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애명월도 天涯.明月.刀 , The Magic Blade 영화

보통 영화는 시작하면서 제작사, 감독,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자막으로 잠깐 보여주는 시간을 가집니다. 영화에 따라서는 애니메이션이나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해서 이런 장면을 재미있는 뮤직 비디오 형식으로 꾸미는 것도 있고, 상징적인 물체를 한 동안 비추기도 합니다. 혹은 TV연속극에서 많이 사용하는 장면처럼, 주요 등장인물들의 얼굴을 보여주면서 이름 소개를 같이 해 주기도 합니다. 1976년작 "천애명월도"의 재미있는 특징은 영화 전체를, 마치 기나긴 시작 부분의 이름 소개 장면처럼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적룡: 부흥설 등장)

이 영화의 기본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어떤 부자인 듯한 사람이 거나한 주안상을 받아 두고 야밤에 술을 한잔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득 어두운 달빛 아래에 우리의 주인공 적룡이 나타납니다. 두 사람은 길거리 농구나 권투 스파링처럼, 그날 무술 대결을 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득 괴이한 악당 일파가 나타나 주인공의 무술 대결 상대를 암살하려고 합니다. 주인공은 엉겁결에 무술 대결 상대를 구하려고 함께 싸우게 됩니다. 덕분에 이날밤, 주인공은 왜 수많은 악당 패거리들이 암살계획을 세웠는지, 그리고 공작령이라는 강력한 암살 무기란 어떤것인지에 얽혀, 사람 여럿 죽어나가는 대소동에 휘말립니다.

"천애명월도"는 마치 하룻밤 사이에 일어나는 복잡하고 긴 모험담을 다루는 듯 하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따지고 보면 좀 더 긴 시간을 다루는 이야기 입니다. 하지만, "천애명월도"는 대부분의 싸움 장면과 중요한 대화가 깊은 밤에 일어납니다. 밤이 아닌 장면들은 짤막짤막하게 잠깐으로 넘어갑니다. 그런 와중에 맨 마지막 결투가 막 해가 떠오른 아침으로 되어 있어서, 정말 긴 밤 사이에 모든 영화의 사건들이 일어난 듯한 느낌을 줍니다.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시간이 짧아 보이는 것은 그만큼 싸움장면이 쉴새 없이 많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온 동네, 온 길거리에 악당들의 수하가 촘촘히 깔려 있습니다. 칼질 하며 격투하는 장면과 다양한 은밀한 암살시도들이 끊이질 않습니다. 이렇게 악당에 의해 장악된 무법천지가 배경입니다. "표적 Run"이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처럼 주인공들은 밤새도록 쫓고 쫓기며 맞닥뜨리고 돌파합니다. 한편으로는, 앞서 말씀드린대로, 영화 전체가 긴 시작 장면 같은 모양새로 되어 있다는 점도 이런 하룻밤 대소동이라는 느낌에 한 몫 합니다.


(추낭자 등장)

덕분에 "천애명월도"는 마치 오페라나 뮤지컬 같은 무대 쇼를 보는 느낌을 줍니다. 이야기 자체가 딱히 악극이나 마술쇼 처럼 되어 있다기 보다는, 영화의 시간이나 공간감으로 관객이 받아들이는 태도를 더욱 그렇게 느끼게 합니다. 말인즉슨, "천애명월도"를 볼 때, 어느 날 작심을 하고 하룻밤의 즐거운 볼거리로 무대 에서 펼쳐지는 꿈 같은 공연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날 밤을 끝내는 커튼콜과 박수소리와 함께 막을 내리는 분위기를 낸다는 것입니다. 보통 "살인무도회 Clue"나 "시카고" 같은 영화는 정말 무대처럼 생긴 미술을 첨가한다거나, "신사 숙녀 여러분-" 하는 해설을 끼워 넣어서 그런 실황 공연의 느낌을 내고 있습니다. "천애명월도"는 특유의 지속적으로 등장인물을 시작장면처럼 소개하는 자막에서 그 비슷한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천애명월도"의 가장 멋드러진 점은 그 흥미진진한 조명입니다. "천애명월도"의 조명은 뭔가 엄청나게 기막힌 기술을 사용했다기보다는, 흔히 볼 수 있는 연극의 스포트라이트나 극의 중심을 표현하기 위한 조명을 많이 활용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영화의 내용이 대부분 밤에 이루어지는 일들이고, 또한 촬영 자체를 멋드러지게 잘꾸민 세트에서 하다보니, 효과가 좋습니다. 어둠속에서 관객이 집중해야 할 요소들만 조명을 비춰 보여주는 모습들이 매우 신비스럽고 호기심을 당기게 되어 있습니다.

주인공을 연기한 적룡이 두씨성을 가진 친구의 집으로 피신하기 위해 급히 달려왔습니다. 고요한 밤. 달빛만 내리비치는 가운데 아무도 없이 인적은 드뭅니다. 그런데, 집 안에서는 은은히 따스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습니다. 모든 정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가운데, 그 고요한 불빛만 있는 집에서 갑자기 아리따운 생전 처음 보는 부인이 나타나 주인공에게 인사를 합니다. 호기심과 긴장감이 감돌고, 신기한 분위기와 달빛과 밤의 향취도 멋드러집니다.


(환상특급스러운 텅빈 밤거리의 운치)

이런 분위기 아래에서, "천애명월도"는 쉴새 없이 무대와 판을 갈아치워가며 다양한 액션 장면을 거듭합니다. 악당 두목은 천하 최고 수준인 주인공 패거리와 대결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청부살인자와 부하들을 내보냅니다. 저마다 독특한 무대에서 활약하는 개성있는 주인공들입니다. 행색이나 성격도 독특하며 배우들의 모습도 특색이 있습니다. 눈썹을 희미하게 한 명월 역도 기억에 남고, 할머니 암살자나 장기두는 암살자도 짧은 광고 애니메이션의 등장인물같은 기괴한 면면들이 흥미를 끕니다.

이런 많은 상대들은 길따라 맛따라 하나 둘 천천히 등장하지 않습니다. 꽉 짜여진 하룻밤의 난리 분위기에 맞게 하나 물리쳤다 싶으면 또다른 녀석이 바로 나타나고 이 녀석을 물리쳤다 싶으면 자연스럽게 무대장치가 변하면서 또다른 악당이 나타납니다. 악당들이 싸움판을 벌임에 따라 양민들이 일제히 사라지는 모습은 오페라에서 발레 음악부분이 끝날 때 일제히 무용수들이 퇴장하는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어두운 밤의 좁은 실내에서 잽싸게 배경이 바뀌는 부분은 정말 무대 뒤편에 세워둔 장치들이 올라갔다 내려오며 1막, 2막, 3막으로 넘어가는 듯 합니다. 이 영화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하나 둘 습격해오는 악당들은 마치, "이소라의 프로포즈"나 "윤도현의 러브레터"에서 가수들이 하나 둘 출연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분위기와 비슷합니다.

그러면서도 배경은 산중의 지하요새에서부터, 식당, 술집, 민가, 사원, 골목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변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주로 밤 달빛에 걸맞게 조명과 어울리고, 이것은 제목에서부터 "명월"을 들먹이는 대사와도 부합하도록 되어 있어서 더욱 분위기를 돋굽니다.


(명월심 등장)

이야기 자체에 깔린 추리물 요소도 좋습니다. 정말 기막힌 추리극이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범인이 누구인지, 위기를 어떻게 탈출할 것인지 끊임없이 궁금하게 하는 것은 이야기에 힘을 줍니다. 에드가 앨런 포의 수법을 빌린 전형적인 추리 요소도 두어번 써먹고 있고, 바람따라 구름따라 떠돌아다니면서 맹세와 의리를 중시여기는 정의롭고도 굳건한 주인공의 성격 역시, 차분하게 사태를 관망하며 추리하는 주의 깊은 탐정역할과 통합니다. 적룡이 심각하고 무뚝뚝한 딱 하나의 "적룡 표정"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때우는 것은 심심하긴 합니다. 하지만, 허세와 대의명분을 강조하는 분위기의 대사 때문에 더욱더 빛을 발하는 마지막 추리는 독특한 재미를 주기도 합니다.

칼싸움 장면들은 모두 빠른 느낌을 강조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많은 적들과 싸울 때 특히 잘 드러납니다만, 주인공의 칼 놀림 동작이 신속하고, 그러면서 이리저리 타넘고 뛰어다니며 싸우는 모양새는 큰 동작과 넓은 무대 활용의 묘미를 보여줍니다. 그에 비해 몸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특수효과 액션들은 약간 부족한 면이 있습니다. 그냥 달리고 뛰며 싸울 때에 비해, 높이 날아오르는 장면이나 기이한 무기를 사용하는 장면들은 좀 엉성합니다. 가장 중요한 무기인 공작령의 효과를 보여주는 장면도 내용전달은 잘 됩니다만 그냥 펑펑거리는 터지는 소리만 많이 날 뿐, 딱히 볼거리나 신기한 면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장기판 그리기"나 "글자 모양으로 드러눕기" 장면 역시 해괴한 기술을 쓰는 적을 보여주려다가 좀 과하게 비현실적으로 변한 부분입니다. 부채춤에서 여러 무용수들이 어울려 모양만드는 것 비슷한 것으로, 후다닥 넘어가고 말아서 어색함이 덜어졌을 뿐 딱히 어울리지는 않습니다.


(처음 등장하는 나열)

또다른 약간 아쉬운 점을 찾아 본다면, 에르퀼 포와로가 추리소설 말미에서 거실에다 사람들 모아놓고 기나긴 대사를 펼치듯이, 긴긴 근거들기를 하는 장면을 짚어 보고 싶습니다. 이 장면 자체는 이야기의 추리물스러운점을 생각해보거나, 정신 없이 긴긴 야간 격투 장면이 이어져 온 것을 생각하면, 가라앉은 최후의 대결치고 괜찮습니다. 그렇지만, 정작 싸움이 다 끝나고나면, 무슨 싸움 후의 변화나 감정의 동요, 하다 못해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같은 것도 없이 그냥 후다닥 "아니오." 하고 퇴장하면서 끝나버립니다. 이것은 너무 거창하고 긴 설명을 달았던 싸움직전과 서로 잘 통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이야기 전체의 복잡함에 비해서도 약간은 부족한 듯 하기도 합니다. 남녀 주인공이 나누는 대사가 영화에서 보여주는 사건과는 아무 상관도 없이, 그냥 노래 가사 주고 받기 같은 감상적인 이야기로만 되어 있는 것도 비슷하게 힘이 약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오히려 이야기 자체가 한 편의 정신없는 무대쇼 같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불필요하게 장렬해지거나 너무 진지하게 나가지 않아서, 경쾌한 소동극으로 좋아진 면도 있습니다. 재빠르게 바뀌는 무대, 그 무대위에서 벌어지는 놀라운 속도의 끊임없는 싸움들, 명월의 심야를 드러내는 조명은 그럴듯합니다. 이것이 이 영화에서 가장 역동적으로 활용된 확대/축소 촬영과 어울리면 정말로 영화는 보기 즐거워 집니다.


(유금 등장)

보통 영화들은 놀란 주인공의 표정이나, 충격적인 장면을 눈 앞에 들이대는 느낌을 주기 위해 화면을 당기며 확대(zoom in)하는 연출을 사용합니다. 자칫 남용되면 추레해지기 쉬운 연출인데, 이 "천애명월도"에서는 그런식으로 감정을 표현하기 보다는, 관객에게 전해줄 사건을 드러내기 위해 활용했습니다. 영화를 보는 시선을 움직여 주기 위해서 확대/축소 연출을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자질구레한 설명없이도 자연스럽게 관객들이 부드럽게 시점을 옮기고 영화가 보여주는 중심소재에 집중하게 해 줍니다. 이런 장면들은 주인공이 이리저리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살기를 느낀다거나 숨은 악당을 찾아내는 장면 같은 곳에서 정말 주인공이 두리번 거리는 느낌을 바로 전달 해줍니다. 적룡이 위장하고 술집 주변에 숨어 있는 적들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은, 많이 본 장면방식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아주 훌륭합니다.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갑자기 기이한 풍악을 울리고 술잔을 주고 받으며 요사스러울 정도로 느긋한 쾌락이 감도는 폭풍전야 분위기에서도, 연출력은 단연 힘을 발휘해서 영화에 재미를 더합니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 밖에...

꽤 재미있고 인기 있는 영화고 원작도 알려졌다면 알려져 있는데, 대부분의 우리나라 영화 웹사이트에는 구체적인 자료가 없습니다. 그래서 개봉이나 출시 자료를 알아내기가 어렵습니다. 다행히, 최근 쇼브라더스 영화들이 DVD로 찍혀나왔을 때 이 영화도 널리 소개된바 있습니다.

인터넷에 도는 Magicvoice의 글은 이 영화의 음악 일부가 "혹성 탈출 Planet of the Apes"에서 가져와 편곡한 부분이 있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영어로된 글들을 보다보면, 이 영화가 떠돌이 싸움꾼이 악당의 소동에 말려든다는 것 때문에, 요짐보류와 "황야의 무법자" 아류 영화들과 비슷한 점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저는 별로 비슷한 분위기라는 점을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막판 결전을 앞두고 전날밤에 펼쳐지는 짤막하지만 퇴폐스러운 분위기가 감도는 장면이 독특한 절정이었다고 지적하는 사람들도 꽤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공감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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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rumic71 2007/02/14 14:11 # 답글

    무대쇼... 고룡 작품의 특징을 한마디로 압축해주는군요.
  • 미디어몹 2007/02/15 08:58 # 삭제 답글

    곽재식 회원님의 상기 포스트가 미디어몹에 링크가 되었습니다.
  • 게렉터 2007/02/15 13:11 # 답글

    rumic71/ 원작과 이 영화의 "무대쇼" 분위기가 얼마나 연결되는지는 제가 무협지는 아는 바가 거의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다정검객무정검"이나 "유성호접검" 같은 영화를 보면 뭔가 공통점이 있는 듯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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