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론을 평론하는 기계 는 옳은가? 영화

어제 올렸던 "영화평론을 평론하는 기계"에 대한 글 http://gerecter.egloos.com/3336554 에서, 기계를 돌려서 영화 평론이 누구의 글과 닮았는지 분석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게 얼마나 맞는 것입니까?

한가지 시험을 위해서, 평범한 검증 방법을 사용해 봤습니다. 듀나, 정성일, 김혜리, 이동진, 김영진, 곽재식 여섯사람의 영화에 관한 글을 사람별로 각각 14개씩 구했습니다. 그러면 총도합 84개가 되는데, 이 글들을 섞어 놓고, 이 기계가 한 번 알아 맞춰 보게 했습니다. "누구누구 스럽다"라고 평한 것을 기준으로 하면,

84개 중, 76개 를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누구누구 스러운 맛도 있다"에서라도 언급되면 맞춘것으로 하면, 딱 한 개의 글 외에 83편의 글에서 모두 정확했습니다. 14개씩 글을 구한 출처가 애초에 기계를 만들면서 분석을 한 곳과 같기 때문에 유리한 점은 있습니다. 그때문에 실제 성능보다 훨씬 더 좋은 결과가 나온 것으로 보이기는 합니다. 그렇습니다만, 그래도 이 정도면 나쁜 것은 아닌듯 합니다.

그렇다면, 이게 사람이 직접 눈으로 읽고 가슴으로 느낄 때 글에서 느껴지는 느낌 보다, 기계가 세밀하냐, 어떠냐 하는 생각이 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 번 퀴즈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아래에, 영화에 관한 짧은 글 여섯편을 인용해 두었습니다. 여섯편의 글은 듀나, 정성일, 김혜리, 이동진, 김영진, 곽재식이 쓴 글 들인데, 꼭 한 사람당 한 편씩 뽑았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저자는 모른채 글만 읽어보고 누구의 글인지 맞추실 수 있겠습니까? 난이도 조절을 위해서, 말투는 모두 경어체가 아닌 평어체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아마, 영화에 관한 글을 많이 읽는 분이시라면, "저 글은 누가 쓴 것인지 기억이 난다" 싶어서 바로 맞출 수도 있겠습니다만, 순수하게 글만 갖고 여섯명 중에 한 명인 저자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인지 한번 도전해 보시기 바랍니다.



1.
세 번째. 알렉산더 소쿠로프는 매우 난처한 세명의 인물의 연작을 찍었다(아마도 이 연작은 계속 이어질지도 모른다). 그 하나는 레닌을 다룬 [몰로크]이고, 그 다음은 히틀러를 다룬 [타우르스]이고, 그리고 [더 선]은 일본 천황 히로히토를 다룬다. 세 사람의 공통점은 그들의 결정이 정말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다루면서 소쿠로프는 그런 역사적 책임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이 없다. 이미 전쟁은 끝났고, 히로히토는 작은 도서관에 유폐된 채 지낸다. 마치 채플린처럼 우스꽝스러운 그의 뒤뚱거리면서 걷는 모습은 미군 점령관 맥아더의 웃음거리가 되기도 하지만(그는 중얼거린다. "내가 저런 인물을 또 어디서 보았을까?" ), 여전히 히로히토를 모시는 가신들은 그를 "태양의 신" 으로 생각한다.


2.
휴먼드라마적 측면 외에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가 ‘일본인이 꿈꾸는 바람직한 일본인상’을 그대로 드러낸다는 점이다. 이 영화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위치에서 성실한 삶을 산다. 훌륭한 직업인인 동시에 믿음직한 남편인 사에키와 외유내강의 전형으로 현명하게 대처하는 에미코는 말할 것도 없고, 친구와 부하 직원 하나하나까지 전부 그렇다. 심지어 사에키를 해고하는 회사 간부도 인간미를 지녔고, 사에키의 병을 고자질해 그의 자리를 꿰찬 후배까지도 최소한의 품위를 갖췄다. 특히 언뜻 냉정해 보이는 의사는 전문지식과 직업윤리를 체화한 모습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다.


3.
굉장히 얇은 이야기들이다. 동성애라는 기본 주제를 너무 심각하게 다루지 않은 건 좋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가볍다. 모든 갈등은 10분을 넘기지 못하고 그것들은 모두 어이가 없을 정도로 쉽게 풀린다. 게다가 그들은 제대로 된 드라마를 푸는 대신 막연하고 일반적인 관념론을 읊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어서 의도했던 것만큼 쿨해보이지도 않는다.

게다가 주인공들이 너무 얄팍하다. 특히 주인공 이치코는 심하다. 그녀는 아직 애다. 여자친구가 맘 잡고 공부 좀 할 테니 잠시 그만 만나자고 말하자 하늘이 무너지는 애다. 이런 애에게서 어떤 깊이를 기대하겠나.그래도 영화는 예쁘고 배우들도 예쁘다. 두 주인공들의 얼굴을 구별하는 데에 10여분 정도가 소요되긴 했지만.


4.
그럼 이 작은 배우는 어디서 이런 조숙함을 얻은 걸까? 그녀는 사실 고양이의 정령이어서 다섯 번째나 여섯 번째쯤의 생을 살고 있는 걸까? 내 이야기가 좀더 멋대로 날아가버리기 전에, 명백한 사실들을 짚어봐야 할 것 같다. 다코타 패닝의 결정적 연기 교사는 [아이 엠 샘]의 숀 펜이었던 것 같다.

숀 펜은 상대가 꼬마라고 자신의 방식을 선선히 바꿀 배우가 아니다. 그는 시나리오대로 고분고분 연기하지 않았다. 70% 정도가 즉흥 대사였다는데, 6살의 다코타는 모든 장면에서 그가 예기치 않게 난사하는 화살을 놀랍게도 다 받아넘겼다. [아이 엠 샘]의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그래서 다코타는 그녀의 직관을 믿는 법을 일찍 배우게 됐다"고 말했다. 여섯살 때부터 학교에 가지 않게 된 다코타는 열성적인 학생이다.


5.
이렇게 연기 잘하는 사람들, 처음부터 이야기에 나왔던 사람들은 젖혀 놓고 갑자기 하늘 날아다니는 특공대원들의 사연만 길게 다루어 버리는 이상한 실수를 하고 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특공대 자체가 현실적인 세계와 비현실적인 괴물의 충돌을 다루는 이야기에서 너무 황당한 요소라는 점도 문제이지만, 이런 가장 인상적인 배역들이 별 의미없는 단역들이, 조잡한 연기로 해 치우고 마는 것도 아쉬웠다.

이 정도로 강렬한 역할을 하는 특공대라면, 적어도 [로켓티어]처럼 주인공이 직접 맡는다든가, [독수리 5형제]의 용사들처럼 한명 한명이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영웅 역할을 확실히 하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6.
지금까지 크로넨버그의 영화는 늘 그랬다. 우리는 인간다움의 기원을 부수고 재모색하는 것을 신체훼손과 접합의 시각적 전시로 묘사한 그의 공포영화를 주로 떠올리지만 공포영화 장르 외의 영역에서 작업할 때도 그의 사상은 일관된 방식으로 나타난다. 2002년 칸에서 공개됐던 랠프 파인즈 주연의 [스파이더]의 예를 들면,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영화지만 과거의 망상에 사로잡힌 남자의 현재 삶을 현실과 판타지를 오가는 구성으로 해 영화 전체를 거대한 무의식의 거미줄처럼 그려내는 것이, 관객을 꼼짝없이 주인공의 무의식에 옭아매놓는다.

어떤 식으로든 크로넨버그 영화 속의 인물들이 느끼는 정체성의 혼란은 공포를 낳는다. 크로넨버그는 우리가 상식으로 믿고 싶어 인간다움의 가치에 정중하게 침을 뱉는 예술가다. 무릇 인간이란 이런 것이다, 라는 유의 온갖 정의가 그의 영화에서는 산산이 부서진다.



위 여섯편의 글을, 여러분과 같은 인간이 읽어보고 누구와 닮았다고 그 감상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글들을 어제 소개한 기계 http://gerecter.100webspace.net/ 에 집어 넣어도 나름대로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답을 알고 있는 저는 미리 확인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확인해 보니 기계는 여섯편의 저자를 모두 정확히 구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글을 읽고 "누구와 비슷하다"라고 받은 느낌과 기계가 내린 평론이 얼마나 일치하는지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비록 통계적으로 검증이 부실해서 유의미한 결론을 얻기는 어려울 것입니다만, 이런 짓을 통해서 한가지 매우 흥미로운 상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문제의 "영화평론을 평론하는 기계"는 단순히, 몇 가지 단어를 얼마나 자주 글에 썼느냐 하는 빈도가 닮았는가 하는 것 만으로 그 사람의 글인지 아닌지 평가하고 있습니다. 내용이나 논리, 주장이나 사상은 전혀 따지지 않았습니다. 오직 단어 선택 경향만 계산합니다. 그것도, 겨우 40개 정도밖에 되지 않는 적은 숫자의 단어만을 자료로 활용해서 단순한 곱셈과 덧셈으로 매우 간단하게 계산할 뿐입니다. 그런데도, 보시다시피 의외로 결과는 꽤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서로 다른 사람의 글을 구분해 주는 것은 내용이나 사상이 아니라, 의외로 문체일 뿐인지도 모릅니다.

우리 독자들은 저마다 좋아하는 글쓴이가 있고, 싫어하는 글쓴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우리가 어떤 글을 좋아하고 싫어한다고 하는 것의 기준이, 글 자체의 내용이나 글에 담긴 사상보다는, 의외로 그냥 어투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일정정도 수준에 달한 글들의 차이가, 내용을 무시한 채 단지 어투만 살펴봐도 이 정도로 구분해 낼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글에서 느끼는 "특징"이라는 것도 실은 그냥 말투 차이 뿐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더우기, 무슨 특별한 수사법이나 묘사방법의 차이가 시적으로 복잡다양한 것이 아니라 그냥 자주쓰는 단어가 무엇인가 정도의 차이에 불과하다는 이야기 입니다.

더 나아가서 좀 더 막나가는 상상을 해본다면, 일정 수준에 이르면, 글쓴이 들도 사실은 별로 차이가 없는 모두가 비슷비슷한 내용을 쓰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독창적인 생각, 글쓴 사람의 개성 이 영화평론의 관점 속에 드러난다고 생각하게 되지만, 기실은 그냥 글쓰는 사람마다 자주 쓰는 단어가 조금씩 다르다는 정도 밖에 차이가 없는 것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영화평론이야 그럴수도 있겠다 싶지만, 논술점수 채점, 증권거래인의 조언이나 정치인의 연설 역시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면, 좀 더 생각은 복잡해집니다.

- 뒤에 주절거린 내용은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이니,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지금 이 글 자체를 평론기계에 넣으면 "곽재식" 스럽다 고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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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엔리꼬 2007/08/16 16:18 # 답글

    정성일은 맞췄습니다.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정형적인 스타일은 눈에 띄는군요.
  • 기재호 2007/08/16 16:59 # 답글

    영화 평론은 잘 몰라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글쓰기에 대해서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네요. 잘 읽었습니다.
  • kz 2007/08/17 12:45 # 삭제 답글

    비슷할지 모르겠지만, http://blog.ohmynews.com/dangun76/134819 같이 연설을 분석하는 시도도 있었죠.
  • 게렉터 2007/08/17 12:50 # 답글

    엔리꼬/ 위 여섯가지 글 중에서는 특히나 눈에 뜨인다 싶습니다.

    기재호/ 언어학, 통계학, 심리학, 감성공학 분야의 여러 진지한 연구쪽을 살펴보시며 흥미를 가져봐도 될 것입니다.

    kz/ 코퍼스 언어학을 좀 더 깊게 응용한다면 의미있는 결과를 많이 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제가 한 것은 그런 것도 아니고, 그냥 글자세기 text mining 장난감에 불과하니, 훨씬 격이 낮습니다. 그래도 나름대로 결과가 나왔다는게 재밌다면 재밌는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 심리 2007/11/18 17:32 # 답글

    기계의 논술 테스트 같기도 하네요. 속알맹이인 사상도 중요하지만, 표현법도 중요하다는 뜻이 될까요? 네, 중요한 것 같습니다. 여러 의미에서요. 개인의 고유한 정서상태가 표현법에 반영되니까요. 흥분을 잘 한다면 욕설을 자주 쓴다든가 하는 식으로(부정적인 예). 반대로, 부드러운 사람의 문장은 아무래도 부드러운 느낌이 들더군요. 잘 쓰는 표현법과 무관하지 않겠네요.
  • 게렉터 2007/11/19 13:21 # 답글

    심리/ 언어학 쪽의 진지한 연구를 보면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또 재미난 연구들이 많이 보이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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