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저와 나 Roger & Me: FTA 이야기를 곁들여 영화

"로저와 나 Roger and Me"는 마이클 무어가 감독과 각본에 참여한 1989년작 영화로, 마이클 무어에게 부와 명성을 가져온 첫번째 흥행작입니다. 이 영화는 미국 미시간주, 플린트 시가 겪는 GM사의 대량해고를 중심으로 이 도시가 겪는 실업과 빈곤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내용은 비극적인 상황에서 벌어지는 여러가지 부조리한 점들이 과장되어 보이도록 편집하고, 음악, 나래이션을 잘 섞어 연출해서, 사태를 풍자하고 웃기는 것을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로저와 나)

"로저와 나"의 내용은 크게 네 단계 정도로 되어 있습니다. 첫번째는 플린트 시의 삶과 거대 기업 GM의 역사와 과거를 간단히 소개하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GM의 단계적인 구조조정, 기업감량 그리고 거기에서 벌어진 직원 해고, 실업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번째는 벌어진 실업과 빈곤을 퇴치하고 대처하기 위한 정부의 여러가지 노력과 그 처참한 실패를 비웃는 것이고, 네번째는 급격한 경제 불황에서 헤메고 있는 플린트 시의 비참한 생활상을 비추고 있습니다. 네 가지 내용은 기승전결의 순서가 잘 맞아서 내용을 쉽게 파악하게 해주고, 극적인 재미도 줍니다. 특히 마지막 두 부분인 정부의 노력 - 실패 - 비참한 생활상은 두어번 반복되면서 여러 차례 다른 각도로 강조되면서 나옵니다. 그래서, 이 플린트 시의 실업문제가 왠만해서는 결코 극복되지 않는 문제라는 암담함과 우울함도 웃음속에 섞어서 전달해 줍니다.

이 영화는 어이없는 상황을 보여줘서 웃기는 것으로, 플린트시에서 벌어진 일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리는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웃기기 위해서 영화를 전통적인 다큐멘터리라기 보다는 현실에서 벌어지는 장면과 뉴스, 인터뷰를 재조합한 코메디물에 상당히 가깝게 꾸몄습니다. 진지하고 객관적인 사실을 다룬다기 보다는 애초에 주관적인 관점과 감상에 치우쳐 있다는 느낌은 애초부터 있었다손 치더라도, 사실성을 조금은 심하게 포기한 것입니다. 이 영화는 "의지의 승리"나 "올림피아" 보다도, 인터넷을 떠도는 패러디 동영상이나 합성 동영상에 가까운 분위기입니다.

그래서, "로저와 나"는 사건들을 시간순서로 보여 주려하지도 않고, 일정한 공간순서로 옮겨가며 보여주지도 않습니다. 이야기하는 내용과 분위기에 도움이 되도록 서로 다른 시간대에 있는 내용을 섞어서 보여주는가하면, 나중에 벌어진 일을 영화상에서는 먼저 보여주기도 하고, 먼저 벌어진 일을 슬며시 나중에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웃음을 주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서슴치 않고 적극적으로 내용을 자르고 재배치한 것입니다. 웃기는 분위기에 도움이 되도록 화면전환은 전체적으로 경쾌하고 빠른 편이며, 음악은 안나오면 안나오지 나올때는 항상 발랄하고 즐거운 곡조로 되어 있습니다. 특히 팻 분의 노래들이나 비치보이스의 명곡 "Wouldn't It Be Nice" 같은 배경음악은 매우 훌륭하게 활용되었습니다.


(플린트 시, 자동차 공장 전경)

사실 여기에는 약간은 얍삽한 방법이 스며 있기도 합니다. 영화를 보면서, 관객들은 무심코, 먼저 보여주는 것이 원인이고, 차례대로 나중에 보여주는 것이 결과라는 생각을 하게 되기 쉽습니다. 이점을 잘 활용해서 비판하는 대상을 더 멍청하게 보이게 하고, 혹은 더 불쌍하게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놀이공원 건설과 폐쇄 장면 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GM 공장이 문을 닫아서 실업문제가 심각해진 것을 먼저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정부가 관광산업을 발전시켜 보고자 놀이공원 건설을 시도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마침내 놀이공원이 맥없이 실패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놀이공원 건설은 GM 공장이 문닫기 이전에 앞서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것을, 이렇게 순서를 바꿔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꼭 정부가 허둥지둥 실업대책이랍시고 놀이공원을 건설한 것처럼 보이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래서 고려공사삼일, 무능하고 허황된 계획으로 예산낭비만 했다는 느낌이 강하게 나는 것입니다. 때문에 정부가 실업자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한심한 느낌이 훨씬 강조되었고, 영화의 황당무계한 현실에 웃고, 씁쓸하게 문제를 느낄 수 있는 느낌은 더 커졌습니다.

이런 식의 연출은 군데군데 매우 잘 활용되었습니다. 요즘 인터넷을 돌아다니는 짤막한 움직이는 그림이나 짧은 동영상들은 멀쩡한 연속극이나 영화의 극히 짧은 부분만을 잘라내서 내용을 과장하거나 곡해하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주인공이 어린이의 볼에 손을 살짝 갖다대는 장면을 빠르게 재생하고, 무한반복하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주인공이 어린이를 마구 두들겨 패는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이 영화에도 이처럼, 어떤 사람의 말이나 행동을 잠깐 한 부분만 잘라서 보여주고, 그런 짧은 행동이나 말이 가장 비웃음살만한 위치에 배치되도록 끼워넣어서 웃음을 끌어내도록 했습니다. 이런 수법들은 영화 전체에 자주, 많이 활용되어서, 영화전체에 계속 이목을 붙잡는 재미거리가 되어줍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여유롭게 골프를 즐기는 노인들을 인터뷰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은 게을러서 가난하다"라는 말을 하는 부분을 짧게 인용하는 부분입니다. 뼈빠지게 일하다가 갑자기 해고당해서 당장 길거리에 나앉을 판인 고달픈 사람들의 힘겨운 얼굴들을 보여주다가, 바로 다음에 느릿느릿 유유자적 걸어다니며 시원하게 웃으며 골프채 휘두르는 사람이 "게으르니까 가난한거지요."라고 하는 장면을 붙여 넣으면, 그 해괴한 대조적인 느낌은 기가막힙니다. 그래서 거의 거짓말을 한다거나 비도덕적인 느낌을 풍기는 정도에 이릅니다.


(역사적인 30년대 플린트시 GM 노동자 연좌 파업)

이런저런 이상과 같은 기술적인 재치들은 이야기의 중심 내용이 잘 지탱되는 덕분으로 그 효과가 멋지게 잘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그냥 무의미한 농담거리나 비방하는 풍자 정도에 그쳤을 것입니다.

이 영화는 실업과 거대 기업의 효율성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만, "에린 브로코비치" 같은 소시민 영웅을 다루는 것도 아니고, "차가운 공장의 높은 크레인 위에서는 무슨일이?" 라는 식으로 이국적인 동네의 낭만적인 사건을 꾸며서 다루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제작진의 고향에서 벌어진 이웃들의 이야기와, 동네 사람들과 지역 주민의 화제거리들 중에서 내용을 뽑아내고 있습니다. 그런 덕분으로 여러모로 극적인 효과를 위해 꾸미고 짜집기한 부분이 많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기본 소재에는 등장하는 사람들, 플린트 시의 실제 정황에 밀착된 현장감 넘치는 느낌이 생생하게 살아나 있습니다.

보통 교양 다큐멘터리는 "국제 실업문제 연구소 책임연구원 마이클 박사"라든가, "플린트 대학 경제학과 구조조정연구실 무어 교수"의 해설이나 인터뷰를 싣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과 비슷한 권위있는 사람들이 멋있는 이야기하는 내용을 끌어붙여서 자기가 하는 주장이 멋있고 옳은 내용인척 합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딴 장면은 다 걷어치우고, 농담 잘하는 마이클 무어 친구나, 위문 공연하러 플린트 시에 자주 찾아오는 연예인과 대화하는 장면을 집어 넣고 있습니다. 이런 점이 가장 생생하게 살아나는 부분은 흥미진진한 도입부입니다. 이 영화는 도입부에서 나래이션 담당이자 제작진인 마이클 무어의 가족 이야기와 자라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자연스럽게 그의 고향 마을인 플린트 시 이야기를 하고, GM과 미국 자동차 산업 이야기를 실감나게 풀어냈습니다.

또 다른 이 영화의 멋진 점은, 등장인물들 중에 재미있고 멋진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주인공에 해당할만한, 이 영화의 등장인물과 인터뷰 상대 중에는 정말 그 자체로 흥미로운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쉴새없이 빠른 말투로 과장과 놀람을 섞어가며 줄줄이 내용을 설명하는 극장 관계자는 왠만한 만담꾼 못지 않은 솜씨로 상당시간 내용을 재미나게 전달해 줍니다. "Wouldn't It Be Nice" 노래를 설명하면서, 눈에 참고 있지만 살짝 눈물을 글썽이는 실업자가 농담처럼 이야기하는 장면은, 그 이야기 자체로 중후한 삶의 역정을 담아냅니다.

이 영화의 절정을 장식하는 이야기는 돈 없어서 집에서 쫓겨나는 사람들과 성탄절 기념행사에서 연설하는 GM 회장 로저 무어를 교대로 보여주는 장면일 겁니다. 여기에서 관찰자로 이야기를 끌어가는 보안관 부서에서 나온 담당관의 모습은 감정을 이끌어내는데 간접적으로 큰 공헌을 합니다. 이 사람은 항상 말투에 별 변화도 없고 무표정합니다. 하지만, 또 이래저래 말은 많습니다. 겉모습을 보면, 옛날 느와르 영화의 뒷골목 탐정처럼 보입니다만, 그 행색은 그보다는 좀 더 초라한 형사 콜롬보 쪽에 더 가깝습니다. 그래서 돈없는 사람들을 집에서 쫓아내고 다녀야 하는 그 쓸쓸한 임무의 회한을 과장없이 담아냅니다. 이 사람은 가만히 지켜보면서, 무표정한 얼굴과 특유의 걸쭉한 말투로 집에서 나가라는 매정한 말을 계속 반복합니다. 그러면 여기에 가족들, 어린이들이 절망하는 모습이 이어지는데, 그 모습은 웃기고 발랄한 장면들로 가득찬 내용속에서 큰 어긋남없이 묘하게 어울리면서도 진지한 감정을 전달해 냅니다.


(플린트에서 생산되 최초의 뷰익 자동차)

이 영화의 제목이 "로저와 나"인 것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선명한 줄거리와 끝맺음을 위한 소동을 만들기 위해서 "나"인 마이클 무어가 GM 회장인 로저 스미스를 만나 인터뷰하려는 시도들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이클 무어는 회사가 망할 것 같아서 직원을 해고한다면 모를까, 이미 이익을 보고 있는 GM이 더 큰 이익을 위해서 수많은 플린트의 실업자를 생겨나게 한 것이 정당한지 물어보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 부분은 이 영화에서 좀 재미 없는 부분이기도 하고, 약간 식상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전체적으로 이 영화의 내용은 시민들에게 밀착된 일상사의 변화와 납득하기 어려운 사회 변화에서 벌어지는 우스꽝스러운 장면들을 포착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마이클 무어가 대기업 회장을 인터뷰하려고 용쓰는 모습은 이와는 상반되는 영웅담 분위기입니다. 게다가, 딱히 그냥 "억지로 인터뷰하려는 기자"의 전형적인 모습 이외에는 별다른 특색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여러번 실패하는 모습이 차이도 없이 따분하게 되풀이되고 있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긴 합니다만, 내용만 놓고보면 실업자 발생의 책임을 왜 하필 기업 회장인 로저 스미스에게 묻는가 하는 것은 사실 어느 정도 핵심에 닿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1930년대 뷰익 광고)

이 영화에서는 플린트에 있는 GM 공장을 없앤 이유를, 플린트에서 공장을 돌리는 것보다, 멕시코에서 공장을 세워 돌리면 훨씬 값싸게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간단한 비교우위론으로 설명될 수 있는 내용입니다. 미국 근로자들이 받고 싶어하는 돈은 많고, 사람들의 취업성향이나 산업구조도 공장 근로자를 기피하는 방향으로 바뀌어갑니다. 그렇다면, 나중에 손해를 보거나 기회를 잃기 전에, 얼른 일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공장을 옮기는 것은 할만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이 문제를 결정하는 경영자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실업문제와 해외진출의 위험을 감수하고 효율성을 높여 볼 것이냐, 아니면, 위험한 일을 벌이기 보다는, 지금이대로도 당장 문제는 없으니 그냥 공장을 유지하고 직원들을 유지할 것인가 하는 선택입니다. 로저 스미스의 판단은 석유파동 이후로 경쟁상대로 나선 일본차, 한국차에 대한 위기감을 중시했고, 또 더 이상 보급대수가 늘어나기 힘든 자동차 시장의 한계를 중요하게 여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주주들과 자신의 실적에 더 중요한 요소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리하여, 플린트의 미국인 노동자들을 포기하고 멕시코와의 국제 교류로 기울어진것이 그의 결정이었습니다.


(1980년대 뷰익 광고)

로저 스미스의 GM처럼 미국에서 공장을 없애고, 외국에 공장을 건설하는 회사들은 계속 늘어났습니다. 얼마후에는 미국과 멕시코 사이에 FTA가 체결되어 이런 움직임은 더욱 더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마이클 무어는 그리하여 이후에 이런 여러 회사들에 대해 싸잡아 문제를 제기하는 "빅 원 The Big One"이라는 차기작을 만들기도 했으며, 이 영화 역시 상당히 흥행을 거두었습니다. 미국과 멕시코의 FTA에 대해, 당시 마이클 무어를 비롯한 적지않은 미국인들의 생각은 FTA 때문에 미국의 돈이 멕시코로 새어나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경영자와 주주들이 돈을 좀 더 챙기려고 정치인들과 외교관들을 부추겨 저지른 일 때문에, 수많은 미국사람들이 실업자가 되었고, 대신에 멕시코 사람들만 돈을 벌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비난의 화살을 한 몸에 받는 듯한 로저 스미스는 사실 지금까지의 결과만 놓고보면 오히려 옳은 선택을 한 듯 보이기도 합니다. 80년대가 끝나면서 미국경제의 기막힌 "주술 경제학"은 문제점을 드러냈고 위기감은 커졌습니다. 예상들 중에는 FTA로 인해 공장들이 멕시코로 다 빠져나가고, 실업자 문제는 심해지고, 일본과 한국의 도전 때문에 경제 대공황이 다시 찾아 올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만,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새로 축적된 자금과 새로운 일에 뛰어들 수 있는 실업자들, 변화해야만 하는 산업 종목의 압력이 외려 더 큰 이익을 낸 것입니다. 비록 닷컴 거품의 여파가 있긴 했지만, 소위 첨단기술을 중심으로한 "신경제"를 일구어 내는데 성공했고, 여기에 세계경제호황과 더불어 미국인들의 소득과 생활수준은 더욱 높아졌습니다. 사회복지도 꾸준히 발전했거니와, 오히려 일본이 거품 붕괴의 고통을 겪었고 한국이 IMF에 시달렸습니다.


(1980년대 (악명 높은) 현대 엑셀(한국 차종명은 포니엑셀) 광고)

그러나 또한 그렇기에, 이 영화, "로저와 나"가 갖고 있는 독특한 장점들은 지금 보면 더욱 선명하게 눈에 뜨입니다. 단순히 영화를 "나의 편"과 "로저의 편"으로 나누어서 한 쪽은 악마고, 한쪽은 천사라고 하는 지지와 비방의 선전은 큰 의미가 없게 보입니다. 외려 그보다는, 이 영화에서 더 큰 감동의 중심이 된, 플린트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와 닿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얽혀 있는 비상식적인 사건들과 어처구니 없는 멍청함들이 더 인상적으로 보이게 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플린트 사람들의 운명을 선택한 것은, 로저 스미스가 자신의 평판과 실적을 위해 내린 판단이었습니다. 관료제와 다수결에서는 어쩔 수 없이 상관없는 사람들이 자기 이득을 위한 자기의 판단으로 남의 일들을 결정하곤 합니다. 플린트 사람들의 실업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구체적인 대책은 없으면서도, 로저 스미스가 자기가 주주들에게 잘 보여서 봉급 많이 받기 위한 이기적인 생각으로 공장 문을 닫아버렸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문제를 개인적으로 보면,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한국 대통령이 자기가 공적세우고 일부의 지지를 받기 위한 제 욕심 때문에, FTA의 대의명분을 내세워 몇몇 산업 종사자들을 희생시킨 것이라고 분통을 터뜨릴 수도 있습니다.


(한미FTA 협상대표단 결과보고를 위해 회의장으로 들어서는 김현종 본부장)

결국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대표자들이 얼마나 감성적으로, 또 이성적으로 책임감있는 실력을 갖추었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대책없이 플린트의 실업자들에게 막연히 "긍정적으로 생각하세요. 낙천적으로 살면 기회는 옵니다"라고 외치는 GM대변인의 빳빳한 비싼 정장은 그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말이 도리어 분통을 터지게 합니다. 실업자 천국인 플린트에 관광산업 진흥을 위해서 정부예산으로 호화 호텔을 지었다가 망해먹은 이야기는 무능함에 한심함을 느끼게 합니다. 전문적인 판단에 근거한 학식높은 고민을 하는 모습을 항상 보여주려 하지만, 대표자들도 사람인 이상, 어쩔 수 없이 자기 이익을 위해 남의 일들을 결정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만큼, 스스로 그 뿌리부터 의사결정과 설득과정에 대해 끊임없이 반성하고 숙고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 점을 게을리 할 때 그 대표자들은 "앞날은 밝고, 오늘도 해가 뜨니 낙천적으로 생각하라"고 막연히 혼자만 감동하는 일장연설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울적한 이야기를 보여주면서 밝은 음악과 화려한 볼거리를 대조적으로 뒤섞는 "로저와 나"의 가장 특징적인 연출방법에 의해 언제, 어디서나 비웃음 당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화와 개방에 대한 단순한 찬반논란과는 또다른 면에서 이 영화는 그 재미와 감동이 돋보이는 면이 있습니다. GM의 멕시코 진출이 플린트 시내의 들쥐 숫자와 무슨 관계가 있나를 살피고, 집에서 사람들을 내쫓는 사람의 시각으로 퇴거와 무주택자를 다루는 "로저와 나"의 연출은, 사회의 의사결정과 그 설복을 어떻게 이루어 나가는가에 대한 좋은 생각할 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 밖에...

IMDB Trivia에 따르면 이 영화를 만들때만 해도 마이클 무어는 영화에 대해서 기술적인 지식이 거의 없어서 케빈 레퍼티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이 영화가 개봉된 1989년에 플린트 시에 있는 모든 극장들이 다 문을 닫았기에 이 영화는 플린트 시에서는 상영되지 못하고 첫번째 상영은 플린트 바로 옆의 버튼에서 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이번 행정부는 2006년, 희대의 바보스러운 괴법안인 속칭 "산업기술보호법"이란 것을 통과시킨 바 있습니다. 내용인 즉슨 한국의 이공계 대학원생, 이공계 연구원 및 기술자에 한해서, 외국회사에 취업하면, 뭔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하여간 구속하고 감옥에 집어 넣을 수 있다는 이상한 취지로 출발한 법입니다. 그런데, 실제 완성된 법안 자체는 거기에 한 술 더떠서 취업하지 않더라도, 취업을 "예비"-"음모" 하기만 해도 처벌할 수 있다는 기이한 마이너리티 리포트 법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이광재․강혜숙․권선택.김교흥․김낙순․김덕규.김원웅․김재윤․김재홍.김태년․김혁규․김현미.노영민․노현송․박재완.박찬숙․배일도․백원우.서갑원․서재관․신국환.안민석․엄호성․염동연.오제세․유시민․이근식.이은영․정문헌․정성호.정청래․조일현․최인기.한병도 등등의 국회의원이 밀고나가서 어물쩡 무의미하게 통과된 법안인데, 괴이한 것은 이 법안은 대표적으로 FTA에 배치되는 자가당착 법안이라는 것입니다. 아직 전문기술인에 대한 부분이 한미 FTA에서 확실하게 굳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당장 누가 제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곧 확정되는대로, 아무 생각없이 추진한 법안이 스스로 자가당착을 빚는 기이한 볼거리를 구경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 재미있는 대목은, 이 때 한국기술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한국 사람이 아니라 미국 사람이 제소해야만 된다는 점입니다.

덧글

  • 게렉터 2007/04/04 12:15 # 답글

    갑자기 바뀌어서, 밸리에는 트랙백을 한 분야에 밖에 못 보내게 된 것과 내용을 수정할 때마다 예전에 HTML로 작업하고 있더라도 갑자기 비효율적인 자체 에디터 방식으로 계속 되돌아가는 것은 좀 당혹스럽습니다. 자동 저장 기능은 좋은 듯도 하지만, 너무 무겁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그 밖에 트랙백이나 기타 다른 인터페이스는 더 쓰기 어렵고 복잡하고 느려진 듯한 느낌이 듭니다.
  • 닥슈나이더 2007/04/04 12:18 # 답글

    [산업기술보호법]을 보면.. 얼마나 이공계 사람들을 부품으로 보는지 알 수 있죠.....
  • 다음엇지 2007/04/04 12:23 # 답글

    상영실 바꿔가며, 강의실 전전하며 힘들게 보았던 기억이 나는군요. 마이클 무어를 발견하게 되었던 영화였죠. ^^
  • 콜린 2007/04/04 13:05 # 답글

    좋은 글 읽고 갑니다.
  • Needle 2007/04/04 13:18 # 답글

    좋은 글 읽었습니다. 영화 내내 빠져들어서 봤지만, 마지막에 '플린트에 극장이 다 망해서 상영을 못했다'는 자막이 제일 강렬하게 남았던 기억이 있네요. 마지막 한 방이었어요. 어이쿠야 하게 만들었달까... (아참, 글 중간에 'GM 회장 로저 무어'라는 부분이 나와요~)
  • 게렉터 2007/04/05 15:26 # 답글

    닥슈나이더/ 놀라운 것은 이 법안이 한국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해 추진되었다는 점입니다. 거의 전쟁중의 "국민방위군" 사건을 연상케하는 황당무계한 짓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음엇지/ 미국 개봉된지 참 오랜시간이 지나서야 보게된 영화였습니다.

    콜린/ 감사합니다.

    Needle/ 지적 감사합니다. 수정하겠습니다. 제임스 본드 이야기를 자주 하다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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