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이별 The Long Goodbye 영화

1973년작, "기나긴 이별"은 탐정일을 해서 먹고 사는 담배에 쩔은 인상 찌푸린 주인공이 고양이 때문에 밤중에 잠에서 깨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주인공은 살인사건 하나에 휘말리고, 어느 갑부 작가와 관계 있는 다른 사건도 하나 맡습니다. 영화의 내용은 1970년대 캘리포니아를 배경으로 좀 우울한 사람들이나 껄렁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주인공 필립 말로우가 이 두가지 사건의 실체를 파헤치려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레이몬드 챈들러 최고 걸작이라고도 불리우던 이야기였는데...)

탐정이 주인공이고 범죄에 대해 조사하는 것으로 내용이 되어 있긴 합니다만, 이 영화는 줄거리 풀이에 집중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야기 흐름을 위해서 우연에 기대는 부분이 약간 납득이 안갈때도 있고, 주인공이 추리를 풀어가는데 사용하는 근거가 "왠지 그럴것 같은 직감이 들어서"로 버틸뿐 아무 이유도 없는 대목도 좀 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억지로 이야기를 중간에 끊기 위해서, TV극에서 심심하면 사용하는 "갑자기 교통사고가 난다"까지 써먹고 있기도 합니다.

그렇기는 합니다만, 그런 줄거리를 통해서 적절한 갈등구도를 계속 끌어내는 면이 있거니와, 마지막까지 표현하고자 하는 분위기도 잘 일관되어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 영화가 주력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사건해결과 줄거리 풀이라기 보다는, 사람들의 심성을 드러내는 대사들입니다. 대사에 살짝 코메디스러운 대목과 농담들이 조금씩 섞여 있어서, 영화를 보며 듣고 있노라면 지루함을 조금씩 녹여서 없애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영화는 대사량 자체가 적지 않은 편인데, 그 대사들은 거의 대부분 "생활의 발견"이나 "비열한 거리"의 몇몇 부분처럼 사실주의 방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선명하게 내용을 전달해주는 낭독이나 웅변풍이 아니라, 정말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더듬거리기도 하고 말실수도 중간중간에 하는 그런 말투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물론 영화 줄거리도 줄거리대로 잘 진행되고 있는만큼 그런 부분이 과하게 많지는 않습니다. 대신에, 사소한 인삿말이나 자잘한 대화를 자주 보여주는 기술도 섞여 있습니다. 그렇게, 일상적인 어투를 잘 살려서, 현실적인 대사라는 느낌을 물씬 풍기게 하고 있습니다. 동네 경비원과의 대화나 슈퍼마켓에서 나누는 말들, 옆집 아가씨들과 하는 말들은 그런 형식이 눈에 뜨입니다.


(필립 말로우 처럼 인상 찡그리기)

그리고, 주인공이 조사하고 수사하는 탐정임을 십분 활용하여, 각개각층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게 됩니다. 이 영화 속에는 어딘가에 취해서 몽롱한 삶 허구헌날 살아가고 있는 옆집 젊은 여자들, 구치소의 수감자, 경찰들, 백만장자, 알콜중독자, 미모의 부유한 부인, 중상을 입고 입원한 환자, 냉정한 의사, 양아치, 미국-멕시코 차이를 선명히 드러내는 멕시코인 관리들 등등 매우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대거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사람들이, 그런식으로 꽤 사실적으로 보이는 대사를 좋은 연기로 소화해 내고 있습니다. 주인공인 엘리엇 굴드, 정말로 헤밍웨이가 술에 맛이가면 저렇게 되겠다 싶은 스털링 헤이든은 훌륭합니다. 알콜중독자 작가를 연기하는 스털링 헤이든은 가장 개성이 풍부한 인간이면서 연기도 아주 그럴싸해서, 불안한 느낌도 들면서 일견 측은해 보이기도 합니다. 이런 중요한 인물 이외에 사소한 인물들도 세밀하게 잘 짜여 있습니다. 멕시코의 관리들을 연기하는 사람들도 사소한 것으로도 무척 그럴듯한 특징적인 느낌을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인물들은 저마다 개성과 특징을 많은 대사속에서 드러내고 줄거리가 진행되면서 적절한 위치에 두번이상씩 등장하며 더 재미를 돋구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이런 여러부류의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이 영화의 재미가 됩니다. "저는 고양이는 기르지 않아요. 왜냐면, 저는..." 같은 대사는 초장부터 흥미로운 것입니다.


(맨왼쪽 부터 스털링 헤이든, 엘리엇 굴드)

이렇게 여러부류의 사람들이 사실적인 분위기에서 대화를 하는데 내용은 조금씩 코메디를 담고 있습니다. 다양하고 재미난 비아냥거리는 말들을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는 주인공은 주인공답게 그 분량도 많습니다. 그렇게 코메디 대사가 많은데, 반대로 분위기는 좀 울적하고 냉랭한 듯한 이런 향취는 "매쉬" 같은 영화나 "넘버3"의 몇몇 부분들과 비슷한데가 있습니다. 그래서 큰 사건이 안벌어져도 어딘지 우울증에 빠질 수 있는 인생살이의 면면이나, 전통적인 도덕이나 열정 없이 조금씩 망가진 사회의 모습을 훑는 듯한 느낌도 납니다.

예를 들면, 이 영화는 채도가 높지 않은 탁색 계열 색상이 주로 화면에 펼쳐집니다. 또 바깥은 밝은 대낮인데도 굳이 빛이 잘 안들어오는 컴컴한 실내에 들어와서 진행하는 장면들이 많습니다. 컴컴한 실내에서 옛날 느와르 영화처럼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진채 대화를 나누는데, 괜히 한쪽 구석에서 창밖에 밝은 바깥 풍경이 보이는 것입니다. 밝고 상쾌한 날씨보다 흐리고 우중충한 날씨나 밤이 주로 나타난다는 것도 특징입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이 주고 받는 농담들이 그만큼 쓸쓸한 느낌도 나고, 어두운 감정이 더 돋보이게 됩니다. 이 영화에는 부정적인 느낌을 내려고, 굳이굳이 별상관 없는 개판인 상황을 화면 중앙에 잡아 한참 잘 보이게 보여주는 대목도 몇군데 있습니다.


(조사 받고 있는 주인공)

쓸쓸한 비판적인 분위기속에서 소소한 흥미를 주는 대사들과 다양한 인물들을 구경시켜주는게 이 영화의 줄기입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영화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장면들에서 흥미를 돋구는 재미난 연출들이 멋드러지게 들어가 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역시 악당 두목이 사람 패는 부분입니다. 이 장면은 많이 패지도 않고 딱 한대판 때릴 뿐이고, 제대로 핏방울도 잘 안보여 줍니다. 그런데도 굉장히 흉악해보이고, 악당이 정말 막나가는 악당으로 보여서, 확실히 인상을 남겨 줍니다. 때리기 전에 악당 두목이 조용한 분위기에서 혼자 평범하고 잔잔한 대사를 길게 하면서, 적막한 분위기를 잡았습니다. 그렇게 긴장감을 잘 끌어간 것이 효과를 높였고, "의외의 소도구"를 사용하는 충격요법도 강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맞은 사람의 울음소리와 주변에서 당황하는 모습을 영화 속에서 한참동안 잘 담아 보여주고 있어서, 확연히 장면이 마음속에 오래 새겨지도록 하기도 합니다.


(홍보전략변경으로 다시 나온 영화 포스터)

또다른 재미난 대목은 주요인물 한 명이 죽는 장면을 묘사할 때 입니다. 이 장면은 인물이 죽는 모습을 주인공이 발견하고 놀라서 뛰어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주인공이 뛰어가기 전만해도, 죽는 모습 자체에 집중되어 있지가 않습니다. 주인공이 다른 사람과 줄거리상 상당히 중요한 대화를 하는 것을 소리로 들려주면서, 화면은 그 대화와 상관없이 별개로 멀리 죽는 사람을 보여주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영상과 함께 대사가 소리로 들리는 유성영화의 특징을 잘 살렸다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귀에 들리는 대사 내용이 줄거리에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화면 저편에 사람 죽는 모습이 또한 언뜻언뜻 관객의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관객이 "다른 소리하느라 못보고 있지만, 저 사람이 그새 죽고 있네" 하는 점을 먼저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신경쓰는 사람 없는 가운데 이 사람이 죽는다는 점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서, 또 나중에 주인공이 놀라서 달려갈때, "대화하느라 몰라서 나중에 발견했다"라는 주인공의 상황도 잘 느낄 수 있습니다. 대화 말소리와는 별개로 관객이 화면속에서 그 모습을 스스로 발견한 경험을 앞서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후에는, 무심하게 울려퍼지는 파도 소리가 더 크게 들리게 했고, 복선으로 계속 활용되어온 개가 또다시 모습을 드러내도록 했습니다. 그러면, 좀 불쌍하게 죽어버린 사람의 처지와, 그 울적한 밤의 쓸쓸한 분위기가 잘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 장면에서 들리는 밤바다의 파도소리는, 사람이 죽거나말거나 휘몰아친 무심하다는 것이라는 분위기로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또 보다보면, 그런 여러 연출 때문인지, 그 파도소리가 꼭 대성통곡하는 소리인듯한 큰 소리라는 느낌도 얼핏 듭니다.


(파도 장면 직후)

이런 것들 외에도 기본기가 충실하게 잘 살아난 장면들도 많습니다. 갑부 집에 놀러와서 대화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부유한 집안의 정경과 집 바깥의 풍경들을 잘 담아 보여주는 것은 그야말로 좋은 정석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희뿌옇게 가로등 불빛이 깔린 밤거리를 정신없이 뛰어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여러 각도에서 빠르게 바뀌는 화면으로 보여주는 부분도 이야기해 볼만합니다. 좋은 사건으로 잘 연결되지 못해서 그렇지, 어슬렁거리던 주인공이 이사람 저사람 만나며 진행되던 이야기의, 절정즈음에 해당하는 장면으로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느릿느릿 여유롭게 걷던 주인공이 마구 뛰어다니는 장면이니 말입니다.

끝으로, 음악과 의상을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상황에 맞도록 여러 가지 다양한 편곡으로 나와 울려퍼지는 주제곡은 형태를 바꾸어 계속 반복됩니다. 배경음악으로, 라디오 틀면 나오는 노래로, 영화 속 사람이 흥얼거리는 곡으로, 매우 여러가지 형태로 계속 나오는데, 그런데로 영화에 잘 어울립니다. 키가 큰 편인 주인공에게 어울리는 검은 양복은, 감상적인 옛날 느와르 영화풍이 나면서도, 1970년대 유행을 담고 있는 것에 잘 들어맞았다고 생각합니다. 끝없이 계속 담배불을 붙이며, 구겨진 인상을 조금도 펴지 않는 고독한 탐정, 필립 말로우에 적당했습니다. 웅얼거리는 듯한 목소리면서도 발음은 꽤 정확한 엘리엇 굴드에도 잘 맞고 말입니다. 근래의 "카우보이 비밥" 같은 것의 원형으로 무리가 없습니다.


그 밖에...

예고편 동영상:


로버트 알트만이 감독을 맡은 영화입니다. 처음에는 정통 "하드보일드 탐정" 영화인 것처럼 선전했는데, 반응이 망할 것 같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좋은 비평이 많이 나왔고, 비평에서 강조한 것을 살리는 쪽으로 홍보전략을 바꿔서, 수습해내는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을 맡은 엘리엇 굴드는 많은 훌륭한 영화들에 출연했는데, 그래도 "프렌즈"의 로스-모니카 아버지로 전세계에 가장 널리 알려졌으리라 생각합니다.

레이몬드 챈들러가 쓴 소설 "기나긴 이별"을 원작으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원작도 추리극 자체의 줄거리만 보면 문제가 좀 있는데, 영화는 그 문제를 덮어두기보다는 오히려 더 드러내버렸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글로 쓴 묘사와 독백의 재미가 절반이상을 차지하는 책의 재미를 나름대로 영화로 옮겨왔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책과 영화는 다른점이 상당히 있는데, 분위기가 비슷한대신 일단 "주제"부터가 다릅니다. 또 모든 사건의 시작이 되는 인물인 테리 레녹스도 다릅니다. 책에는 멋지고 어찌보면 좀 중후한 사람으로 나오는데, 영화에는 경망스러운 인간으로 나온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영화 마지막이 되어서야 범인에 해당하는 사람이 드러나기는 합니다만, 특별히 엄청나게 기묘한 대반전이 있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결말에 대해 이야기 할 때는, 어디까지 이야기하는 것이 스포일러 아닌 스포일러가 될 것인가 하는 면에 대해서, " 천상의 피조물 http://gerecter.egloos.com/2849512 " 과 비슷한 정도로 좀 복잡한 면이 있습니다.

요즘 자주 언급되는 이야기입니다만, 영화에 보면, 당시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되었던 영화배우 로널드 레이건을 들먹이는 장면이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 영화에는 단역으로 아놀드 슈왈츠제네거 가 출연합니다. 악당의 떡대 부하들 중에 한 명으로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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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말로러부~~ 2009/10/26 20:08 # 삭제 답글

    기나긴 이별 너무 좋아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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