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기 妲己 The Last Woman of Shang 영화

1964년작, "달기"는 중국 고대, 은나라의 최후 이야기입니다. 폭군이었던 주왕이, 해괴한 왕비까지 만나서, 쌍으로 정신 나간 짓을 하며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그러다가 결국 열받은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망한다는 겁니다. 하나라 걸왕과 함께 "주지육림"이니 "도탄"이니 하는 표현의 근원이 대체로 이 시대에 있다고 하는 만큼, 나라를 말아먹은 왕에 대한 가장 정통파 이야기를 펼칠만한 것입니다.


(하하하! 내가 다 말아먹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이야기의 초점을 주왕 보다는 그 왕비인 달기에 맞추고 있습니다.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태어날 때부터 그냥 왕인 주왕에 비해, 달기는 어느날 바람처럼 나타나는 인물이기에 어떻게 보면 당연하게도 더 주목을 받을 만한 것입니다. 환상물로 발전한 "봉신방"이야기라든가, 이 고대의 전설을 다루는 적지 않은 일본책들, 그리고 여기에 영향을 받은 고우영 선생의 만화 "십팔사략"까지도 거의 달기 중심으로 되어 있습니다. 거기까지는 이 영화 "달기"도 딱히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서 "달기"를 평범한 인간적인 인물로 그려내려고 했습니다.

평범한 인간인 달기를 표현하는게 잘한 일인지는 따질 만한 일입니다. 일단, 다른 많은 전설에서나 영화 속에서나 이 사람은 저지른 행동 자체가 악행들입니다. 게다가 영화 속에서 악의 꼭대기에 서 있는 주왕이 무척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무시무시한 사람을 무슨 대단한 사연이 있는 악인이 아니라,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는 사람으로 꾸미려고 하자니 힘겹습니다.


(달기 등장)

일단 달기를 그렇게 안 나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공포, 슬픔 때문에 복수를 계획하고, 거국적인 차원에서 일부러 악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관객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그런 평범한 사람이, 납치 당했을 때 갑자기 그렇게 냉정한 거국적인 계획을 세울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더군다나 아버지가 살해 당하고 집안이 풍비박산 나기까지 해서 제 정신을 못차릴 지경이니 갑자기 그렇게 침착하게 엄청난 계략을 꾸미는 것은 어색합니다. 결국 이 영화가 택한 이야기는 주인공에게 똑똑한 하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하녀가 계획을 세우면, 비탄과 분노에 찬 주인공이 솔깃해서 그대로 시키는대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달기"의 주인공 달기는 얼굴을 베개에 묻고 흑흑흑 하면서 울다가, 하녀가 무슨 계획 가르쳐 주면 시키는대로 하고, 그러다가 또 시간나면 베개에 얼굴 묻고 흑흑흑 하면서 우는게 전부입니다. 이것은 불쌍한 한 인간을 보여주는 데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그리고 배우가 좀 착하고 불쌍해 보이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TV광고 같은 거 나중에 찍기에 도움될 수 있겠다는 장점도 있다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러느라고 이 고전적인 신비롭고 무서운 악당을 하나도 써먹지 못한 것은 아쉽습니다. 온갖 방탕한 짓을 하고, 재미로 별별 잔인한 짓을 했다는 전설이 다양하게 전해지는 해괴한 이 마귀 같은 인물이 그냥 눈물 많은 비련의 여자주인공이 되었을 뿐입니다. 그나마 그 하녀조차 끄트머리에 가면 슬그머니 퇴장시키면서 그냥 아무 사연도 아니게 됩니다.


(하녀의 말이라면 뭐든 시키는대로 하는 착한 달기)

수천년째 내려오고 있는 많은 달기 이야기처럼, 달기는 대체 왜 저런 짓을 하는지 상상도 할 수 없는 순수한 악의 화신으로 활약하기에 좋은 인물입니다. 아주 아주 악하고 악한 일을 할 능력도 많기에 그래서 더 거창하고 묵직하고 무섭게 보일 수 있는 인물입니다. 신기하고 호기심을 돋구는 개성 넘치는 인물, 보고 있으면 적개심과 호기심을 함께 받을 인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런 기회를 모두 포기했습니다. 단적인 예가 있습니다. 고우영 선생의 만화 "십팔사략"에서는 현자의 장기를 꺼내보자고 부추기는 사람이 달기 그 자신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만, 이 영화에서는 주왕이 그런 명령을 내리면 달기는 듣다가 울면서 무서워 도망가기에 바쁩니다.

악행의 사연이나, 배경, 성격에 대한 설명 같은 것을 나중에, 혹은 도입부에 잠깐 반전 비슷하게 끼워 넣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일본에서 시작된 몇몇 "십팔사략" 소설판은 그런식으로 꾸민 것들도 있었습니다. 고우영 선생 역시도 그런 이야기를 노린 바 있습니다.그렇게 하면, 나름대로 인물을 입체감있게 하고 풍성하게 하면서도 악당으로 활약은 충분히 시킬 수 있습니다. 이 영화의 결말이, 무척 급작스럽고 썰렁한 것을 본다면, 그래서 더 아쉽습니다. 정말 달기의 악랄한 면을 무섭게 중반에 길게 보여준 뒤에, 막판에 감정을 분출하며 숨겨진 사연을 드러내는 쪽이 과연 나았겠다 싶습니다.


(주지)

때문에 이 영화에서는 달기 보다는 주왕을 연기한 신영균이 훨씬 더 재미있는 인물로 보입니다. 이 배우는 언어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더빙에 모든 것을 걸고 연기를 하고 있어서 가끔 심한 판토마임 과장의 구렁텅이에서 헤멜 때가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다혈질에 열받으면 불같이 화를 내면서도, 나름대로 낭만파이자 기분파인 연산군이나 네로 황제형 폭군의 모습을 흥미진진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덩치 좋은 몸집에 수염이 어울리는 얼굴도 한몫합니다. 달기의 목욕을 쇼처럼 감상하는 모습은 수줍으면서도 능글맞고 위엄있으면서도 변태스러운 모습의 연기를 훌륭하게 보여줍니다. 최후에 몰린 상황의 마지막 광기어린 모습도 죽는 장면이 재미없게 처리되어서 그렇지 직전까지는 멋드러집니다.


(육림)

이 영화는 호사스러운 사치 생활을 묘사하기 위해서 궁정을 화려하게 보여주기도 합니다. 사실 "달기"나 로마 제국의 평판 나쁜 황제 이야기를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영화의 알맹이일 것입니다. 만들어 놓은 소품을 또 써먹고 만들어 놓은 세트를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서, 이 영화는 은나라와는 별 상관 없이 진한시대 이후의 문화를 이용해서 모든 세트와 의상을 꾸몄습니다. 이 때문에 뭔가 들어맞지 않는 느낌이 들 때가 있긴 해도 그래도 어쨌건 황실풍으로 사치스럽고 화려한 집과 옷들이 재미있게 보이기는 합니다. 이것은 이 영화의 가장 훌륭한 점입니다. 한국에서 찍은 강제 노동 장면에서는 엑스트라들이 한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 비친다거나, 성벽의 방어무기로 "대포"가 잠시 보이는 등 좀 심하게 이상해질 때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래도 궁중의 음주가무는 흥미를 끌만해 보입니다.

다만 이 역시 "달기" 이야기의 독특한 면을 살리지는 못했습니다. 달기는 역사적인 기록도 모호한 인물이고 워낙에 신비롭고 과장된 전설과 신화로 많이 활용된 바 있습니다. 그래서 이 때 이야기를 다룬다고 하면, 좀 비현실적인 과장이나 신화에나 나올법한 극단적인 상상력을 기대할 법도 합니다. "주지육림"의 사치스러운 정도를 과장하는 것은 가장 흔한 방법일 것이고, 잔인한하고 포악한 명령을 과장하는 것도 할만한 일입니다. 그런데 "달기" 영화에서는 평범한 소품과 세트를 활용하는데 기울어져 있다보니 이런 신기한 요소가 부족합니다. 기껏해야 "별을 딸 수 있을 만큼 높은 탑" 한 가지가 있을 뿐입니다. 모형으로 만든 겉모습에 바벨탑 다운 종말론적인 느낌이 있어서 보기 괜찮긴 합니다만, 너무나 짧게 비치고 맙니다.


(불타는 별을 딸 수 있을 만큼 높은 탑)

비슷한 맥락에서 영화의 화려하고 거대한 야외장면에 대한 아쉬움도 생깁니다. 수십만 대군의 대반란이라든지, 왕의 어마어마한 행차 같은 것은 분명히 큰 규모와 물량공세의 멋을 보여줄만한 볼거리가 될 것입니다. 이 영화의 시작장면의 결전장면을 보면 나름대로 군사들의 소품도 충실하고 엑스트라도 꽤 많이 동원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한국에서 찍은 야외 장면과 홍콩 쇼브라더스 세트에서 찍은 실내 장면이 아주 다른 화질, 조명, 연기, 연출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궁정 내부는 중국 황매조 뮤지컬 영화의 전형적인 귀족 집안 세트처럼 되어 있는데, 궁전을 둘러싼 성은 한국의 조선후기 성곽으로 되어 있다는 점은 본바탕부터 달라보이는 점입니다. 그러면서, 야외촬영 부분이 워낙 다른 방식으로 찍혀 있다보니, 이 많은 엑스트라를 동원한 전쟁장면, 병사 동원장면들이 같은 영화의 연결된 장면으로 보이지가 않습니다.


(경기도에서 찍은 은나라 공격 장면)

마지막 반란으로 왕성이 불타고 있는 혼란속에서 어지럽게 헤메는 장면은, 외부의 침입과 내부에서 멋모르고 놀다가 당황하는 장면이 교차되는 모습으로 재미를 줄만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찍은 전쟁장면은 자연조명이 있는 낮인데, 홍콩 세트에서 찍은 궁실 장면은 인공조명이 있는 밤 같아 보입니다. 특히나 전쟁 장면은 구체적인 주인공들의 모습이나 대사가 거의 없는데다가 정확히 어떤일이 있어나는지 사건이 명확하게 드러나지도 않아서 이야기가 잘 표현이 안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맨처음 시작장면을 제외한 대부부분의 야외 장면은 그냥 다른 영화 속 중세 전쟁 장면을 자료화면으로 비추는 것으로 보일 뿐, 연결된 한 영화의 부분으로 보이지가 않습니다.

"달기"는 전형적인 이야기를 다루었고, 물량은 풍부한 편이며, 세트와 의상은 화려합니다. 인물에 비해 여자 주인공이 좀 나이들어 보이기는 하지만, 전체 이야기를 보여주는데 걸림돌이 될 정도는 않습니다. 제목에 비해 막상 "달기"가 너무 평범한 인물이라는 점과 한국-홍콩 합작의 어색한 부분은 재미를 떨어뜨렸다고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남궁원이 일으킨 혁명)

굳이 부족한 부분이라고 더 찾아내자면, 몇몇 배우들의 몸짓 연기와 그것을 잡아낸 연출에, 황매조 뮤지컬 영화의 습관이 어색하게 서려있다는 점도 꼽을만 하겠습니다. 이 영화는 규모를 내세우는 서사시적인 이야기로 꾸며졌습니다. 대병력과 큰 궁전, 넓은 벌판과 긴 성벽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구연동화체와 무용, 노래로 연결되는 양식화된 연기가 어울리지 않게 눈에 뜨입니다. 간신배역을 맡은 배우들이 비열한 놈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기에 더욱 대조되어 보입니다. 주인공 배우들의 걸음걸이는 무용과 같고, 굳이 엎드려 눈물을 흘릴 때는, 제자리에서 2회전 한 후에 철퍼덕 엎드려 어깨를 들썩들썩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말을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좌우로 고개를 돌리며 손을 휘젓습니다.


그 밖에...

홍콩 쇼브라더스사는 홍콩에는 없는 큰 벌판과 큰 성벽을 찍고 싶어 했습니다. 중국이 개방되기 전이라서 쇼브라더스는 한국 영화사 신필름과 계약을 맺어 일부를 합작해 촬영했는데, "달기"는 두 회사의 첫번째 합작 영화입니다. 합작하는 김에 주요 배역을 한국배우들이 맡기도 해서, 신영균과 남궁원이 주연급 인물을 맡았습니다.

"정인석 情人石 Lover's Rock"과 함께 정패패의 데뷔작으로 꼽히는 영화입니다. 그렇습니다만, 정패패가 어디에 나오는지는 못찾겠습니다. 아마 궁녀3 내지는 궁녀23 으로 나왔다고 짐작만 해 봅니다.

왠만해서는 이제 자막이 나쁘다는 이야기는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만, 그래도 이 "달기"의 한국판 DVD는 참 정도가 심합니다. 천년쯤후에나 나올 "폐하"라는 표현을 "샹" 왕조의 "조우"왕 에게 사용하는 것부터 참 답답한데, 도가 지나친 것은 영화 제목이 "달기"인데 이 제목의 "달기"조차 "탄지"라고 자막에 쓰여 있다는 겁니다. 이 영화 한글 자막에 따르면 이 영화 "달기"에는 "달기"가 나오지도 않는 겁니다. 자막 번역한 사람이 그렇게 했다고 해도 나중에 누구라도 나서서 바꿀만 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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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FAZZ 2007/02/15 15:29 # 답글

    합작덕에 경기도가 중국의 배경으로 쓴 것이었군요 ^^
    한국판 DVD 자막이 안좋기는 뭐 포기한지 오래니...
  • 이준님 2007/02/15 19:12 # 답글

    1. 그러고 보니 서울의 정사나 APE 같은 영화는 무려 "미국 합작"이지요. -_-;; 안정효씨의 모 에세이에서 서울의 정사를 가지고 아주 장탄식을 한게 기억이 납니다.

    2. 틴토 브라스의 칼리귤라가 웬지 그립네요 --;;;

    3. 선데이 서울에 이로마씨가 장기 연재한 작품은 뭐 이유 없는 악의 화신으로 달기를 그렸죠. 고우영 화백의 작은 나름의 이유가 있는 걸로 그렸지요-음모론-

    ps: 그러고 보니 "삼장을 유혹하는 여왕"이 나오는 모 서유기 시리즈는 무려 "불국사(?)" 필이 나는 사찰형 궁궐에 선덕여왕 필의 서역국 여왕이 나온적도 있었답니다.
  • 게렉터 2007/02/16 12:31 # 답글

    FAZZ/ 유명한 "용호의 결투'나 "생사결"을 비롯해서 눈 덮힌 광경이나 인적없는 바닷가 장면 같은 것을 찍기 위해서 한국 촬영을 하는 홍콩 영화들이 꽤 있었습니다.

    이준님/ 이준님께서 말씀을 꺼내신 김에 좀 다른 이야기를 해 보자면, 소위 합작 영화들 중에는 광고선전이나 정부 당국의 제도를 악용하기 위해서 과대포장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홍콩 영화 찍을 때 아르바이트 생 두 명 보내서 조명 들고 있게 한 다음에, 양국 영화사 스텝들의 열정을 합쳐 완성했다고 한다는가, 미국 영화에 동양인 엑스트라를 모아다 주는 일을 하고 영화 자체를 한미 합작으로 선전한다든가 하는 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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