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리비안의 해적: 세상의 끝에서 Pirates Of The Caribbean: At World's End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 세상의 끝에서"는 동인도 회사가 중심이 된 대대적인 해적 박멸 사업을 보여주는 도입부로 시작합니다. 실제 이야기는 싱가폴의 화교 해적 소굴에 주인공 일행이 찾아가는 것이 처음인데, 그곳에 간 이유는 "죽었다 깨어나는" 꼴을 보기 위한 준비를 하기 위해서 입니다. 죽은 사람을 깨운 일행은, 몇 가지 이유 때문에 "배들의 공동묘지"로 가서 온 세상 해적들을 다 만나고, 마침내 그곳에서 일행을 쫓아온 동인도 회사의 해적 토벌대와 결전을 벌이는 것이 영화의 절정입니다.


(화교 해적 소굴로 들어가는 엘리자베스)

이 영화는 제목이 "캐리비안의 해적" 입니다만, 사실 캐리비안과도 상관이 없고 해적과도 별 상관이 없습니다. 이 영화는 대항해시대의 시대감각을 살리는 배경이나 사건, 인물들이 거의 등장하지 않고, 그 시대의 카리브해의 상황을 소재로 삼지도 않습니다. 동인도 회사가 등장하고 범선과 대포들이 나오기는 합니다. 하지만, 동인도 회사는 이름만 동인도 회사 일뿐 실제 동인도 회사가 했던 일이나 모습과는 거의 아무 상관이 없는 그냥 악의 제국 군단일 뿐입니다. 그나마, 대포와 구식총, 칼 같은 무기들은 조금은 예스러운 느낌이 나기도 합니다만, 이 역시 영화에서 결정적인 사항은 아닙니다.

더우기, 이 영화는 소재가 해적이고 주인공들이 해적이라고 하지만, 해적과도 별 상관이 없습니다. 이 영화에는 온 세상 해적들이 다 등장하지만, 영화 전체를 통틀어 해적질하는 장면은 거의 한 장면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 영화의 해적들이 굳이 "해적"이라고 불리우는 까닭은 생긴 모습이 좀 지저분 하다는 점 정도일 뿐, "해적"이라는 신분 내지는 직업은 거의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결국 이 영화는 "대항해시대 카리브 해 해적들의 옷을 걸친 인물"들이 나올 뿐인, 나니아 연대기나 해리포터 시리즈, 바리데기 전설 같은 환상소설, 검과 마법 이야기 같은 모험담인 것입니다.


(좌우는 죽은 사람, 가운데는 총독급 "영국" 귀족의 외동딸)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꾸몄다면 가장 먼저 떠오를 만한 것은 아라비안 나이트 에 섞여 전해내려오는 걸작 고전인 신밧드 이야기일 것입니다. 선원들이 미지의 세계로 항해를 떠나고 그러다 이상한 곳에 휘말려들어 생전처음 보는 괴수들과 싸우고, 이상한 민족들과 다툼을 벌이는 이야기가 흥미롭게 펼쳐질 것입니다. 그러다 천신만고 끝에 보물을 찾아 귀환한다는 내용으로 끝을 맺을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배를 타고 먼곳을 떠도는 사람들 특유의 기이한 야생동물 목격담, 해괴한 이국 문화 풍물담이 자연스럽게 과장되므로 생생한 생명력을 얻기 쉽습니다. 정글과 고원의 다채로운 경치, 다양한 문화권의 화려한 모습을 볼거리로 펼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환상적인 모험담이기는 하되, 이런 신밧드 이야기류의 항해 모험담과도 또 전혀 다른 형식으로 꾸몄습니다. 이 영화속에서 괴물이나 괴물 비슷한 것들을 무척 자주 나오지만, 이들은 자연적인 야수가 아닙니다. 모두가 다 마법과 주술과 관련된 신비로운 존재 입니다. 이 영화속에 나오는 괴물 및 이상한 인물들은 복잡한 종교 신화 체계 속에 걸맞는 것들입니다. 조건과 예외 규정이 혼란스러운 겹겹의 저주가 감싸고 있고, 별별 복잡한 규칙이 넘쳐나는데다가, 쓸수 있는 상황이 엿장수 마음대로인 마법들이 난무하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이 영화속에서 해적들이 탐험하는 세계는 대항해시대 카리브해도 아니요, 바다 저편 신밧드가 한 번 가봤다는 미지의 섬도 아닌, 종교적이고 우화적인 세상이 됩니다. "신곡"이나 "천로역정"에나 나올법한, 이상한 상징, 자잘한 규정, 장황한 배경설명으로 휩싸인 여행이 이 영화의 내용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런 탓에, 연옥에 갖힌 잭 스패로우 선장은 "매트릭스" 2,3편이나 "에반게리온" 후반 에피소드에 나오는 억지로 집어넣은 모호하면서 약간 지겨운 철학적인 환상을 경험합니다. 등장인물들은 명색이 해적인 주제에 차분하게 종교 지도자의 말을 따르고, 얼토당토 않은 자살 행위를 시키는대로 그저 따라할 뿐이라서, 인물의 생동감이 죽고 갈등의 긴장감도 꽤나 줄어 들어 버립니다.


(뭔가 이해할 수 없는 규칙인데.)

이러한 구성은 앞뒤를 살펴보건데, 무슨 심오한 이야기를 하려고 짠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제작진은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어림없는 일을 벌이고, 주요 등장인물인 여러가지 괴물 스러운 인물들을 하나의 소동으로 엮어야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러면서 "바다의 공동묘지", 화교 해적, 대함대의 해상 결전 같은 소재들을 줄거리에 포함시켜서 보여 주려고 합니다. 게다가 나침반, 심장 같은 특수 마법 도구 까지 이야기에 접붙이려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전혀 다른 상황에서 적군과 아군으로 활약했던 인간들을 억지로 모으기 위해 온갖 핑계거리를 주렁주렁 깔았습니다. 그 결과 "마법의 조건"에 해당하는 복잡한 변명을 장황하게 늘어 놓은 것입니다.

주인공이 불구덩이 속에 기름을 지고 뛰어드는 장면을 집어 넣고 싶다고 칩시다. 정상적인 상황은 아닙니다만 여러가지 다양한 극적인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하필 주인공이 "불을 좋아하는 불나방신의 저주에 걸렸다"고 한 뒤에, 어느 마녀가 거머리를 기름통으로 변하게 하는 마법을 걸어서, 주인공등에 딱 달라 붙게 했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자니, 왜하필 마녀가 거머리를 기름통으로 변하게 했는지, 기름통이 왜하필 주인공에게 달라 붙었는지, 이런 이상한 마법을 쓰는 마녀가 어째서 세상에 있을 수 있는지, 불나방신의 저주를 푸는 방법은 무엇인지, 주인공은 어쩌다 불나방신의 저주에 걸렸는지 등등에 대해 온갖 구구한 설명과 납득하기에 상당히 헷갈리는 조건, 상황 설명을 덧 붙여야 합니다.

이렇게 앞뒤 왔다갔다하는 이상한 상황을 마법 조건으로 때워서 뭉치게 만든 이야기를 만들었으니, 많은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야기 자체에 필요 없는 심오함과 심각함이 흐른다는 것도 문제고, 웃긴 해적들이 싸움질 하는 이야기에 괜히 별 도움도 안되는 복잡한 세계관을 어지럽게 설명하느라 조금은 지겨워질 수도 있는 것도 문제 입니다. 그 중에서도 인물로서 가장 이상한 위치에 놓여버린 사람을 꼽는다면, 부두교 주술사 입니다.


(가라는데로 가 봅시다. 뭔지 모르지만 말이 길고 대사가 많았으니 맞는 말아니겠습니까)

이 부두교 주술사는 원칙적으로 옛날 이탈리아에서 찍어내던 싸구려 신화 영화 등에 심심하면 등장하는 "해설가 여자 주인공"입니다. 이런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은 용기 있고 칼싸움 잘하는 소위 "용사"입니다. 이 사람은 여러가지 모험을 겪어야 하는데, 왜 그런 모험을 겪어야 하는지 표현하기는 좀 귀찮습니다. 그럴 때, 여자 주인공을 한 명 내세워서, 설명 역할을 모두 떠맡기는 것입니다. 여자 주인공은 보통 마법에 걸려서 인간의 모습이 된 요정이나 여신, 혹은 왕궁의 비밀을 모두 알고 버려진 공주 마법사 등으로 나옵니다. 그러면 이 여자 주인공이 "마왕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지혜의 샘에 가야하고, 지혜의 샘에 가는 지도를 얻으려면, 불사조의 둥지를 뒤져야 해요." 따위의 대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여자 주인공이 이 핑계 저 핑계를 대사 몇마디로 읊어 주면, 남자 주인공이 그 말대로 이 산에 올랐다가 저 동굴로 기어들어갔다가 하면서, 거인, 흡혈귀, 반인반마, 용 등등과 싸돌아다니며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부두교 주술사가, 신비롭고 기이한 투로 치장된, 그래서 알아듣기는 어려운 이상한 말을 주절주절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인물은 행색으로 보나, 모험에 개입하는 비중으로 보나, 그간의 인물간의 갈등관계로 보나 사실 별 중요한 인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 영화에서 온갖 이상한 짓을 하는 설명역을 다 맡고 있습니다. 정도도 심해서 무슨 도선국사나 간달프라도 되는지, 온 세상과 세상 밖의 일을 다 아는냥 행세 합니다. 그런 주제에 이런 영화의 습관대로, "붉은 빛이 동쪽에서 나올 때, 물과 불은 테크노댄스를 출 것이리" 같은 가짜 고대 암호해석은 꼭 남자 주인공에게 넘깁니다. 그러면 남자 주인공이 멋진 기지와 훌륭한 추리력으로 암호를 해석했다면서, "붉은 빛이란 것은 싸이키델릭 조명을 말하는 것이야!" 따위의 어색한 풀이를 하고 감탄하는 분위기를 이끌어 갑니다.

사소하게 등장한 인물에게 너무 거창한 분위기를 잡게 한 것이 이상한지, 영화 후반에 이르면 부두교 주술사는 갑자기 엄청나게 중요한 인물로 확대됩니다. 진짜 울트라맨 처럼 막 확대됩니다. 갑자기 다른 주요 등장인물과 옛날부터 관계가 있었다는 과거사 미화를 하기 위해 단 한번도 암시되지도 않았던, 삼각관계를 갑작스럽게 제시하기도 합니다. 전세계 해적들의 운명과 차원을 넘나드는 종교적인 이야기를 풍긴 주제에 갑자기 사소한 개인적인 삼각관계로 빠지는 것이 약간 당황스럽기도 하거니와, 이 삼각관계가 진지하고 심각하게 묘사되지도 않았고 비극적인 서사시도 아닌, 그냥 가벼운 짝사랑 이야기일 뿐이라서 싱겁다는 점도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어딜 봐서 그렇게 중요한 인물이란 말인가)

무엇보다 치명적인 것은, 그래서 막상 끝까지 보면 역시나 이 인물은 사실 아무 비중 없는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이 인물은 막판에 조금 난리를 치는데, 그 난리치는 시간 한 2,3분간이 끝나고 나면, 이후로는 아무도 신경쓰는 사람이 없습니다. 별별 저주와 마법의 핵심인물인척 하지만, 영화 절정의 싸움에서는 나오지도 않고 이 사람을 기억하는 사람도 없는 듯 합니다. 영화의 절정인 마지막 결전은 이 인물이 그 기나긴 설명으로 읊어댄 복잡한 사연과는 무관한 그냥 총칼과 항해술로 겨루는 결투로, 이기는 쪽이 이기는 이유도, 이 부두교 주술사와는 별 상관이 없고, 싸우는 중에도 이 부두교 주술사에 대해서는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 이야기로 흐르니, 절정 부분의 결전을 앞두고 부두교 주술사가 설명해준 마법세계의 다양한 이야기들은 연결이 안됩니다. 그런즉 대신 또다른 싸움의 동기가 필요합니다. 이 영화에서는 급하니까 그것을 주인공 한명의 "감동적인 연설"로 때웁니다. 그런데 이 연설이란 것이 놀랍게도 양아치 해적들을 모아놓고 "자유와 인권의 가치"에 대해 눈물을 글썽이며 열정적으로 웅변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장 연설에 해적들은 감화되어 목숨을 버리며 싸우려 하는데, 이 모습은 영화 전체에서 가장 어색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보다야, 차라리, 용맹한 군인과 예비군들에게 대통령이 애국심 소재로 연설을 해서 출격을 응원하는 "인디펜던스 데이"의 연설장면이 많이 나아 보입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은 감동적인 연설 뿐이다)

또다른 부작용은 이런 마법과 주술 대결에 관해 덕지덕지 조립된 이야기를 꾸민 덕분으로 악당 두목과 주인공의 비중도 쪼그라들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절정 장면 직전까지 저 유명한 잭 스패로우는 그냥 다른 일행들 사이에 얹혀서 따라다닐 뿐입니다. 그러면서 가끔 이야기가 너무 심각하다 싶을 때 만담을 좀 해주는 것 정도가 역할입니다. 그외에 유일한 역할은 투표권을 한 번 행사하는 것인데, 이 역시 잭 스패로우 다운 헛베짱이나 오묘한 비겁함과 상관없는 현명한 전략적 판단에 불과하기에 별 대단한 행동은 아닙니다. 영화 전체에서 가장 개성적인 배경을 가진 인물이자, 동시에 출연료도 아마 가장 많이 챙겼을 배역치고는 참 하는 일이 없는 셈입니다.

더욱 더 하는 일이 없는 인물은 악당 총두목입니다. 이 악당 총두목은 겉모습도 별볼일 없게 생겼고 대사도 많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복잡한 음모나 욕망을 표현하는 중심 인물도 아닙니다. 하는 일은 줄창 앉아서 찻잔에 각설탕 타는 것 뿐입니다. 여유 부리는 모습으로 폼잡는 것도 한 두 번이지, 이 양반은 아무 하는 일 없이 그냥 죽어라 찻잔에 각설탕만 탑니다. 그러다가 매우 바보스럽게 최후를 맞이하는데, 역시 최후를 맞이 할 때도 아무 하는 일 없이 가만히 있을 뿐입니다. 그나마 이 장면에서 컴퓨터 그래픽 효과가 정성스러워서 얼굴이 잊혀질 정도는 아닐 뿐입니다.

영국군 제독 노링턴 역시 동인도회사 두목과 주인공 잭 스패로우 못지 않게 허망한 인물입니다. 노링턴은 영화의 모든 인물 중에서, 복잡한 마법과 주술규칙 이야기를 들먹이지 않고도 자연스러운 갈등을 표출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입니다. 자기가 사적으로 사랑하는 인물이, 공적으로는 토벌해야할 해적패라는 구도는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이야기에서 재미있게 활용된 소재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이러한 구도를 거의 전혀 활용하지도 않거니와, 노링턴의 등장과 퇴장도 무척 초라하고 심심하게 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절정인 결전 장면과 마지막 장면에는 이런 사람이 있었는지 누구도 별로 떠올리지도 않는 인물에 지나지 않게 전락합니다. 주윤발 역시 돈값에 걸맞지 않게 초라한 배역으로, 신비로운 동양인 흉내만 조금 내다가 모험 장면에는 하나도 등장 안하고, 엄청난 거물인척 하지만 잠깐 다시 나왔다가 무진장 비열한 녀석인척 하다가 한번 "쾅"하니까 엄청나게 장렬한 인물인척 하면서 후다닥 맥없이 퇴장하는 인물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런 장면은 거의 나오지도 않는단 말이오.)

이 영화에서 가장 훌륭한 장면은 영화의 절정을 장식하는 해전 장면입니다. "진홍의 도적"에 결코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각개각층의 인물들이 마구 뒤섞여 싸우는 난장판 싸움입니다. 소용돌이 격류와 쏟아지는 빗물이 배경이라서 "진홍의 도적"을 능가할만큼 더욱 혼란스럽고 박력있는 싸움 장면이 되었습니다. "진홍의 도적" 이후 해적 영화 답게, 줄타기, 칼싸움, 포격전, 총격 등등이 어지럽게 뒤섞인 화려한 싸움을 펼치는데, 이 장면에서는 이런 장면에서 등장하기 마련인 어처구니 없는 코메디 격투도 조금씩 적절하게 잘 끼워 넣었다고 생각합니다. 포탄이 날아가고, 줄을 타고 상대편 배로 건너가고, 파도에 흔들리는 배에서 나뒹구는 싸움들이, 속도와 관성을 자연스럽게 따라가면서 요란하게 움직이는 화면속에 신나게 담겨 있습니다. 음악 역시 벌어지는 사건과 휘몰아치는 힘에 어울리게 멋지게 연주됩니다.

이 장면에서는 박진감 넘치면서도 낭만적인 이야기 하나가 펼쳐지는데, 이 장면에서 바르보사의 활약은 멋집니다. 낭만적인 코메디에 잘 어울리면서도, 고유의 마구잡이 미치광이 해적의 거친 모습도 마음껏 작렬시킵니다. 다만, 이 부분의 코메디는 무척 가볍고 명랑해서, 이 영화 전체에 서려 있는 복잡하고 신기한 저주, 복수, 희생 이야기와 잘 어울리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보기에 따라서는, 어색한 억지 감동처럼 보일 우려도 없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렇게 이상하게 사연을 지어내 왔으면서도, 정작 마지막에 몰리자 어떻게든 급하게 이야기를 끝내고자 무리수를 두는 부분도 많습니다. 정교하게 주인공들의 행동을 예측하고 이용하던 악당들은 막판에 바보짓을 우수수 몰아서 합니다. 그리고 그런 탓에, 규율과 명예를 중시하는 것으로 줄곧 표현되어 있던 영국 해군들이 막판에는 해적들보다도 바보스러울 정도로 비겁해져 버리고 맙니다. 그 많은 대군을 끌고 왔다가 왜 도망가는지 도무지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결전 직전에는, 대규모 해상 결전을 준비하여, 아랍 상인들에서 화교들의 정크선 까지 세계 각지의 해적들이 모여 대군이 운집합니다. 그렇습니다만, 싱겁게도 이들의 활약은 볼 수 없다는 점도 무척 아쉬웠습니다. 블랙펄 호의 해적들 이외에는 다들 구경만 하고 있고, 해전 고유의 전략이나 전술도 전혀 볼 수 없습니다. 임진왜란 사극에서 볼 수 있을 법한 대규모 해전과는 거리가 멉니다.


(절정)

등장인물의 비중은 무척 작은 데도 불굴하고, 요소요소에서 개성을 뿜어내는 조니 뎁, 잭 스패로우의 코메디는 바르보사 정도 외에는 아무도 상대도 되지 않을 만큼 훌륭합니다. 전체 이야기에 도움이 되는지는 의문스럽지만, 정말 무슨 사후세계 모험담의 묘한 선문답 같은 기이한 환상들도 줄기려면 즐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감정은 미흡하고, 줄거리의 이어지는 관계에는 도움이 안된다고 봅니다만, 자꾸만 되돌아오는 돌멩이나, 산으로 가는 배, 망자들이 등불을 들고 저승의 바다를 헤메는 광경은 적당히 운치가 있습니다.

거의 "보물성"으로 떠나는 둘리 일행의 모험 수준으로 세상의 벽을 초월하는 모험을 하면서도, 의외로 대부분의 배경은 그저 바다 위의 선상일 뿐이라서 조금은 심심하다는 점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바다 위 선상 장면이 많은 만큼, 대항해시대의 영문학권 전설들은 옹기종기 많이 모여 있습니다. 소용돌이, 해적소굴, 배들의 무덤, 거대한 바다 오징어, "방황하는 화란인", 땅속 세계로 통한다는 북극에 뚫린 구멍, 여자 해적 두목, 해적 규약, 무풍지대. 가장 흔한 소재인 "해적의 숨겨둔 보물"과 "코끼리 공동묘지"와 흡사한 "고래 공동묘지"를 빼면 왠만한 것은 다 훑고 있습니다. 아쉬운데는 무척 많습니다만, 그나마 2시간 40분의 긴 시간동안 이 모든것들이 다 모여있는 풍경이, 그래도 최소한의 재미는 유지했다고 느꼈습니다.


그 밖에...

IMDB Trivia 에 따르면, 대본이 완성되기도 전에 촬영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키스 리처즈가 롤링스톤즈의 명성에 어울릴 만한 역할로 깜짝 출연합니다.

예고편을 보고 이번에는 대항해시대 컴퓨터 게임에서나 볼 수 있었던 명청시대 중국 정크선과 영국 군함의 3층 대포가 맞붙는 모습을 볼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런 장면은 사실상 없습니다.

덧글

  • oIHLo 2007/05/27 19:47 # 답글

    전체적으로는 실망스러웠습니다. 뭔가... 안 그래도 문제였던 대충대충 전개하기가 폭주했달까요 -_-
  • 게렉터 2007/05/28 17:57 # 답글

    oIHLo/ 다른 게시판에도 올린 이야기입니다만, 이 영화 시리즈에서 가장 멋진 장면은 1편에서 그 화려무쌍하게 배를 타고 미끌어지며 입항하는 잭 스패로우 선장이, 바닷가에 널브러져 걸려 있는 죽은 해적의 유해를 향해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하는 장면이었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항해시대 해적 낭만의 진수라고 생각한 까닭에 굉장히 즐거워했습니다.
  • 슈리 2007/05/28 23:18 # 삭제 답글

    정말 내용이 난잡하고 어지러울 정도로 사건을 많이 벌려놨지만 막바지의 전투신과 간간히 튀어나오는 유머때문에 즐겁게 보긴 했습니다^^; 3편이나 되는 현재까지 오면서 내용을 이어가느라 말도 안되는 부분이 많이 생긴게 아닌가 싶어요. 많이 부족한 제글 트랙백 걸고 갑니다^^:
  • 게렉터 2007/05/29 17:42 # 답글

    슈리/ 역시나 죽은 사람 살리기라는 가장 비현실적인 마법을 (보통 컴퓨터 게임 같은 곳에서도 죽은 사람 살리는 마법은 아주 고난도 마법이지 않습니까) 두 껀이나 끼워넣으려니 자꾸만 이상해진 듯 합니다. 그런 것 최대한 없이 그냥 크라겐과 싸워서 오징어 뱃속에서 잭 스패로우를 꺼낸다는 식으로 단순하게 가는게 좋았을지 싶은데. 무슨 드래곤볼도 아니고 말입니다.
  • x랄마린 2007/06/03 05:48 # 답글

    보고나서 감상을 써볼까 했는데 하고싶은말을 다 쓰셨네요^^

    잘보고갑니다~

    이 영화가 이렇게 된건 '후속예정은 없지만 성공하면 후속작을 찍어내는'영화라는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아닐까 싶습니다.

    매트릭스 시리즈 처럼 말이죠.

    하지만 망자의 함에서 그렇게 일을 벌려놓고 수습은 커녕 더욱더 벌려놓는걸 보면서 매트릭스는 양반이란걸 느껴버렸습니다.(...)
  • 게렉터 2007/06/03 09:01 # 답글

    x랄마린/ 영화를 보니, 저는 3편에서는 2편 마지막 부분의 상황은 그냥 도입부에 간단하게 수습해 버리고, 3편 내용은 별 상관없는 제3의 이야기로 깔끔하게 꾸미는 게 좋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 잠본이 2007/06/06 00:49 # 답글

    의리에 죽고살던 윤발이형님이 '의리보단 실리가 중요하지'라며 배신과 음모를 밥먹듯 꾸미는 인물로 등장한게 쇼크였는데 그나마 활약도 못하고 재수없이 사고당해 죽는다는 게 더 쇼크더군요 OTL
  • asdf 2007/06/10 12:00 # 삭제 답글

    3편까지 했으면 충분히 한 것이었을까요.
    매투릭수도 조금 아쉬웠던 3편이었는데...
  • 게렉터 2007/06/11 12:34 # 답글

    잠본이/ 자막으로 이름 나오는 순서, 광고할 때 비중, 심지어 출연 시간에 비춰 볼 때도 아주 비중 적은 인물이라서, 뭔가 공수래공수거라고나 할지...

    asdf/ 시간을 두고 천천히 새로운 이야기를 지어서 만드는게 나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빽 투 더 퓨처 3"가 실망스러운 3편이라는 이야기가 많이 돌지만, 그래도 "빽 투 더 퓨처 3"는 1,2에 비해 부족해서 그렇지 충분히 훌륭합니다. 그 정도로 시간이나 노력을 따로 집중하는 편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이상한사람 2007/08/01 11:32 # 삭제 답글

    님들아~ 음악도 좀 올려주시면 감솨 하겠습니다^^
  • 게렉터 2007/08/01 18:43 # 답글

    음악은 저작권 때문에 되지 않는 일입니다.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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