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Perfume: The Story of a Murderer) Das Parfum - Die Geschichte eines Mörders 영화

"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의 기본 골격은 옛날 옛날 한 옛날에 있었던 기이한 전설을 이야기해 주는 투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주인공의 일대기를 다루는데, 엄청난 재능을 가졌지만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난 주인공이 여러사람을 만나면서 이런저런 괴이한 사건을 일으키고 마침내 대파국과 함께 최후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허균이 17세기에 쓴 유명한 고전 "홍길동전"이 이런 이야기로, 뛰어난 재능, 불우한 환경, 괴이한 사건, 파국적인 전투로 되어 있습니다. "향수"와 홍길동전의 이야기는 홍길동전 쪽이 비할바 없이 평화로운 결말로 끝난다는 점에서 먼저 차이가 납니다. 그리고 더욱 결정적인 차이는, "향수"의 문명 성찰이 흥미를 끌만큼 세밀하다는 점입니다.


(대혁명도 일어나기 전의 파리를 거니는 주인공과 그 밥상을 차리고 있는 60여명의 스탭들)

이런 류의 기이한 일대기를 전설처럼 늘어 놓는 이야기들은 괴이한 내용이나 신기한 부분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런 대목이 요점이 됩니다. 많은 이야기들은 단순한 뜬소문처럼 들리는 단촐한 짧은 분량으로 그치는 경우도 많고, 아예 그림동화집에 수록된 이야기들처럼 그 환상적이고 낭만적인 묘사에 치중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홍길동전"의 경우에는 비교적 사회사적인 사건들을 폭넓게 다루기도 하고, 풍속과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비판이 들어가 있는 편입니다. 하지만, 이 역시 소재에 그칠뿐, "홍길동전"의 장면묘사와 사건 전개는 시적인 낭만주의에 기울어져 있는 느낌이 강합니다.

그런데, "향수"는 이야기가 다루는 소재와 배경 속에, 생생하고 거친 사회에 대한 묘사가 선명하고 강렬하며 자세하게 들어가 있습니다. 대항해시대 이후 갑자기 급성장한 도시의 미친듯한 인구밀도, 르네상스와 함께 급성장한 과학과 기술의 영향력, 자본주의가 싹트던 무렵의 원시적인 경제체제, 귀족문화의 요란한 화려함과 가난한 사람들의 저주스러운 처절한 삶이 조목조목 세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좀 더 폭 넓게 생각해 보면, "향수"에서 전하는 이야기 속에는 제조소(manufactory)가 성장하고 금전만능주가 위세를 떨치면서, 계몽주의와 과학혁명이 함께하고, 합리주의와 개인주의 인권개념이 싹트던 산업혁명 직전의 그야말로 혁명전야와 같은 사회상이 흥미롭게 담겨 있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의 맹아)

"향수" 줄거리의 뛰어난 면은 이렇게 사회상에 대한 다양한 모습이 잘 녹아 있으면서도, 이야기 본연의 기이한 전설을 들려주는 모습을 조금도 잃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역사 소설들을 보다보면, "조상의 뛰어난 실력"이나 "민족의 웅혼한 기상" 운운하는 면을 강조한답시고 이야기를 전혀 재미없게 하면서 신나게 자랑만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 합니다. 반대로 "현대사의 비극"이나 "만행의 책임"을 밝히고자 하는 열의에 들떠서, 정작 주인공 인물이나 사건의 박진감은 날려버리고 괜히 비난의 수식어들과 감탄사만 난무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데, "향수"는 어느 이야기 못지 않게, 문명 전환기의 비판적인 모습들을 잘 잡아내면서도, 그러한 내용들을 도리어 훌륭한 배경으로 삼아 버렸습니다.

사회상과 전설적인 인물을 잘 조화시킨 면을 보자면, "소설 동의보감" 같은 이야기도 뛰어난 편입니다. 그러나 "소설 동의보감"의 경우만 해도, 이러한 조화를 위해서 사건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보이도록 꾸몄습니다. 그래서 사회 속을 사는 인물의 능력과 행동을 현실적으로 그려내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향수"는 그렇지도 않습니다. 계속해서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들을 다루고, 초현실적인 느낌으로 이상한 악몽같은 상황을 늘어 놓습니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그렇게 전설을 들려주는 신비로운 괴기요소를 화려하게 살립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충분히 설득력있게 사회의 단면들을 잡아내는 위력을 갖고 있습니다. 나아가 이 이야기에는 사회상을 비판적으로 묘사하는 부분이 괴기요소를 더 신비롭게 돋구는 묘미가 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파리 뒷골목, 아무도 신경안쓰는 가난한 행상)

이러한 성공에는 우선 무엇보다 중심소재와 SF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그 활용에 원인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홍길동 처럼 도둑질에 능한 것도 아니요, 김선달 처럼 환상적인 사기 수법을 재능으로 갖고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냄새를 맡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향기를 수집하고 가공하겠다는 화학공학의 열정에 광기어린듯 불타오르는 사람 입니다. 이 영화는 주인공이 냄새를 느끼고 냄새에 대한 생각에 빠지는 과학적인 요소들을 소재로 이용합니다. 그리고 주인공이 향수를 제작하고 개발하는데 얽힌 공학적인 이야기들을 꽤 비중있게 활용한 것입니다.

이 스팀펑크 SF 물 같은 이야기 구성 방식이 괴기물과 현실감을 연결하는데 훌륭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SF 이야기는 옛부터 생물학과 장기이식과 같은 소재를 프랑켄슈타인과 같은 공포물로 훌륭히 발전시킬 수 있는 좋은 선례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대부분의 SF 소설들이 환상적인 요소와 사회비판적인 성찰, 그럴듯한 현실감을 잘 버무리려고 노력합니다. 그렇듯이, 비슷한 방향으로 소재들을 모아 전개하는 "향수"도 이런 면에서 유리하게 이야기를 엮어 나가고 있습니다.


(영화속 과학기술자라면 색색깔 용액을 섞는 모습이 기본)

인구 밀도가 극단적으로 높은 파리 시내의 정경은 실제 18세기 파리를 사실 그대로 재현한다기 보다는, "여인의 음모 Brazil"나 "블레이드 러너"의 도시처럼 과장되어 묘사 됩니다. 거대한 건물들과 그림자진 뒷골목, 밤의 음침한 느낌이 가득하도록 그 필요한 특징만 심하게 부풀려 꾸민 것입니다. 다리위에 빽빽하게 늘어선 낡디 낡은 고층건물들의 모습은 그 중에서도 꽤 보기 좋은 것입니다. 거대한 규모의 멋이 살아나면서도 음울한 느낌은 풍부하고 강과 도로의 모습은 지리상의 개성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그 모습은 프란츠 카프카의 "성"이나 "소일렌트 그린"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할만큼, 실재감과 괴이함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머리카락을 자른 민머리의 사람에 기름을 발랐 천으로 감았다가 서서히 다시 펼치는 모습은, 인간복제나 인조인간을 만드는 장면과 같은 분위기입니다. 희생자가 향기를 추출하는 거대한 유리 용기 속에, "표본실의 청개구리"와 인어공주가 섞인 모양처럼 들어 있는 모습은 그 모습 그대로 스팀펑크 SF의 한 경지를 보여 줍니다. 이런 내용들은 제작비를 퍼부은 풍성한 소품과 미술로 인상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보게, 돈 많이 들인 세트 같지 않은가?)

이렇게 이야기의 중심 줄기가 튼튼한 것은 끝까지 그 값을 하는 듯 합니다. 예를 들면, 이 영화의 결말 장면 역시 이러한 이야기의 방향 때문에 그런대로 무난하게 완성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영화의 결말 부분은 꽤나 변태적이고 시각적인 충격을 높일 수 있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제작면에서도 상당히 많은 비용을 때려넣은 장면으로 보입니다. 영화 화면에서 이런식으로 좀 과격한 일을 벌이는 것은 내용이나 상영시간 동안 이어온 분위기보다는 그 보여주는 난리통 자체가 순간적으로 지나치게 자극적으로 화면에 나타날 위험이 있습니다.

수백명의 군중이 등장하는 결말부분에서 선정적이고도 혼란한 상황이 화면을 긴시간동안 가득 메우는 것은 문제의 소지가 될지 모릅니다. 다른 이야기와 다른 감정은 다 무너져 버리고 그 선정성에 영화전체가 휘둘릴 수 있습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난잡해 보일 수도 있고,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이유없이 징그러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나키스트"나 "청연" 같은 영화에서, 무의미한 자극적인 고문 장면을 넣은 것이, 이야기를 갑자기 끊어버리고, 쓰잘데 없이 분위기만 어두워졌다는 느낌을 받을법도 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줄거리 덕분에 그보다 더 자극적인 장면을 펼쳐놓고도, 역효과는 좀 더 적은 편입니다. 줄거리에는 문화사적인 부분과, 초자연적인 부분이 잘 어울려 있었습니다. 그러니 영화가 고수하는 괴이한 분위기상, 충분이 이상한 일은 벌어질 수 있었습니다. 기왕에 영화가 끝나가는 마당이니 이상한 정도는 등장인물들을 절단낼만큼 막강한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줄곧 유지해온 현실적인 시각을 생각해보면, 이 이상한 일을 용이 승천하거나, 화려한 장풍을 보여준다면 좀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그런 것들로 막판 파국을 장식하기보다는,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과 같은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금기에 관한 난장판이 꼭맞게 어울릴 만합니다. 결코 현실적이지 않은 일이 화끈하게 벌이면서, 그 상황이 과격한 까닭은 현실 사회의 풍습과 규범을 환기하는데 있도록 만드는 겁니다. 이 영화는 결말을 맺는데, 완벽한 방법은 아닐지언정, 내용은 부드럽게 이어집니다. 이 영화의 파국장면은 당시 종교에 대한 변화하는 시각과 어울어지기도 하고, 답답한 중세 도덕률과 그 반작용으로 나타난 도덕적 해이에 대해서 다루는 느낌이 나기도 합니다. 장면에 맞는 좋은 이야기가 진행되었기에, 꽤 난삽한 장면으로 전락할 소지가 많은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결말부분은 가치가 있습니다.


(대파국 직전)

영화의 세부 사항들을 살펴보면, 전반부는 주인공이 자라나면서 겪는 중요한 사연들과 그 사연과 관계 있는 사람들을 주인공이 만나고 헤어지는 이야기로 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는 정말로 옛 전설 같은 기록의 느낌이 생생하게 잘 살아 있습니다. 나래이션도 듣기 재미있고, 이야기 내용도 좀 암울한 분위기를 유지해 나가는 가운데 신비롭고도 다채로운 이야기들을 잘 펼치고 있습니다. 이때, 주인공의 삶 뿐만 아니라, 주인공이 만나 주인공에게 영향을 끼친 사람들의 출신과 행적 역시 간단간단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영화 이야기의 흥미로운 특징입니다. 마치 열전이 모여 역사서술이 되듯이 정말 옛날 이야기를 듣는 느낌도 생생하거니와, 그런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함께 다루는 속에서 사회상을 묘사하는 또다른 분위기도 더 살아납니다. 물론 이야기 자체가 다양해졌기에, 이 변태 살인자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도 조금씩 웃음거리를 담아내는 면도 재미있습니다.

연출 방법 중에서 눈에 뜨이는 것은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을 크게 확대하는 수법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가진 엄청나게 예민한 후각을 화면과 소리로 나타내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이 영화는 사소한 사물을 아주 크게 확대해서 자세하게 천천히 보여주고, 작은 소리와 사소한 소음이 크게 들리게 했습니다. 비록, 향기가 직접 나는 것은 아니지만, 평소라면 제대로 들리지 않는 책장넘기는 소리, 목걸이의 구슬이 부딪기는 소리가 영화관 전체에 울려퍼집니다. 평소 같으면 흘깃 보고 지나쳤을, 가게 손님들이 떠드는 모습따위를 한 장면 한 장면 천천히 세세히 크게 확대해서 훑어가며 보여줍니다. 뭔가 자세하게 관찰하고 깊게 집중했다는 느낌이 자연스럽게 표현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감각을 집중해서 냄새를 맡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이런 수법은 세르지오 레오네가 감독을 맡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 같은 서부 영화에서 화려하게 활용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 수법은, 그런 연출 때문에, 주인공이 그만큼 집착하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느낌도 같이 전해지기에 더욱 재미있습니다. "향수"에서는 주인공이 보고 있는 조그마한 자두가 화면 중앙에 거대하게 확대되어 보이고, 자두를 자를 때 나는 과즙의 찰박거리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립니다. 그러다보니, 주인공이 그만큼 감각을 집중시키고 있다는 느낌을 전해줌과 동시에, 그만큼 주인공이 신경쓰고 몰두하고 도취되고 있으며, 너무 심하게 도취되어 막말로 말해서 중증 변태라는 인상도 심어줄 수 있었습니다.


(칙칙한 배경, 변태살인마와 선명한 붉은 머리, 노란 자두)

또다른 연출 방법은 세상을 더럽게 한 것입니다. 이것은 일단 갑자기 인구가 폭증한 도시 생활을 묘사하는 밑천이 됩니다. 모두 꼬질꼬질하고 위생관념 없이 싸돌아다니게 했습니다. 특히 영화 초반부에 당시의 비정상적으로 높은 영아 사망률을 묘사하는 장면은 좀 섬뜩한 면도 강하게 드러납니다. 주인공은 항상 때와 검댕이 묻은 모습으로 항상 나오고, 질척거리는 길바닥과 그을리고 칠이 벗겨진 건물로 세상은 가득차 있습니다. 색상은 칙칙한 회색이고, 질감은 거칠거나 찐득거립니다. 시장통 생선 같은 죽은 동물이나 생선내장 같은 좀 역겨운 것들을 가끔씩 보여주면서 이런 면을 억지로 강조하는 수작까지 부렸습니다.

이런 모습은, 나중에 주인공이 신경을 집중할 때 강조해 주는 효과에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즉, 주인공이 감각을 예민하게 기울이는 대상은 반대로, 깨끗하고 산뜻하고 색색깔의 유채색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다른 것들과 선명하게 대조를 이루고, 더욱더 눈에 뜨이고 더욱더 집중해서 느낀다는 기분을 들게 합니다. 검은 그늘이 진 어두컴컴한 파리 뒷골목의 회색 길바닥을 주인공은 배회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노란 자두를 든 빨강머리를 천천히 확대해 보여주면 그만큼 인상이 강해지는 것입니다. 어두운 도시에 대조되면, 색색깔의 꽃잎들이나 푸른 들판의 정경, 향수 가게의 화사한 귀분인들의 모습도 그만큼 선명해집니다.


(무채색 도시와 유채색 향수가게)

주인공이 자라나며 만나는 사람들을 차례로 짚어가며, 흥미 있는 이야기거리 중심으로 진행되던 이야기는 주인공이 파리를 벗어나면서 분위기가 바뀝니다. 주인공의 변태성이 도를 넘어서 아예 작심을 하고 연쇄살인을 하기 시작하면, 이야기는 앞부분과 같은 옛날 이야기 분위기는 좀 옅어집니다. 대신에 전형적인 공포물 연출로 변합니다.

물론 진짜 놀래키고 잔혹한 장면을 보여주는 공포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핏방울 조차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잔혹한 장면은 거의 없는데다가, 으스스한 느낌이 앞부분에 비해 심하게 강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연쇄살인이라는 소재를 다루느라, 이 영화는 이 부분을 이야기로 꾸미는 데 "할로윈" 시리즈 같은 살인마 영화와 비슷한 수법을 자주 활용하고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이런 영화들이 완급 조절을 위해 사용하는 실없는 코메디입니다. 주인공의 뒤에 뭔가 조마조마하게 다가오는 듯한 느낌이 들고, 관객들은 주인공이 곧 공격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긴장하게 됩니다. 그러다 갑자기 놀래키는 음악과 함께 사실은 그게 살인자가 아니라 주인공 친구라는 것을 밝히는 장면 말입니다. 이런 장면은 수많은 잡다한 공포영화에서 과하게 남용한 연출방식이라서 자칫 재미없어지기 쉽습니다.


(공포영화처럼 찍어 보자는 말일세.)

이 영화 역시, 정통 공포물과 같은 형식으로 이야기가 바뀐 부분은 앞부분에 비해서 좀 재미가 없습니다. 전반부 다양한 인물들을 다루면서 자꾸만 바뀌어가는 다채로운 배경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에 비해, 살인이 벌어지는 후반부는, 한 도시로 무대로 고정하고, "샤이닝"에서 "프롬 헬"에 이르는 연쇄살인물 이야기로 구성했습니다. 드넓은 미로 정원을 미행과 범죄의 무대로 사용한 것이나, 성곽도시의 어두운 골목들을 죽음의 장소로 설정한 부분처럼 개성이 드러나는 면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초반의 분위기보다는 다른 이야기에 비해 특이한 재미는 좀 없어집니다.

이렇게 흔한 살인마 이야기로 내용을 바꾸었기에, 이야기의 시각이 갑자기 어색하게 바뀐 문제도 있습니다. 초반에는 주인공의 감정과 주인공의 인생을 다뤄오던 주인공 중심의 시점이었습니다. 그랬던 것이 후반에는 연쇄살인마를 일종의 "주인공 괴물"처럼 관찰하고 재난의 원인으로 지켜보는 공포물, 괴수물로 변해 버린 것입니다. 차라리, 갑자기 주인공이 자취를 감추는 것처럼 해서, 아예 주인공의 흔적이나 짧은 모습만을 보여줬다면, 신비롭기라도 할 것입니다. 그러면 주인공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데 대한 기대감 비슷한 것이라도 커질 텐데, 그렇게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주인공이 왜 살인을 하는지, 살인을 결심하고 계획하고 도망다니는 심경이 어떤지 하는 면이 잘 전달되지 않아서 비는 느낌이 생깁니다.


(대체 왜 죽이고 다니는거야?)

이 부분이 이렇게 좀 약해진 데는 일단 초반과 후반의 전환점이 되는 동굴 장면을 지나치게 가볍게 넘어간 데서 원인을 짚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주인공은 향수에 대한 기술 연마를 위해서 파리에서 후반부의 무대가 되는 중소도시로 떠납니다. 그 중간에 산을 넘다말고 어느 동굴에 들어갔다가, 일종의 면벽수도 비슷한 것을 하다가 문득 암울한 깨달음을 얻는 일이 일어납니다. 당연히 무슨 깨달음을 어떻게 얻었고, 그래서 인간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하는 내용이 강조되는게 이야기 흐름에 유리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무슨 환상적인 뮤직 비디오 같은 것을 잘 꾸민 것이 아닌 다음에야, 어두컴컴한 동굴에서 혼자 고민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보여줄 게 적습니다. 면벽수도를 특징이 많고 재미난 긴 영화 화면으로 끌어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어쩔 수 없는 한계에 부딪혔다는 생각도 듭니다.

또 한 가지 후반부 살인마 이야기가 좀 지겨워 보이는 까닭은, 이야기 전체에 걸쳐서도, 주인공이 변화하는 양상이 좀 덜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이런 류의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사람 이야기는, 처음 부터 악마의 자식 비슷한 것으로 태어나서 결국 세상을 피 물들인다는 이야기로 꾸밀 수 있습니다. 반대로,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 났지만, 그것이 불우한 환경과 어울리다보니 이상하게 자꾸만 어긋나는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마침내 사람이 이상해지고 주인공이 괴물이 되었다는 식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잡아 보여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주인공은 불쌍하고 처량하면서도 평범한 사람의 모습으로 묘사되고, 그 불쌍한 사람이 점차 사회속에서 망가지고 흉악해지는 과정을 그려내면서 이야기의 감정과 흥미를 더할 수 있습니다.

실례로 "홍길동전"도 그렇고, "수사반장" 시리즈의 수많은 이야기들도 그렇게 공감되는 면이 많은 불쌍한 사람이 겪는 인생역정을 다루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렇게 내용을 구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초장부터 주인공을 좀 변태적인 사람으로 묘사했던 것입니다. 화를 잘내고 항상 광기에 차 있고, 처음부터 괴상한 집착과 거기에 이어지는 해괴한 행각을 종종 드러냅니다. 이것은 초반과 후반이 바뀌는 동굴장면을 세세하게 묘사할 수 없으니, 애초부터 좀 주인공을 "범죄형"으로 꾸민 이유 있는 일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러다보니, 후반 연출이 연쇄살인마 이야기로 바뀌면, 정말로 단순한 나쁜놈 범죄자처럼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그냥 안어울리는 "13일의 금요일 2007년판"의 잔혹장면 삭제판 처럼 아류작스럽게 보일 때도 있습니다. 화학과 가공기술, 유통과 상업에 대한 통찰은 심하게 비중이 적어집니다. 결국 제목이 "향수"임에도 불구하고, 막상 다채로운 향수나 향수의 영향과 가치를 설명하는, 정말로 향수에 관한 부분은 많지 않게 되었습니다. 겨우 더스틴 호프만이 등장하는 잠시의 시간 정도 입니다.


(싹수가 노란 어린 주인공)

연쇄살인마 공포물의 평범한 이야기 전개가 아까워지는 또다른 요소는 살인사건의 희생자들이 조금 재미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아리따운 젊은 여자들만 줄줄이 죽어나가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향수라는 소재와 더불어 후반부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입니다. 이것은 2차대전으로 세상이 바뀌기 전, 여자를 들판에 피어 있는 꽃으로 여긴 옛 사회의 한 측면입니다. 여자는 꽃이요, 지나가던 사나이가 그 꽃을 꺾는 다는 옛 문화를 직접적으로 상징하여 풍자하거나 비판하거나 또다른 특징을 드러낼 수 있는 소재였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이런 소재는 좀 묻혀버렸습니다.

연쇄살인 범죄에 얽힌 내용들을 보여주는 중에, 도시의 발전, 기술의 변화, 종교와 사상의 흐름 등등은 재미난 배경과 흥미로운 풍자로 구체화되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사건의 희생자들만은, 그런 식으로 개입되는 정도가 훨씬 약합니다. 역할이 공포물 희생자이다 보니, 그냥 다른 칼질 공포영화에서 막판 대결과 반전 이전에 죽어나가는 단순한 희생양에 머무는 듯합니다. 그나마, 특별히 잔혹한 장면 없이도 영화 전체에 퍼져 있는 변태적인 느낌을 이어간 것이 연결된다는 느낌을 주는 효과는 있습니다. 잠자는 듯 가만히 누워 있는 희생자들의 아름다운 자태들을 다양한 각도로 묘사해서, 기묘한 느낌을 이어갑니다.


(희생당할 것인가?)

후반부를 중심으로 좀 부족한 점들을 이야기했습니다만, 실은 이 영화는 후반부도 심하게 이상하지는 않습니다. 거기에는 단연 음악을 연유로 꼽을만 합니다.

이 영화의 음악은 신비롭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풍성하게 유지합니다. 그러면서, 파국적인 느낌에 필요한 장중함이나 거창함도 잘 살리도록 잘 만들어져 있습니다. 동시에 음악 자체의 곡조가 구슬프고 애절한 느낌으로 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영화가 신기함에 집중하는 괴기물이라기보다는, 문화의 옛모습과 극단적인 감정을 다루는 심각한 이야기인 듯 보이는 힘을 줍니다. 앞부분에 보면, 음악을 잘 사용하지 않고, 쿵쿵대는 심장소리를 들리게 해서 긴장감을 높이는 부분이 있습니다. 음악이 부족한, 이 부분을 보면, 비슷하게 만든 "터미네이터'의 심장소리에 비해 좀 부실해 보입니다. 아주 개성적인 음악은 아닐지언정, 그만큼 음악이 차지하는 힘이 상당하다는 뜻일 것입니다.

음악 연주는 작곡 자체보다 더욱 훌륭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줄줄이 이어지는 연쇄살인을 박진감있게 묘사해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부분은 살인이 넘쳐나는 가운데, 사회가 혼란에 휩싸이고, 거의 종말론적인 공황에 빠져드는 저주 같은 느낌을 드리워야 합니다. 그런 모습을 역동적인 화면으로 짧고 빠른 장면들로 그려내야 합니다. 이 부분의 배경음악은 비슷한 내용을 다루는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Murder! Murder!" 같은 곡에 비하면 좀 평범한 편입니다. 다른 비슷한 영화음악들과 별차이도 없는 듯 합니다. 하지만, 곡의 연주가 상당히 충실해서, 음악은 효과적으로 분위기를 이끌어냅니다. 그래서 "이것은 사람의 짓이 아니라 악마의 짓이니 주교님께 말씀드려 신께 기도하도록 합시다!"라는 절망적인 제안으로 치닫기에 충분합니다. 한편 넓은 들판에서 멀리 떨어진 상대를 냄새로 파악하는 능력을 묘사한 부분은 촬영과 영상 기술이 한계에 부딪혀버리는데, 이 역시 음악이 잘 가려 줍니다.


(평화로운 듯 보이는 들판)

배우들을 보자면, 주인공의 스승을 연기한 더스틴 호프만과 주인공이 노리는 딸의 아버지 역할을 한 알란 릭맨을 이야기해 볼만 합니다. 더스틴 호프만은 이 시대의 향수 장인이라기보다는, 좀 21세기의 갑부 헐리우드 배우 그대로 보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심각한 분위기를 조금도 해치지 않으면서, 그와중에 소소한 웃음들을 자아내는 모습은 상당히 멋집니다. 인물이 아주 심하게 놀랐지만, 하나도 안 놀란 척 하는 모습을 하는 것처럼 연기해야 하는 복잡한 도전도 잘 해내고 있습니다. 알란 릭맨은 워낙에 목소리부터 뚜렷하게 특색이 있는 사람인터라, 위엄있고도 현명한 귀족역할에 처음부터 잘 어울리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악랄한 탐관오리나 취향이 괴팍한 맛간 귀족에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딸을 걱정하는 마음에 점차 억장이 무너지는 듯한 그 연기 자체는 아주 훌륭합니다. 알란 릭맨의 연기 덕택에, 대파국 장면에서 차라리 주인공이 단칼에 죽는 것이 주인공이 개인으로서 존재감을 느끼는데는 도리어 낫지 않았을까하는 역설적인 생각마저 살짝 드리웁니다.

알란 릭맨의 딸역할인 레이첼 허드우드는 잘 기용되었습니다. 비슷한 역할의 다른 등장인물들은 적당히 매력적인 배우들로 고용 해 놓았지만, 이들 중 누구도 레이첼 허드우드와는 경쟁이 되지 않도록 조절되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레이첼 허드우드가 상대적으로 월등히 더 아름다워 보여서, 영화에 꼭 필요한 대단한 미모라는 느낌이 충분히 살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밖에...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흥행작 소설이 원작입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삶 자체도 꽤 호기심을 자아내는 사람입니다. 소설 "향수"는 1985년 출간 이후 유럽각국에서 인기를 끌었고 우리나라에서도 "장미의 이름"에 맞먹는 인기를 누렸습니다. 작가들에게 끼친 영향도 구석구석 적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때 인기 MBC 연속극에서 "절대 미각" 운운하는 소재를 써먹었던 부분들이나, 단편집 "면세구역"에 실린 듀나의 소설 "오발행동"을 볼작시면 "향수"의 일부와 비슷한 부분이 상당히 보입니다.

IMDB Trivia에 따르면,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영화화 판권을 넘기면서 1천만 유로, 즉 100억원에 육박하는 거액을 받았다고 합니다. 역사상 제작된 독일 영화중에 가장 많은 제작비를 들인 영화라는 말도 있습니다.

주인공은 통칭 "그르누이"로 불리우는데, 영화 자막에서는 보통 "장바티스트"로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종교적인 느낌을 좀 더 살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다른 많은 "15세 관람가" 영화들과 공통점을 참 찾기 어려운 영화입니다.

덧글

  • 더카니지 2007/04/11 14:03 # 답글

    전 좀머씨 이야기로 파트리크 쥐스킨트를 처음 알았습니다. 그러고보니 원작 향수의 기억도 희미해지는데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군요.
  • 전설의실버팽 2007/04/11 14:21 # 답글

    전 "깊이에의 강요"로 쥐스킨트를 알았습죠. 그러다가 향수를 척 보니
    "야~~ 이 사람이 대중소설을 쓰는 날이 오다니!!"
    하고 외친 기억이....
  • 게렉터 2007/04/12 17:06 # 답글

    더카니지. 전설의 실버팽/ 저는 친구 추천으로 "콘트라베이스"를 읽었던게 처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좀머씨 이야기", "비둘기"를 읽어 보았는데, 나중에 파트리트 쥐스킨트의 최대 흥행, 대표작이라기에 "향수"를 보니, "향수"는 "콘트라베이스"를 읽기도 전에 누가 썼는지 별 의식없이 한 번 읽어 본 책이었습니다. 어렴풋한 기억입니다만, 요즘 도는 판본으로 출간되기 전에 "향수"가 한 번 소개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납니다. 예전에 세계 베스트셀러 줄거리 요약책에 한 번 나온 적 있는 것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 향수 2007/05/07 00:48 # 삭제 답글

    한 15년 전에 나왔었죠.. 꽤 두꺼웠습니다
  • 게렉터 2007/05/10 12:39 # 답글

    향수/ 추리소설 관련 웹사이트에서 타이핑해서 올려 놓은 것을 본 적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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