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타지아 2000 Fantasia 2000 영화

2006년. 안익태가 태어난지 100년을 맞아 몇가지 일들이 있었습니다. 8월에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안익태 관련 소장품을 상당수 기증 받기도 했는데, 그 중에는 월트니즈니가 직접 식당 냅킨에 그려서 안익태에게 건넸다는 도널드 덕 그림이 한 장 있습니다.


(이제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문제의 그림)

들려오는 이야기에는 안익태와 월트 디즈니가 클래식 음악을 중심으로 하는 애니메이션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1940년에 "환타지아"가 제작되었고, 이 영화의 음악은 안익태에게 영향을 많이 줘서 선배뻘로 불리우기도 하는 스토코프스키가 맡았습니다. 도널드 덕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쉽게도, 이 1940년작 "환타지아"에는 도널드 덕이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도널드 덕은 그 후로부터 60년이 지나, "환타지아"의 속편격인 "환타지아 2000"에서 한 단락의 주인공을 맡게 됩니다.

"환타지아 2000"의 중반부에는 1940년판에 나온 "환타지아"의 미키마우스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부분이 그대로 들어가 있습니다. 그림책으로도 굉장히 인기를 끈 이 "마법사의 제자"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미키마우스는 음악을 만들고 연주한 스토코프스키와 대화를 나눕니다. 1977년에 세상을 떠난 스토코프스키의 영상을 복원해서 장면을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미키마우스는 화면에서 튀어나와 극장을 돌아다니며 도널드덕을 찾습니다. 입체음향을 이용한 효과인 것입니다. 도널드덕은 그렇게 등장해서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활약하게 됩니다.


(판타지아 2000: 전체의 주인공은 포스터 아래쪽의 오케스트라)

이 이야기는 "위풍당당 행진곡"을 연주하는 가운데 어울리는 짤막한 것으로, 내용은 성경의 "노아의 방주" 이야기입니다. "위풍당당 행진곡"은 엘가가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의 뒤를 이은 에드워드 7세의 대관식을 위해 만들어낸 단순하지만 화려하고 장중한 곡으로 영미권에서는 졸업식 음악으로 뿌리내린 곡이기도 합니다.

"위풍당당 행진곡"과 노아의 방주 이야기가 맞아 떨어지는 부분은 화면과 줄거리 두 가지입니다. 먼저 보이는 부분은 화면에 관한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위해서는 세상의 모든 동물들이 거대한 배에 타고, 또 거대한 배에서 내리는 장엄한 광경이 필요합니다. 바로 이 엄청나게 규모가 큰 끝없는 모든 동물들이 거대한 배 앞에서 행진하는 모습이 "위풍당당 행진곡"의 거대한 곡조와 어울릴만한 것입니다. "환타지아 2000"에서도 "위풍당당 행진곡"의 가장 선명하게 들리는 동기를, 배에 동물이 타고 내리는 부분에 배치했습니다. 많은 동물들이 배를 향해 긴 줄을 만들어 걸어가는 모습을 드넓게 보여주는 가운데, 음악을 연주하는 것입니다. 이런 발상은 한 때 대한항공이 광고에서 커다란 여객기가 격납고에서 나올 때 이 부분의 음악이 겹치게 한 것이나, 자기회사 회장이 행사에서 모습을 드러낼 때 이 음악을 연주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동물 총집합)

또 한가지 면은, 이 "위풍당당 행진곡"이 한 시대의 끝과 다른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졸업식 노래라는 점입니다. 회자정리, 거자필반, 헤어지는 것이기도 하고 또다른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느낌을 강하게 갖고 있는 음악이다보니, 세상을 포맷하고 프로그램을 다시 깔아버리는 듯한 노아의 방주이야기에 "위풍당당 행진곡"이 용도면에서 어울리기도 합니다. 거기에 이 노아의 방주 이야기에 겹친 도널드 덕의 애틋한 이별과 그리움의 이야기를 통해서 실제로 그런 만나고 헤어지는 정서를 직접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 이야기의 첫번째 장점은 그런 바탕 위에서 도널드 덕의 사랑이야기를 꽤 애틋하고 감격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내용인즉슨 세상이 홍수에 휩쓸리는 난리 통에 그만 도널드 덕이 사랑하는 데이지와 헤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만 방주에 승선해 혼자 살아남은 줄 "착각"하게 됩니다. 도널드 덕은 슬퍼하고 그리워합니다. 그러다가 결말에 이르면 의외의 꿈에 그리던 애틋한 재회를 해서 감동을 줍니다.

일단은 과장되어 있지만 선명하게 감정을 표현하는 그림이 무척 표현력이 뛰어납니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듯한 표정"이란 것을 그림으로, 그것도 오리 얼굴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은 밑천이 없으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영화에서는 충분히 쌓인 수많은 기술자들의 실력은 그런 감정들을 바로 관객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화면에 표현해 냈습니다. 과장된 표현과 주먹을 휘두르는 손동작들로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런 표현들은 짧은 시간안에도 상당히 복합적인 면을 표현하도록 여러가지로 구체화되어 있습니다. 이별하게 될 것 같다는 두려움, 잃어버린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 나타나 있는가하면, 짝이 있는 다른 사람에 대한 괜한 질투, 막막한 절망감과 외로움, 슬픔이 나타나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불의로 헤어진 사람이 느낄 수 있는 다양한 감정의 면면들이 살아납니다. 시간은 훨씬 짧지만 그 감정의 다양한 양상은, "엽기적인 그녀"의 이별 묘사 만큼, 내지는 그 이상으로 풍성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게다가 상황 자체도 근본적인 보는 재미를 줍니다. 많은 글과 TV쇼와 영화가 묘사하는 사랑이란 것이 서로 심정을 들여다 볼 수 없는 두 사람이 끈끈하게 교류하는 과정입니다. 이런 데서, "관객들은 진상을 알고 있지만, 주인공들은 몰라서 헤메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은 기본기중의 기본기입니다. 서로 겉돌고, 몰라서 착각하고, 그래서 관계가 꼬이는 모습은 관객을 안타깝게 하고, 긴장감을 느끼게하고, 그만큼 감정에 빠지게 합니다. 이런 내용은 아무생각없이 아무데다 진부하게 끼워 넣으면 너무 식상해보이지만, 동화 같이 표현된 짤막한 이야기속에서는 충분히 무리없이 잘 재연됩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 구조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애틋한 마음을 간접적으로 비추는 효과가 있었던 것입니다.


(도널드와 데이지)

두번째 장점은 음악 자체입니다.

대체로 "환타지아" 시리즈의 음악들은 음악 자체의 구체적인 그 순간 순간의 느낌을 영상으로 그때 그때 구체화하는 형태입니다. 때문에 구체적인 줄거리가 있는 경우와 결합되는 정도도 약하고, 아예 순간순간 추상적인 느낌이 환상적인 화면으로 보이는 자체를 추구할 때도 많습니다. 1940년판 "환타지아"에서 호두까기 인형의 음악을 표현한 부분은 아마 후자의 전형적인 예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위풍당당 행진곡" 부분은 그렇지 않습니다. 영상의 줄거리는 줄거리대로 있고, 음악은 어디까지나 배경음악으로서 줄거리의 감정을 깔아주는 역할만 합니다. 도널드덕이 매달리고 자빠지고 하는 잠시간의 슬랩스틱 코메디쇼를 벌이는 화면 구성 몇 곳을 제외하면, 음악에 영상을 맞췄다기 보다는, 영상에 어울리는 음악을 그냥 배경에 깔았다는 데 그칩니다. 그래서 "환타지아" 시리즈에서만 볼 수 있는 기이한 상징적이고 막연한 환상의 느낌은 거의 없습니다. 분명한 줄거리에 듣기 좋은 배경 음악이 깔리는 것에 그치는 것입니다.

이런 점이 도리어 장점이 되는 까닭은 바로 "위풍당당 행진곡"이라는 행진곡이 바로 그런 배경음악으로서 무척 훌륭한 음악이라는 것입니다. 풍성한 악기들이 복잡하게 화음을 이루지면, 음악의 전개방식은 간단해서 쉽게 기억에 남으며, 중심이 되는 곡조는 성악 노래처럼 선명하게 밝혀져 있습니다. 실제로 대관식, 졸업식장에서 말그대로 배경음악으로 훌륭하게 사용되어온 곡이었기도 합니다. 그래서, 음악의 길이나 듣는 사람의 감정을 고조시키고 가라앉히고 다시 발산하는 시간구성도 잘 짜여져 있습니다. 마지막 결말에서 사건의 진상이 순간적으로 밝혀지면서 음악도 화려하게 맺는 모양은 무척 아름답습니다.

음악 자체의 힘이 화면으로 옮겨진 다른 예들에 비하면, "위풍당당 행진곡"은 도널드덕의 사랑 이야기 코메디에 단지 배경음악으로 깔릴 뿐입니다만, 이런 이유들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충분합니다.


(판타지아 2000에 출연한 30년대, 한창 때의 조지 거쉰)

또다른 장점으로는 애니메이션의 표현력을 잘 살리고 있는 소재 자체의 재미도 꼽을만 합니다. "환타지아" 시리즈는 주로 애니메이션이 아니면 표현하기가 거의 불가능할 법한 상황들을 묘사해서 애니메이션의 힘을 과시했습니다. "환타지아 2000"에서도 남극의 고래 수천마리가 바다에서 치솟아 오로라 속에서 하늘끝으로 날아가는 극단적인 장면이 있는가 하면, 플라밍고가 요요를 갖고 노는 사소한 상상 장면도 재미있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노아의 방주 이야기쯤 되는 규모가 크고, 눈으로 보기 어려운 일도 좋은 소재라 할만합니다.

노아의 방주 이야기는 워낙에 강렬한 시각적 심상을 갖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때문인지 세계의 수많은 문화권에 비슷한 신화들을 찾아 볼 수 있기도 합니다. 세계의 멸망, 새롭게 세상을 시작하는 최초의 인간들, 세상 모든 동물들의 집결, 지구를 뒤덮는 홍수, 엄청나게 거대한 배, 끝 없이 쏟아져 내리는 무시무시한 비, 어둠속에 가려 햇빛이 들지 않는 길고긴 죽음의 시간들. 왠만한 신화적인 거대한 사건들이 한 번에 다 등장해 줍니다.

거기에 누구나 하늘을 올려다보며 끝없이 환상적인 공상에 젖어들 수 있는, 창공의 구름들이 중심 소재 입니니다. 마지막에는 신비하게 여기기 마련인 아름다운 무지개가 결정적으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이 정도 재료라면, 커다란 화면 속에 화려하고도 웅장하게 담아서 강렬한 상상력의 힘을 보여주기에 즐거운 이야기거리라 할만합니다.


(다른 동물들을 모으고 관리하는 도널드 덕)

"환타지아 2000"의 "위풍당당 행진곡" 부분은 어느 서사시 못지 않은 풍부한 힘을 깔고 있으면서도, 그 속에서 개인적인 사랑과 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 입니다. 아주 복잡미묘하다거나, 경이로운 참신함이 비록 바로 느껴지지 않더라도, 그 정석 대로 담긴 사랑의 감정 때문에, 평화로운 동화책 같은 이야기로부터 눈물을 글썽거리는 관객도 꽤 있을 겁니다.

"환타지아 2000"은 1940년판 "환타지아"에 비하면 무한히 제작비를 때려 넣어가면서 불가능에 도전한 듯한 기술을 보여주는 느낌은 적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는해도 아이맥스 화면, 입체음향, 연주와 녹음의 여러시도들은 역시나 만만치 않은 도전과 성취를 보여줍니다. "토이 스토리"에 앞서서 시도해본 자유로운 컴퓨터 그래픽 애니메이션들이나 3차원 컴퓨터 그래픽과 2차원 애니매이션을 자연스럽게 섞는 기술도 멋집니다.


(30년대 뉴욕)

"환타지아 2000"에서 "베토벤 5번 교향곡 1악장"부분은, 지나치게 곡을 단순하게 꾸려냈다는 평을 종종 듣기도 합니다. 하지만, 너무나 굳건히 위세를 떨치는 대단한 곡이기에, 외려 이 영화처럼 개성있는 발빠른 연주와 가벼운 화면으로 재미있는 특징을 잡아낸 것은 그 나름대로 가치가 있었습니다. 감동적인 곡이기에, "베토벤 5번 교향곡 1악장"은 듣다보면 그 속에 들어 있는 경쾌한 속도감과 힘있는 순발력은 놓치게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단촐하고 흥겹게 연주한 "환타지아 2000"의 음악은 심각한 면을 좀 줄인대신에 그런 특징만은 듣기 편하게 포착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름의 웃음과 재미가 충만한 다른 부분들도 좋은 이야기가 되어 주고 있습니다. 요즘 극장에서는 보기 힘든 1930년대에 유행한 형태로 그 시기 알 허쉬펠트 만화 그림이, 경제공황 속의 30년대 뉴욕의 정경들과 1930년대에 유행한 조지 거쉰 음악에 어울리는 것은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그런 모양새는 1968년판 한국영화 "장국의 수염"에 삽입된 애니메이션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본듯하지만, 의외로 요즘의 다른 단편 애니메이션이나 TV광고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볼거리였습니다.


그 밖에...

"환타지아 2000"에 나오는 곡들은 차례로, "베토벤 교향곡 5번 1악장", "로마의 소나무", "랩소디 인 블루 Rhapsody in Blue", "쇼스타코비치 피아노 협주곡 2번 1악장", "동물의 사육제 피날레", "마법사의 제자", "위풍당당 행진곡", "불새" 입니다. 연주는 제임스 레빈이 맡아서 시카고 교향악단과 함께 연주했습니다.

2000년 1월 1일 0시에 새 밀레니엄이 시작될 때 공개되었습니다.

IMDB Trivia에 따르면, "위풍당당 행진곡"에 쓰인 빗줄기는 1940년판 "환타지아"에서 쓴 것을 다시 쓴 것이라고 합니다. 마지막에 쓰인 음악 "불새"의 저작권도 1940년판 "환타지아"를 만들때 이미 획득해 놓은 것을 60년만에 써먹은 것이라고 합니다.

IMDB Trivia에 따르면 9년 동안 부분부분 작업해서 완성된 영화라고 합니다. "랩소디 인 블루"를 만들기 전에 알 허쉬펠트에게 허락을 받으러 연락을 했더니, 알 허쉬펠트는 "50년마 젊었어도 내가 직접가서 일을 했을 텐데" 라며 아쉬워 했다고 합니다. 알 허쉬펠트는 2003년에 작고했으니, 결과는 볼 수 있었을 겁니다.

덧글

  • rumic71 2007/02/22 15:35 # 답글

    <위풍당당>을 좀 많이 편곡한 게 맘에 걸렸었습니다...
  • 게렉터 2007/02/24 16:09 # 답글

    rumic71/ 워낙에 많이 편곡되다보니, 그냥 처음부터 정통파 연주를 한다는 생각은 아예 접었던 듯 합니다. 어떻게 보면 "환타지아 2000"의 곡들이 전체적으로 좀 그런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 FAZZ 2007/02/24 17:46 # 답글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확실히 감동은 1940년 원판보다 좀 덜한거 같았습니다. 영상자체는 현대기술이 도입되 괜찮은 편이었지만...
  • 게렉터 2007/02/27 12:36 # 답글

    FAZZ/ 저는 "위풍당당 행진곡"의 단순무쌍한 순간감동에 갑자기 감동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다채롭게 그때그때 도전과 시도를 보여주었던 전편에 비해서는, 좀 그냥 무난무난하게 가는 면이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 햏리포타 2007/03/22 13:56 # 답글

    아직 환타지아 2000 전부는 못 봤고 랩소디 인 블루 편만 봤는데 정말 멋지더군요 ㅋ
  • 게렉터 2007/03/23 15:27 # 답글

    햏리포타/ 단순하지만 정통파인 노아의 방주 이야기도 재미있고, 플라밍고 이야기도 무척 신납니다. 아이맥스로 재상영된다면 꼭 볼만한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 2007/04/10 21:16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게렉터 2007/04/11 13:54 # 답글

    비공개/ 혹 1940년작도 안 보셨다면 보시기 바랍니다. 꽤 다른 재미가 또 있습니다.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