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이별 The Long Goodbye
진이 빠지도록 더운 어느 여름날 밤.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소리만 멀리서 들려오는 조용한 아파트에 앉아있는데, "Summer Time" 이나 "Laura" 주제곡 http://gerecter.egloos.com/2800683 쯤 되는 끈적끈적 늘어지는 음악이 낡은 스피커를 통해 울려퍼집니다. 도시에서 맞는 그런 여름날 밤은 나름대로 독특한 정취가 있기 마련인데, 이런 분위기에 잘 맞는 재미난 소설을 하나 골라 본다면, 40,50년대의 고독한 탐정이야기를 뽑아 볼만 합니다. 그중에 다수결로 좋은 것을 꼽아본다면, 역시 그 바닥의 달인인 레이몬드 챈들러가 1953년에 쓴 대표작 "기나긴 이별 The Long Goodbye" 일 것입니다.


("기나긴 이별" 표지)

"기나긴 이별"에는, 언제나 그렇듯이 쓸쓸한 삶을 살면서도 묘한 웃음이 담긴 독백을 담담하게 읊어대는 주인공 탐정 필립 말로우가 나옵니다. 이야기는 도입부에서 필립 말로우가 우연히 우울증 기미가 있는 어느 돈많은 젊은이를 도와주면서 시작합니다. 이 젊은이는 의문의 살인사건에 휘말리기 때문에, 필립 말로우도 같이 경찰의 조사를 받고 자신도 스스로 사건을 조사합니다. 시작은 그렇게 했습니다만, 이 사건은 뾰족한 결말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곧 더 중요한 사건이 나옵니다. 필립 말로우에게 출판업자가 사건을 의뢰하는 것입니다. 필립 말로우는 싸구려 소설로 성공한 알콜 중독자 인기작가의 주변사건을 조사하게 되는데, 그러면서 좀 더 치명적인 이 작가 주변 사람들의 사연에 휘말리는 것입니다.

혼자 도시 한구석의 좀 빈한한 탐정 사무소를 운영하는 필립 말로우가 이 두가지 사건을 조사하는 것이 이 책의 내용입니다. 필립 말로우는 사건과 관련한 각종 명단을 뒤지고, 명단에 나온 주소로 사람들을 만나고, 사람들에게 사건에 대해서 묻고, 사람들을 쫓고 그 사람들 주변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면서 이야기를 진행해 나갑니다. 그리고, 그러는 가운데 옛날 느와르 영화에 자주나오는 악당들, 주인공의 친구가 되는 사람들, 위험해보이지만 아름다운 여자 주인공들이 등장합니다.


(영화판 "기나긴 이별")

이 책에서 무엇보다 눈에 뜨이는 것은 뭐니뭐니 해도, 흘러넘치는 필립 말로우 고유의 현란한 독백입니다. 이 책에는 "진부한 비유법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겠다"라는 각오라도 한 것인지, 기이한 비유, 독특한 묘사가 끊임없이 나옵니다. 계속 계속 한 페이지에도 수십개씩 나오는듯 합니다. 이런류의 다른 소설과 비교해봐도 확실히 풍부한 편입니다. 지금 책 아무페이지나 펼쳐 보겠습니다. "문은 녹색이 감도는 잿빛으로 칠해져 있었고, 새 칼날처럼 선명한 금속제 글자가 붙어 있었다. '칸 협회 회장 제랄드 C. 칸' 그 밑에 작은 글씨로 '입구'."

그리고, 그런 것들에는 대부분 쓸쓸한 유머 감각이 서려 있습니다. 비교적 차분하게 진행되는 사건들 사이에서 이런 묘사들은 웃음을 짓게하고, 계속 책을 읽어가는 재미를 줍니다. 그런가하면, 그런 특이한 비유법 속에서 주인공 필립 말로우의 독특한 시각과 취향, 성격이 드러나기도 하고, 이를 통해서 책에서 묘사하고 있는 사회군상 여러 사람들에 대한 태도도 잘 포착되고 있습니다.

"기나긴 이별"에는 이렇게 현란한 수사법이 난무하면서도, 대부분의 묘사는 이야기 속에 잘 연결되어 있습니다. 간혹 소설에는 오직 작가가 "아무도 안해본 특이한 비유를 해보겠다"라는 의욕에만 불타서, 그저 특이할 뿐인 묘사가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묘사는 "작가가 신기한 것 한 마디 썼네" 하는 생각은 들게합니다. 그런데, 그러면 소설을 쓴 작가의 정신상태에 대해서는 한 번 생각하게 할지 몰라도, 정작 소설 속 이야기에는 별로 안어울릴 때가 많습니다. 억지로 특이한 척 해보려는 작가 자기 자랑에 머물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와는 대조적으로, "기나긴 이별" 속에는 온갖 비유법이 태평양 밤바다 파도 물결처럼 넘실넘실합니다만, 거의 전부가 이런 부작용 없이 매끈하게 이야기속에 잘 어울리고 있습니다.


(표지)

이렇게 묘사와 설명의 재미가 효과적인 것은, 아마도 이야기 분위기와 필립 말로우의 성격이 튼튼하게 일관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그 내용이 다루고 있는 사회상황과 잘 어울리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필립 말로우는 도시의 비정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으로 되어 있으면서, 거기에 어울리는 폼잡기와 과묵하며 무뚝뚝한 냉소의 극치를 이루는 인간입니다. 그런데 멋있는 것을 흉내내는 장면만 나오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구한 생활의 사소한 문제나 조잡한 사무실의 누추한 모습 같은 사실적이고 일상적인 면도 함께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필립 말로우가 술 덜깬 채 아침에 일어나서, 맛 없어 하면서 아침 만들어 먹는 장면을 세세하게 묘사하는 장면 따위가 이야기 중심과는 아무 상관없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런 장면이 필립 말로우 성격을 묘사하는 재미있는 장면이 되기도 한다는 것입다.

이 책에는 중간에 필립 말로우가 사소한 사건들을 해결하면서 보내는 지루한 일상적인 하루를 묘사하는 대목도 있는데, 이 부분의 그럴듯한 느낌은 전체 줄거리 못지 않은 재미를 줍니다. "기나긴 이별"이 이렇게 감상적이고 낭만적으로 폼을 잡으면서도, 도시 생활의 실제적인 면을 놓치지 않는 것은 특히 훌륭해 보입니다. "얼굴없는 미녀" 같은 한국 영화가 도전하려다가 못미친 그 목표를 보여줍니다. "기나긴 이별" 속 필립 말로우가 초라한 생활과 가라앉은 일상을 살면서도, 자기 나름대로의 의리와 자제를 잃지 않는 모습은 현실적인 인간의 인간미에 대한 분위기를 깔아주게 됩니다.

묘사와 설명에 들어있는 그 표현 자체의 기묘한 유머 감각 자체도 대단히 재미있습니다. 앞뒤 묘사들을 이용하기도 하고, 예전에 언급했던 이야기를 끌어오는가하면, 자조적인 것도 있고, 단정적으로 누군가를 비아냥거리며 욕하는 것도 있습니다. 상황에 맞게 적절하게 어울리고 있어서, 중요한 순간 직전에 잠시간의 긴장감을 주는 용도로 배치된 것도 있고, 큰 사건을 맞이한 충격을 묘사하는데 십분 위력을 다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풍자적인 언급이 많아서, 나름대로 어떤 비판적인 시각이 살아있는 것도 상당합니다.

그런가하면, 가끔 어디 한 번 막가보자 하면서 폭주하면서 한참 묘사 자체를 화려하게 과시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이야기에 항상 나오기 마련인 "위험해 보이지만 엄청나게 아름다운 여인"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이 책은 무려 2페이지에 걸쳐 "금발" 하나에 대해서만 끝도 없이 사설을 읊어 댑니다. 이부분은 살짝 웃기기도 하면서, 나름대로 온갖 인생살이 경험담을 들려주는 듯한 맛도 있어서 이 책의 백미로 꼽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약간 한심하게 나온 사진인 듯한 느낌도 없잖아 있는, 레이몬드 챈들러)

묘사와 꾸밈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이 책은 등장인물들도 거기에 어울릴 만큼 모양을 잘 잡고 있습니다. 주요인물 뿐 아니라 주인공이 조사를 위해 잠시 만나고 마는 사소한 인물들도 그 개성과 특징이 뚜렷하고, 나름대로 인생살이 살아온 사연이 풍성한 듯 보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인물이 입체적인 성향을 갖고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악당인지 불쌍한 사람인지 애매한 사람, 희생자인지 표독스런 음모자인지 애매한 사람 등등의 이중적인 면을 잘 보여줍니다. 그래서 인간 자체를 진짜처럼 보여주기도 하고, 동시에 "이 인간은 과연 어떤 평가를 받을 만한 인간인가"를 궁금하게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각각의 인물들의 사연, 앞으로할 행동에 대해 궁금증을 품게해서, 사건을 파헤쳐 가는 탐정 이야기에 큰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주인공이나 조연급 인물을 꼽아보자면 채 너댓명이 안됩니다. 하지만, 가볍게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다 따지면 이 책에는 십수명의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이 책 속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런식으로 세밀하게 잡혀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인물들을, 불필요하게 장황하게 서술하지 않으면서도, 특유의 묘사 속에서 그 모습을 생생하게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애완동물에 관한 사연으로 탐정에게 연락해왔다가 무시당하는 사람 같은 작은 인물도, 따지고 보면 인물의 한심함과 순박함을 동시에 보여준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 이야기는 어떤 특정 부류의 사람이나 특정 직업군의 사람만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각계각층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다 등장시키면서, 모두다 그 실상을 꽤 그럴싸하게 보여주고 있는데, 그 실력은 과연 탁월합니다. 그리하여, 자괴감에 빠진 흥행작가, 우울한 백만장자, 음침한 불법체류 외국인 등등의 인물들이 저마다 무슨 사연을 펼칠지 궁금하게 하며 그 개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표지)

이렇게 여러 인물들이 생생하게 묘사된 덕으로, 이 책은 몇몇 사회적인 현상들을 잡아내고 있기도 합니다. 멕시코-미국 관계라든지, 히스패닉 이민의 위상, 약물 문제라든지, 부유층과 조직폭력배의 관계, 경찰과 범죄인들의 위치 같은 면면들이 인물들의 뒷이야기 속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모아보면, 산업사회 부유함의 허상이라든가, 삭막한 미국 도시와 나른한 매정함의 충돌 따위의 이야기 거리를 논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기나긴 이별"속의 이런 이야기들은 따져보자면 아주 정확한 것도 아니고, 구체적으로 비판하려는 어떤 주장이나 의식을 선명히 갖고 써내려간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무슨 진취적인 면이 있다고 볼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인공이 냉소석인 독백 읊조리면서 낭만에 쩔은 고독함으로 멋부리는 이야기를 하는 마당에, 그러면서도 거기에 어울리도록 다각적인 사회의 이면을 잘 담아낸 것은 사실 입니다. 이런 점들은 이야기에 실재감과 풍성함을 주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또 비록 어떤 사상을 잘 표현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사회의 그런 모습들을 그려내서 문제제기를 했다는 것 자체도 충분히 값어치 있어 보입니다. 이런 부분과, 화려한 묘사 속에 담긴 풍자적인 요소 때문에, 이 책은 "하드 보일드 추리 소설의 묘미와 사회 비판을 잘 조화시켰다"는 평을 얻기도 했습니다.


(표지)

이 책은 일단 사건 해결을 위해서 우연이 도와줘서 어물쩡 넘어가는 부분이 한두군데 있습니다. 사건 전개 속도조차 느릿느릿한데 이렇게 좀 얼른 이해가 안가는 대목이 있다면 약간 내용이 답답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 속에 들어있는 분위기를 즐기고 묘사를 충분히 좋아했다면, 별로 크게 드러나지는 않았겠지만, 그렇지 못했다면, "필립 말로우가 결정적으로 한 게 뭐냐?"라면서 불만을 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필립 말로우가 폼 잡는 장면을 더 멋있게 해 주기 위해서, 아무 이유없이 여자 배역들이 갑자기 필립 말로우에게 안기며 연정을 호소하는 장면도 있습니다. 이유를 찾아볼래야 "필립 말로우가 원래 초특급 멋있기 때문" 외에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을 법 합니다. 게다가 그와중에 이야기 내내 줄기차게 필립 말로우가 고독한 황야의 이리인냥 하고 있었기 때문에, 허무맹랑한 자아도취로 보일뿐일 수도 있습니다. 정말 진솔한 불안함이나 진지한 감정교류로 보이기는 불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은 어찌보면, 멋있는 주인공이 나와서 인기를 끌면서, 속편을 이어가는 이야기의 한계일 수도 있습니다. 맥가이버가 심심하면 에피소드마다 여자 주인공 인물들의 사모를 받고, 미녀삼총사들에게 추근거리는 남자들이 계속 나오는 것처럼 말입니다.


(기나긴 이별 영화판의 로스 아버님)

끝으로 이야기의 멋부림으로 넘치는 장중한 결말을 언급해 볼만합니다. 처음에 제시되어 이야기 내내 수수께끼처럼 희미하게만 언급되었던 소재가, 막판에 반전과 함께 필립 말로우 눈앞에 생생하게 돌아옵니다. 워낙 자주 언급되었고, 중요하게 다루었던 소재기 때문에, 이런식의 반전으로 강렬하게 실체를 나타낸 것은 훌륭했습니다. 단서나 정교함만 따지자면 무색한 반전에 머물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 전체에 그 영향이 세세히 깔린 분위기를 잘 이용하는 것이어서, 갈등 구조를 해결하는 대단원에 훌륭하게 들어맞는 내용이었습니다.

필립 말로우는 이 책속에서 여러 종류로 망가진 이상한 인간들을 만나고, 스스로 상황도 좀 가난하고 외로워서 흔들흔들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줄곧 자기 자존심과 도덕, 냉철함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애환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책은 결말에서 그런 인생의 가치를 삶과 죽음의 문제로 다시 한번 화끈하게 부각해 줍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 아련한 느낌과 정체가 흐릿한 그리움도 잘 살려 주고 있습니다. 이런 책에 대해서는 프랑스어에 좋은 말이 있습니다. 프랑스어에는 어떤 경우든 알맞은 말이 있고, 그 표현은 늘 적절합니다.


그 밖에...

각국에서 나온 여러가지 영화판, TV판이 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1973년작 영화입니다. 전세계에서 "프렌즈"의 로스, 모니카 아버지로 이름을 드날린 엘리엇 굴드가 젊은 시절에 출연한 영화인데, 이 양반이 필립 말로우로 나옵니다. 로버트 알트만이 감독을 맡은 영화입니다.
by 게렉터 | 2007/08/13 05:29 | 기타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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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하리왕 at 2008/01/03 03:42
굉장히 좋아하는 책입니다. '이 세상은 그가 비난하지 않는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같은 부분이 좋습니다. 그 지루한 하루도, '미국인은 빵에 시든 양상치를 끼워넣은 것이라면 뭐든 먹는다'던 아침식사에 대한 묘사도... 금발 예찬도 잊을 수 없고 체스 이야기도..
이 책을 좋아해서 챈들러를 모두 읽게 되었고 영화도 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재차 읽게 되는 건 이 책이고, 얼핏 흉내내는 말 장난도 언제나 챈들러풍입니다.

그 프랑스어가 뭘까요. 생각에 잠겨 봅니다.
Commented by 게렉터 at 2008/01/03 20:10
하리왕/ 프랑스어 라기 보다는, 프랑스어 표현 운운하는 것 있잖습니까. 오랫만에 한 번 찾아 보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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