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로즈 특공대 (패톰, Fathom, 1967) 영화

우연히 심야 케이블 텔레비전을 뒤적거리다가, "어? 라켈 웰치 나오는 영화가 하네." 싶어서 이 영화에 잠시 채널을 고정하면서 문득 마주쳐 본다면 꽤 재밌을 수 있는 영화가 "레드 로즈 특공대 (패톰, Fathom, 1967)" 입니다. 시작 장면을 보면, 느긋하게 즐길 수 있는 활극인듯 한데, 도무지 무슨 내용일지 짐작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니만큼, 아무것도 영화에 대해서 모르는 입장에서, 대체 이 영화가 어떤 내용으로 사건이 점차 흘러갈지 지켜보는 것이 심야TV의 재미일 것입니다. 도대체 라켈 웰치가 무슨 모험을 할 지 호기심을 가지면서 천천히 내용에 빠져들면 좋을 것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이 영화는 다짜고짜, 아무 설명도 없이, 어느 풀밭에 업드려 있는 라켈 웰치의 늘씬한 다리를 한참 보여주는 것으로 영화가 시작됩니다.


(난데 없는 시작 장면: 하지만 앞으로 펼쳐질 영화를 단박에 요약해 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영화의 멋진 주제곡과 함께 펼쳐지는 시작장면 동영상: 이 영화를 보신 적 없으시다면, 대체 무슨 내용으로 흘러가는 영화일지 이것만 보고 한 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조금 더 내용을 밝혀 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영화는 도입부에서 라켈 웰치가 대체 뭐하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능숙하게 낙하산을 다루는 모습을 여유롭게 보여줍니다. 잠시 이야기가 흘러가면, 라켈 웰치는 미국에서 온 낙하산 스카이 다이빙 선수이고, 이곳은 조용하고 평화로운 남부 스페인의 경치 아름다운 고장임을 알 수 있습니다. 라켈 웰치는 좀 위험한 직업 때문인지 상당히 베짱있고 용감한 사람인 듯 해 보이는데, 이야기가 흘러가면서 라켈 웰치는 한국전쟁 참전용사와 동서냉전이 살짝 얽힌 첩보전에 얽히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펼쳐져서 라켈 웰치가 악당들의 속고 속이는 다툼속에서 사건의 실체를 알아내려 하고, 마침내 미국으로 무사히 돌아가기 위해 스페인의 해변 각지를 넘나드는 것입니다.

60년대 후반에, 제임스 본드 영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영화들을 세계 각지에서 다소간 찾아 볼 수 있는데, 이 영화도 보다보면 역시 그런 영화 중에 하나라는 느낌이 많이 듭니다. 첩보기관이나 세계 정세에 걸친 커다란 모험이 벌어지지만, 별로 살벌한 느낌은 없고, 오히려 곳곳에 서려 있는 유머 감각과 관광지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여주는 평화로운 느낌이 강조됩니다. 등장하는 인물들의 그럴듯한 모습과 화려한 옷차림새, 멋드러진 호텔과 호사스러운 만찬 장면 같은 것을 화면에 뿌려대면서, 별로 아슬아슬할 것은 없어도 궁금증은 자극하는 줄거리를 같이 즐기면 됩니다.


(남스페인 해변의 라켈 웰치)

이런 영화 중에는 정통으로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모방한 플린트 시리즈나, 멧 헬름 http://gerecter.egloos.com/3286989 시리즈, 드러몬드 시리즈 http://gerecter.egloos.com/3074505 같은 영화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주인공이나 줄거리는 제임스 본드 시리즈와 좀 다르지만, 분위기나 영화의 목적인 휴가철의 멋진 풍광을 즐기는 목적을 따라했던 영화 또한 적지 않습니다. 남자 첩보원 대신 여자 첩보원을 주인공으로 삼은 "철관음 鐵觀音 Angel With The Iron Fists" http://gerecter.egloos.com/3034332 같은 영화도 있고, 특급 첩보원 대신 평범한 사람이 첩보전에 휘말려서 마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http://gerecter.egloos.com/2183319 "나 "39계단 http://gerecter.egloos.com/2277670 " 을 따라하면서 줄거리를 좀 더 복잡하게 꾸미는 경우도 있습니다. 태국에 출장온 홍콩 회사원이 모험을 겪는 "금보살 金菩薩 The Golden Buddha" http://gerecter.egloos.com/3007177 같은 영화가 그 예일 것입니다.


(당신이 요원?)

이 영화는 대강 살펴보자면, "금보살" 계열입니다. 라켈 웰치가 연기한 여자 배우가 주인공이라는 면에서는 "철관음"이나 "샤레이드" http://gerecter.egloos.com/3046929 에 가깝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철관음"의 주인공이 정보조직의 지원을 받는 충실한 첩보요원인데 비하면, 라켈 웰치가 연기하는 이 영화의 주인공은 우연히 첩보전의 소용돌이에 말려든 평범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훨씬 강합니다.

한편 "샤레이드"와 비교하면 이 영화는 좀 더 닮은 데가 많습니다. 주인공이 누구를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혼란스러워 한다는 부분이 같습니다. 착해 보이는 사람이 악당인지, 멋있게 보이는 사람이라고 과연 착한 사람인지 자꾸 의심하게 되는 분위기는 아주 흡사합니다. 거기다가 그런 의심을 계속 활용하는 반전, 반전에 반전이 자꾸 나오는 것도 닮았습니다. 또 그렇게 반전이 나오지만, 그것을 엄청난 충격이나 결정적인 변화로 여기기 보다는, 그냥 "의심할 수 밖에 없는 분위기" 정도로 여기면서, 영화 전체에 농담과 코메디가 간간히 많이 나온다는 것도 비슷한 부분입니다.


(신뢰의 눈빛? 의심의 눈빛?)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줄거리 외에는 "샤레이드"와 아주 많이 다릅니다. 일단 이 영화에는 그 의심하는 느낌이나 알 수 없는 느낌, 미묘하게 느껴지는 사랑 같은 것을 별로 대단하게 다루려고 하지 않습니다. 샤레이드에서 오드리 헵번이 보여주는 그런 감정들은 영화의 핵심이라할만 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그런 부분은 곁가지로 미루어 둘 뿐입니다. 갑작스런 입맞춤 장면이랄지, 라켈 웰치와 안소니 프랜시오사 두 사람의 농담 따먹기랄지 감정묘사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비교적 재미없고, 비교적 부실합니다. 라켈 웰치는 이 영화 전체에 매우 잘 어울리지만, 이런 류의 농담 대사를 잘 소화해내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안소니 프랜시오사는 자기 실력으로 때워내고 있지만, 라켈 웰치는 못해내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영화의 초점에서 벗어나는 부분에 억지로 끼워져 있는 농담이라서 해내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핵심이 무엇인고 하니, 라켈 웰치가 남부 스페인을 수십시간 정도 동안 가지각색으로 싸돌아다니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그 자체 입니다. "공룡 100만년 One Million Years B.C."과 "마이크로 결사대 Fantastic Voyage"가 나온 직후, 수많은 관객들이 "라켈 웰치라는 배우가 나오는데, 완전 환상이더라"라고 한참 떠들던 시기에 나온 것이 바로 이 영화 입니다. 이때는, 이 사람 사진이 있는 달력이 쏟아졌고, 이 사람이 나오는 광고, 잡지, 혹은 감옥에서 몰래 벽에 구멍 뚫을 때 가리기 위해 붙여 놓는 포스터 같은 것이 인기를 끌던 무렵입니다. 그러니, 다른 줄거리, 다른 볼거리 없이, 바로 라켈 웰치에 초점을 맞춰서, 이 사람이 여러가지 아찔한 일들을 겪고, 이 사람이 여러가지 모습으로 다양한 배경에 등장하게 하는 그 겉모습, 행동 자체에 중심을 기울인 것입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상황에 잠입해야 하는 라켈 웰치)

과연 라켈 웰치는 이런 영화에 잘 어울렸습니다. 라켈 웰치는 이 영화에서 "패톰 Fathom" 이라는 이름의 스카이 다이빙 선수(엄밀히 말하자면, 꼭 그게 본업이라고 할수는 없습니다만) 를 맡았고, 번역하자면 무려 "한아름" 정도의 이름이 되는 이 담배 광고 모델 같은 느낌의 배역을 무척 잘 연기하고 있습니다. 패톰은 무척 베짱이 넘치고 용감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임스 본드나 엘 마리아치 처럼 폼잡다가 죽는 한이 있어도 마티니는 젓지 말고 흔들어서 먹는 정도의 화려무쌍한 인간은 아닙니다. 당황도 하고, 겁도 먹고, 놀라기도 하는, 어디까지나 현실적인 인간인 것입니다. 라켈 웰치는 그런 모습을 잘 보여주면서도 나름대로 여유부리는 첩보요원 같은 느낌도 충분한 미묘한 인물을 연기해 냈습니다. 비교하자면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에서 캐리 그란트 정도의 인물인 것입니다. 어찌보면, 각본은 대강 짜집기해서 만들었는데, 라켈 웰치가 워낙 잘 어울리다보니 이렇게 말이 될만한 인물로 굳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 OST LP앨범 표지)

영화의 기본적인 방향도 대체로 이런 라켈 웰치의 인물 정도와 비슷하게 맞아 떨어집니다. 이 영화는 그다지 현실적인 내용은 아닙니다. 자동차가 구르고, 배가 뒤집히고, 왠갖 난리가 터져도 주인공은 반창고 하나 붙일 상처도 나지 않는 영화입니다. 반전이 터지고, "사실은 이런저런 사정이 있어서 아까는 그렇게 이상하게 행동했다"라고 사연을 설명하는 부분이 자꾸 나오는데, 이중에 딱히 말이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영화는 동서 냉전배경 특히, 한국전쟁 참전국들간의 대립이 언급되는데, 이것은 그냥 "첩보전 하면 냉전을 끌어다 붙여야 제맛이지" 싶어서 가져온 것일 뿐으로, 별 나올 이유도 없고, 나와서 별로 더 재밌어진것도 없는 그냥 말만 잠깐 나오는 것일 뿐입니다. 이 영화는 사건이 해결되거나, 사건이 오리무중으로 흘러가거나, 왔다갔다하며 영화 전체에 걸쳐서 혼란스럽게 꼬이는 내용을 다룹니다. 그러면서도 등장인물들이 "이제 사실을 알겠군" 하니까, 사건이 해결되었다 싶고, "도대체 뭐가뭔지 모르겠군" 하니까 사건이 꼬였다 싶을 뿐, 아귀가 맞아들고, 정교한 이야기를 구성해 충격을 주는 부분은 전혀 없습니다. 좀 과장하자면, 그냥, 반전 세 개 나오게 하고, 라켈 웰치가 이런저런 일을 겪게 해 보자 정도만 구상한 뒤에 앞뒤 갖다 붙이기 위해 아무렇게나 핑계를 지어내 읊어대게한 정도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대체 어떻게 엮이면 한국전쟁까지 엮일지 모를 모습의 스카이 다이빙 선수, 라켈 웰치)

하지만, 이렇게 비현실적인 구석이 많다고 해도,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아주 환상적인 내용으로 치닫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즉, 이 영화에서는 60년대 제임스 본드 아류작 악당들이 많이 하던, "화려한 비밀기지"나 어처구니 없는 세계 정복 음모 같은 것은 나오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많은 제임스 본드 아류작 영화들은, 그 지하 비밀기지가 독특한 맛인 경우가 있습니다. 막판 즈음이 되면 펼쳐지는 무슨 할로윈 나이트 클럽 실내장식처럼 꾸며놓은 주제에, 알록달록한 제복으로 장식한 부하들이 일렬로 줄 서 있게 해 놓고는, 이것이 세계를 정복하기 위한 지하 비밀 기지라고 하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이렇게 오직 미술쇼와 기괴함을 위해 만들어 넣는 공상적인 장난은 없습니다. 악당 비밀기지에 최대한 가까운 것은 그냥, 지중해의 멋진 별장, 근사한 요트 정도일 뿐입니다. 그런즉, 해골마크를 가슴팍에 그려넣고, 이상한 손동작으로 총두목에게 경례를 하는 악당부하 같은 사람은 아무도 안나옵니다. 악당과 벌이는 쟁탈전도 세계정복 음모와는 거리가 멉니다. 금전으로 환산할만한 정도의 가치를 가진 다툼일 뿐으로, 사소하게 축소하자면 그냥 보물찾기라든가 돈가방 쟁탈전 같은 아주 현실적인 일입니다. 영화전체에 걸쳐 어림없는 사건사고들이 터져나오고, 그런 사건들이 벌어지는데 대한 복선이나 일관성도 부족한 영화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벌어지는 일 하나하나를 따져보면 일어날만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악당 요트 내부)

이를테면, 이영애가 나오는 카드사 광고에서 이영애는 서화가무 문무예체 온갖 분야에 능한 가히 초인간적인 인물로 나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영애가 갑자기 하늘을 날아올라 빌딩을 가로 지른다거나, 장풍을 쏘아 악당을 제압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 영화도 딱 그 정도 입니다. 말이 되건 안되건 자유롭게 이야기들을 연결해 붙이고 있고, 앞뒤 이야기 연결을 따져볼작시면 어림없는 부분이 넘쳐나는 영화입니다. 하지만, "라켈 웰치"에 어울리도록, 지나치게 환상적인 장면은 안나오고, 불필요하게 요란한 상상력은 배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부분이, 라켈 웰치 배우 자신이 갖고 있었던 선전, 인기의 매력과 잘 통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이야기가 별 설득력이 없는 와중에도 줄곧 호기심은 어느정도 유지해 줍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적들의 정체와, 라켈 웰치가 과연 누구와 한편을 먹을 것이며, 찾아야하는 물건의 행방은 도대체 어디인가 하는 이야기는 어쨌거나 끝까지 이야기를 끌고나가는 재료는 되어 줍니다. 특히, 라켈 웰치가 구사일생으로 보트에서 살아난 직후 어리둥절해 하며 추격전을 벌이는 대목은 앞뒤 사연이 엉성해서 어림없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호기심 유지는 잘 시켜준 표본이라 할만합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사실 이 영화는 가끔 그런 균형잡기에서 잘못 빠지는 대목도 좀 있습니다. 적다고 하기에는 좀 많기도 합니다. 결말 장면에서 라켈 웰치가 보물을 전달해주는 부분은 그야말로 만화에도 잘 안나올법한 농담 같은 장면 입니다. 이것은 아예 막판이니까 논외입니다. 어림없는 일들이 줄기차게 벌어졌던 라켈 웰치의 대모험의 대미로 한 번 다 날려보내버린다는 생각이 들게하는 맛이 있어서, 딱히 많이 이상하지는 않았습다.


(뭐, 이해 안가도 그러려니 하세요.)

하지만, 그 외에 중간중간에 약간 엉성한 부분들은 확실히 좀 이상합니다. 예를 들면, 이 영화에는 두목급으로 세르지 세라프킨이라는 괴짜 갑부가 한 사람 나옵니다. 이 양반은 괴짜 갑부 인물이 벌이는 코메디 스러운 부분은 능숙하게 연기합니다. 하지만 정말 악당 같거나 변태 같은 모습을 보여서 이야기를 튼튼하게 해주는 균형을 찾는데는 실패했습니다. 또 후반부에 어지럽게 얽힌 사건에 연루된 모든 인물들이 기차안에서 대화를 나누는 팽팽한 협상 장면도 어색합니다. 제임스 본드의 쓸데 없이 여유부리는 농담장면을 억지로 베껴왔다는 생각만 들 뿐이지, 그 상황에 있을법하지도 않고, 인물들의 성격을 표현하는데도 전혀 도움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악명이 높을 만한 장면은 라켈 웰치가 겪는 최대의 위기 장면입니다. 이 영화에는 "해외 특파원"에서 풍차 액션이 나오고,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에서 옥수수밭 액션이 나왔던 것처럼, 현지의 특산물, 풍물을 이용하는 액션으로 거창한 것이 하나 들어가 있습니다. 배경이 스페인이니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을 밝히자면 영화를 보는 흥이 약간 깨질수는 있겠습니다만, 밝힌다면, 바로 그렇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투우"가 소재로 나옵니다. 바로, 라켈 웰치가 황소랑 싸우는 것입니다.

라켈 웰치가 무슨 바람의 파이터도 아닌데, 소랑 싸우는 장면을 잘 집어 넣기가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도 별로 잘 해내지를 못했습니다. 황소와 라켈 웰치가 싸우는 장면은 설득력도 없거니와 지루하기도 하고, 어정쩡하니 별 특징도 없어서 좀 우스꽝스럽게 되어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자니, 가볍게 이야기를 연결해나가지만, 현실적인 분위기를 고수하는 이 영화의 흐름 속에서라면 좀 다른 방법으로 투우라는 소재를 넣을수도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 라켈 웰치야.)

이 영화는 이렇게 실패하는 부분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구석구석에 재치 있는 연출들이 재미난 부분은 또 그 재미난 부분대로 잘 살려 준다는 점이 사태를 수습해 줍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설명으로 전달해주는 일을 그대로 화면 속에서 펼쳐지는 3인칭 시점 화면으로 곁들여서 보여주는 재치있는 구성은 짧지만 재미납니다. 짧아서 그렇지, 그 속에서 시간 순서와 시점을 자유롭게 바꾸어서 이야기를 신기하게 즐기게 해주는데, 꼭 이런 수법을 쓴 90년대 이후의 여러 영화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또 거울 속에 비치는 사람들의 모습을 화면에 한 가득 잡아서 비좁은 공간에서 사람들이 모이고 쫓는 모습을 이야기해주는 부분 같은 것도 볼만합니다.

그리고, 영화의 핵심에 어울리도록, 남부 스페인의 아름다운 경치들이 잘 잡혀 있다는 점은 정말로 좋았습니다. 딱히, "파리의 에펠탑" "뉴욕의 브룩클린 다리" 같이 대놓고 과시하는 유명한 것 없이도,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정경들을 잘 잡아내고 있습니다. 이런 장면들은, 어디인가에 저런 그럴듯한 휴양지가 있고, 거기에 멋진 모험과, 라켈 웰치 같이 매력적인 사람이 있다는 그 꿈을 눈앞에 그려내 줍니다. 그런 화면을 잘 만들어서 배치해 놓은 것은 이런 영화가 제몫을 하는 튼튼한 바탕이 되어 줍니다.

기술적인 노련함이 필요한 항공촬영도 무난합니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특별히 경치 보여주기 장면이 멋드러지게 펼쳐지는 기교적인 부분은 없지만, 대체로 그 수준은 꽤 괜찮습니다.


(열차 내부에서 쫓고 쫓기는 부분)

무엇보다도, 이 영화에는 아름다운 음악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 영화의 부실한 부분이나, 영화 자체의 한계와 성격을 이야기 했는데, 이 영화의 음악은 이 영화의 단점들을 덮어주고, 억지스러운 내용들을 가려줄 만큼 훌륭합니다. 좀 남용되는 듯한 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몇가지 주제와 어울리면서 여러가지로 변주되는 음악은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줘서 영화의 가치를 잡아 줍니다.

즉, 앞서 이야기했던, "샤레이드"나 "39계단" 같은 영화와 이 영화의 결정적인 차이점을 찾는다면, 단연 음악입니다. 서정적이면서도 중후하고, 낭만적이면서 여유로운 음악은 즐거운 관광과 휴가 분위기의 이 영화를 한껏 다듬어 줍니다. 긴박하고 아슬아슬한 맛이 숨겨져 있는 비슷한 다른 영화의 음악과는 무척 대조적인 것입니다. 이 음악은 첩보전이나 목숨을 건 추격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입니다. 오히려 코메디 영화나 사랑 이야기에 더 어울릴법 합니다.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라켈 웰치 화보집 같은 느낌이 서려 있는 이 영화에 더 오묘하게 연결됩니다.


(남스페인의 평화로운 마을을 배경으로)

휴일을 앞둔 어느 깊은 밤에 TV채널에서 예상치 않게 만나서 즐기는 옛영화로 꽤 괜찮은 영화입니다. 굳이 하나 더 짚어보자면, 라켈 웰치에 집중하는 영화지만, 의상이나 분장, 소도구는 좀 조촐하다는 것이 좀 아쉬웠습니다. 대체로 라켈 웰치의 "개인기"에 기대고 있을 뿐이라서, 단순한 라임 색깔 비키니 수영복 정도 외에는 그다지 인상적인 것은 없습니다. 하기야, 라켈 웰치의 개인기는 그런 상황에서 더 살아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 밖에...

"레드 로즈 특공대"라는 제목으로 TV에서 방영되었습니다만, 딱히 레드 로즈 도 안나오고, 특공대도 안나옵니다. 동아TV에서 "프렌드"라는 제목으로 방송한 시트콤을 아무도 "프렌드"라고 안하고, "프렌즈"라고 하는 것처럼, 이 영화도, 대체로 "패텀" 내지는 "패톰", "파톰", "패돔" 정도로 통합니다.

감독을 맡은 레슬리 마틴슨 Leslie H. Martinson 은 많은 영화와 TV쇼의 작업을 맡았습니다. 얼마전 이야기했던 배트맨 영화판 http://gerecter.egloos.com/3412945 의 감독을 맡기도 했습니다. 중간에 맷 헬름 이야기를 했는데 남자주인공을 맡은 안소니 프랜시오사는 TV판 맷 헬름 시리즈에서 맷 헬름을 연기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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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렉터블로그 : 그 여자를 쫓아라 2010-10-10 20:59:21 #

    ... 인적인 능력도 강조하면서 나름대로 수수께끼 같은 사연에 빠진 평범한 사람의 느낌도 살릴 수도 있었을 겁니다. 라쿠엘 웰치를 주인공으로 한 "레드 로즈 특공대(패톰)" http://gerecter.egloos.com/3458218 같은 영화는 엇비슷한 시도로 적어도 이 영화보다는 훨씬 매끈하고 재미난 이야기를 꾸며내기도 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 more

덧글

  • 박민성 2007/10/29 21:33 # 삭제 답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레드로즈 특공대'란 제목을 붙인걸까요?
    옛날의 외화 제목 바꾸는 센스는 참으로 신비롭기까지 합니다..
  • 탕야 2007/10/30 01:03 # 삭제 답글

    게렉터 님 이런 영화 어디서 구하시는지요...
    아마존 가면 있나요, 개인적으로 철관음 이란 영화를 구하고 싶은데
  • FAZZ 2007/10/31 20:45 # 답글

    역시 남자에 있어서 미녀는 FATAL....
  • 게렉터 2007/11/01 12:41 # 답글

    박민성/ 이 영화는 정말 알기 어려웠습니다. "레드 로즈" 같은 말은 참 듣기 어려웠으니 말입니다. 혹시, 라켈 웰치의 다른 영화나 당시 유행하던 다른 영화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탕야/ 철관음은 홍콩영화인데, 몇년전에 쇼브라더스 DVD가 주욱 나왔을 때 같이 나왔습니다. yesasia 같은 사이트를 한 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FAZZ/ 이 영화는 라켈 웰치가 남자들의 음흉한 계략에 빠져서 헤메는 것으로 출발합니다. 물론 다들 라켈 웰치를 못당하기는 합니다만.
  • 잠본이 2007/11/02 00:26 # 답글

    그냥 저 빨간 땀복(?) 때문에 붙인 이름일지도 OTL
  • 게렉터 2007/11/04 22:56 # 답글

    잠본이/ 의외로 그럴 수도 있는데, 또 그렇다고 하기에는 저 빨강색 옷은 정말 조금밖에 안 나옵니다. 궁금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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