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복전기 蝙蝠傳奇 Legend of the Bat 영화

1978년작 "편복전기 蝙蝠傳奇 Legend of the Bat"는 고룡 원작, 초원 감독 영화입니다. 쇼브라더스 영화사에서 고룡 원작의 무협소설을 초원이 감독이나 각본을 맡는 영화로 만들던 시기에 나온 여러 1970년대 후반 영화중 하나인 것입니다. "편복"이 박쥐라는 뜻이니, 영화에는 박쥐라는 별명을 가진채 외딴 섬에 비밀기지를 꾸미고 천하의 기이한 물건을 밀매하는 괴이한 백만장자가 악당 총두목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그 상대로 초류향을 중심으로한 예닐곱명의 일행이 주인공이 되는 것이 내용입니다.


(초류향과 암살자)

초류향 이야기는 기이한 사건이 벌어지면, 사건의 진실을 풀려고 노력하며 돌아다니고, 추리와 수사 솜씨를 간간히 자랑하면서 내용을 펼치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시작하자마자, 의문의 습격, 독살음모,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 등등이 우수수 등장하면서 초류향을 모험으로 끌고 들어갑니다.

그러나, 중반부 쯤에 이르러서 내용이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으면, 초류향의 비중은 약해 집니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는 여유만만한 막강한 고수 초류향의 멋을 보여주는 내용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신에, 여러명의 일행이 저마다 각자의 사연으로 악당 총두목인 편복공자, 즉 박쥐 도련님을 만나러 가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 일행 전체가 주인공이 되고, 초류향은 그저 일행이 서로 가끔 토론할 때 사회 보는 역할, 내지는 싸울 때 가장 잘 싸우는 사람 정도에 그치게 됩니다. 이 영화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각자 성격과 신분이 다른 여러 사람들이 비밀스럽고 신기한 편복공자의 비밀기지를 향해 한 단계 한 단계, 한 관문 한 관문 돌파해 나가는 과정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이한 모험에 초점을 맞추면서, 도입부에 선보였던 사건 수사나 추리 같은 요소는 흐지부지 사라집니다.


(기이하게도 바다속 그물에 걸려든 여자들)

대신 이야기를 계속 펼쳐나가기 위해서, 여러가지 신기한 사건, 괴이한 장치들을 차례로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밤안개 속을 유령선처럼 항해해나가는 묘한 배 라든가, 배를 가라앉히려는 비밀 장치 같은 것들이 나옵니다. 갑자기 고기 잡느라 드리운 그물에서 나체의 여자들이 여러 명 걸려드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고, 불타는 강이나 얼음 동굴, 산성 용액으로 부글거리는 함정 같은 것들을 돌파해야 하기도 합니다. 살기 위해 제발로 관속으로 들어가야하는 묘한 상황이 벌어지는가하면, 목숨을 건 제비뽑기도 한 번 나오고, 감옥 탈출, 마법 무기도 나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주인공 일행은 서로 다투거나 서로 돕기도 하고, 각자의 주특기를 발휘하며 위기를 돌파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 영화는 전체적으로 보면, 검과 마법 이야기 풍의 환상 소설 비슷한 모양새 입니다. 이상하고 괴이한 악당을 향해 조금씩 미지의 세계로 일행이 나아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대체로 밤을 배경으로 하는 상황에서 음침한 느낌과 꿈과 같은 희뿌연 조명을 잘 살려서 이런 환상적인 느낌은 꽤 잘 살아나고 있습니다. 특히 아가사 크리스티의 "나일강의 죽음" 같은 책에서나 나올 법한 호화 선실과 갑판으로 된 대형 여객선을, 중세 중국에서 등장시켜 온통 중국풍으로 만든 여객선이 나오게 한 것 등등은 꽤 인상적입니다. 별로 사실적이지는 않습니다만, 그 퓨전 요리 같은 느낌이 재미있고 볼만한 느낌도 분명히 있습니다.

환상적인 분위기에 계속되어 이어지는 기이한 사건들을 구경하는 재미는 분명 이야기를 즐기게할만한 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방해가 되는 걸리적 거리는 부분이 적지 않은데, 이것들은 크게 두 가지 정도로 정리됩니다.


(화려한 여객선 선실 내부에서 범죄와 싸우는 초류향)

첫번째 걸림돌은 인물들이 좀 단조롭다는 것입니다. 이런식으로 꾸민 떼거리 일행이 함께 모험을 벌이는 이야기에서는 다채로운 인물들이 서로 티격태격하는 모습 같은 것들이 가장 재미있는 볼거리입니다. 한편으로는 그게 많은 인물들을 서로 분명히 드러나고 기억하기 쉽게 만드는 방편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신기한 사건들 사이를 이어주는 중간 다리 이야기거리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 나오는 일행들은 모두 의리있고, 과묵한 사람들 일변도 입니다. 좀 경망스러운 사람이나, 익살꾼이라든가, 비겁한 녀석이나, 실리파나, 아니면 지나치게 과장된 이상주의자 등등으로 충분히 풍성해질 수 있는 구성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은 모두 시종일관 눈썹을 찌푸린채 심각한 표정을 짓다가, "의리를 위해서라면" "의를 행하기 위해서" "내가 한 말은 내가 지키기 위해서" 라는 말만 할 뿐입니다.


(얼음 동굴의 정리)

물론 너무 인물을 살린답시고 성의없는 애니메이션이나 환상 소설에 자주 보이는 도식적인 갈등관계로 빠지는 것도 문제이기는 합니다. 이를 테면 엄청나게 자주 등장하는 "돈에 미친 실리파"와 "얼빠진 잘난척에 쩔은 귀족" 등등의 인물은 그냥 다른 이야기를 따라하는 것에 그쳐서 식상한 느낌으로 비현실적일 뿐, 잘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모두가 중세스러운 명분과 의리에 불타고 있는 이 영화의 인물들은 개성이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좀 더 인상적이고 재미있는 이야기거리를 더 끌어올 가능성에서는 아쉬운점이 더 많다고 느꼈습니다. 이 영화는 약속을 지키는 계책이랍시고 갑자기 자기 팔을 확 잘라버리는 과격한 인간이 그걸 멋이라고 여기는 장면이 있는 등, 가끔 그야말로 "수호지"스러운 중세 분위기가 강렬합니다. 그러니, 인물들을 좀 더 특색있게 조율했다면 정말 기기묘묘하고 극단적인 성격을 잘 표출시킬 수 있었을 겁니다. 지금의 모두 비슷비슷하고 모두 한결 같은 표정일 뿐인 일행들의 면면은 개선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부채로 상대를 제압하는 초류향을 연기한 적룡과 제압당한 악화)

예를 들면, "미래에 나를 죽이겠다고 한 사람을 지금 내가 살려줘야 하는가"하는 윤리문제는 꽤 재미난 소재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속에서도 흡인력있는 부분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더 많은 대사와 동작으로 표현될 수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미래의 죄는 지금의 혐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 사람이 나를 죽이겠다고 말은 했지만, 아직까지 무슨 큰 해를 끼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바로 잡아 죽이는 것은 심합니다. 하지만, 지금 닥친 상황은 직접 칼을 들고 죽이는 것은 아닙니다. 죽기 직전이 된 그가 구해 달라고 손짓하고 있는데, 그냥 모른척 "나까지 너무 위험하오" 하면서 지나가면 되는 상황일 뿐입니다. 그것은 양심에는 찔릴 지언정 크게 죄가 될만한 상황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정도 상황에서는 미래에 나를 죽이겠다고 한 사람을 살려줄 필요가 없는 것입니까. 미래의 행동가능성만을 가지고 선악을 판단한다는 것과, 소위 착한 사마리아인 문제를 동시에 품고 있는 이야기거리인 것입니다.

이런 점들을 보면, 오히려 인물들을 조금은 겁많고 악한 인간들로 했어도 좋았겠다 싶습니다. 이 영화 속 일행들은 따지고보면, 모두 서로가 서로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죽이면 득이 되는 관계로 이어져 있습니다. 한 마디로 상대방이 죽었으면 좋겠다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살얼음판을 걷는 듯 서로 협력하는 형국 입니다. 이것은 아슬아슬하고 치명적인 감정을 드러내기에 좋은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두 의롭고 멋지다보니 슬며시 없어져 버린 듯 합니다.


(산성용액이 끓어오르고 있는 함정)

두번째 걸림돌은 신기한 장면들 사이사이를 연결하는 사연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줄거리 상으로는 없지 않습니다. 신기한 일들이 벌어지고, 정체를 숨긴 사람이 정체를 드러낼 때마다 나름대로 사연과 사건의 전말은 다 준비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극적으로 드러나거나, 영화로 표현된 것은 아닙니다. 갑자기, 인물이 "사실을 말해 주겠소" 하면서, 45도 각도로 카메라를 바라보면서 기나긴 연설을 줄줄 읊어대는 것이 전부입니다. 이 연설을 읊기 전에는 복선도 아무것도 없고, 그런 사연이 있는지 없는지 상관도 없는 일들이 펼쳐질 뿐이고, 연설 뒤에도 역시 사연과는 아무 상관 없는 다음 신기한 장면으로 연결될 뿐입니다.

그렇게 아무 배경 없이 갑자기 "내가 일행을 공격한 이유" 라든가, "누구누구에 대한 암살음모가 있는 이유" 등등을 설명하려다보니, 몇 마디 말로 쉽게 수긍갈만한 핑계를 짜내기가 어려워 졌습니다. 사실 사람 죽인다는게 심심해서 호박씨 까먹는 일과는 다른 것 아닙니까. 그러다보니, 이 이야기는 갑자기 "사실은 부모님의 원수였다" 라든가 "사실은 자식의 원수였다" 같은 출생의 비밀을 아주 남용합니다. "사실은 이 사람이 니 부모다"나, "사실 이 사람들은 삼촌 조카 관계다" 같은 것을 한 두 번도 아니고 거의 십여분 마다 한 번 씩 구경하는 느낌이 듭니다.

이렇게 앞뒤를 연결히지 못하는 내용 덕에, 의협심으로 피가 끓는 주인공들을 좀 싱겁게 보이게 하고, 장난스럽게 보이게 하는 악영향이 큽니다. 똑같은 소재와 인물들로 연결되는 전체 긴 줄거리만 다르게 잡는다고 해도, 훨씬 더 흥미로울 법한 내용이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불타오르는 강)

끝으로 이상의 장단점과 함께, 이 영화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은, 이 영화의 살짝 오페라 같은 연출 입니다. 세트 촬영에 치중하는 쇼브라더스 영화사의 옛 영화들이 황매극의 전통과 이어지며 무대극 같은 분위기가 나는 일은 자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특히 이런 점이 부각되어 있습니다. 곡조와 연주가 두드러지는 음악 사용부터 도입부와 결말부에서 전형적인 오페라 풍인 데다가, 거의 영화 전체가 모두 세트 촬영과 폐쇄된 실내 공간을 무대로 하고 있는 덕에 더욱 그런 느낌이 강합니다.

다행히 이런 연출은 신기한 함정과 기이한 사건을 연달아 보여주는 이 영화의 장점에 도움이 됩니다. 화려하고 세밀한 세트는 정성들인 무대 장치를 보는 재미를 잘 전해 주고, 배우들의 모습과 강조하는 순간에 들어맞는 조명 사용도 효과가 좋습니다. 정작 마지막 결전 부대는 신비스러움을 강조하려 울긋불긋한 조명을 너무 남발해서 불필요하게 잡스러워질만큼 무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적룡과 악화등의 명배우가 활약한 무술 장면들은 이야기사이에 삽입된 발레 장면처럼 흥겹도록 매우 빠르게 칼날을 주고 받는 등, 흥겹습니다. 그러다보니, 괴기물스러운 탐험 이야기가 갑자기 자폭작전 운운하면서 엄청나게 비장해지는 널뛰는 듯한 감정 역시, 나름대로 오페라의 막과 장이 바뀌면서 확 기쁨과 슬픔이 반전하는 듯해서 대충 이해될 법도 합니다.


(편복공자의 비밀기지)

어둠속에서 혈투를 벌이는 마지막 결전은 이런 연출이 문자그대로 "빛을 발하는" 부분입니다. 잘 안보이는 사람들과 잘 안보이는 사람들이 안보이는 사람들이 어둠속에서 싸우는 속고 속이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관객들은 잘 볼 수 있도록 흥미롭게 펼쳐내고 있습니다. 공격 수비의 타격감은 완벽하지 않을지라도, 상당히 돋보이는 싸움장면인 것만은 틀림 없습니다. 물론 박쥐 도련님이 왜 "박쥐"라는 별명을 가졌는가 하는 애초의 초점 역시 호기심을 끌며 이야기를 즐기게 해 줍니다. 관속에 들어간 사람들이 바다 위를 떠도는 모습은 에드가 앨런 포 소설에서나 볼법한 시적인 느낌을 고즈넉하게 화면위에 보여줍니다.


그 밖에...

고룡 원작, 초원 감독의 영화 "초류향" 성공 이후, 바로 뒤이어 나온 초류향 이야기가 이 영화입니다. 대체로 부채를 주무기 삼아 싸우는 여유만만한 초류향의 모습은 뒤이어나온 정소추의 초류향이 원조로 불리웁니다만, 이 영화등에서도 초류향은 부채를 잘 사용합니다. 어쨌거나, 초류향이 나오는 영화치고는 별로 초류향 고유의 멋부리기나, 초류향이 다양한 재주를 보여주는 면은 없는 영화입니다.

"초류향"에 초류향으로 나왔던 초류향은 또 초류향으로 나옵니다만, "초류향"에 나왔던 악화는 이번에는 다른 인물 역할을 맡아 시치미 뚝 떼고 나옵니다.

원작 소설은 국내에 여러형태로 번역 출간된 것으로 압니다만, 영화는 개봉, 출시가 어떻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영화는 원작과는 내용에 차이가 있다고 하며, 후에 소설을 다시 TV나 영화로 만든 것과 이 영화도 상당히 초점이 다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핑백

덧글

  • 조홍일 2007/05/09 18:46 # 삭제 답글

    게렉터님 대전 안오시나요?
    술링이 하고 싶어요.
  • 게렉터 2007/05/10 12:38 # 답글

    조홍일/ 아마 곧 가게 될 것입니다. 꿈과 희망이 봄소풍 잡상인처럼 끝없이 넘실거리는 모교가 있는 그곳에 어찌 머물지 않겠습니까.
  • 길손 2007/07/04 22:50 # 삭제 답글

    혹, 이 영화 제대로 본거요.....
    비평을 자세히 봤는데요
    원작 영화 내용과 많은 차이 맟 괴리가 있는 것 같아서 지나가다 몇자 적습니다
    아무리 봐도 이 영화를 제대로 본 것 같지가 않습......
  • 길손 2007/07/04 23:01 # 삭제 답글

    사실은 이 사람이 니 부모다"나, "사실 이 사람들은 삼촌 조카 관계다" 부모다"나, "사실 이 사람들은 삼촌 조카 관계다"
    십분마다 안 나와요 특히 삼촌조카관계는 끝날때까지 없습니다
    그리고 "불타는 강" 이아닌데요
    지하동굴에서 자연 분출되는 흑유(원유)에 불을 붙여서 "흑유편표"(중국말)인데요
    그리고 산성용액이 끓어오르고 있는 함정-> 끓어오르면 산성이 증발해서 없어지지요
    혹시 영어자막으로 보셨나요................ㅋㅋㅋ
    좌우지간 재미난 표현이라서 독특하네요
  • 게렉터 2007/07/09 14:26 # 답글

    길손/ 중국어 자막으로 보았습니다. 삼촌 조카 관계는 초반에 "자기가 자기 팔 자르는 사람"을 비롯해서 일가가 수두룩 나올 때 나오게 됩니다. 십분마다 나오는가 하는 것은 좀 과장일 수도 있겠습니다. 정확하게 엄밀한 말을 쓰지 못하고 가볍게 글을 쓰다보니, 불타는 강 이나, 부글거리는 산성 용액 같은 말로 이야기한 부분은 좀 다른 느낌으로 읽기도 하셨나 봅니다. 앞으로는 더 좋은 글 쓰도록 해 보겠습니다.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