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춘각의 풍파 (영춘각지풍파, 迎春閣之風派, The Fate of Lee Khan) 영화

"영춘각의 풍파"는 14세기말 원나라가 망해가고 명나라가 흥해갈 무렵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해설로 들려주면서 시작하는 1973년작 영화입니다. 곧이어 영화에는 당시에 주원장 일당과 원나라 군대와의 전투 못잖게 첩자들의 첩보전도 치열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원-명 세력간의 첩보전을 소재로 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런즉, 이 영화의 내용은 "영춘각"이라는 한 외딴 주막을 무대로,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몰려든 사람들이 벌이는 암투와 싸움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문제의 영춘각을 찾는 의문의 인물들)

본격적으로 내용이 진행되면, "영춘각의 풍파"는 무협물에 종종나오는 객잔 이야기의 전형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어느 외딴 가게에 이 사람, 저 사람 나그네들이 모여드는데, 나그네들이 대부분 범상치 않은 사람이고, 비밀과 음모가 교차하여 객잔을 무대로 사기, 절도, 암살, 결투가 벌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영춘각의 풍파'에서는 주인장 이려화를 중심으로 호금, 모영, 마해륜 등 너댓명의 여자들이 가게를 운영하고 다스리는 임직원으로 나와서 처음부터 그 개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영춘각의 풍파"는 초반에 호기심을 돋구고 흥미를 끕니다. 가게 문이 열리며 한 두사람이 얼굴을 들이밀때 마다, 시선이 집중되며 이번에는 또 어떤 녀석이 나타났는지 관심을 생기게 합니다. 단순한 한량에서, 한심스럽게 추태부리는 손님, 행패부리는 불량배, 도박광, 지나치게 과묵한 젊은이에다 걸인 까지 저마다 독특한 인간들이 모습을 비춥니다. 이 사람들이 하는 말과 행동들은 그같은 부류의 인간을 나타내는 전형성이 있으면서도, 충분히 그 모습을 머리에 남게 할 만큼 연기도 잘 하고 있습니다.


(왠지 예사롭지 않은 노래하는 걸인이 주인장에게 박대받다)

그리고, 이 사람들 사이를 네명의 종업원들이 바쁘게 오가면서 주문을 받고 음식과 술을 내어오고, 가게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문제들이 벌어지고 해결되면서, 이 사람들이 있는 왁자한 가게 모습을 잘 그려냅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들이 보이는 눈빛의 변화나 표정이 바뀌는 등등의 의미심장한 순간을 일부러 잠시 잠시 잡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 중에 예사롭지 않은 비밀을 숨긴 사람들이 있다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과연, 이 양반들 중에 누가 원나라-명나라 전쟁과 연관이 있는 사람인지, 관객이 계속 의심하게 만듭니다. 또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엮여 소동이 커질지 계속 궁금하게 합니다.

특히 비밀스러운 느낌, 숨겨진 사실이 있다는 흥미를 주기 위해서,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은 모르고 있고, 주인공과 관객만 알 수 있는 몰래벌어지는 사건을 보여줍니다. 그런 것들을 조그마한 것이라도 살짝살짝 끼워 넣었습니다. 그런 사소한 모습들을 보는 가운데, 숨겨진 비밀을 관객들이 계속 눈치채게 했고, 동시에 전지적 작가 시점이 아니고서는 알 수 없는 엇갈리는 사건 관계들을 보여주는 재미가 있습니다.


(등장인물들은 볼수 없고 관객과 카메라만 볼 수 있는 들킬까봐 긴장한 표정)

이 영화에서는 만약 그 영춘각에 관객이 실제로 가서, 그냥 눈으로 보았다면 무심코 지나칠만한 부분을, 카메라로 확대해서 보여주는 부분이 있습니다. 혹은, 가볍게 지나칠만한 주인공의 표정과 시선을 강조해서 화면에 잡아 보여주는 방식으로 선명하게 눈에 뜨이게 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특정한 감정이나 숨겨질만한 사실을 드러내 보여주는 장면을 만들어 넣었습니다. 이런 장면들은 소설이나 라디오극에서 주인공의 마음속 이야기를 설명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렇게 풀어내는 그야말로 전지적 작가 시점스러운 수법과는 또 좀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긴하지만, 무엇을 보여줄지, 무엇을 강조할 것인지를 잘 조절해서 화면에 꾸려놓고 있기에, 그런 볼거리만으로 등장인물들의 비밀과 계획, 느끼고 있는 기분과 생각을 관객만은 잘 알 수있게 몰아가고 있습니다.

"보석 훔치기 장면" 전후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영화 속 인물들은 아무도 신경쓰고 있지 않은 무심코 놓아둔 보석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화면은 굳이 그 보석이 있는 곳을 한참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보석이 없어진 모습을 화면 중앙에 놓고 또 한참 보여줍니다. 그렇게하면, 영화 속 다른 인물들은 아무도 보석에 신경쓰지 않고 있고, 설명하는 대사도 한 마디도 없습니다만, 영화보는 관객은 보석이 갑자기 없어졌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무엇을 중심으로 화면을 잡았느냐 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만으로, 극중 등장인물의 대사를 초월해서 전지적 작가 시점의 맛을 활발하게 살리고 있다 할만합니다. 이 영화는 이런 구성이 초반에 잘 되어 있어서, 서로 꿍꿍이를 숨기고 영춘각에 모여든 사람들에 대한 기대와 긴장이 생기게 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네 종업원들의 성격도 살짝살짝 드러내주고, 특히, 모든 일에 침착하고 대범하게 대처하는 그야말로 영웅호걸 스러운 사장님 이려화의 멋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게의 시끌벅적한 소음이 잘 녹음되어 있다거나, 빽빽하게 가득찬 진짜 같은 손님들 엑스트라 사이를 헤치고 주인공의 발걸음을 따라 화면이 부드럽게 따라가고 자연스럽게 확대되고 축소되는등 기본기도 충실합니다. 한 사람의 표정을 보여주는 화면과, 한 두 사람의 실랑이를 보여주는 화면, 가게 전체의 모습을 보여주는 화면을 번갈아가면서 잘 보여주는 점도 좋습니다.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 가게 이 구석에서는 이런일이 벌어지고 있고, 저 구석에서는 저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그 동시에 엮이는 사건들의 모습을 부드럽게 보여줍니다.


(멀리서 보이는 호금)

(가까이서 보이는 호금)

(호금의 표정: 특유의 입 아래 점에 주목)

이렇게 중요한 모습을 가까이 잡아서 크게 보여주었다가, 전체 구도를 넓게 보여주었다가 하는 장면을 속도감있게 연결하는 부분은 이 영화가 끝나도록 무척 많이 나옵니다. 칼을 뽑는 장면의 손을 보여주고 바로 칼싸움 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넘어가면서 집중력을 높이고 박진감을 키운다는가 하는 수법이 곳곳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연출은 상대방에게 시치미를 떼고 속임수를 쓰면서 물건을 빼돌리려고 하는 첩보전 이야기로 흘러가면서 나름대로 일관성도 생깁니다. 들킬까 말까 두려워하는 표정, 거짓말을 하는지 의심하는 눈빛 같은 것들을 집중해서 잡아내면서 감정 표현하는데도 효과가 좋았던 것입니다.


(호금과 이려화)

이 영화가 아쉬운 것은 중반이후입니다. 이렇게 무대가 한 건물로 제한된 곳에서 벌어지는 암투를 다루니 만큼, 영화 속의 싸움과 난리는 하룻밤 혹은 2박 3일간의 난리로 빡빡하게 압축해서 보여주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하면 혼란 스럽고 지쳐가는 긴긴 밤의 괴로움이 잘 표현되어서 훨씬 더 아슬아슬 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꼭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도, 초반부에 하나둘 등장한 인물들의 모습과 그 인물들의 행동을 복선으로 활용해서 이렇게 저렇게 뒤범벅시켜 놓았다면, 전통적으로 코메디물에서 자주 나온 저택을 무대로한 소극(farce) 처럼 만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 둘 가게 문을 열어 젖히며 흥미롭게 등장한 인물들이 가득 있는 만큼, 여러 사람들의 복잡하게 엮인 관계와 갈등이 마구 엉키면서 파국적인 결말로 끌고 갔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복선이나 인물간의 갈등 관계가 엉키기 보다는 그냥 하나 하나 차례 대로 해결되어 갑니다. 첩자인지 아닌지, 적인지 우리편인지 의심하게 하는 대목 까지는 흥미를 줍니다만, 일단 그게 한 번 밝혀지기만 하면, 더 이상 갈등이 복잡해지지 않고, 그냥 착실하게 같이 협동할 뿐입니다. 그래서 막상 절정 이후에 이르면, 다른 등장인물들은 차근차근 다 정리가 되어서 퇴장하게 되고, 도리어 대립관계가 매우 단순해집니다. 그냥 악당 두목과 그 부하 와 가게 종업원 일행의 쌍방 단체전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반에 나왔던 그럴듯한 분위기과 복선이 넘치는 듯한 모습은 없어져 버립니다. 그냥 의심하는 악당들과 악당들에게 정체를 숨겨야 하는 주인공들의 간단한 대결이 되어서 맥이 빠집니다. 속임수와 복잡한 관계의 재미라기보다는 단순히 힘으로 싸우는 패싸움 구도가 되니 말입니다. 그나마 감정을 복잡하게 하려고, 등장인물들이 하나 둘 죽어가게 했는데, 그 때문에, 초반에 살짝 감돌던 코메디 분위기가 싹 사라져 버렸습니다. 노래하는 걸인이나, 수완 좋은 웃음 머금은 종업원처럼 재미난 인물들의 유쾌함이 날아간 역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등장인물 숫자 자체가 줄어들어서 복잡하게 꼬이는 이야기나 복선을 활용하는 재미와 더 멀어지는 것도 아까웠습니다.


(싸움하면, 모영의 발차기)

대신에 영화를 끝까지 지켜봐 주는 힘이 되도록, 강렬한 등장인물들이 나름대로 패싸움 이야기의 싸움군으로서도 충분히 멋을 살리고 있습니다. 전풍이 연기한 악당 대장은 말이 악당이지, 실은 유능하고 선량한 원나라 관리입니다. 탐욕스럽다기보다는, 냉철하고, 잔인하다기 보다는 지혜롭습니다. 그래서 민생치안에 신경쓰고, 임무수행에 철저한 누가봐도 훌륭한 관리처럼 보입니다. 그렇기에 도리어 이 악당 대장은 정말 뛰어난 인물처럼 보입니다. 정말 주인공들의 헛점을 파헤치고 간첩질을 까발릴 수 있는 위세가 있어 보입니다. 그래서 정말 두렵고 대단한 적처럼 보입니다. 사실, 이 영화 "영춘각의 풍파"도 중국 고전에서 심심하면 나오는 "한족 멋져, 오랑캐 미워미워" 소재를 또 써먹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그 소재 안에서 충분히 입체적인 인물을 끌어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 와중에도 전풍의 복장, 외모하며, 말투며 손짓하며, 원나라 고위 관리로서, 허름한 가게에서 밥장사하는 주인공 일행과는 선명하게 대립되고 있어서 충분히 "상대편" 분위기는 선명하게 풍기고 있습니다. 이런 점도, 연기와 소도구, 연출이 잘 어울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위풍당당 대원관리)

매력적인 호금, 무술을 잘하는 모영, 노련한 침착함이 넘치는 이려화 처럼, 아예 배우 자체의 주특기에 꼭 맞는 종업원들은 역시 가장 매력적인 연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영걸이나 서풍 같은 배우도 결코 녹록한 사람들이 아닌데도, 오히려 빛이 바랠 정도 입니다. 그러다보니, 이야기가 단순해지는 후반부에도 계속해서 그래서 결말이 어떻게 나는지 기다리게 하고, 각계각층을 상징하는 등장인물 하나하나의 성격과 운명을 선명하게 제시하는 것을 지켜보는 맛도 있습니다. 무술 장면에 굳이 결정적으로 치중한 이야기라고는 할 수 없지만, 훌륭한 연출과 이런 등장인물에 잘 맞는 모습과 어울려서 무술 장면 역시 재미거리가 되었습니다.

끝으로 한 가지 덧 붙인다면, 역시 이번에도 영화에 풍성하게 사용된 다양한 중국 전통 음악들이 멋집니다. 옛 분위기에 잘 어울리기도 하고, 거대한 원-명 교체 역사 속 한 구석에 찰나처럼 지나가는 가게 종업원 이야기라는 그 무상한 느낌과도 잘 맞는 소탈한 곡들이기도 합니다. 노래를 부르고 시구를 읊조리는 한영걸의 연기는 그야말로 고전 그 자체를 풍성하게 즐길수 있게 하면서, 또 그 구성진 느낌이 시살감도 드리우고, 시적인 운치를 북돋우기도 합니다. 이런 전통문화의 멋진 활용은, 다소 싱거운 마무리인 듯 하기는 해도, 길을 떠나는 마지막 모습과 그 눈빛에 옛 이야기 고유의 고즈넉한 애환을 드리웠다고 생각합니다.


그 밖에...

영화 시작 부분 동영상:


"대취협(방랑의 결투) http://gerecter.egloos.com/2987678 ", "용문객잔(용문의 결투)" 등의 감독을 맡아 세계에 이름을 떨친 호금전이 감독을 맡은 영화입니다. 후에 유명해지는 홍금보가 무술 감독 일에 참여 했고, 출연진인 한영걸 역시 홍금보의 선배격으로 무술 감독일을 맡았습니다.


(주인장 이려화)

이려화는 50년대 후반, 60년대 전반에 활약한 대배우로 사극, 현대극, 종교극, 황매조 뮤지컬 영화 등등 온갖 영화에서 주인공을 도맡아 했습니다. 국내에서는 관세음보살에 관한 한국-홍콩 합작 사극/종교극인 "대폭군(관세음보살)"에 출연한 일로 널리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호금은 70년대에 관능미로 유명세를 떨쳤던 배우로, 제목부터 "애욕기담" "성색견마" "금병쌍염" 등등인 영화들에 출연했습니다. 모영은 액션 장면의 활약으로 한 때 인기를 끌었는데, 영미권 쿵푸 팬 들에게도 "Angela Mao Young" 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하고, 일단의 한국-홍콩 합작 권격 영화에 자주 출연해 우리에게도 무척 친숙합니다.


(매우 친숙한 모양의 영화속 원나라 관공서 건물)

이 영화에서는 거대한 대 저택/ 관공서 장면이 나와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잠시 나올 장면을 위해서 거대한 세트 건물을 세울 수 없으니, 비슷한 당시 대만/홍콩영화들의 사례처럼, 다름 아닌 서울의 경복궁에서 촬영했음을 빤히 알 수 있습니다.

덧글

  • oldman 2007/09/13 22:37 # 답글

    세트장이 정말 친숙하군요. 대만/홍콩영화들이 우리나라에서 촬영했다는 이야기는 종종 들었어도 경복궁에까지 촬영했다는 사실은 처음 듣네요.
  • marlowe 2007/09/14 10:03 # 답글

    [용문객잔]과 비슷한 분위기일 것 같군요.
    저는 지금까지 영춘권을 다룬 권격물인 줄 알았습니다.
  • 뚱띠이 2007/09/19 02:35 # 답글

    세트 진자 친숙하네요....이리저리 흘러돌다 왔는데 좋은 곳이라 링크 납치해 갑니다~~~
  • 게렉터 2007/09/20 13:29 # 답글

    oldman/ 이소룡은 법주사에서 싸웠고, 성룡은 불국사에서 싸운적이 있다는 것은 유명합니다만, 사실 서울 고궁들이나 경기일원의 성벽들이 정말 자주 모습을 드러냅니다.

    marlowe/ 워낙에 양자경이 멋진 전설을 드리웠으니 말입니다.

    뚱띠이/ 당시 홍콩/대만 영화에서는 그 외에도 종묘며, 수원성이며 무척 자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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