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영춘 (萬花迎春, The Dancing Millionairess, 1964) 영화

뮤지컬 영화 중에는 스스로 뮤지컬 제작을 배경으로 하는 뮤지컬이 꽤 많은 편입니다. 저작권 문제 없이 무료로 인터넷에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는 영화로는 1951년작 "로얄 웨딩 Royal Wedding"도 있고, 최고의 명작으로 칭송 받는 "사랑은 비를 타고 Singin' In The Rain" 도 따지고 보면 이런 부류 입니다. MGM 뮤지컬 영화와 흡사한 정통파 뮤지컬 영화들을 꽤 제작하던 1960년대 홍콩 쇼브라더스 영화사에서도 이런 영화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바로, 1964년작 "만화영춘 (萬花迎春: 온세상 꽃들이 봄을 맞이하다, The Dancing Millionairess, 1964)" 입니다.


(영화속 뮤지컬의 모양새)

영화가 처음 시작되면 빅밴드 연주를 자랑하는 음악과 함께, 60년대에 유행한 애니메이션을 이용한 시작 장면과 배우, 감독 글자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영화 첫장면에서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연기 썩 잘하는 여자 배우가 한 명 나옵니다. 배우, 감독 소개를 유심히 보지 않았다면, 꼭 이 사람이 주인공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주인공이 아닙니다. 대체 그러면 누가 주인공입니까? 어찌보면, 이것이 스포일러 아닌 스포일러 입니다.


(주인공 같이 등장했지만 조연일 뿐)

잠시 후, 여차저차 해서, 이 여자배우는 롤러스케이트를 타다가, 그럴싸하게 생긴 돈 많아 보이는 은행간부 한 명과 비중있게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영어 제목에 백만장자 어쩌고가 있었던 듯 한데, 그렇다면 이 사람이 주인공입니까? 역시 이 사람도 주인공이 아닙니다. 이후, 롤러스케이트를 타던 사람은 은행간부와 이야기하면서 입수한 좋은 정보를 자신의 아버지에게 이야기해 줍니다. 그런데, 아버지라는 사람은 직업이 뮤지컬 제작자이고, 이름인즉 곽 선생입니다. 곽 선생이라. 이름은 초특급 멋집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곽 선생이 주인공입니까? 하지만 이 사람도 주인공은 아닙니다.


(뮤지컬 제작자 곽 선생. 과감한 땡땡이 무늬 나비 넥타이를 보십시오.)

한참 이야기가 전개된 후, 별 특징도 없고, 별 상관도 없이, 셋방에 궁벽하게 사는 가난뱅이 삼인조가 나옵니다. 뮤지컬 제작하던 곽선생님은 어디로 간 것입니까? 가난뱅이 삼인조는 별로 관계도 없는데 왜 나왔나 싶은데, 이중에 한 사람이 바로, 60년대 쇼브라더스에서 코메디 섞은 연애물에서 특히 저력을 보여주었던 명배우, 진후(陳厚) 입니다. 바로 이 사람이 남자 주인공인 것입니다. 남자 주인공이 등장하고나면, 뮤지컬 제작 어쩌고 하던 이야기는 잠시 미뤄 두고 갑자기 이 남자 주인공의 생계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이 세 사람은 땔감이 없어 쓴 원고를 태워 땔감으로 쓰던 "라 보엠" 오페라 속 주인공들보다 더 초라한 처지로 보이는 빈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무슨수를 써서든 때거리를 해결할 일자리를 구해 보려고 합니다.


(가난한 예술가 삼인조. 방세를 내지 않기 위해 방에 아무도 없는 척 하느라 촛불을 켜놓고 있습니다. 맨 왼쪽이 주인공 진후입니다.)

우리의 주인공 진후를 보면, 가난하지만 "꿈은 많고, 항상 밝은 젊은이"를 맡기에는 살짝 늙수레 해 보입니다. 하지만, 전성기에 로돌포를 연기하던 루치아노 파바로티에 비길만큼 연기력은 안정되어 있습니다. 마른 모습으로 난처하고 소심한 표정을 지을 때는 정말 가난해 보이고, 그러면서도 웃으면서 유쾌한 모습을 보일 때는 밝고 명랑해 보입니다. 진후는 한 백만장자의 운전기사 자리를 마침내 얻게 되어 드디어 밥값을 벌러 백만장자의 집으로 갑니다.


(쭈뼛쭈뼛 백만장자의 집에 들어서는 진후)

백만장자 집의 하인1, 하인2, 부하1, 부하2이 줄줄이 등장하고, 천천히 진후와 대화를 나누지만, 모두다 진후의 상대역인 여자 주인공은 아닙니다. 잠시 후, 문제의 백만장자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 백만장자가 바로, 아직까지도 별명 "고전미인" 으로 불리우는 배우, 낙체(樂蒂)인 것입니다. 그런즉, 낙체가 바로 여자 주인공입니다. 이제 이 백만장자 낙체와 가난뱅이 진후가 만나서 티격태격 알콩달콩 룰루랄라 흑흑흑 엉엉엉 하하하 호호호 하면, 사랑을 재미나게 표현하는 뮤지컬 코메디가 될 것입니다.


(부하1 에게 벌써 당황한 진후)

그런데, 진후는 어이없는 영구짓을 하며 엉뚱한 곳에 차를 몰고 다니다가 그만 백만장자 낙체를 만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진후와 낙체는 얼굴도 보지 못합니다. 대체 그러면 이게 어떻게 사랑 이야기 뮤지컬이 되는 것입니까? 백만장자 낙체를 만나지 못해서 진후는 일자리에서 잘려 버립니다. 다시 실업자가 된 진후는 또 생계가 막막해 집니다. 그런데, 이때 뮤지컬 제작할 자금이 부족한 곽선생이 사기 비슷한 기묘한 계획을 하나 세우고, 바로 이 계획에 먹고살길 없는 진후가 동참하게 되는 것으로 사건은 연결되기 시작합니다.


(무슨 수로든 제작비를 긁어내어 뮤지컬을 완성하려는 곽 선생의 흉계에 말려드는 순간. 웃기는...)

이 사기 비슷한 기묘한 계획의 내용을 보면, 바로 "진후가 낙체의 운전기사 자리에 잠시 있었다"라는 점을 악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이 곽선생의 사기 같은 술수 때문에 진후와 함께, 마침내 백만장자 낙체까지 여차저차 하여 뮤지컬 제작에 말려들어 버리게 됩니다.


(백만장자 낙체: 까부는 녀석들이 있거든 모두 지옥행 급행열차에 태워 보내 버리도록 하세요.)

그런즉, 이 영화에서는 진후와 낙체가 영화 중반이 되어서야 서로 얼굴을 보게 되고, 더군다나 여자 주인공으로 되어 있는 낙체가 본격적으로 주인공 같이 나오는 것은 영화 후반부에서 뿐입니다. 전반부는 어떻게 이어질지 알 수 없는, 곽선생 딸, 곽선생, 그리고 진후가 연기하는 남자 주인공의 이야기만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를 가장 재미나게 보는 경우란, 사실, 배역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그냥 극장에 가서 보는 것입니다. 그 유명한 "낙체/진후"나오는 영화라는데, 도대체 두 사람은 뭘로 나오고, 언제 나오는지 기다리면서 보는 것입니다. 인기 배우인 두 사람이, 자꾸만 뜸들이면서 등장을 안하고, 한참 만에 등장을 해서는 꼭 활약할 것 처럼 해놓고 별로 활약 안하고, 만날 것 처럼 해놓고 안만나고, 하면서, 안타깝고, 이상해 보이고, "그러면 도대체 뭐가 어떻게 흘러가자는 거냐?" 라면서 자꾸 의아해 하면서 보는 것이 재미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장면은 도대체 언제 어떻게 나오게 되는 것인가? (부창부수))

이 영화의 재밌는 부분은 이렇게 해서 등장한 진후와 낙체가 과연 돈값을 톡톡히 한다는 것입니다. 진후는 현실감 있는 느낌으로 가난한 젊은이 모습을 잘 드러내면서도, 여러가지 코메디 표정, 다양한 상황의 개성적인 모습도 충분히 재미나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변 배우들과의 장단이 무척 잘 맞아서, 처음으로 운전기사 자리를 알아보러 갈 때 딱 한 벌 있는 양복을 단장하는 부분 같은 것은 부드럽게 연마된 코메디 연기를 노련하게 보여줍니다. 세 명의 배우들이 박자에 맞춰서 자연스럽게 하다 둘 동작을 연기하면서, 미소 짓게하는 상황을 가볍게 풀어내는 것입니다.


(곽 선생과 함께, 코메디 진후)

더 재미난 배우는 낙체 입니다. 이 영화 속에서 낙체는 그 얼굴이 특별히 화려한 모습은 아닙니다. 물론 아름답지만, 개성적이거나 강렬하다기보다는, 가녀린 모습입니다. 그런데, 낙체가 맡은 배역은 부하직원들의 조그만 실수도 용납치 않는 무시무시한 백만장자입니다. 당연하게도 이 영화는 이런 무서운 냉혈한 백만장자 낙체가, 명랑하고 얼렁뚱땅 넘어가는 구석이 있는 진후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이고, 그 대립이 웃음을 자아내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화려하고 거세기보다는 조용한 느낌을 풍기는 낙체가 그 역할을 참 잘 해내고 있습니다.


(낙체가 부하들을 모아 놓고)

흥미를 돋구는 것은, 낙체가 연기하는 무서운 백만장자의 모습을 좀 더 평범하고, 훨씬 덜 무서워 보이는 낙체가 애써 연기하는 모습 그 자체입니다. 일단 "냉혈한 낙체"는 "백윤식 사기꾼" "이나영 엉뚱녀" 같은 전형적이고 틀에 박힌 모습이 아닙니다. 그래서 안지루합니다. 그런데, 낙체가 기술상으로는 연기를 잘 해내고 있기 때문에, 분명히 설득력 있는 동작과 표정은 확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색하거나 가짜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기묘하게도 "영화 속에 나오는 백만장자" 라기보다는 "진짜 백만장자" 같은 느낌도 어렴풋 나는 것이 더 와닿습니다. 이런류의 연기는 비슷한 시기 엄앵란이 보여주던 모습과도 비슷합니다.

사실 낙체는 이렇게, "고전미인" 모습으로 나타나서 별로 안 고전적인 역할을 재미나게 하는 것에서 이전에 몇번 성공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아마 낙체의 무서운 백만장자 연기는 그 나름대로 써먹었던 모습 또 써먹기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배우의 얼굴에서 쉽게 느껴지는 느낌 그대로만 활용하는 전법과는 분명히 다르고, 이런 것은 확실히 독특한 느낌을 줍니다. 실제로 이 영화 끝날 무렵의 낙체가 성냥팔이 소녀 비슷한 모습으로 나오는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에서는 또 갸냘프고 불쌍해 보이는 연약한 모습이 전혀 어색하지도 않습니다.


(성냥팔이 소녀 낙체)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낙체는 중반부 연결 장면에서 괴력을 발휘합니다. 이 영화는 영화의 가장 큰 전환점에 큰 구멍이 있고, 이것이 사실 좀 어림없어서 영화 줄거리상으로 상당한 오점이 됩니다. 뭔고 하니, 이 살벌하고 돈/일 밖에 모르는 것 같은 백만장자가 갑자기 장난을 좋아하고 흥겨운 도전에 재밌어하는 유쾌한 사람으로 돌변한다는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재미나야 하는 부분은, 낙체가 곽선생이 꾸민 사기의 실체를 알고 그것을 역으로 이용해서 장난을 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냉혈한 백만장자 낙체가 왜 소송을 걸거나, 돈 먹여 놓았던 떡검사들을 동원해서 구속시켜 버리지 않는 것입니까? 하다못해 산으로 끌고가서 부하떡대들과 가서 같이 주먹질을 한다거나 하지도 않습니다. 시간 1분 늦는 것도 못견뎌 하던 그 살벌한 양반이 겨우 하는 일이 고작 "장난을 치는" 것입니까? 이해할 수 없는 줄거리입니다. 이후에도 낙체가 하는 행동들은 전반부와는 전혀다르게 "농담 잘하는 재미난 부자" 역할로 돌변한 상태입니다. 거의 스크루지가 레트 버틀러로 변신하고, 렉스 루터가 배트맨으로 변신하는 어색한 전환입니다.

그런데, 낙체는 이런 어림없는 줄거리의 헛점을 개인기로 때워 줍니다. 개인기가 눈에 뜨이는 대단한 개인기가 아닙니다. 냉혈 백만장자 인물이 장난스러운 농담꾼이 되어버렸지만, 그러면서도 미묘하게 자태며, 표정이며, 몸동작에 바로 그런 냉혈 백만장자스러움을 자꾸 표현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줄거리가 어림없이 바뀜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다른 인물로 바뀌었다든가, 심하게 어색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지 않습니다. 낙체가, 선글라스를 벗은 뒤, 태연자약하게 진후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하는 장면은, 장난꾼의 모습과, 무서운 냉혈 백만장자의 모습이 "엄앵란 같은 낙체" 속에서 자연스럽게 섞여 있습니다.

그래서, 자칫 엉뚱하게 잡스러운 짜집기 트래쉬 무비로 전락할 수 있었던 영화를 든든하게 받쳐줍니다. 이 영화의 줄거리 자체가 어디서 본듯한 좀 뻔한 스크루볼 코메디 스러운 이야기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확실히 낙체의 연기는 커다란 부분입니다.


(사랑에 기쁨에 취한 낙체의 모습)

영화의 화면 구성은 이렇게 낙체나 진후 같은 배우들이 제 모습을 잘 보여줄 수 있도록 충실하게 따라오고 있습니다. 화면은 역동적으로 움직이면서, 인물들의 얼굴만 보여주어야 할 때, 전신을 보여주어야 할 때를 잘 알아서 바꿔가면서 담아내고 있습니다. 구도 배치도 충실해서, 단순히 인물을 앉아 있는 구도를 조절해서 화면에 담는 것 만으로, 중요한 인물, 덜 중요한 인물을 눈에 확들어오게 표현합니다. 이런 연출들은 어찌보면 평범한 것이지만, 이 영화는 그런 평범한 대목에서 실수를 하는 부분이 없습니다.


(중요한 대사와 표정을 보여주어야하는 주인공 진후는 화면쪽을 보면서, 다른 배우들은 등을 돌린 모습으로 대화가 진행됩니다.)

세트 사이를 화면이 왔다갔다하며, 화면 전환을 부드럽게 해주는 것도 요소요소에 잘쓰였습니다. 곽 선생이 뮤지컬을 제작하고 있는 극장이라든가, 백만장자 낙체의 저택, 회사 건물 처럼 이 영화에는 큰 건물들이 몇 등장합니다. 이 큰 건물을 표현한 세트를 화면이 다가가기도 하고 물러나기도 하면서 그곳에 있는 사람들과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하는 일들을 잘 보여줍니다. 2층에서 무대연습을 끝낸 배우들이 내려옵니다. 화면은 세트로 되어 있는 2층과 1층을 보여주는데, 층바닥을 통과해버리면서 움직여서 내려오는 배우들을 따라 자연스럽게 1층까지 연결합니다. 화면이 1층으로 내려오고 나면, 1층에는 곽선생 일행이 있고, 이 곽선생 일행이 대사하는 모습으로 화면은 다가갑니다. 이렇게 해서, 배우들이 무대활동을 끝냈고, 거기에 대해서 다른 제작진이 논평을 한다는 식의 이야기 전개가 부드럽게 연결되어 화면에 담기게 됩니다.


(중간의 진후를 중심으로 왼쪽의 낙체와 오른쪽의 진후 친구1, 친구2. 진후와 친한 두 종류의 인물들이 함께 앉아서 대화하는 장면인데, 이렇게 하면 자연스럽게 낙체가 친구 두 명 합한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장면 전환 수법, 장면 연결 수법은 영화 구석구석에 잘 담겨 있는데, 마지막에 지옥과 천국을 오가는 뮤지컬 공연 장면도 그 예입니다. 짤막하지만, 눈에 뜨이는 것으로는, 자신이 저지른 장난의 결과를 몰래 구경하고 있는 낙체를 보여주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영화는 가장 먼저 당하고 있는 진후 일행을 보여줍니다. 이때 영화의 시점은 진후의 시각으로 진후가 고생하는 느낌과 당황한 감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진후 일행을 구경하고 있는 비서를 보여줍니다. 이때 영화는 순간적으로 비서의 시점이 됩니다. 비서는 그곳을 떠나 옆방으로 가고, 옆방의 문을 열어보면, 낙체가 있습니다. 비서는 낙체가 진후가 고생하는 것을 엿듯고 재밌어 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 모습을 보고 비서는 조금 놀랍니다. 여기까지는 비서의 시점입니다. 그리고, 화면은 부드럽게 낙체에게 다가가서, 낙체가 즐거워 하는 표정을 크게 보여줍니다. 이때 다시 한 번 시점이 바뀌어서, 영화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낙체의 마음속 입니다.

배우들의 동작을 화면 전환에 연결하고 화면이 가까워가고 멀어지는 방식을 활용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누구의 시점을 영화가 다루고 있는지, 그 시점을 계속해서 바꾸고 있으면서도 부드럽게 이어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소설이나 연극으로 표현하기는 무척 어려운 영화만의 재미난 연출입니다. 화면이 다가가고 멀어지고 편집되어 끊기고, 보는 시각이 움직이는 영화화면 속에서만 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만약 소설로 표현한다면:

이때 진후는 이렇게 생각했다 '꼬였다...' 한편, 이때 비서는 이렇게 생각했다. '낙체 사장님께 보고해야지...', 또 한편 낙체는 이렇게 생각했다. '참 재밌구나...'

이런식으로 밖에 되지 않습니다. 나름대로 맛은 있지만, 연결이 툭툭 끊어지고, 세 사람의 시점이 바뀐다기보다는 제3의 3인칭 전지적 작가시점이라는 것이 너무 뚜렷해 집니다. 평가해 보자면 기본기에 불과한 단순한 연출/편집 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낙체와 진후의 모습을 손색없이 담아내기 위해 이런 기본기를 잘 사용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장점입니다.


(재미난 장난)

소품과 세트도 좋은 편입니다. 특별히 화려한 세트를 보여준다거나, 의상이 특출나게 재미난 영화는 아닙니다. 하지만, 전부 어울리면서도 보기 좋은 모습으로 등장해주고, 뮤지컬 공연 장면의 조명은 썩 좋은편이고, 특별히 과시적으로 펼쳐질 때 나오는 색색깔의 알록달록한 의상들도 그때만은 뛰어납니다. 조명이나 주요 장면에서 의상 선택한 것은 충분히 멋져서, 무려 "뮤지컬 전용관"이름을 걸고도 이상한 몰골과 괴상한 소리를 자랑할 뿐인 21세기의 서울 팝콘 하우스 공연 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낙체의 저택은 과하지 않게 현실감 있으면서도, 대단한 부자 다운 멋진 모습으로 깔끔하게 되어 있고, 무엇보다, 영화에 등장하는 낙체 소유의 자동차 2대는 60년대 자동차의 멋을 충분히 보여주는 보물입니다.


(낙체의 집)



(영화 속에 등장하는 두 대의 보물)

낙체와 진후의 연기로 때워 주는 줄거리의 문제점을 제외하면, 이 영화의 가장 큰 문제점은 뮤지컬 연출입니다. 이 영화는 흥행에 성공한 뮤지컬 영화이지만, 괴이하게도 춤과 노래가 부실합니다. 일단 노래는 무려 "거의 없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딱 두 곡 있는데, 마지막 노래는 그냥 짤막한 끝내기 합창이라서, 따로 떼내서 노래라고 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닙니다. 즉 이 뮤지컬 영화는 사실상 노래가 딱 한 곡 등장하는 뮤지컬 영화인 것입니다. 물론, 이 노래는 전통적인 황매조 뮤지컬 영화에서 갈고 닦은 낙체가 부르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곡은 나쁘지는 않고, 낙체가(아마도 낙체 목소리 더빙 가수가) 잘 부르기는 하는데, 반대로 그다지 좋지도 않습니다. 노래에 불필요하게 일본 엔카 느낌이 섞여 들었는데, 다행히도, 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서 낙체의 상황이 대조, 비교의 재미가 묘한데가 있어서 볼거리로는 문제가 없습니다.


(영화 속에 딱 한 곡 등장하는 노래: 꽃 사세요~ 꽃 사세요~ 하는 내용을 가진 노래입니다.)

구제할 수 없는 것은 이 영화속 뮤지컬 장면의 춤들입니다. 노래 딱 한 곡 있는 영화에서 대부분 노래 없는 연주곡에 맞춰서 춤을 추는데, 춤들이 부실합니다. 주인공 진후를 포함하여, 춤실력도 안좋고, 안무도 안좋습니다. 그냥 발레 동작을 정통파 그대로 쓰는 부분은 많이 이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 외의 장면은 꽤 어색하고 부자연스럽습니다. 꼭 일치되어야할 동작이 어긋나는 그냥 눈에 훤히 보이는 실수가 있기도 하고, 그냥 뛰고 돌고 만 많이 해서 노래 나오는 시간을 때울뿐, 별 감상할 춤이랄 것이 없는 대목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옛날에 미8군 쇼무대에서 대강 급하게 꾸려서 흉내내던 뮤지컬 쇼보다 못하면 못하지 잘하는 구석이 없습니다.


(세트와 의상은 그럴싸하지만 엉성한 춤)

결국 이 영화는 뮤지컬 영화이지만, 춤과 노래보다는 오히려 줄거리와, 뮤지컬 코메디 특유의 계층, 빈부, 희로애락을 초월한 낙천적인 분위기 자체에 더 가치가 있는 영화입니다. 낙체와 진후가 연기하는 백만장자와 가난뱅이의 현대 동화 같은 사랑 이야기는 이런 고전 뮤지컬 속 낙천적인 분위기에 분명히 도움을 얻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힘입어서 무서운 백만장자가 재미난 백만장자로 변하는 낙체의 모습과, 당장 밥먹고 비피할 것이 궁하지만 유쾌한 진후의 모습에는 삶의 즐거움에 대한 감흥도 살아 있습니다.


(뮤지컬!)

거기에 더하여, 비록, 춤과 노래는 좀 부족하지만, 그래도 충실한 의상과 세트, 조명과 소도구들을 즐긴다면, 그리고, 영화 화면속에 무대보다 더 그럴싸하게 담기는 풍성한 연출을 즐긴다면, 이 영화속의 쇼 장면 역시 충분히 재미난 덤은 되어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썼던 곡이나 다른 영화 등에서 가져온 듯한 음악이 많은 듯 하기는 해도, 음악은 꽤 신나고 들을만 하니 말입니다.


그 밖에...

한동안 영화잡지에 잘못 떠돌던 말 중에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뮤지컬, SF, 서부영화는 헐리우드에서만 만들 수 있는 장르다" 특정한 시대, 조건에서는 맞는 말일 수도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평생 비디오 대여점 한 번 안가보고 꿈꾸듯이 쓴 말일 정도로 성의 없는 이야기 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완전히 틀린 말로 출발해서, 뮤지컬이나, SF, 서부영화의 장르의 특성을 이야기하고 그것이 "미국적 사상"에 부합하는지 설명하는 글은 그저 거짓말일 뿐이라는 생각도 해 봤습니다. 저는 그런 글을 몇 번이나 보았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서부영화 하면 우리나라에서는 미국 서부영화보다 "(속)석양의 무법자" http://gerecter.egloos.com/3472034 등등의 이탈리아산 서부 영화, 소위 "스파게티 웨스턴"들이 더 인기가 많고, SF물 역시 한국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은 일본 SF 애니매이션 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애니매이션을 배제한다고 해도, 우뢰매 시리즈 http://gerecter.egloos.com/2908060 , 대괴수 용가리 http://gerecter.egloos.com/3069003 등을 낳게한 특수촬영을 내세운 일본 SF물의 영향은 헐리우드 SF물 못지 않습니다.

뮤지컬 역시, 옛날부터 내려오던 홍콩 황매조 영화들이 한때 얼마나 유행했는지 왜 기억하지 않고, 벌써 예전부터 헐리우드 보다 훨씬 많은 뮤지컬 영화를 쏟아내고 있는 인도 영화들은 왜 무시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소위 60년대 한국영화 황금기만해도 스스로 뮤지컬이라고 선전하는 한국영화도 있었는데 말입니다.


(사실 약간 조잡한 구석도 없잖아 있는, 만화영춘, 극중극의 피날레: 제목이 만화영춘이기 때문에 자세히 보면 배우들이 북한등지에서 현재에도 애용하곤 하는 가짜 꽃장식을 들고 춤을 추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낙체(樂蒂)는 우리나라 대부분의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나, 상당수 국내 개최 국제 영화제 자료를 봐도 보통 "요체"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저는 낙체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낙체는 홍콩식 영문 이름인 Betty Loh Ti 로 표기하는데, 아마 여기서 Loh 가 어쩌다가 樂의 "좋아할 요"자 발음해 해당한다고 착각된 것은 아닌가 상상해 봅니다. 하지만, 낙체의 樂은 보통화 한어병음 le 로 발음되고 이것은 우리 한자 발음 "즐길 락"에 해당합니다. 팬사이트 http://www.geocities.com/lediweb/index_E.htm 만 찾아봐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제미난 것은 성룡을 청룽이라고, 주윤발을 저우룬파 라고 표현하는 요즘 기준에 따라 표기하면, 낙체는 무려 "러디" 가 됩니다. 이렇게 해서는, 요체건 낙체건 간에 한국사람이고 중국사람이고 광동어쓰는 홍콩 사람이고 아무도 "낙체"라는 것을 알 수 없게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너무나 어색하기 때문인지, 반드시 공리를 "궁리"라고 쓰는 신문이나 잡지에도 낙체는 낙체/요체라고 하지 "러디"라고 하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낙체)

낙체는 황매조 뮤지컬 영화 중에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양산백과 축영대(梁山伯与祝英台, The Love Eterne, 1963)"의 주인공으로, 국내에서 단연 인상을 남겼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능파와 함께 출연한 이 영화는 홍콩과 중국어권에서 개봉 당시에도 대단한 인기였고, 아직까지도 60년대 황매조 뮤지컬 영화의 명작으로 남아 있습니다. 저 역시 "양산백과 축영대"는 일부러 보려고 한 적은 한 번도 없는데도, 한 두어번 보게 되었습니다. "양산백과 축영대" 가 나온 그 바로 다음 해에 나온 것이 이 영화 "만화영춘"인데, 낙체가 황매조 뮤지컬 영화를 몇 편 찍은 후 간만에 찍은 현대극들 중 하나 입니다.

이 영화를 찍을 당시 여자주인공 낙체는 남자주인공 진후와 결혼한 상태였습니다. 그것도 결혼한지 2년 밖에 되지 않았을 때 였습니다. "고전미인" 낙체나 인기배우 진후의 위치를 생각하면 거의 신성일-엄앵란 급의 부부였을 것입니다. 팬사이트를 보면, 낙체의 인터뷰에서 낙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항상 "가족, 가정생활"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인지, 이 영화 속에서 두 사람의 모습은 무척 잘 어울리고, 정말 사랑하는 한 쌍처럼 보입니다.


(영화 속의 진후와 낙체)

그러나, 낙체와 진후는 이 영화에 출연한지 3년후인 1967년에 이혼하였습니다. 그리고 이혼 후, 1년만에 낙체는 갑자기 혼수상태로 발견되어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 버렸는데, 자살이라는 소문이 아직까지도 파다합니다. 한편 진후는 그로부터 2년후에 암으로 역시 요절해버리고 맙니다. 이렇게 젊은 나이에 비극적으로 끝난 뒷이야기를 생각해보면, 이 밝고 명랑한 영화는 그때문에 더 곱고, 더 소중한 아련한 옛추억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당시 영화 홍보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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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렉터블로그 : 쇼브라더스 고전 홍콩 영화 목록 2014-10-05 00:19: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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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2007/11/08 13:12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뚱띠이 2007/11/08 14:41 # 답글

    이상하게 옛날 영화의 색감이 더 화려하고 정감이 가는 것 같습니다......

    요즘 영화도 색감이 어쩌고저쩌고하는데 좀 기계틱하다고할까요? 인간미가 없어요......
  • 택씨 2007/11/08 21:11 # 답글

    아아 마지막의 두 주인공의 결말이 너무 허망하군요.
    (역시나 너무 행복해지면 안되는 것일까요?)
    이름이 초특급으로 멋진 '곽'선생!!!
  • 박민성 2007/11/09 00:54 # 삭제 답글

    그나저나 요즘은 왜 성룡을 청룽이라고 표기하는걸까요?
    수십년동안 성룡이라고 하다가 이제와서 갑자기 청룽이라니..
    주성치, 주윤발, 장백지, 장국영... 이런식으로 불러오던 이름을 갑자기
    어차피 중국인도 못알아들을것 같은 이상한 이름으로 부르게 된 배경이 도대체 뭔지..
  • 게렉터 2007/11/09 15:35 # 답글

    비공개/ 저 역시 두 배우의 영화를 볼 때 마다 생각이 납니다.

    뚱띠이/ 색감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 따로 할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색감에 대해 많이들 하는 이야기에 더하여, 예전 영화들은 세트 촬영을 특히 선호한 것 역시 화면의 모습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이야기를 일단 하고 싶습니다.

    택시/ 낙체 이야기는 그 자체로 영화가 될만한 이야기니 말입니다.

    박민성/ 중국어권 이름도 다른 이름과 표기를 통일하려고 하다보니 어느날 갑자기 그렇게 되었지 싶습니다. 일본이름은 일본 발음으로 표기하는게 굳어졌으니 그것과 그냥 맞춰버린 듯 한데, 그렇다해도 여전히 좀 이상한 것이 일본이름은 중세-고대의 이름도 다 일본 발음으로 옮기는데, 그에비해 중국 발음은 우리나라 역사와의 상호 참조 때문에 근대 전은 전부 우리식 한자독음으로 읽고 있습니다.

    이러다보니, 원세개, 손문 처럼 근대 역사 격동기에 걸쳐져 있는 인물은 표기하기 애매하기도 하고, 참 논란거리가 항상 끊이질 않는 주제입니다.
  • 리온테 2007/12/08 03:19 # 삭제 답글

    잘 봤습니다...
  • 게렉터 2007/12/08 20:58 # 답글

    리온테/ 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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