌이에서 주인공을 맡은 폴 하켓은 갈등하는 평범한 사람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잘 보여주면서도 똑똑한 발음과 선명한 어투로 대사를 아나운서 못지 않게 잘 전달해 줍니다. 때문에 주인공의 시각을 빌어 관객이 관찰하는 느낌을 주는데 부족함이 없습니다. 중간의 경찰서에 전화 받기 같은 부분은 상당히 억지스럽게 보일 수 있는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각본상의 미려한 대사 처리와 연기, 연출이 어울려 무척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나홀로 집에"의 어머니 역으로 세계적으로 얼굴을 익히게한 캐서린 오하라도 흥미로운 인물을 진짜같고도 보기 즐겁게 연기해 줍니다. 다른 인물들도 대체로 역에 어울리는 배역에 제 몫을 하고 있습니다.

"특근"은 그저 유쾌하고 흥겨운 코메디라거나 멋있고 아름다운 인물을 보여주는 신나는 대소동 영화는 아닙니다. 그보다는 좀 더 어두운 분위기 입니다. 그러나 가면 갈수록 묘하게 기묘해지는 상황의 처지가 숙명적인 도시의 꽉 짜여진 빡빡한 일상과 대조되는 느낌 때문에 즐겁게 볼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기이함과 조롱하는 듯한 가벼움이 섞인 전자음악도 듣기 괜찮고 끝날즈음 춤추는 장면의 재즈, 페기 리의 "Is That All There Is"는 "미녀와 세 꼬마(야행) Adventures In Babysitting"의 "애보기 블루스 Babysittin' Blues"만큼 듣기 좋습니다.


(마지막 바텐더, 스티븐 J 림)


그 밖에...

번역 제목이 "특근"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만, 사실 특근에 관한 내용이라고 하기에는 약간 무리가 있습니다. 그러니만큼, "After Hours"는 "일과 후" 정도로 번역하는게 좋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아마 제목 번역하던 사람이 계속되는 특근에 지치고 열받아서 제목을 그렇게 해버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After Hours"는 1982년부터 발간된 컴퓨터 주간지 "PC Magazine"의 한 부분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특근" 영화 앞부분에 나오는 워드프로세서 기계는 유명한편인 제록스 860과 비슷한 분위기이기는 한데 제록스 860은 절대 아니고, 도저히 뭔지 모르겠습니다.

마틴 스콜세지는 "예수의 마지막 유혹 The Last Temptation Of Christ"에 노력을 왕창 때려넣어 참여했는데 그것이 제대로 개봉을 못하게 되자 엄청난 실의에 빠져 있었다고 합니다. 바로 그때, 작은 영화의 감독을 제의 받아서 불과 28일만에 저예산으로 후다닥 찍은 것이 이 영화 "특근"이라고 합니다. 결과는 무척 좋고 반응도 괜찮았으며, 칸 영화제 감독상까지 받아서 마틴 스콜세지가 희망을 되찾게 되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그럴싸한 이 영화의 결말은 노장 감독 마이클 파웰이 구경하다가 말한 것이 시초였다고 합니다. 도입부 연출 역시 사소한 듯 해도 매우 좋습니다.

마지막 술집의 바텐더로 나오는 사람은 "로보캅"등의 제작진으로 참여한 스티븐 J 림 이라는 사람입니다. 얼핏보면 한국계로 보이는데 확실히는 잘 모르겠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영화에 어울리는 음악이 되는 페기 리의 "Is That All There Is" 는 이 웹 페이지 http://www.angelfire.com/rant/maknithe/band.html 한 켠에서 들어 보실 수 있습니다. 긴긴 밤 고생하다 자포자기 심정으로 주인공이 그저 좀 쉬려고 할 때 나오는 음악입니다. 이 영화는 "분노의 주먹 Raging Bull" 과 함께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마틴 스콜세지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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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루"처럼 코메디 영화나 액션 블록버스터에서 자주 쓰이는 "긴 하루"에 대한 이야기구성 속에 사실주의 수법을 좀 가미해 본 영화로는, "특근(After Hours)" http://gerecter.egloos.com/2923892 을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특근"은 "멋진 하루"와 달리, 사람이 죽어나가고,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장면이 있는 등등 ...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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