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스 カオス (1999) 영화

평화롭고도 어느 정도는 화려하게 저녁을 먹는 장면이 영화 본론의 시작부분입니다. 그 직후, 한 기업체의 사장은 자신의 아내가 유괴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경찰과 사장은 유괴범과 전화통화를 하면서 유괴범을 찾아내려 합니다. 영화는 얼마 후부터는 유괴범의 이야기를 하면서 유괴범의 나날을 보여주면서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유괴범 쪽의 사연도 단순하지 않고, 닥치는 운명은 좀 더 복잡하므로, 사태는 점점 더 꼬여갑니다.


(...)

이 영화는 결말을 굳이 구체적으로 직접 말하지 않아도 다음 한 마디로 대부분의 요점이 드러납니다. 이 영화는 알프레드 히치콕이 감독을 맡은 걸작 고전, "현기증"의 직접적인 영향이 매우 선명한 영화라는 것입니다. 천천히 차근차근 진행되는 분위기에서, 눈부신 오후의 나른한 분위기가 몽롱한 환상과 악몽으로 연결되는 느낌은 동일합니다. 죽었던 사람이 갑자기 다시 눈앞에서 걸어 다니기에, 그걸 주인공이 보고 경악하는 장면이 영화에서 중요한 열쇠라는 것도 일치하고, 결정적으로 영화의 추리물 수법 자체가 거의 같습니다. 뿐만아니라, 신분차이가 나는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이 미묘하게 조금씩 가까워지는 묘사도 비슷하고, 여자 주인공의 오묘한 성적 매력,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의 옷과 화장을 예전 처럼 꾸며주는 부분의 연출까지 똑같이 일치합니다. 시작과 끝의 수미쌍관법, 마지막 결말 장면마저도 동일합니다.

이 영화가 "현기증"의 장점들을 더욱더 발전시킨 부분은 두 가지 정도 입니다.


(내가 제임스 스튜어트는 아니오만, 이 옷을 입어주오)

첫번째는 여자 주인공의 매력을 묘사하는 수법들입니다. 이 영화의 여자 주인공을 맡고 있는 나카타니 미키는 킴 노박 처럼 화면을 불사르며 압도적인 위력을 내뿜는 강렬한 배우는 아닙니다. 체구도 작거니와 좀 이상한 비유기는 하지만, 킴 노박과 싸우면 1회전에 KO패 당할 법한 인상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무척 아리따운 배우이며, 또한 그만큼 더 실재감이 뚜렷한 인물로 영화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영화속의 여자 주인공은 "현기증"의 킴 노박 보다 훨씬 더 연약해 보이고, 보기에 따라서는 정신 상태도 더욱더 불안한 여자 주인공인 듯 보입니다.

이 영화에서 나카타니 미키가 빛을 발하는 대목은 그게 그냥 연약하고 정신 불안한 여주인공으로 그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외려 그 뒷면을 살려서 덕분에 그만큼 더 독하고, 음험하고, 비밀스럽고, 광기어린 면들을 살리고 있습니다. 불안한 정신 상태는 우울증과 무기력증으로 가볍게 표현하는 것이 가장 간편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여자 주인공은 정신이 불안한 나머지, 선악관도 불투명하고, 겁도 없고, 미래도 없이 막나가는 인물 비슷하게 되어 있습니다. 살짝 미친듯한 웃음을 깔깔대다가, 동시에 한방에 무기력하게 죽어버릴 것 같은 약한 모습을 내비치는 그 모습은 훌륭합니다. 킴 노박이 당당한 자태에 대조되는 가슴앓이를 보여주었다면, 나카타니 미티는 약한 모습이지만 다른사람들을 마음대로 휘두르려는 자신감을 보여줍니다.


(웃음)

이런 미묘한 모습은 비교적 순박한 남자주인공의 태도와 대조되면서 더욱 더 강조됩니다. 남자 주인공은 돈도 없고, 좀 추레하게 살며, 항상 인상을 찌푸리고 다닙니다. 그러니 돈 많고, 깔끔하게 살면서, 항상 배실배실 눈웃음을 치는 여자 주인공과 대조를 이룹니다. 그러면서, 이 영화는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워지고, 손끝이 마주치는 장면을 화면에 한가득 자꾸 담아내고 있습니다. 은근한 매력과 유혹적인 느낌은 끊임 없이 강해집니다.

여자 주인공이 옷을 갈아 입는 장면에서 등을 돌린채 거울을 잠시 훔쳐보는 장면은 두 사람 사이의 정서를 단적으로 강조해서, 그 관능적인 느낌이 꽤 근사합니다. 스톡홀름 신드롬에서 줄로 사람을 묶는 행동에 이르기까지 이상심리에 가까운 불길한 자극적인 느낌도 충분히 암시됩니다. 여자 주인공은 여기서 음모를 꾸미는 악한 모습과 순박하고 가녀린 약한 모습을 지상최강급의 내숭떨기에 담아 보여주면서 활약합니다. 반면에, 눈부신 오후 햇빛이 쏟아지는 가운데 물이 튀기는 수도꼭지를 붙잡고 있는 여자주인공의 젖은 모습은 배우의 생생한 매력을 밀어 붙이는 장면이 되었습니다.



(여자 주인공)

두번째는 이 영화의 나른한 분위기와 거기서 베어 나오는 몽롱함을 강조하는 방법이 출중하다는 것입니다. "현기증"과 비교해보면, 가장 선명한 차이는 음악입니다. "현기증"은 기가막힌 배경음악을 잘 가꾸어 내면서, 가면 갈 수록 폭발하는 격정적인 감정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중반부까지는 음악이 거의 없고, 이후로도 음악은 조금씩만 사용되고 있습니다. 곡조 자체도 지나치게 격정적이거나, 웅장한 음악과는 거리가 멀어서, 조용하고 은은한 음악이나, 혹은 단순히 긴장감을 돋구는 리듬감있는 음악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대신에 다양한 생활소음이 많이 들려오게 했습니다. 먼데서 들려오는 기차소리, 아이들 떠드는 소리, 혼자서 웃고 재잘거리는 텔레비전 소리 같은 것들이 영화 전체에 자주 서려 있습니다. 이러한 자잘한 생활소음들은 일단 그만큼 주인공 주변에 소리다운 소리가 없다는 적막함을 드러냅니다. 주인공이 듣고 있는 음악이 있다거나, 주인공 앞에서 무슨 폭발, 기관총 사격 같은 것이 있다면 이런 소리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 거창한 것들이 전혀 없어서, 저 멀리서 한가롭게 들리는 라디오 방송 소리가 슬며시 들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차분하게 가라앉은 여름 오후 분위기가 무척 잘 살아납니다.


(여름 오후)

동시에 이런 여러가지 생활 소음들은, 주인공이나 다른 등장인물들의 외로움을 나타내는 데도 무척 도움이 됩니다. 주인공이 한창 즐겁게 수다를 떨고 있거나, 다른 사람에게 신나게 설교를 하고 있다면, 이런 잡다한 소리는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공 주변에 사람이 없고, 주인공이 딱히 귀를 기울일만큼 신경을 쓰는 대상도, 신경을 써주는 대상도 없으니, 멀리서 수박 사라는 트럭 스피커 소리만 들려올 뿐입니다. 이런 효과는 속고 속이는 비정한 내용이나, 죽은 사람이 갑자기 백주 대낮에 걸어다니는 악몽 같은 상황을 몽환적으로 펼쳐지게 하는데도 무척 도움이 됩니다.

이런 부류의 연출수법이 힘을 발휘하는 또 한가지 요건은 이것이 범죄 사건의 매정함과 불안감을 드러내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영화는 발단이 유괴사건으로 시작해서, 협박, 공갈에서 나아가 살인이 벌어지기까지 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무시무시하고 살벌한 범죄가 벌어지는 고로, 피해자든 가해자든 모두 초조하고 흥분하고 걱정하고 불안해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거리를 지날 때는 여전히 행인들은 웃고 떠들고 있고, 상점 앞에서는 신나는 음악에 맞춰 물건을 파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자신에게 비극이 벌어지고 있고,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격한 심정의 동요를 느낍니다만, 세상은 별 상관없이 그냥 이전처럼 잘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잘 나타냅니다. 지금 나의 기분이야 어떻든, 언제나 똑같은 목소리로 내게 말하는 자동판매기나 지하철역의 또박또박한 아나운서 목소리도 그만큼 매정하고 감정없이 들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평범한 거리)

그만큼, 왜 나에게만 날벼락 처럼 이런 불행이 생겼나 하는 감정을 드러내는 효과도 있고, 또, 이러한 범죄의 상황을 생생한 실생활의 일부분속에서 사실적으로 보여준다는 느낌도 있습니다. 이 영화는 주인공이 거리를 헤메고 길가를 돌아다닐 때, 밝은 햇빛아래 심심하게 오가는 행인들, 거리 풍경을 좌우에 같이 담아서 보여주는데, 이 역시 이런 느낌에 많은 도움이 됩니다. 놀이공원이나 대형할인매장에서 어린이를 잃어버렸다고 해봅시다. 졸지에 미아를 찾는 보호자가 되어 식은땀이 나고, 심장이 벌렁거리는데, 귓가에는 속절없이 놀이공원이나 대형할인매장의 밝고 경쾌한 홍보용 노래가 끝없이 무한반복으로 울려퍼집니다. 가사도 "행복이 가득한 곳" "모두가 즐거운 나라" 운운할테니, 더욱 심정은 괴로워지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이 영화는 일단은 고전 "현기증"을 잘 답습하고 개량하는 것을 바탕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한 가지 특징을 덧붙여서 조금은 더 개성있는 이야기를 보여 주려 했습니다.


(킴 노박?)

그것은, 범인이 도리어 탐정이 되는 묘한 형국입니다. 이 영화는 세 차례에 걸쳐서 사건의 초점이 바뀝니다. 비유하자면, 처음에는 난자 취득의 윤리 문제 - 법률 문제 였다가, 나중에는 언론의 선정성 문제 였다가, 마지막으로는 연구논문 자체의 진실성 문제로 공방이 옮아가는 듯합니다. 이 영화에서는 처음에는 부녀자 납치 문제를 중심 사건으로 제시했다가, 점차로 더 강력한 사건들이 하나 둘 제시 됩니다. 그러면서 국면이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형국이 바뀌면서, 자연스레 범인이 탐정 역할을 하도록 절묘하게 상황이 바뀌어 갑니다.

범인이 탐정 역할을 해서 묘한 재미를 주는 이야기의 극단을 달리는 것은 역시 "탐정을 찾아라" 같은 소설이겠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 역시 그런 전환의 맛이 잘 살아납니다. 일단 범인이 끝없이 나쁜놈 혹은 최악의 악마로 잡는 것에서 벗어나서, 관객들이 외려 범인의 심정을 따라가고 범인이 조사하는 진상에 호기심을 갖게 할 수 있습니다. 범인을 응원하는 듯 하게 되고 범인에게 감정이입하게 됩니다. 단순한 대결구도를 넘어서서 인간의 심정에 대한 공감을 그려내고, 사람의 여러가지 면을 보다 입체적으로 묘사할 수 있게 됩니다. 게다가, 사건의 추이를 볼 때도, 탐정이 탐정일 때와 달리, 범인이 탐정이면 경찰측에 수사 요청을 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쫓기는 형편이니, 더 긴박감있고, 더 힘들고, 더 필사적으로 탐정짓을 하게 됩니다.


(전형적인 남자주인공 표정1)

남자 주인공을 연기한 하기와라 마사토는 뭐든지 다해주는 흥신소 겸 심부름 센터 직원을 연기하면서 희망없고 재미 없는 답답한 인생을 사는 도시 구석의 인간을 연기하고 있습니다. 힘없고 가라앉은 모습은 설득력있고, 어금니에 충치 생긴 것 같은 구겨진 표정으로 찌푸둥하게 있는 얼굴은 썩 잘 어울립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그 표정 하나로 때우고 있어서 좀 심심하긴 하고, 여자 주인공 처럼 매력과 연기실력을 흔들어 대는 수준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영화의 조금 악하고, 조금 선하고, 전체적으로 외로운 주인공으로 제몫은 충실하여 차고 넘칩니다.


(전형적인 남자주인공 표정2)

영화가 전체적으로 워낙에 "현기증"을 답습하고 있는 면이 많아서, 중언부언 보고 또 보고 하는 식상한 느낌은 한계입니다. 결말 장면이 그냥 대책없고 별 반전없는 막나가기에 불과해서, 분노와 죄책감이 마구 뒤섞이는 "현기증"보다 확연히 부족하다는 점도 아쉬운 대목입니다. 그러나 흙속에서 시체를 파내는 장면 등의 공포영화 연출을 잠시 이용해서 자극적인 화면을 잡아내는 것이 한 두 장면 들어 있는 것도 과하지 않았고, 보다 사실적인 느낌으로 가깝게 다가오는 차분하고 진실성 있는 분위기, 매력적인 주인공들의 모습은 걸작의 최신변형판으로 적절합니다. 예를 들면 영화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평범한 주택가의 애들 놀이터 같은 공터에서 펼쳐지는 점은 꽤 그럴듯 했습니다. 이 영화를 적어도 "하프 라이트" 보다는 훨씬 낫게 느꼈습니다.


그 밖에...

우타노 쇼고의 소설 "사랑 받고 싶은 여자"가 원작이라고 합니다. 우타노 쇼고의 소설 중에는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가 요즘에는 한국에서 널리 읽힌다 싶습니다. "링" 시리즈등으로 공포영화로 명망을 높인 나카다 히데오가 감독을 맡았는데, 초장부터 알프레드 히치콕 오마주를 하리라고 작정을 하고 만들었다고 합니다. 땅에서 시체 파내는 장면이 잠시 있는 것을 제외하면 이 영화 "카오스"는 보통 공포영화와는 거리가 많이 먼, 일반적인 추리물입니다.

남녀주인공인 하기와라 마사토와 나카타니 미키는 "역도산"에도 나옵니다. 여자 주인공 나카타니 미키는 최근 한국에서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으로 완연히 인기를 굳혔고, 하기와라 마사토는 일본의 드라마, 영화등에서 배용준 더빙을 많이 맡아서 일본의 배용준으로 알려진 것도 유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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